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5

연찬문화연구소 | 청년들이여, 어떤 삶을 살 것인가?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청년들이여, 어떤 삶을 살 것인가? - Daum 카페



청년들이여,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자료실
남곡|조회 417|추천 0|2019.03.15. 06:11



고전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청년들이여,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사람은 우주 안에서 가장 뛰어난 ‘자유욕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현대의 최대의 모순은 인간의 지적능력이 행위능력을 발전시키는데는 고도로 발전하였지만, 자신의 관념을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는 그다지 발전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고등종교의 지향은 사실 이 방향으로 사람의 지적능력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것이다.

‘논어’는 그런 점에서 현대적으로 해석되고 기여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고전의 하나이다.

공자(孔子)하면 보통 늙은 공자를 떠올린다. 대부분 구부정하고 주름투성이인 늙은 공자를 프로필로 쓰고 있다.

의문이 생기면 밥 먹고 자는 것을 잊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며칠이라도 전념했던 패기 넘치는 젊은 공자를 떠올리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나도 공자의 나이 쯤 되면 알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겨우 나이 20대인데...”

하고 지나쳐 버린다.

시대를 넘어 관통하는 인생과 사회의 본질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것은 공자 스스로 밝히기를 15세였다.

지금의 경우 중3이나 고1의 나이다.

그리고 30에 정립되었고, 40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지금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기 위해 그 귀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가?

어떤 교육제도와 교육 내용이 주가 되고 있는가?

미래 사회에 과연 쓸모가 있는 내용들인가?



맹자에서 주자에 이르는 제자들과 공자의 말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이용하거나 또는 배척한 권력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파묻혀버린 공자의 진면모를 발견하는 것은 유교(학)가 끼친 폐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이어져야할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를 살리는 것은 21세기 르네상스의 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사대모화(事大慕華)의 깊은 뿌리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다보니 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 두 세력 간의 반목ㆍ갈등을 포함하여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진영이나 이념들은 낡으면 그야말로 장애 이상의 것이 아니다.
평면에서 입체로 뛰어올라야 한다.
수입된 개념이나 제도를 넘어 이제는 창조해야 한다.
세대 차이는 이런 방향에서 극복해야 한다.



고전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의미한다.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배우기만 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어둡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면서 온고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1. 물질적 자유

행복의 첫째 조건은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 성숙으로 이어질 때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을 위한 1차적 조건이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이고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적 성숙이 뒤따라야 진정한 행복이 온다는 것을 구체적 삶과 사회적 실천을 통해 확산해 가는 것이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눈을 떠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감소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 자기 몫을 충족시키고 남은 것을 '나누고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빈곤을 넘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목표로 되었다.
내가 공자의 '빈이락(貧而樂)'과 '부이호례(富而好禮)'가 이제 비로소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목표로 되었다고 생각하는 배경이다.
부자들, 대기업이나 재벌들에게도 그들과 후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이런 의식의 전환을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식(食)의(衣)주(住)를 해결하는 것이 1차적 생존 조건으로 된다.

인간은 그 지적 능력(도구 사용능력)으로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하는데서 다른 동물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그 능력 때문에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되어, 물질에 의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자본주의에 오면 ‘물신(物神)의 지배’가 모든 영역에 걸쳐 확산된다.

물질을 생존을 위한 1차적 조건으로 보면서, 항상 그 물질을 수단 이상의 가치로 보지 않을 때라야 진정한 진보 즉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子路 第十三)>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學而 第一)>





2. 사이좋음



우리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인식할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내가 틀림없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따라서 '누가 옳은가?'하고 서로 다투는 문화로부터,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탐구하는 문화로 진화시키는 일이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읽고 지나치는 것 같다.
나에게는 ‘정의’ 논의에 대해 정곡을 꿰뚫고 있는 말로 들린다.

첫째, ‘이것이 정의다’라고 단정함이 없이 출발한다.
둘째,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에 빠지지 않고 ‘오직 의(義)를 좇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둘의 사고방식의 중요함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친다.

현실을 보면 이 둘이 함께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다.
‘이것이 정의’라고 자기 생각을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이것이 정의’라고 단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회의주의나 불가지론이나 시세영합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단정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정의를 추구하는 ‘결합’을 2500년 전 공자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인간 의식의 진화가 필요하다.
<공자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 가겠다.”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인간은 실체를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실체를 인식할 뿐이라는 자각이다.
그래서 공자에게는 이른바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을 이단(異端)이라고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극단(極端)과 단정(斷定)을 벗어나 실체에 접근하자는 것이다.

<공자 말하기를,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제2편 위정)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그런데 이것을 ‘이단을 행하면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자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유교(유학)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사회의 정체를 가져온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사이좋음’의 인문적 토대는 ‘무지(無知)의 자각’을 바탕으로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통하여 그 시점에서 가장 옳은 합의에 도달하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즐거움



'돈'을 벌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하는 지금의 시스템은 결코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시스템(자본주의)이 생산력을 증대시켜 왔기 때문에 부정할 수가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전념(몰입)하여 그것이 기쁨으로 되는' 동기가 생산력의 원천으로 될 때 새로운 생산관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내가 협동(조합)운동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에 인문운동가로서 큰 관심을 갖는 배경이다.



즉 개별적인 깨달음의 추구가 자칫하면 벗어나기 힘든 함정이 결국 ‘자기 본위’에 그치기 쉽다는 것이다.

며칠 전 협동운동가들의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소개한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출발이라면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나에게는 15세기 에크하르트가 이야기한 ‘거룩함’이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자발성• 전념(專念)• 기쁨’이 그 내용이다.

아마 이것이 동기(動機)로 보편화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중심이 될 때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운 인간•새로운 사회•새로운 문명으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공자가 스스로 평생을 관통(一以貫之)했다고 하는 ‘서(恕)’와 ‘충(忠)’이라는 말이 에서도 깊은 감동이 있다.

‘트라우마로부터의 해방’이 ‘서(恕)’와 통하고 ‘에크하르트의 거룩함’이 ‘충(忠)’과 통한다는 느낌이다.

축(軸)의 시대의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인 공자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국가 권력에 의하여 여러 면에서 심하게 왜곡되었다.

유교(유학)로부터의 해방은 시대의 한 과제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그 것이 공자를 왜곡으로부터 해방하는 일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 • 공동체운동 • 마을만들기 등은 새로운 인간•새로운 사회•새로운 문명을 향한 주요한 실험 무대이고,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 못매어 쓴다’라는 말이 있다.



너무 서두르거나 성과가 나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여러분의 선택은 옳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