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심과살림연구소 동아시아 전환과 평화, '친구 되기'에서 시작하자
[6호] 동아시아 전환과 평화, '친구 되기'에서 시작하자
2016-01-29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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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심과 살림 6호에 실린 글입니다.
동아시아 전환과 평화, ‘친구 되기’에서 시작하자
글 김유익 (다문화, ‘생활’ 통역자(Culture Broker), 전환과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생활 공동체 프로그램 和&同 (Harmony&Equality) 프로그램 매니저)
일본 도치기 현의 나스라는 농촌에 위치한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이라는 자급자족생활기술교육센터에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알게 된, 친한 정도는 아니지만 면식이 있던, 지역에서 활동하는 생태활동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폐식용유로 바이오디젤을 만들어서 전기를 생산하기도 하고, 숲속의 마을 ‘마르쉐’에서 자신이 가진 생태지식과 미술 재능을 활용해서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운 아름다운 새와 곤충, 식물 들을 세밀화로 직접 그려 아이들에게 나눠 주곤 했습니다. 그는 또, 거의 매일 자신이 정성스레 만든 가족의 한 끼 사진을 ‘좋은 남편, 자상한 아빠’ 인증샷으로 페이스북에 올려 주위 여성들의 ‘품절남 좋아요’를 독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가진 여러 재능에 시새움을 느낀 탓에 언제인가부터 그의 포스팅은 빨리 스크롤해서 넘겨버렸는데, 어느 날 뜻밖의 소식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일본 때리기가 도를 넘는다”는 어떤 일본 지식인의 주장을 링크하고, 이에 찬성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 그의 활동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명치끝의 따뜻한 기운이 일순간 사라졌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오해를 한 것일까? 정성스레 답변을 달았습니다. “이웃나라와 자국 여성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탈하고 ‘성노예’로 삼은 사건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으니, 비난을 이어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고 심각한 범죄이지만, 전쟁에서는 늘 있어나는 일이지요. 와중에 왜 일본만이 계속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공방이 오갔으나, 결국 긴 침묵에 이은 어색한 봉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마침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인류의 지속가능성과 생태적 전환을 위해 탈핵과 같은 초국가적 의제에 대해서 특히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손잡아야 한다고 저마다 소리를 높이던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3년이 조금 안 되는 짧지 않은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있던 터이고, 무엇보다 비전화공방에서 일본 친구들과 일 년 가까운 기간 공동생활을 경험하면서 진한 가족애 수준의 우정을 나누었던 터라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금세 문제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당시 같이 생활하던 동료에게 근현대사 문제에 대해서 물어 보았을 때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배운 것이 별로 없어서 잘 알지 못한다”는 답변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경험했거나 전후 일본 사회의 ‘반전 평화’ 분위기를 경험했던 60대 이상의 활동가들이 거의 기계적으로 2차 대전과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반성적 태도를 보이는 것과 달리, 젊은 일본인들은 진보적인 생태주의자들조차 근대 일본의 역사적 범죄 사실 자체에 대해서 별다른 인식이 없던 것입니다. 생활 전반을 함께 나눴던 비전화공방의 동학들과 이런 문제를 조금 더 토론해봤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생활과 이를 통해 이루어진 학습과 상호이해의 경험이 매우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비전화공방은 국내에도 소개된 『플러그를 뽑으면 지구가 아름답다』,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하기 - 3만엔 비즈니스』의 저자 일본의 후지무라 야스유키藤村靖之 박사가 설립했습니다. 이곳은 세계화(globalization)의 도저한 물결 속에 대자본이 농촌과 소도시를 비롯한 지역을 공동화시킬 뿐 아니라 주로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청년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으며, 기후변화와 핵발전소 등 우리 삶의 지속가능성이 급격히 감소하는 파국적 현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실천적으로 연구하고 학습하는 공간입니다. 성원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저는 이러한 생활방식을 나누는 것이, 비전화공방의 문제의식뿐 아니라 국적을 초월한 이웃 간의 상호이해와 평화로운 공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초국가적 문제는 지구의 이웃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기도 하고, 식량과 에너지 등을 자급하는 생활방식은 이웃 간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자원 경쟁을 원천 무효화시킬 것이며, 다양한 생각과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지혜를 나누면 그 역량이 몇 배 커지고 더 창의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우리’에 대한 물음
무려 마흔이라는 나이에 이전에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경력을 시작한 제가 당초 사회에 발을 디딘 것은 1998년 1월, IMF환란이라는 충격 속에 한국 사회가 거대한 구조적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때였습니다. 28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학교 밖 세상을 제대로 겪어보지도 못한 탓에, 그 변화를 탐색하며 의미를 찾기보다는 세계화라는 흐름에 걸맞은 직장인 다국적 컨설팅기업의 신입사원이 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헬조선’에 비교하자면, 용기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여전히 ‘꿈꾸기’가 허락된 ‘재미있는 지옥’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당시의 한국에 살면서도, 겁이 많은 탓에 다른 선택지를 쉽사리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세계화된 다국적기업의 특성에 걸맞게 아시아의 다양한 도시에서 일하면서 생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홍콩에서 시작한 제 여정은 거의 30대를 다 보내는 시간 동안 베이징, 싱가포르, 도쿄 지역들을 거치게 됐는데, 금융고객사를 위한 IT컨설턴트라는, 내심 찬성할 수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 자체만큼은 꽤 즐길 수 있었습니다. 다르면서도 같은, 데자뷰를 연상시키는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의 삶이 즐거운 자극이 되기도 하고, 겉보기에도 별로 다르지 않고 생활습관도 차이가 많지 않은(?) 곳의 생활이라서 심각한 향수병에 걸릴 일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시아인들의 삶과 인문에 대한 애정이 커지는 만큼, 마음 한구석엔 다국적기업 내의 보이지 않는 서구인 중심 질서와 위계에 대한 불만과 의문이 함께 커져갔습니다. 본업과는 무관한 역사서와 인문서 등을 읽으면서 압축적 근대화가 우리에게 강요한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 보게 됐습니다. “아시아인, 동아시아인인 우리는 누구일까?” 전통사회의 어렴풋한 기억과 근대적 서구사회의 영향이 우리 안에 어지럽게 공존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세대가 이 문제에 쉽게 답하지 못하고 그 왜곡된 자화상과 서구인에 대한 콤플렉스를 쉽사리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자라나는 다음 세대의 아시아 청년들은 보다 건강한 자아를 획득하기를 소망하게 됐습니다.
중국과 일본, 한국을 비교하면서, 동아시아 전통 문명의 뿌리가 되는 중화의 질서와 그 변용적 발전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제게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서구문명의 영향이 침략적이고 식민적인 이미지의 기억으로 남은 반면, 수천 년간 영향을 받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독자성을 보존할 수 있었던 과거의 관계가 훨씬 더 균형 잡히고 안정된 것으로 인식됐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인들, 동아시아인들이 지금까지 강요된 서구의 주류적 시각을 최대한 객관화하고 함께 이런 문제를 고민한다면 뭔가 토론의 실마리라도 잡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중국, 중국인들을 만나다
직장을 그만두고 비전화공방에서 생활하게 된 계기는, ‘하자센터’라는 청소년 대안문화공간을 만든 학자이자 활동가인 조한혜정 선생과의 우연한 만남이었습니다. 이미 적지 않은 기간을 다국적기업에 복무했으니 이제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충고를 해주셨습니다. 비전화공방에서 약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하자센터에서 청소년,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인생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아시아의 청년들이 일정 기간 함께 생활하면서 학습하는 공간을 만들어 보기 위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한 것이 올해(2015년) 초입니다. 주로 대도시 근교의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5개월간 중국 전역을 돌아보았습니다. 베이징, 광저우, 션전, 홍콩, 쿤밍, 따리, 청뚜, 총칭, 샹하이, 쑤져우, 칭따오가 제 발길이 닿은 곳들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과거에 컨설턴트로서 생활하면서 겪고 알았던 것과는 다른 중국과 중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GDP(국내총생산)를 키우고 더 부유해져서 대도시에 큰 집과 호화로운 차를 사고 아이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에서 승진을 거듭하며 잘나가고 싶다는, 실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욕망을 가진 보통의 중국인들이 아니라, 건강한 먹거리, 깨끗한 물과 공기와 같은 인간 생존의 필수요소들과 이를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하는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다른’ 중국을 꿈꾸며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 중국인들입니다.
샹하이 총밍섬, 쟈루이밍의 농장에서 여름 자연학교 캠프에 참가한 청소년들과 한중일 자원봉사자들
무턱대고 중국을 떠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여러 연고로 알게 된 몇 가지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 알게 된 홍콩 기반의 PCD(Partnership for Community Development)라는 단체는 중국 대륙의 농촌지역과 소수민족 거주지역의 전통문화와 생활방식이 산업화로 인해 파괴되는 것을 막고 건강한 먹거리가 유통될 수 있도록 유기농법과 퍼머컬처 등을 교육하며, 농촌으로 돌아가는 반향청년返..年들의 귀농 교육과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생협운동, 도시농업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단체입니다. 베이징에 위치한 향촌건설센터는 중국 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생태적 농업을 보급하고 청년들과 지역 주민들에 의한 농촌 공동체와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한 인민대학의 원톄쥔 교수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단체입니다. 원 교수의 저작과 강연집을 모은 『100년의 급진』도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 중국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 설립된 이 단체들은, 90년대의 급격한 도시화와 농촌·농업의 붕괴가 초래한 생태적, 사회경제적 위기를 평범한 농민과 서민으로부터 중국 공산당의 고위층에 이르기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중국 각지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지원 협력하는 단체와 농민들을 소개받아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특히, 농장의 경우는 짧게는 5일에서 길게는 한 달에 이르기까지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는 우퍼WWOOFER(Willing workers On Organic Farm) 형태로 그곳 생활을 직접 경험해 보았습니다. 주마간산 격으로 훑고 지나가기보다는 직접 함께 생활하면서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 장소와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권역과 장소를 중심으로 여행을 이어갔지만. 한정된 지면에 모든 사례를 자세히 다룰 수 없기에 방문한 곳과 사람들을 다소 거칠게 세 그룹으로 묶어 소개해 볼까 합니다.
지식인과 학생
지식인과 대학생들이 사회개혁의 전위를 이루는 ‘향촌건설센터’ 조직의 성원들은 우리로 치면 학생운동권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었던 열혈 청년들이 지금은 30대 중반의 중간 지도자급이 되어 중국 전역에서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시민농장 등을 운영하거나 학계에서 연구 성과를 발표하여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중국공산당과 협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체제와 반정부의 성격이 강했던 한국의 학생운동이나 시민운동과는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습니다.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목표에 천착하면서 권위주의 정치체제와의 갈등을 피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공산주의가 진짜 공산주의/사회주의답게 ‘인민의 이익’을 우선하여 복무하도록 자신들의 역할을 설정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박원순 시장이 이끄는 서울의 다양한 사회혁신 활동에 시민운동가들이나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계속 귀농 청년들을 키워내고 있는 향촌건설센터 조직과 그 참여자들, 협력파트너들은 이미 중국 전역의 100여 개 프로젝트와 수천 명의 참여자들이 함께하는 규모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 층위와 다양한 목적의 하부 단체를 거느리고 있는 이들의 중심조직은 인민대학의 연구소가 아니라 베이징 교외에 위치한 중국의 대표적 시민농원인 ‘작은 당나귀 농장’입니다. 이미 500여 명 이상의 회원이 매주 이곳에서 키워 내는 채소 ‘꾸러미’로 가족들의 건강한 밥상을 차려내고 있고, 주말마다 수백 명 이상의 회원들이 방문하여 정성스럽게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자라는 닭, 돼지, 양 등의 가축과 더불어 순환 생태계를 갖춘 이곳 농원은 자연, 다양한 전통놀이, 공예와 연관한 향토문화에 기반한 아동 교육에도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후에 교육과 관련한 더 많은 기능의 확대가 기대되고 있습니다.
작은 당나귀 시민농원, 베이징 북서쪽에 위치한 봉황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샹하이에서 디자인 가치를 농업 생산물에 더해 브랜드화 하고 농촌 고민가古民家를 개조한 펜션 등으로 농촌생태관광분야에서도 선구적 역할을 하는 사회적기업의 간부, 광저우에서 정직한 생산자들과 의식 있는 소비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소비자생산협동조합의 대표, 중국 근대화시기에 농민대중이 중심이 되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향촌건설운동을 이끌던 선각자들의 도시 충칭에서 새로운 향촌건설연구조직을 이끄는 대학교수 등이 다양한 실천 활동을 이어가는 이 네트워크의 면면입니다.
한편으로는 대도시나 상대적으로 경제가 발전된 연안지역을 떠나 더 가난한 내륙의 농업지대,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하는 쓰촨, 윈난, 꾸이져우 등의 지역에서 전통문화를 되살려 공예품이나 농가공 생산품, 주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공정여행을 기획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2001년 쿤밍 윈난대학의 인류학 연구에서 출발해 지금은 광저우의 중산대학에 자리 잡은 녹경.耕과 같은 조직들이 좋은 예입니다. 이들은 특히, 농촌의 부녀자들을 조직하고 아이들 교육의 질과 통합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자발성과 장기적인 내적 역량을 키우도록 지원합니다.
농민
이 흐름의 또 다른 주체는 농민 자신입니다. 도시화에 의한 농지의 축소, 관행농법의 확산, 공업지대의 확장에 의한 농수와 농토의 오염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 개발에서 소외된 계층인 농민들 대다수는 자의 반 타의 반 도시로 떠돌게 됐습니다. 이들은 ‘농민공’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최하부 노동자 계층으로 편입되면서, 교육, 의료 등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차별적 대우 속에서도 건설, 제조, 그리고 서비스 등 지식 산업을 제외한 중국의 거의 모든 산업의 하부구조로 기능하면서, 현대 중국 경제의 내부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비록 실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인구는 일억 명 언저리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탈농의 흐름이 거세지만, 13억 중국 인구 중 과반수가 넘는 8억 명 이상의 인민들은 여전히 농촌을 근거지로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었기 때문에, 도시로 나와 불공평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현금수입을 대가로 현대 중국의 건설에 기여한 것입니다. 이들이 미래에도 고향에서 안정적인 생활기반을 유지하며 생활수준을 적절히 높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국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의 관건입니다.
이런 농민들 중에서도 지방 정부나 토호의 횡포에 맞서 결집하던 힘과 고양된 의식을 토대로 새로운 농업운동에 주체적으로 앞장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생태적 농업을 택하고, 생산자협동조합을 꾸리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한 도시와 농촌의 다양한 조직과 협력하여 생산물의 상품성을 높이고, 도시의 협조적 소비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를테면, 쓰촨의 청뚜에서 만난 고씨 농장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CSA를 실행한 곳입니다. 2천3백 년 전의 생태적 수리 프로젝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강언都江堰 덕에 비옥함을 자랑하며, 융성한 지역 문화와 상업의 토대가 되기도 했던 수자원이 있었는데 이것이 도시화와 공업화, 관행농업의 심화로 심하게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수질을 개선하려는 환경 NGO들과 시작한 유기농업 프로젝트가 청뚜 시민들의 적지 않은 참여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또, 일반적으로 농민의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개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도시의 임금노동자를 지향할 때, 향촌건설센터 등의 지원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장을 이어받고 생태적 농업으로 전환하는, 일부지만 매우 믿음직한 농촌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귀농 청년들 중 핵심인데, 낭만적인 생각이나 다소 이상주의에 경도된 도시 출신의 귀농 청년들이 쉽사리 농촌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밴 농촌의 부지런한 생활습관과 무슨 일이든 당황하지 않고 척척 해내는 일머리, 고향과 가족, 이웃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묵묵히 지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갑니다. 광저우에서 만난 은림.林생태농장의 구어루이郭.(31세, 남)는 과수, 곡물, 채소로 가득한 농장에서 연못의 물고기, 가금류와 돼지 등이 함께 생활하는 아름다운 생태계를 만들어 나갑니다. 윈난의 따리에서 알게 된 셰슈에메이.雪梅(28세, 여)는 귀농 일세대인 아버지와 함께 건조한 고원지대를 개간하여 허브농사를 짓고, 10년 후에 수확을 내다 볼 수 있는 과수의 묘목을 심습니다.
청뚜의 고씨 농장에서 두부 만들기 허브 기름을 채취하는 셰슈에메이의 허브농장
공장지대에서 자라나 교사 생활을 하다가 농민의 길을 선택한 쟈루밍.瑞明(40세, 남)과 같은 이들은 농업을 통한 중국 사회의 개혁을 꿈꾸고 있습니다. 생태농업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생태주의를 고집하는 자연농법을 실험하는 선구자이자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로 당당히 소개할 정도로 강골인 그는, 그만큼 의지가 굳세고 엄정해서 사람들이 많이 믿고 따르는 농민지도자입니다.
도시 중산층 시민
끝으로 도시 중산층 시민들의 생태적 농업과 사회혁신에 대한 관심에 주목해 볼 만합니다. 이들이야말로 농민들이 생태적 농업으로 전환할 때, 품질과 가치에 제 값을 매겨주어 변화를 촉진하는 든든한 우군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교육과 함께 먹거리 등의 환경문제는 매우 절실합니다. 예전에 가짜 분유 파동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먹거리 등의 안전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위험사회에서 최대 피해자는 바로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아이들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들은, 좋은 먹거리 운동에 쉽게 호응하기도 하고, 농경문화와 자연의 생활과 조화를 잘 이루는 대안교육에도 관심을 많이 갖는 편입니다. 특히, 중국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발도르프학교의 학부모들이 중심이 되어 CSA농장이 생겨나기도 하고, 파머스 마켓이 규모를 키워가기도 합니다. 이미 1,600가구의 회원 가정을 확보하고 있는 션전의 사계분향四季分享 농장과 청뚜의 발도르프 파머스 마켓이 좋은 예입니다. 이들 학부모들은 직간접적으로 생태농업의 확산에 많은 기여를 합니다. 좋은 소비자로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태교육에 나서거나 이 방면의 활동가로 성장하는 예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광저우에서 ‘콩세알’이라는, 아이들 또는 어른들을 위한 생태교육을 끊임없이 기획, 실행하거나 장기적으로 생태마을/공동체 만들기를 지향하는 어머니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중국 전역과 해외의 사례를 직접 방문하여 참고하거나, 다양한 교육에 참여하면서 준비를 착실히 진행해나가고 있었습니다.
또, 저처럼 전문직에 종사하다가 비영리단체의 활동가, 혹은 관련한 비즈니스를 벌이는 사회적기업가로 나선 이들도 있습니다. 광저우의 천지인화天地人禾라는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류샹원..文은 농업 관련 소셜 벤처와 NGO를 위해서 펀드레이징 컨설턴트 역할을 자임하면서, 광동의 유서 깊은 역사적 건물들을 활용한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로 키워나갈 계획도 가지고 있고, 광동성의 변방에 위치한 농민들과 함께 재배한 생태농업 쌀과 그 가공품을 도시 소비자들에게 공급하는 비즈니스도 이미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IT기업을 창업하고 문화기획자로서 전방위적 활동을 벌이다 약관의 나이에 칭따오의 산속에 ‘자급자족 실험실’을 마련한 탕화唐冠.와 같이 매우 창의적인 젊은이들이나, 한국의 제주도에 비견할 윈난의 따리에서 만난 개성이 강한 아마추어 예술가 청년들(文..年), 게스트하우스, 카페의 운영자들도 도시 중산층의 배경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자연친화적이거나 주류 시스템을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자유주의적 성향은 ‘경제발전의 중독’에 빠진 중국 사회에 또 다른 삶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은, 이와 같은 사람들의 등장이 중국의 시민계급, 그중에서도 ‘깨어있는 민주시민’의 등장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합니다만, 소비자로서의 중산층은 여전히 한계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공성과 중국 사회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염원보다는 자신의 자녀와 가족의 안녕에 대한 근심이 주요한 동기이기 때문이고, 공산당 일당 독재의 권위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정치적 발언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두가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동의하는 이런 약한 고리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의 변화와 행동을 이끌어낼 수 있고, 중국 정부나 공산당과의 협력 혹은 묵인 하에 활동을 진행해나갈 수 있습니다.
전환과 평화의 길에 함께하기
이렇게 중국 사회의 변화는 전위가 되는 지식인, 학생들과 중국민의 대다수를 점하는 농민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도시 중산층의 조화로운 관계와 발전 속에서 느리지만 거역할 수 없는 ‘장강’과 같은 거대한 흐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물이 장강을 빠져나와서 황해와 태평양으로 나가면서 다른 물을 만나듯, 한중일 시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 제가 꿈꾸는 일입니다.
저의 중국 견문록을 우연히 접하게 되신 분들의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접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입니다. “중국에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미심쩍은 표정이지만, 사진을 보여드리고 실명과 함께 구체적인 사례를 조근조근 설명하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절에는 중국의 미래가 지구적 차원의 변화, 무엇보다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을 부연할 필요가 없을 터이니, 왜 이런 흐름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인지 일일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더구나, 역사의 퇴보를 경험하며 고통스런 시간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웃 나라의 예상치 않았던 희망의 싹이 돋는 광경을 목도하는 것은, 언젠가 다시 강남 갔던 제비가 한반도에 박씨를 물고 찾아 올 것만 같은 작은 기대를 품게 합니다.
“여하튼, 중국은 아직 갈 길이 머네요.” 우리가 20~30여 년 앞서 겪었던 경험과 반성이 이제 막 시작되는 중국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측은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80년대까지 본격적인 사회·경제의 변화가 시작되기 전, 국유기업과 공장, 협동농장과 같은 평등하고 안정된 노동자, 농민 공동체의 기억을 가진 세대가 아직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근대화, 산업화,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이 중국의 지도층을 포함한 전 계층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좋은 징조입니다. 경제적 부유함만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 후발주자 중국이 자의든 타의든 다시 동아시아의 긍정적인 변화를 선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신재생에너지의 연구와 활용 분야에서 앞서 나가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중국인들의 실용성을 중시하는 생활태도는 때로 상업주의로 쉽게 경도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제 해결의 좋은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하다면, 막연한 기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나서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겪었던 시간들에 성공과 실패의 경험과 깨달음, 기쁨과 슬픔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우리와 다소 다른 경로를 밟고 있고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중국이지만, 역시 사람 사는 곳의 일이라 우리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과거 일본의 활동가들의 경험에서 빚졌던 것을 이제 후발주자인 중국의 활동가들과 나누며 공덕을 되갚음 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일본의 생태활동가와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저명한 일본의 포토저널리스트 히로가와 류우이치.川隆一 선생이 오키나와에 장소를 마련하고 후쿠시마의 어린이들을 초청해 방사능 걱정 없이 뛰어놀 수 있는 캠프를 주최하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습니다. 류우이치 선생은 아이들이 2차 대전 중 일본군에 의해서 ‘옥쇄’라는 집단자살을 강요받은 주민들의 위령비 앞에서 잠시 가벼운 참배를 하도록 했습니다. 별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오키나와의 자연을 사랑하게 된 아이들은 필경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지 스스로 찾아보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중일 청소년과 아이들이 나라를 돌아가면서 매년 생태캠프를 갖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특히, 일본의 후쿠시마 아이들, 한국의 경우 밀양이나 강정과 같은 생태재난지역의 아이들이 함께한다면 이 활동은 더 뜻깊을 것입니다. 생각을 같이하는 여러분들과 협력하며, 이렇게 한중일의 다양한 세대가 함께 만나 동아시아인들의 지속가능한 삶을 지향하는 전환과 평화라는 가치를 목표로 창의성과 회복력, 우정을 쌓아갈 공간과 계기를 준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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