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2019.08.01.
원본보기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정혜경 박사가 1일 정동길에서 일제강점기 아동 강제동원 실태를 설명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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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사진 속 앳된 소년 모습을 보면 그냥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아동 강제동원 피해자를 만나고서야 그 실체를 알게 됐습니다.”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정혜경 박사(59)는 강제동원 된 아동들을 연구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제강점기 ‘징용 문제’ 전문가인 정 박사는 지난 20여년 동안 3000여명의 징용피해자들을 만났다. 역사적 사건 관련자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는 ‘구술사’는 그의 오랜 연구방법이다. 정 박사는 이렇게 모은 자료 중 ‘아동 강제동원’ 사례만 묶어 책으로 출간했다. 1일 경향신문 근처 정동길에서 그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너무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대체 이 아이들은 뭐냐’고 생각했죠” 정 박사는 아동 징용 사례를 접했을 때의 충격을 이렇게 회상했다. 정 박사는 2004년부터 2015년까지는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에서 조사과장으로 일했다. 징용피해자 접수를 받고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아동 징용피해 사례의 심각성은 이 일을 하며 알게됐다.
“위원회에서 피해자 판정을 하는데 자꾸만 어린 아이들이 나와요. 당시 일본은 최저연령 기준을 정해서 동원을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 기준보다 어렸어요. 위원들도 모두 혼란스러워했죠. 혹시 아동 징용 관련 연구가 있는지 찾아봤어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연구도. 실태조사도.” 결국, 정 박사는 직접 이들의 사례를 모으기로 했다. 일일이 피해자의 출생년도, 동원당시 나이, 이름 등을 컴퓨터 파일로 정리했다. 생존 피해자들은 직접 만나 이야기를 채록했다.
조사를 하면서 가장 신경 쓴 것은 신뢰성이었다. “진짜 있었던 일인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당시에는 호적에 올라간 나이와 실제 나이가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피해자, 가족, 주변 이웃들에게 ‘피해자가 몇 년 생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몇 년도에 징용을 갔는지’ 등등을 반복해서 확인했어요. 아동 징용이 확실한 사례들만 추려냈습니다.”
신뢰성은 확보했지만 그 결과는 마음이 아팠다. 강제동원된 아이들은 너무 어렸고, 그 후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12살에 일본 오이타현에 있는 광업회사로 징용된 덕종 할아버지는 마치 그 시절에 성장이 멈춘 것처럼 손이 너무 작았습니다. 당시 할아버지 손을 만져 본 사람들이 ‘이런 아이들까지 데려가야 하냐’ 화를 낼 정도였다고 하더라구요. 새끼 손가락도 뭉개져 있었습니다. ‘징용장에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갈 일이 생기자 손가락을 물어 뜯었다’고 했습니다. 12살 아이가 절박한 마음에 스스로 손가락을 물어뜯는 모습. 야만의 시절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은 정 박사를 만나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공사장으로 징용돼 공부도, 기술도 배우지 못한 부안의 한 노인은 “TV에서 돈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죽여 버리고 싶다”고 했다. 비행기 공장으로 징용된 한 할머니는 일본을 도왔다는 이유로 평생을 죄인처럼 살았다고 했다.
가해국 일본은 모든 일들을 잊고 있었다. 2011년 5월, 정 박사는 일본 고베에서 열린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전국연구집회’에서 징용 된 아동의 사망사례를 발표했다. 일본 학자들은 “당시 일본은 공장법이 있어서 14세 미만 아동은 동원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정 박사가 확인한 사례들을 추가로 공개하자 그제서야 “놀라운 일이다. 처음 접하는 사실”이라고 했다.
정 박사는 징용에 대한 한국 사회 인식 문제도 지적했다. “강제징용을 다녀왔다고 하면 ‘전쟁 때는 다 그렇지, 나라 뺏기면 어쩔 수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모든 식민 지배국들이 일본처럼 위안부, 징용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그렇다고 사과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요.”
‘강제동원 피해자’를 구분하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피해자들끼리도 ‘나는 국내로 강제동원됐다’고 하면 ‘일본, 중국 정도는 다녀와야 강제 동원이지’라며 무시하는 정서가 있어요. 당시에는 한반도와 일본간에 국내외 개념도 없었고, 피해자가 동원 지역을 선택할 수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정 박사에 따르면 ‘국내동원자’, ‘해외동원자’ 간의 구분이 생긴 것은 한국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준비하며 열린 여러 차례 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일관되게 국내동원자는 징용피해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일본이 여러차례 진의를 재확인 했지만 “한국 내에는 국내동원자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답했다. 하지만 현재 국내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약 646만명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강제동원 된 아동 규모를 물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 박사는 “이미 피해자들이 사망해 조사가 어렵고, 해방 이후 한국 정부가 제대로 자료를 축적해 온 것도 없다”고 했다. 그는 “징용 문제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피해국 정부 같지않다”며 “사례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야 하는데 정부가 가진 자료에는 접근할 수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일본이 배상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라도 증거자료를 만들어 대응해야 합니다.” 인터뷰 내내 정 박사가 당부한 말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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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사진 속 앳된 소년 모습을 보면 그냥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아동 강제동원 피해자를 만나고서야 그 실체를 알게 됐습니다.”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정혜경 박사(59)는 강제동원 된 아동들을 연구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제강점기 ‘징용 문제’ 전문가인 정 박사는 지난 20여년 동안 3000여명의 징용피해자들을 만났다. 역사적 사건 관련자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듣는 ‘구술사’는 그의 오랜 연구방법이다. 정 박사는 이렇게 모은 자료 중 ‘아동 강제동원’ 사례만 묶어 책으로 출간했다. 1일 경향신문 근처 정동길에서 그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너무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대체 이 아이들은 뭐냐’고 생각했죠” 정 박사는 아동 징용 사례를 접했을 때의 충격을 이렇게 회상했다. 정 박사는 2004년부터 2015년까지는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에서 조사과장으로 일했다. 징용피해자 접수를 받고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아동 징용피해 사례의 심각성은 이 일을 하며 알게됐다.
“위원회에서 피해자 판정을 하는데 자꾸만 어린 아이들이 나와요. 당시 일본은 최저연령 기준을 정해서 동원을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 기준보다 어렸어요. 위원들도 모두 혼란스러워했죠. 혹시 아동 징용 관련 연구가 있는지 찾아봤어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연구도. 실태조사도.” 결국, 정 박사는 직접 이들의 사례를 모으기로 했다. 일일이 피해자의 출생년도, 동원당시 나이, 이름 등을 컴퓨터 파일로 정리했다. 생존 피해자들은 직접 만나 이야기를 채록했다.
조사를 하면서 가장 신경 쓴 것은 신뢰성이었다. “진짜 있었던 일인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당시에는 호적에 올라간 나이와 실제 나이가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피해자, 가족, 주변 이웃들에게 ‘피해자가 몇 년 생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몇 년도에 징용을 갔는지’ 등등을 반복해서 확인했어요. 아동 징용이 확실한 사례들만 추려냈습니다.”
신뢰성은 확보했지만 그 결과는 마음이 아팠다. 강제동원된 아이들은 너무 어렸고, 그 후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12살에 일본 오이타현에 있는 광업회사로 징용된 덕종 할아버지는 마치 그 시절에 성장이 멈춘 것처럼 손이 너무 작았습니다. 당시 할아버지 손을 만져 본 사람들이 ‘이런 아이들까지 데려가야 하냐’ 화를 낼 정도였다고 하더라구요. 새끼 손가락도 뭉개져 있었습니다. ‘징용장에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갈 일이 생기자 손가락을 물어 뜯었다’고 했습니다. 12살 아이가 절박한 마음에 스스로 손가락을 물어뜯는 모습. 야만의 시절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은 정 박사를 만나 그동안의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공사장으로 징용돼 공부도, 기술도 배우지 못한 부안의 한 노인은 “TV에서 돈 잘 쓰는 사람을 보면 죽여 버리고 싶다”고 했다. 비행기 공장으로 징용된 한 할머니는 일본을 도왔다는 이유로 평생을 죄인처럼 살았다고 했다.
가해국 일본은 모든 일들을 잊고 있었다. 2011년 5월, 정 박사는 일본 고베에서 열린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전국연구집회’에서 징용 된 아동의 사망사례를 발표했다. 일본 학자들은 “당시 일본은 공장법이 있어서 14세 미만 아동은 동원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정 박사가 확인한 사례들을 추가로 공개하자 그제서야 “놀라운 일이다. 처음 접하는 사실”이라고 했다.
정 박사는 징용에 대한 한국 사회 인식 문제도 지적했다. “강제징용을 다녀왔다고 하면 ‘전쟁 때는 다 그렇지, 나라 뺏기면 어쩔 수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모든 식민 지배국들이 일본처럼 위안부, 징용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그렇다고 사과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요.”
‘강제동원 피해자’를 구분하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피해자들끼리도 ‘나는 국내로 강제동원됐다’고 하면 ‘일본, 중국 정도는 다녀와야 강제 동원이지’라며 무시하는 정서가 있어요. 당시에는 한반도와 일본간에 국내외 개념도 없었고, 피해자가 동원 지역을 선택할 수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정 박사에 따르면 ‘국내동원자’, ‘해외동원자’ 간의 구분이 생긴 것은 한국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을 준비하며 열린 여러 차례 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일관되게 국내동원자는 징용피해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일본이 여러차례 진의를 재확인 했지만 “한국 내에는 국내동원자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답했다. 하지만 현재 국내로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연인원 약 646만명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강제동원 된 아동 규모를 물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 박사는 “이미 피해자들이 사망해 조사가 어렵고, 해방 이후 한국 정부가 제대로 자료를 축적해 온 것도 없다”고 했다. 그는 “징용 문제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피해국 정부 같지않다”며 “사례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야 하는데 정부가 가진 자료에는 접근할 수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일본이 배상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라도 증거자료를 만들어 대응해야 합니다.” 인터뷰 내내 정 박사가 당부한 말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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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1. 2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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