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1

(32) 이병철 - <내 사랑을 부른다>



(32) 이병철 - 이 페북의 글이 3년 전에 썼던 글이라고 오늘 페북에 떠 있다. 3년 전 팔월의 마지막날에 올렸던 글이다....

이병철
15 hrs ·



이 페북의 글이 3년 전에 썼던 글이라고 오늘 페북에 떠 있다.
3년 전 팔월의 마지막날에 올렸던 글이다.
좀 장황하게 쓰긴 했지만 요즘 가파른 마음 속에서 잊고 있었던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 싶어
오늘 이 팔월의 마지막날 벗들에게 다시 공유한다.


이병철
31 August 2016


-팔월 마지막 날입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이 바람은 어디에서부터 불어온 것일까, 이 바람에 담긴 소식들, 바람결에 실려온 그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하루하루를 무더위 속에서 견뎌낸다는 것이 가장 절실한 관심사였던 이 팔월이 오늘로 저물고 있습니다. 어느새 그 더위에 대한 기억 또한 아련해집니다. 바람따라 울리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이 팔월의 마지막 날에 안부를 전합니다.
이 팔월과, 이번 여름과 함께 했던 모든 그리운 이들께, 그 모든 존재들께, 그리고 이번 여름에게, 이 팔월에게도 고마움과 그리움을 보냅니다.
(풍경소리 8월호에 썼던 글 가운데 한 꼭지 여기에 나눕니다)

<내 사랑을 부른다>

내 사랑아, 어디 있느냐
나는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그리고 매 순간 죽고 있다
나는 태초의 사람
그 남자이고 그 여자
그리고 맨 마지막 사람
그 여자 또는 그 남자이다

내 생애는 길지도
그렇게 짧지도 않았다
내 모든 시간이 한 사랑에 적합한 그 시간이었다
내가 달려갈 때마다
너는 늘 거기에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한번도 헤어진 적도
따로인 적도 없었으므로
이번 생애의 길이는 언제나 그리 맞춤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늘 허기졌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 사랑아
연어가 제 모천으로 돌아오고
철새들이 떠나왔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떠나온 적 없는 그 자리를
다시 돌아가기 위해선
서로를 바라볼 거리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지나간 그 모든 것들은 다 내가 지어내었던 것들
그러므로 너무 서러워했거나
지나치게 애달파 했던 것들 또한
너의 이름으로 내가 그리했던 것이었음을
내가 보는 세상이 모두 너로 가득한 것처럼
너를 사랑한 것은 결국 나를 사랑한 것이었다
나를 비추어 너를 보는 이 생에선
나 밖에는 달리 다른 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너의 이름으로 다시 나를 부른다
내 사랑아, 지금 나는 어디 있느냐

- 근래에 들어 나의 주요한 관심사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최근의 여행에서도 여러 차례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한 존재의 의미입니다. 한 존재, 한 사람입니다. 한 송이 꽃이기도 하지요. 사람이라거나 민중이라거나 또는 꽃이라거나 하는 어떤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내 눈 앞에서 내가 나의 감각기관으로 감지하고 포착하여 경험하고 있는 구체적 한 존재 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 하고 그 형태와 색깔과 향기를 느끼는 한 송이 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실재하는, 그래서 내가 내 몸으로 생생하게 경험하는, 살아있는 그런 한 존재의 의미에 대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사회과학적인 구분으로서의 민족이니 민중이니 계급과 계층이니 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지요. 그건 하나의 관념, 또는 개념입니다. 그건 내가 만져보거나 그 냄새를 맡아볼 수 없습니다. 내가 만나고 그 체온을 느끼고 또는 그의 내면의 아픔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은 내가 내밀어 손잡을 수 있는 구체적 한 사람 뿐입니다. 그 한 사람을 필요에 따라 민족이니 국민이니 민중이니 노동자니 그렇게 보자기를 씌어져 분류하고 구분합니다.
꽃도 같겠지요. 내가 꽃을 느끼고 즐길 수는 없습니다. 꽃이란 개념인 까닭이지요. 장미도 그렇겠지요. 내가 감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은 내 앞에 피어있는 지금여기에 실재하는 한 송이의 그 꽃, 장미라고 부르는 그 한 송이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세계 또한 다르지 않겠지요. 이번 생에서 내가 경험하고 인지한 것만이 나에게 실재하는 나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그동안 나는 한 존재가 곧 한 세계, 나아가 한 우주라는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갈수록 더 자주하게 됩니다. 개념화된 어떤 것을 실재인양 거기에 매달려 왔다고 할까요. 더구나 사회운동이란 이름으로 오랜 동안 일해 오면서 이런 성향은 더욱 짙어진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깨어있지 못하면 한 존재의 의미에 대해 놓치거나 간과하는 성향이 드려나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습관 그런 사고의 틀에서 아직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싶기도 합니다. 아니 오롯하게 깨어있지 못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당신을 봅니다. 지금 내 눈 앞의 당신을.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은 태초가 마침내 여기에 이어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통해 태초가 지금 여기에 드려나 있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이 곧 태초가 여기에 드려나 있는 모습입니다.
당신을 봅니다. 맨 처음의 사람, 그 첫 사람과 사람이 그 오랜 세월, 그 숱한 고비 고비를 딛고 실낱보다 가느다란 그 생명의 줄기를 마침내 오늘 여기에까지 이어와 지금 내 눈 앞에 이리 있습니다. 내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서로를 바라보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살아있는 몸으로, 존재로 나투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가요. 숨이 멎고 온 몸이 떨리는 놀라운 만남입니다. 경이이고 신비이고 기적입니다. 참으로 무릎 꿇고 삼배하며 경탄과 찬미를 보내도 모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존재들이 전부 다 그러함을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생명의 진화과정 그 정점에 서 있는 존재이고 이 모두 저 빅뱅과도 맞닿아있다는 과학적 인식이 그냥 하나의 지식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진실임을 바라본다면 이 세상이란,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그 저마다의 존재의미와 가치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어떻게 신성하고 거룩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싶습니다. 사인여천이나 인내천의 의미가, 모두 저마다 하늘을 모시고 있다(莫非侍天主)는 말씀이 또한 그럴 것이라 여깁니다.
이는 또한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을 떠나서는 이른바 정치판이나 사회운동판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국민이니 민족이니 민중이니 주체니 그리고 그 밖에 무어라고 부르든 그 무엇도 만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 국민의 실체이고 민족과 민중과 시민과 백성과 그 무엇 무엇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마주한 당신은 추상적인 국민 가운데 한 사람, 민중 가운데 또는 시민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실재하는 한 사람의 국민이며 한 사람의 민중이며 한 사람의 시민입니다. 당신 말고는 국민이, 민중이, 시민이 별도로 따로 없는 것입니다. 당신과 그런 당신을 만나고 경험하고 있는 내가 이 모두입니다. 세상은 바로 나와 당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살아있다는 것, 여기에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존재 의미와 가치는 그 무엇과 비교하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놀라운 신비이자 기적임을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한 사람에게, 한 존재에게 주목하고 귀기우리고 품어 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를 깊게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당신을 만나고 안을 수 있다면 결국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안고 있는 당신은 나의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음을, 내가 그렇게 당신으로 비추어 드려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 싶습니다. 누가 따로 있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다르다는 걸 경험해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알아챌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그 때까지 서로를 바라보는 이 놀이를 열심히 그리고 즐기면서 할 수 있기를 마음 모읍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