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사상의 번역 -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읽기와 쓰기
사상의 번역 -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읽기와 쓰기
윤여일 (지은이)현암사2014-04-02
232쪽
144*216mm
390g
책소개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가 기획하고 현암사가 펴내는 인문교양 총서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시리즈 4권. 한국 지식장 안에 동아시아의 사상이 갖는 고유의 질감을 해석해 꾸준히 선보였던 저자 윤여일은 쑨거가 읽은 다케우치 요시미, 그 사상적 만남을 그들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하나하나 세심히 엮어 풀어나간다. 이 작업을 통해 저자는 사상의 운명을 돌아보고 자기부정과 모순을 깨우치지 못하는 사상은 평면화된 시선으로 내려가 소비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쑨거-다케우치 요시미의 조우는 상찬 가득한 업적의 되새김이 아니라, 모순과 좌절을 읽고 그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던 현실 속 복잡함을 복잡함 그대로 읽어가는 과정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쪽에선 “일본의 대표적 지성”이라 칭송받았지만 다른 한쪽에선 “학자에 이르지 못한 평론가”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인간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경로를 추적하는 데 집중한다.
요시카와 고지로와 벌인 번역에 대한 태도 논쟁을 비롯해, 다케우치의 중요한 참조점이었던 루쉰이란 인물에 가닿기 위한 여정과 거기서 피어난 좌절과 모순의 연대기를 재정리했다. 이는 곧 역사상 인물이 드러낸 사고의 한계, 역사상 인물을 통해 극복해보려는 지적인 한계를 깊이 헤아려보려 했던 쑨거의 안목과 감각을 추적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여는 글_사상을 번역하다
1장 사상적 만남
사상적 만남 | 역설적 존재 | 만남의 절차 | 루쉰과의 만남 | 회심을 구해
2장 내재하는 중국
번역과 타자 | 방황과 좌절 | 인간의 얼굴 | 이중의 거리감 | 내재하는 중국
3장 문학과 정치
문학적 태도 | 사상의 운명 | 문학과 정치 | 관념의 역사화 | 정치적 사고의 번역
담론과 감각 사이 | 체험의 사상화 | 큰 사건과 작은 사건
4장 민족과 주체
비판과 건설의 이중과제 | 굴욕의 사건 | 깨어난 노예| 노예근성
쩡짜, 자기부정의 원리 | 민족과 주체성 | 민족의 용법 | 국민문학 논쟁
5장 역사로 진입하다
이중적 역사 인식 | 역사적 중간물 | 역사로 진입하다 | 이중적 전통 | 역사로 진입하려는 갈망
근대의 초극 | 사상의 논리
6장 자신의 근대
근대란 무엇인가 | 이차적 저항 | 노예적 근대 | 근거지와 회심 | 문명사의 역설
일본과 아시아 | 일본의 아시아주의 | 심경과 논리 사이
7장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은폐된 적대성 | 지나와 중국 | 방법으로서의 중국 | 다케우치를 다케우치적으로 계승한다
문명적 되감기 |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맺는 글_ 동아시아의 사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쑨거 연구력
다케우치 요시미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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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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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십 년간 수유너머의 일원이었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로 베이징에서, 도시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교토에서 체류했으며, 현재 제주대학교 학술연구교수로 제주에서 지내고 있다. 2019년 1월 동료들과 연구자공방 천막을 세우며 천막촌 사람들이 되었다.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동아시아 담론』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하나·둘·셋)를 쓰고, 대담집 『사상을 잇다』를 펴냈다.
최근작 : <광장이 되는 시간>,<제주의 마을과 공동자원>,<공동자원론, 오늘의 한국사회를 묻다> … 총 3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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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인생은 마카롱처럼>,<인생은 단짠단짠>,<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등 총 511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6위 (브랜드 지수 94,218점), 음악이야기 6위 (브랜드 지수 15,465점), 불교 10위 (브랜드 지수 39,347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21세기 거대한 전환 속에서
사람의 삶과 문명의 행로를 현대의 고전에 묻는다
우리의 눈으로 읽고 다시 쓰는,
오늘의 문제들에 대한 지적 탐구의 체크리스트!
서구 관점의 고전이 아닌 진정한 ‘우리시대 고전’을 발굴
한국인, 한국어의 시선으로 그리는 지성의 지도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가 기획하고 현암사가 펴내는 인문교양 총서인 ‘우리시대 고전읽기/질문총서’ 2차분이 출간되었다. 2차분 목록에는 사회학자 윤여일이 시도한 동아시아 연구자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에 대한 비평 작업 그리고 영문학자 조현준이 재구성한 페미니즘 이론가·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해제 작업이 포함되었다.
우리시대 고전읽기/질문총서는 사람의 삶과 문명의 행로를 밝히는 ‘우리시대 고전’ 50선을 선정해, 국내 소장 학자가 해당 저작과 사상가의 핵심 전언을 질문하고 해제한다.
구체적으로는, 1950년대 이후 출간된 오늘의 인문사회 고전을 읽고 쓰며 지금의 현실과 고전과의 접점을 찾아낸다. 이 총서는 특히 영미권 주류의 지배문화를 의심하고 저항하는 주변부의 사유를 보여주는 고전,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균열과 전환을 읽어내는 경계의 이론을 발굴·소개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다.
‘우리시대 고전읽기/질문총서’는 고전 읽기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먼저 점검한다. 우리가 탐구하는 고전이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 선정된 고전은 아닌가, 고전을 읽는 일이 지성을 깨우치는 실천이 아닌 지식을 수입하는 행위에 그치지는 않는가, 고전 읽기가 고전과 현실과의 접점을 발견하는 데 제대로 성공하고 있는가.
쑨거가 주목한 ‘사상’이 실현되는 감각,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문제를 다루는 정공법 읽기
사상은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은 채 격동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가
역사·국적·세대를 가로지른 동아시아의 두 논자
다케우치 요시미와 쑨거가 펼치는 방황, 좌절 그리고 희망의 연대기
유명한 구절과 찬사 가득한 업적의 되새김이 아닌,
지식인의 모순 속에 피어난 생생한 고뇌를 읽는다
“사상의 번역이란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하기보다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이다. (…) 다케우치가 루쉰을 사상적 거점으로 삼아 문자로 남겨진 루쉰의 글에 다시 생의 호흡을 주입하고 루쉰의 중국을 끌어안으며 자신의 고뇌를 형상화했다고 한다면, 쑨거는 다케우치의 내재적 모순으로 파고들어 그를 되살리려고 노력하며 일본의 현실로 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다.”
4권 『사상의 번역』은 시대를 움직인 텍스트를 어떻게 우리말로 적절히 옮길 것인지 알려주는 가이드북이 아니다. 여기서 번역은 역사, 국적, 세대를 가로지르는 역사적 인물 간의 만남을 어떻게 조망할 것인지에 관한 태도에 가깝다.
한국 지식장 안에 동아시아의 사상이 갖는 고유의 질감을 해석해 꾸준히 선보였던 저자 윤여일은 쑨거가 읽은 다케우치 요시미, 그 사상적 만남을 그들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하나하나 세심히 엮어 풀어나간다. 이 작업을 통해 저자는 사상의 운명을 돌아보고 자기부정과 모순을 깨우치지 못하는 사상은 평면화된 시선으로 내려가 소비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쑨거-다케우치 요시미의 조우는 상찬 가득한 업적의 되새김이 아니라, 모순과 좌절을 읽고 그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던 현실 속 복잡함을 복잡함 그대로 읽어가는 과정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쪽에선 “일본의 대표적 지성”이라 칭송받았지만 다른 한쪽에선 “학자에 이르지 못한 평론가”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인간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경로를 추적하는 데 집중한다.
요시카와 고지로와 벌인 번역에 대한 태도 논쟁을 비롯해, 다케우치의 중요한 참조점이었던 루쉰이란 인물에 가닿기 위한 여정과 거기서 피어난 좌절과 모순의 연대기를 재정리했다. 이는 곧 역사상 인물이 드러낸 사고의 한계, 역사상 인물을 통해 극복해보려는 지적인 한계를 깊이 헤아려보려 했던 쑨거의 안목과 감각을 추적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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쩡짜의 정신으로 사상을 번역하다.
《사상의 번역》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思想(사상)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러한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 두 번째는 <철학에서> 판단, 추리를 거쳐서 생긴 의식 내용. 세 번째는 <철학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통일된 판단 체계.네 번째로는 <철학에서> 지역, 사회, 인생 따위에 관한 일정한 인식이나 견해. 마지막으로 <문학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지는 견해와 주장이다. 대부분이 사상 하면 첫 번째의 뜻을 떠올리겠지만, 이 책 <사상의 번역: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네 번째 책>인 이 책에 해당되는 뜻은 마지막 의미인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지는 견해와 주장’의 의미에 다 가깝다. 굳이 이렇게 사상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이 책의 구성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이 책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이란 무엇일까? 바로 쑨거가 쓴 [다케우치 요시미의 물음]을 통해 보는 루쉰의 사상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쑨거의 견해와 주장을 새롭게 번역한 것이다.
쑨거가 이 책을 통해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을 번역 하는 패턴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역사상 인물로 크게 시사를 받았기에 숭배에 가까운 감정에 빠져 상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의 말투마저 흉내 내기에 이른다.
둘째. 역사상 인물을 추종하는 분위기에 반감을 폼어 상대의 사생활을 검증하는 등 아우라를 꺠뜨리려고 노력한다.
셋째, 역사상 인물이 범한 사고의 한계를 파고든다.
넷째, 역사상 인물이 지적 전통을 일궜다면 상대를 비판해 새로운 지적 전개를 꾀한다.
다케우치의 사상적 원점은 [루쉰]이다. 일본에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서 다케우치가 자신과 시대의 불행을 자각하며 전 생을 관통하는 사상은 루쉰을 통해 형성되었다.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물음]에서 루쉰을 통해서 일본 사상과 일본 문학에 육박하는 기반을 다지는 것을 살펴본다.
다케우치에게 문학이란 사상이며, 행위이며, 정치이며, 미학이다. 그러나 문학은 그 모두를 초월해 그것들을 생산하고 또 지워버린다. 문학은 희망과 아울러 절망마저도 일신에 모아 사상과 정치와 예술을 토해낸다. 그렇듯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실현하지만 자신은 정해진 틀을 갖지 않는다. 문학은 그것들 모두를 내뿜고 빨아들이는 궁극의 장소다. 그 장소에서 주체는 사상을 정치를 예술을 하며 부단히 자기를 갱신한다. 다케우치가 이런 문학관을 체득하게 된 계기는 바로 루쉰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루쉰]을 작성하면서 문학을 하나의 창작 행위로부터 궁극적이며 본원적인 자기 갱신의 장으로 끌어올렸으며, 동시에 이런 문학관을 세계관에 접목해 세계관이 유동적 양태를 획득하여 현실에 뿌리내리도록 끌어내렸다. -P60
위와 같이 사상가로서가 아닌 문학가로서 루쉰과의 만남을 다케우치는 ‘쩡짜’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신을 상대에게 투입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갱신하는 사상적 만남을 쩡짜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쩡짜는 사상적 만남에서도 생길 수 있지만, 사상이 살아가는 밥이자, 지식을 일구는 방식이자, 더 나아가면 동양이 자신의 근대를 실현하는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P113
이렇게 다케우치의 사상적 토대라 할 수 있는 ‘쩡짜’는 깨어난 노예가 자기부정과 자기재건을 거쳐 주체성을 획득하는 길로 동양이 자신의 근대로 나아가는 길로써 달리말해 ‘루쉰적 저항’을 함의한다.
그것이 깨어난 노예의 숙명이다. 주체는 쩡짜로 타자와의 대립속에서 자신을 씻어낸다. 동시에 부단히 회심의 축을 향해 볼며 자기를 재형성한다. 이로써 주체가 얻는 것은 유동성이다, 다케우치가 말하는 행위란 바로 이런 의미다.-P115
원문 속에서 이미 번역이 시작된다. 사상이란 번역이다. 작가의 사상이 녹여있는 텍스트는 돇자의 의식 안에서 새롭게 번역이 시작되며 유동한다. 이러한 유동하는 의식을 따라 글을 쓴다는 자체가 무척 대단하게 여겨지는 책이었다. 다케시마 요시미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루쉰을 투영하여 시대를 읽는 것도 아니다. 다만 쑨거는 다케우치라는 문학가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다져가는 '쩡짜' 정신을 승계하는 글쓰기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루쉰에 이어 다케우치, 다케우치에 이어 쑨거를 잇는 사상의 궤적은 이렇게 유동하는 텍스트가 문학가에게 흘러들어가 그려지는 번역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 안에 시대를 고민하는 사상가가 있고, 그 안에 시대를 깨우는 문학가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쩡짜의 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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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隱청은 2014-07-04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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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기 갱신으로 이끄는 '쩡짜'...
글쓰기란 언제나 글을 쓰지 않는 마이너리티와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이너리티를 위해서, 마이너리티를 대변해서, 마이너리티의 뜻대로 책임지고 글을 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서로를 밀고, 자신의 도주선 위로, 서로 결합된 탈영토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우연한 마주침이 있다는 말이지요. 글쓰기는 항상 다른 어떤 것 - 자신의 고유한 생성이 되는 어떤 것과 합류합니다.( 들뢰즈의 '대담' 중에서)
들뢰즈는 글쓰기를 단적으로 '타자-되기'로 정의한다. 여성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되기'이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동물-되기'이며 흑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흑인-되기'이다. '타자화'라는 점에서는 번역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다. 번역은 무엇보다 타인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타인의 언어를 제대로 번역해내기 위해서는 타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는지 그 타인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번역하려는 타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번역 또한 '타자-되기'라 할만하다. 윤여일의 이 책 제목이 '사상의 번역'으로 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 있지 않을까 싶다. 타인의 사상을 내 것으로 하는 것도 번역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번역은 일종의 대화다. 그런 까닭에 타인의 사상과 만나 나의 것으로 내재화 하는 일도 답습이 아니라 대화라 할만하다.
'사상의 번역'은 현암사에서 나오고 있는 우리시대 고전 읽기 총서 중 한 권이다. 이 총서시리즈는 한 권의 책을 텍스트 삼아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특징이다. 총서의 네번째로 발간된 '사상의 번역'은 다소 우리에게 생소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 여류 학자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주된 텍스트로 한다.
저자가 자신의 책을 특히나 '사상의 번역'으로 한 것은 기실로 하나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그러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다.
작품이 진정 작품이라면 그 제약을 딛고 나와 타인에게로 손을 뻗는다. 자신의 진실에 천착했던 유한한 개체의 지난한 사고의 흔적이 타인에게 물음으로 육박해간다. 작품의 문제 의식은 짙은 농도로 말미암아 읽는 자에게로 삼투되고 읽는 자는 작품에 자신의 내면 세계를 투사해 거기서 잠재되어 있던 여러 물음이 모습을 이룬다.그런 작품에는 어떤 번역성이 감돌고 있다. 원문에서 이미 번역이 시작되고 있다.(p. 8)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한 개체의 사상을 번역한 번역서라고 한다. 같은 의미에서 윤여일의 이 책 또한 쑨거가 번역한 다케우치 요시미를 다시금 번역한 번역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번역인 게 단순히 그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기엔 한 가지 의미가 더 결부되어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책이 취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상가는 얼른 파악하기가 힘든 사상가다. 그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유형의 사상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주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공헌이 그의 한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이란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 어렵게 내린 개인적 결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그 결단을 내린 시점의 당사자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다. 따라서 내재적 비판이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내재적 비판이란 이런 것이다.
내재적 비판이란 상대의 문제의식을 파고들어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상대가 내딛지 못한 다음의 일보를 비판자가 재구성하는 것이다.(p. 19)
쑨거처럼 이 책도 이 방법을 취한다. 윤여일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제의식을 파고 들고 그를 번역한 쑨거의 문제의식으로 파고들어 그들이 봉착한 한계에서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러한 대화이다. 무엇보다 타자-되기의 대화이다. 들뢰즈는 언젠가 자신의 철학은 남의 등에 달라붙어 자라났다고 고백한 적 있는데 이 책이 취하는 내재적 비판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주목했던 이유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타자인 중국과 대면하면서 일본인이라는 입장에서 중국을 보고 그것을 일본적으로 동일화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중국이라는 타자의 중심에 서서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오히려 일본이라는 자기 내부를 지속적으로 허물어 갔음에 있었다. 그 타자 지향성에 쑨거는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건 그대로 서구 중심의 근대에 간직된 한계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
하이데거가 말했던 대로 근대는 어디까지나 포식자와 같았다. 즉 자신과 차이 나는 것들을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지 않고 모조리 삼켜서 자기와 똑같이 만들었다. 푸코가 말했던 대로 근대의 이면엔 선택과 배제가 차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닮을 수 있는 것은 선택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가차없이 배제되었다. 그렇게 자기 동일화의 이데올로기가 근대의 본질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게 단일한 전체가 되는 파시즘이 근대에 들어와 태동되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쑨거가 보고 있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은 그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엔 자기 동일화가 없었고 오히려 타자와 대면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해가는 '타자-되기'가 있었다. 근대가 간직하고 있는 해악을 치유할 수도 있는 대안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윤여일은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와 대면하면서 찾아낸 대안의 맹아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먼저 다케우치 요시미가 문학을 바라보는 태도다.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였다. 어떤 태도인가 하면,
자기부정만이 진정한 부정의 가치를 지니며, 자기부정을 거치지 못한 지식, 바깥에서 주어진 지식은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다. 문학이란 태도며, 자기부정적 태도다. 문학가라면 마땅히 유동적 상태로 자기를 갱신할 수 있어야지 굳어버려서는 안된다.(p. 58)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자기부정의 태도였다. 나와 같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부정하기 위해 중국 문학을 대했고 중국을 대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평생 연구했고 늘 닮고 싶어했던 루쉰의 문학도 대했다. 사실 자기부정으로서의 문학적 태도는 루쉰을 연구하며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루쉰 역시 늘 자기 한계를 긍정하면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 한 결과 나온 것이 그의 문학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스스로를 노예라 여겼다. 그건 현실 중국 사회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으나 다케우치는 그 절망 때문에 루쉰은 저항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저항은 절망의 행동화로 드러난다고.
구원을 바란다는 사실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노예에서 벗어나려면 가야 할 길 없는 고통스러운 상태지만 깨어나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 공포를 견뎌야 한다. 만약 공포를 견디지 못한 채 구원을 바란다면 그는 노예라는 자각마저 잃는다.(p. 109)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를 다케우치는 '깨어난 노예'라고 부른다. 그는 노예를 거부함과 동시에 해방의 환상 또한 거부한다. 깨어난 노예는 주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착취와 차별의 한 축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근저에 놓여진 구조를 본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한 상황 밖에 보지 못하는 '노예근성'과 구별된다. 그렇게 다케우치는 끊임없이 개인이란 내부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사상가의 내적 모순이 사라지면 사상은 평면화되고 그렇게 되면 타락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통속화를 가장 두려워한다. 자기 모순, 자기 부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를 지향한다. 진정한 사상가는 오로지 거기에 있을 때라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쑨거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태도를 루쉰의 말을 빌러 '쩡짜'라 부른다.
바로 서두에서 진정한 사상적 만남은 자신을 상대에서 투입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갱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바로 쩡짜의 의미다.(p. 113)
쑨거는 '쩡짜'가 깨어난 노예의 숙명이라고 한다.
주체는 쩡짜로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을 씻어낸다. 동시에 부단히 회심의 축을 향해 돌며 자기를 재형성한다. 이로써 주체가 얻는 것은 유동성이다. 다케우치가 말하는 행위란 바로 이런 의미다.(p. 115)
즉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것은 흐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디든 고여있지 않고 그 어떤 곳이든 기꺼이 흐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상을 하는 주체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다케우치와 다케우치를 번역한 쑨거가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생각들이 한창 민족주의가 강해지던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의 첫 저작이자 대표작이었던 '루쉰'은 참전 직전에 죽을 것을 염두에 둔 그가 마치 마지막으로 할 말을 다하겠다는 일념으로 쓴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모두에 대해 배타적일 때 다케우치는 타자인 루쉰과 만나면서 주체는 무엇보다 흘러야 한다는 것을 깨쳤다. 쑨거는 그런 다케우치를 1988년에 만났다. 그 한 해 뒤에 중국에서는 현대에 들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만한 '천안문사태'가 벌어졌다. 민주화를 바라는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염원을 탱크로 처참하게 짓뭉개버린 사건이었다. 천안문사태는 80년 후반에 들어와 더욱 거세어지던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민주화 운동의 절정과도 같았다. 그 열망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조금도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무력으로 짓밟으려고만 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모습은 다케우치의 일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시기에 쑨거는 다케우치를 만났고 그의 '쩡짜'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걸어온 다케우치와 쑨거의 사상 편력은 지금 날로 우경화되는 추세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진정한 주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무엇을 주체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 거리를 가져다 준다. 그런 면에서 '사상의 번역' 역시 다케우치와 쑨거처럼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고 하겠다. 날로 동아시아 삼국 서로에 대한 적대의 시선을 키워가는 요즘 이 책을 통해 '쩡짜'로서 타인을 한 번 헤아려 보는 시선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쩡짜'를 한 번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다. 꽤나 좋은 책으로 적극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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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2014-05-23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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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번역
마치 이어달리기 같은 책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요인물들에 대해 알아보려고 시도해봤는데, 타케우치 요시미를 알기 위해서는 루쉰이 등장하고, 그들의 관계 뒤로 쑨거가 이어진다. 단 하나 제대로 건진 정보가 있다면 타케우치 요시미가 남성이라는 것. 반대로 그만큼 배경 지식이 없는 채로 책을 들었다는 뜻도 된다. 사상과 학문이라는 것이 원래 다 이렇게 이어지고 갈라지는 것인지. 독자를 시험하는 듯한 사실은 이래도 계속 다음장으로 읽기를 계속할 것이냐고 확인하는 듯한 내용이 계속되고 있는 책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생각 이상으로 비워진 공간이 많은데 결국 마지막까지 가긴 했으니, 한보 나아가고 두보 밀려난 느낌이 든다.
상대의 상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더 많은 시간과 공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쩌면 그저 여기서 논의되는 타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에 대해서만 포커스를 잡고 읽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다. 책의 내용 안에서도 나온다. "사상의 번역이란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이다." 라고. 책을 마주하고 되새기자,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은 자기화 된 결과물 외에는 없을 것이란 사실을. 자기화의 범주가 더 크고 넓어지기 위해선 배경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말이다.
타케우치 요시미, 루쉰과 쑨거가 일본과 중국의 문학가이자 비평가이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내용이 나오는 부분도 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특히 전후 일본에 관한 내용이 나오거나 일본과 미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는 부분은 불편하기도 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을 거론한 부분 등이 특히. 그 외에도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담론도 나오기 때문에 그런 사상이 담긴 부분들은 매우 흥미롭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과 동양의 구도를 두고 어떤 시선으로 세계의 흐름을 인식해야 하는지, 근대화의 과정에서 두 문화가 충돌하며 우와 열의 위치를 형성하는 상황에 대해 어느 위치에서 문제 인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는 6장의 내용은 특히 재미있었다. 다소 생소한 쩡짜의 방향이라는 표현에 공감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지식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생각보다 많지 않은 리뷰가 아쉬웠다. 나같은 겉핥기가 아니라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글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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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 2014-05-0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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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번역 (서평)
솔직히 말하면 에세이라고 선택해서 선택한 이책이 내가 상상한 책 내용과 달라서 당혹스러웠다.
문득 안철수의 서재를 읽고 추천한 책을 읽다가 멘붕이었던 오래전의 나를 생각해냈다.
이 책을 다 읽기는 했지만 사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쑨거와 다케우치 요시미에 대해 알아보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부끄럽지만 쑨거라는 인물도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인물도 처음 알았다.
네이버에 다케우치 요시미와 쑨거를 검색해보니 둘은 연관된 부분이 많고 책 또한 꽤 있는 편이다.
나의 무지에 잠시 반성했다가도 쑨거라고 검색을 했더니 인물정보에 나오질 않는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경우 중국문학자 이며 루쉰의 연구를 주로 했다고 간략하게 나오는데
사상의 번역의 시작에도 이부분은 간략하게 나온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을 연구하고 중국의 쑨거는 일본 다케우치 요시미를 연구한다.
이 책의 간략한 내용은 일본의 대표적 칭송과 학자에 이르지 못한 평면가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경로를 추적하고 동양의 두 논자라 불리우니 다케우치 요시미와 쑨거가 펼치는 방황
좌절 그리고 희망 연대기의 내용을 담았다.
사상의 번역이란,
사상의 번역이란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
-윤여일
사상의 번역이라고 해서 번역이 '해석'이라는 뜻인 줄알았건만...여기서 나온 번역은 그런뜻이 아니었다.
역사,국적,세대를 가로지르는 역사적 인물간의 만남을 어떻게 조망할 것인지에 대한 태도라는 뜻이란다.
예상치 못한 내용에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여기서 소화할 수 있는 부분은
그나마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아큐정전의 루쉰을 연구한 중국문화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 그리고 그를 번역(해석의 의미가 아니다)하는 쑨거 이 세명의 관계
는 연결되어있고 이 책은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책이라는 거. 솔직히 한 번 읽어서는 모르겠다. 몇 번 더 읽어봐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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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2014-05-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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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을 잇기 위한 물음
점과 선을 잇기 위한 물음
말 그대로 사상의 번역. 그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물음으로부터
여전히 읽고 있는 중.
이해의 이해를 위한 번역의 해석이라고 보면 되려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상가에 대한 연구를 한 쑨거의 책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그 책[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번역한 윤여일 작가.
번역가인 윤여일 작가가 쓴 [사상의번역] ; <쑨거의[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읽기와 쓰기>.
여는 글에서 윤여일 작가는.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은 '사상의 번역서'라고 말한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을 번역해 간 쑨거.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를 통해 자신을 응시해간 기록에 가깝다.p9
결과적으로 보면.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따라가는 방법으로
'리뷰'를 윤여일 작가가 쓴것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해석학이며 또한 번역자 스스로 들어간 또 다른 점을 이은 선이라고 본다.
맺는 글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은 복잡하다.
그러나 사상을 지향하는 자라면,
현실의 복잡함을 정돈하기에 아서 복잡의 복잡을 사고해야 한다.
바깥의 빛이 비추지 못하는 자기 현실의 어둠을 구서구석 더듬으며 길을 내야 한다.p206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리뷰는 내가 그책을 읽기 위한 선험적인 지식이라고 본다.
책을 읽기전에 미리 이해가 된 내용은
책을 더 읽기 쉽게 만든다.
결국 이 책 [사상의 번역] ; <쑨거의[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읽기와 쓰기>.를 통해
쑨거의[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를 접하게 되는것이며.
작가는 말한다.
사상의 번역이란 힘을 다해 상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만
동시에 상대와 동화될 수 없다는 자각을 품고
상대에게 동일시하기보다 상대와 결별해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노정이다.p208
아직 여전히 천천히 읽는 중이며.
그안에 담긴 사상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 일어나는 상황을 보는 식견을 넓혀주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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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사막 2014-05-0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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