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예수회의 문장 | |||
결성일 | 1540년 9월 27일 | ||
---|---|---|---|
유형 | 복음 전도 | ||
목적 | 가톨릭 복음전파 | ||
활동 지역 | 전 세계 | ||
회원 | 16,740여명 | ||
공식 언어 | 라틴어 | ||
현재 수장 | 아돌포 니콜라스 | ||
웹사이트 | http://www.sjweb.info/ |
설립[편집]
에스파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세속적인 욕망에 충실한 군인이었으나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중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20대 후반에, 작센의 루돌프라는 카르투시오 회원이 쓴 <그리스도 전>과 자코보 데 보라지네라는 도미니코 회원이 엮은 <성인 열전>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새롭게 회심을 하고 순례자가 될 결심을 하였다.[1] 훗날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1534년 8월 15일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청빈[2], 정결, 순명과 교종에 대한 순명을 서원하고, 영혼구원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예수회라는 가톨릭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예수회 설립에 참여한 6명 중 한 사람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1549년 최초로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1540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3세를 알현한 그는 이 수도회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바오로 3세는 '예수회'라는 이름을 내려 이 수도회를 승인하였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노예제에 저항하는 예수회를 불편해하는 포르투갈, 에스파냐, 프랑스에서 들어온 추방 청원을 받아들여 예수회를 해산하였지만,[3] 40년 후에 복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톨릭 내의 수도회 중에서 가장 많은 성인과 복자들을 배출하였으며,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신학자 칼 라너 신부 등 교회사에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현재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에서 활동한 분이다.
특징[편집]
예수회는 전통적인 수도회가 내세우는 삼대 서원인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구원과 믿음의 전파를 위해 맡겨지는 교황의 파견 사명을 지체 없이 실행하겠다는 네 번째 서원이 덧붙여져 있다. 이것은 예수회만의 특징으로 이와 같은 정신은 종교 개혁의 물결로부터 가톨릭교회를 지키고, 내적 쇄신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해 주었다. 이 수도회는 전통적인 수도회의 모습 중에서 과감하게 탈피하는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수도자의 외적인 모습보다는 내적이고 영적인 면을 더 중시하여 수도복을 입지 않는다. 또한 전통적인 정주(settlement) 생활양식에서 벗어난 최초의 활동 수도회이다.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가르침을 따르되, 선교 활동이나 형식은 선교지역의 상황과 문화에 맞추어 적용하는 '적응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예수회의 표어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이며,
예수회의 영성을 대표하는 표현으로는 '활동 중의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Finding God in All Things)' 등이 있다.
선교 역사[편집]
선교지역의 전통 존중[편집]
예수회는 대항해 시대에 동방 항로 및 신대륙을 발견함에 따라 미개척지역으로 가톨릭 교회를 확장시키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학문능력이 뛰어난 선교사들은 인도 고아를 근거지로 하여 동아시아로 선교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 지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적응주의 선교전략, 즉 현지의 언어와 문자를 학습하여 그들의 사상과 문화를 익힌 다음 지배층이나 지식인들과의 학술적 교류로써 가톨릭 교리를 전파한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예수회는 아직 개신교의 세력이 미치지 않은 중국 대륙과 아메리카에서 활발한 해외선교를 하였고, 유럽 교회 역사 처음으로 일본에서 선교하였다.[4] 당시 중국, 일본, 베트남의 군주들이 장기간 동안 예수회 선교사를 고용한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 서학에 접근할 뿐만 아니라 무기,탄환 등 서양문물을 제공해주는 유럽상인들과의 무역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5]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되,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Pax Christi'(주님의 평화) 등의 라틴어 전례용어와 사제가 제단쪽으로 돌아서서 미사를 집전하는 전례를 사용하였으나, 이러한 전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전례 개혁에 따라 현지용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지식인[편집]
예수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논리학, 라틴어, 법학 등 학식이 풍부한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학교 설립 등의 교육 사업에도 업적을 남겼다. 미국의 조지타운 대학교, 포덤 대학교,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오 대학교, 대한민국의 서강대학교 등이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다.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편집]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이 쓴 《여인열전》(김영사)에 따르면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신부가 쓴 《천주실의》는 조선에서 천주교가 자생하는 일에 영향을 주었으며, 미국 예수회 사제인 정일우 신부(존 데일리)는 고 제정구(바오로)의원과 함께 가난한 이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삶을 같이 한 분이다.
양성 과정[편집]
- 지원기
- 수련기
- 철학기
- 중간실습기
- 신학기
- 특수연학과 제3수련기
각주[편집]
- ↑ 최인호의 최장기 연재소설 《가족》에 따르면, 로욜라는 병상에서 기독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열정적으로 살다 간 예수 청년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 淸貧(깨끗한 가난)
- ↑ 《일본 개신교회사》(김수진 지음, 홍성사)에 따르면, 예수회는 노예상인을 파문하고 벌금을 불리며, 몸값을 지불하여 노예들을 해방했다. 당연히 노예무역을 방해하는 예수회를 불편해하는 목소리가 많았을 것이다.
- ↑ 예수회 선교사들이 막부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이야기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공문혜 옮김, 홍성사)를 참조할 것.
- ↑ 응웬응옥투이, 〈19세기 조선-프랑스 관계와 베트남〉( 학위논문(석사)-- 인하대학교 대학원 일반대학원 : 한국학과 2014. 2) 7쪽
같이 보기[편집]
- 로마 가톨릭교회
- 파리 외방전교회
- 미션 (영화)
- 예수회 레둑시온(reducción, en:Jesuit Reductions, 선교를 위한 원주민 보호촌)
- 인디오 레둑시온(en:Indian Reductions, 중남미에 있었던 레둑시온)
- 교황 프란치스코
- 마테오 리치
- 아담 샬
- 페르비스트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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