2019-04-29
[세상 읽기] 종말론과 천년제국 사이에서 / 김유익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세상 읽기] 종말론과 천년제국 사이에서 / 김유익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세상 읽기] 종말론과 천년제국 사이에서 / 김유익
등록 :2018-04-01 18:07수정 :2018-04-01 18:58
김유익
다문화 ‘생활’ 통역
지난달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의 국립호주대에서 ‘삶의 정치학: 동아시아의 자조와 자치를 위한 시민행동’이라는 제목의 작은 회의가 열렸다. 동아시아 지역 시민, 공동체 활동가와 현장 중심의 연구자들이 모여 “트럼프, 아베, 시진핑의 시대에 우리 시민들 삶 속의 진짜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 자리였다.
기숙형 귀농학교인 일본 도치기현 비전화공방의 후지무라 선생은 일본에 대해 불평할 때마다 “이 나라는 글러먹었어”라고 말문을 열었다. 요는 이미 폐색 상황에 처한 국가로서의 일본은 희망이 없고, 불가불 환경과 경제 시스템 등이 파탄에 처할 것이니, 풀뿌리 대안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마모토의 아소산에서 30년 전부터 유기농 차밭을 운영하는 마사키 선생은 버려진 윗마을을 사들여 피난처를 만들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2016년 동아시아 평화 시민회의를 열어, 각지에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 연대할 것을 제안했다. 말하자면, 노아의 방주 네트워크를 상상하는 것이다.
하자센터라는 ‘도시 마을’의 촌장인 조한혜정 선생은 재작년부터 ‘촛불혁명’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시민들의 참여와 상상력이 근대국가를 완성하고 다시 한 단계 진화시킬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실은 타고난 자유주의자인 그가 하자센터의 다른 이름인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를 운영하기 위해 현명하게 국가의 자원을 사용해왔던 것이나, 후기 근대의 일상적 재난 속 청년들을 위해 국가가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국인들은 아래로부터 마을살이를 재구성하면서, 한편으로는 근대적 제도인 국가를 바꾸어 나갈 것을 꿈꾸고 있다.
중국 최고의 3농 전문가로 알려진 원톄쥔 선생은 공동체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중국 시민들과 함께 신향촌 건설 운동이라는 풀뿌리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중화 제국은 상부의 중앙집권 체제와 하부의 향촌자치가 ‘천의무봉’으로 결합함으로써 수천년 안정된 체제를 유지해 왔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함께 농장 공동체에 참여했던 중국 귀농인 친구가 “우리는 국가라는 아버지 품에 안긴 아이 같아서, 아무리 고개를 젖혀 등 뒤의 세상을 보고 싶어도, 아버지가 몸을 돌리는 순간 정반대 방향을 볼 수밖에 없지”라며 늘 ‘지혜로운 방법’을 모색했던 것을 상기하면, 중국 시민들은 자녀들의 유학과 이민 궁리에만 열중이던 대부분의 중산층 친구들 외에는 일당 독재 국가와 이를 지탱하는 엘리트 시스템의 존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분은 촛불의 위대함에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패배주의에 빠진 일본 친구들과 숙명론에 경도된 중국 친구들을 도닥이고 싶어질 것이다. “남한이 세계에 민주주의를 한 수 가르쳐줬다”는 박근혜 탄핵 직후 한 외신의 헤드라인은 ‘시황제’의 나라에 사는 내 가슴도 뜨겁게 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무렵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일본 후쿠시마에 있지만 방사능 오염 피해를 덜 입은 덕에 다시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아이들에게도 안전한 환경을 되살려낸 도와 마을의 사례를 들었을 때, 또 공산 국가에 가부장적 유교질서가 지배하는 베트남에서의 엘지비티(LGBT·성소수자) 운동이 국가와 충돌을 피하면서 풀뿌리 조직을 묶어준 엔지오(NGO)의 영리한 전략 덕에 눈에 띄게 진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자기가 사는 체제와 장소를 선택할 자유가 없는 이들에게, 삶의 정치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남들이 가르치려 들거나, 그들의 이익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떠안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함께 배우고, 원하는 미래를 천천히 만들어 나가는 그것.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8603.html#csidx639d545ce6a3272b9fcf8e0ea7f1e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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