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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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朴正熙, 경제성장으로 중산층 형성… 자신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선택"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9.04.15 03:13
'매국노 이완용 사례'로 본 인간 이해의 착잡함… 김병익 前 문학과지성사 대표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인 김병익(81)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만난 것은 계간지 '본질과 현상'에 실린 그의 글을 보고 나서였다. '인간 이해의 착잡함'이라는 10쪽 분량의 글인데 매국노 이완용의 사례로 시작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고종 때 세운 최초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으며 주미 공사관의 첫 외교관으로 근무한 친미파(親美派)의 수령급이었다. 또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독립공원 건설을 추진했다. 반일(反日) 정책을 표방했던 그가 친일파로 돌아서 을사늑약(1905년)과 한일 병합에 앞장섰다. 나는 '친일파'라는 한마디 낙인으로 한 시대의 거물을 단색적으로 색칠하며 그의 전면을 단정 짓는 것에 대해 동요를 느꼈다…〉


김병익 선생은 "우리 사회가 오직 남의 약점을 들춰내는 '혐오 사회'로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그가 이런 동요를 느끼게 된 계기는 3·1운동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과 이완용 사이에 있었던 일화(逸話)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손병희 선생이 이완용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했다는 것이나, 이완용이 '매국적(賣國賊ㆍ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라는 이름을 이미 들은 나는 그런 운동에 참여할 수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하여 내가 그렇게(맞아죽게) 되면 다행한 일이겠소'라며 사양한 것도 놀라웠다. 그러면서 이완용이 이 비밀 거사를 알면서도 일본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도…〉

자칫 '매국노 이완용'을 변호하는 것처럼 비칠 경우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는 '이완용이 친일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회의나 이의를 갖는 것은 아니다. 독립선언 운동의 낌새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용서받을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단서를 달아놓았다.

그는 통화에서 "나는 현업에서 완전히 물러난 사람인데 괜한 소음을 일으킬까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며칠 뒤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났다.

"한 세기 너머 전의 이완용이 내게 달려들어 인간 이해의 방법에 대한 회의를 안겨줬습니다. 어떤 악한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아무리 성자적인 생애를 살았던 사람도 범용한 인간다움을 가지게 마련이며,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론적인 한계가 있는 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친일인명사전' 집필에도 참여한 윤덕한(경향신문 기자 출신)이라는 분이 몇 년 전 '이완용 평전'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면서 '매국노 이완용'과는 다른 모습의 이완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친일파 단죄'에 앞장섰던 그는 자칫 이완용 변호가 될까봐 책 쓰는 걸 중도에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알게 된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무자비한 일차원적 사유로 인간을 난도질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습니다. 이완용이란 당대 최고의 거물을 '친일파'란 단 한마디 말로 몰아 그 인격적 존재 전체를 단정할 수 있을까. 저는 이런 점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회장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독립문 상단의 '獨立門(독립문)' 글자를 썼지만 역사학자들조차 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당혹스럽기 때문입니다. 1897년 독립신문 사설에는 '이완용이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외세에 저항했다'는 구절도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한마디 말로 그의 전 생애(生涯), 그의 모든 존재성을 한 색깔로 색칠해 버립니다. 저는 이완용의 행적을 보면서 인간 이해가 간단치 않다는 걸 느낍니다. 그의 '친일 논리'도 나라의 절망적인 파탄기에 그 희생을 조금 줄일 방법으로 고위 지도적 인사나 지식인들이 고민한 의제 중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친일 매국 행위가 변명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당시 고종(高宗)은 무력했고, 민비와 대원군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외세와 결탁했으며, 조정 대신들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던 나라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악역을 이완용이 맡았던 셈입니다. 그런 이완용에게 망국(亡國)의 책임을 모두 떠넘겨 버리면 우리가 역사에서 얻을 교훈은 없어지는 것이지요.

"저는 역사적 인물 평가의 단편성에 대해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최근 공중파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선언문을 누가 썼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육당 최남선을 말하는 겁니까?

"육당이 친일(親日)을 했다고 그 이름은 지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합니다. 그는 당당한 애국자였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뒷날 변절한 부분에 대해서만 비판하면 됩니다. 요즘 몇몇 전통 있는 학교에서 작곡가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교가(校歌)를 교체한다는 뉴스도 봤습니다. 서정주의 시(詩)가 교과서에서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전체주의처럼 '친일파'라는 기준만으로 그 인물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친일파' 문제는 현 정권에서 쟁점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오늘의 기준에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친일파' 낙인을 찍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따져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거 정권 시절 '빨갱이' 낙인도 그렇습니다. 40여 년 전 저는 남산에 며칠 연행된 적 있었는데 어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앞집 부인이 내게 '빨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살아온 인생이 그 한마디로 모두 부정됩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그는 한국기자협회장을 맡으면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1975년 신문사는 그를 해직했다.

"늙어서도 현장을 뛰는 기자로 남는 게 꿈이었는데 10년 만에 직장을 잃었지요. 그 뒤 문학평론가 김현 등과 함께 '문학과지성사'를 설립했지요. 하지만 제가 정말 좋아했던 기자 일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주진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겠군요.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떠했습니까?

"독재자가 장기 집권을 하려면 가난하고 무식하게 만드는 빈민 정책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이뤄 중산층이 형성됐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배반당할 선택을 한 겁니다. 그의 서거 소식을 들은 날 '민주주의는 중산층에 의해 이뤄진다.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가 중산층을 형성해 이들이 민주주의 주체가 되면 박정희는 재평가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독재자가 죽었으니 자유를 찾았다'가 아니고, 박정희 재평가를 내다봤다는 겁니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5공 정권에서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중산층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박정희 정권에서 행해진 탄압과 분열 정책의 후유증은 오래갈 것으로 봤습니다.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후유증이 더 악화된 측면이 있었지요."

―그때 문학과지성사가 강제 폐간됐지요?

"1980년 7월인데 창간 10주년 기념호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발행 목적 위배로 등록 취소한다는 공문을 받았지요. 창간 10주년 기념호는 교정쇄(校正刷) 상태로 50부 복사해 가까운 사람들끼리 돌려봤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도 원한이 있겠군요?

"개인적으로 피해를 봤지만 5공 정권에도 공과가 있다고 봅니다. 해방된 뒤로 으레 있는 걸로 알았던 '통금(通禁)'이 그 정권에서 풀렸어요. 이는 일상적 삶의 해제가 아니라 우리 의식의 해방을 가져왔습니다. 컬러TV, 프로야구, 반도체, 광대역통신망 사업이 5공에서 시작됐습니다. 물론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5공 정권은 우리 국민이 경제적으로 가장 호황을 누렸던 시기였지요. 하지만 전두환은 '5·18 낙인'이 찍혀 어느 누구로부터도 변호받지 못하는 '절대악'처럼 됐지요.

"선입견 없이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하는데 아직은 시대 상황, 민심, 여론에 구속될 수밖에 없지요. 전두환의 경제수석이었던 김재익씨 평전을 읽고 있는데,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라면 누구 밑에서도 일하겠다. 경제성장이 되면 그 나라는 저절로 민주주의가 정착된다'라고 나옵니다. 그가 5공에 합류할 때 손가락질했는데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실 역대 대통령 중 재평가돼야 할 분은 노태우 같습니다."

―노태우는 언급 자체가 안 되는 잊힌 대통령이지요..

"군부의 보수성을 지닌 노태우 정권이 중국과 소련과 국교를 맺었습니다. 신도시를 만들어 주택 문제를 해결했고요. 민주화를 가장 많이 누렸던 시기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민간 정부로의 정권 이양을 연착륙시켰지요."

―일제 식민지와 6·25를 겪은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경제와 민주화 양면에서 놀라운 진전을 이뤄냈습니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성공 사례입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과거의 어두운 면에 더 많이 붙들려 있습니다.

"압축성장의 대가를 계속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쪽으로 치우쳤던 시계추가 반대편으로 갔다가 평형을 유지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문제는 어떤 세력이나 집단이 정치적 의도를 위해 군중의 분노와 적개심을 부추기는 데 있습니다.

"정치나 언론이 그런 정서 속에 놓여있고 대중은 휩쓸리고 있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정의'나 '적폐 청산'의 명분으로 과거를 정죄(定罪)합니다. 어떨 때는 우리 사회가 오직 남의 약점을 들춰내는 '혐오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 정권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 우위에 서 있다는 착각을 해왔습니다. 그게 얼마나 허황됐는지 이미 드러났습니다만.

"저는 문재인 대통령 개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정의나 올바름에 대한 정념이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관용이나 사랑이 빠진 정의는 위험합니다. 그런 정의는 단지 정적(政敵)에 대한 보복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저는 '역사의 관용'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4/20190414019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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