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7

한국군의 창설과 일본 군사문화 윤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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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업 교수의 만군 이야기를 따라서
윤정석 02-21 00:53 | HIT : 1,464


김승업 박사가 느닷 없이 만주사변 이야기와 우리군의 만주 군관학교와의 관련 글을 올렸길래 내가 오래전에 우리 나라의 군사문화와 한국군의 창군에 관한 글을 쓴것이 있어 올리니 심심풀이로 읽어 보세요. 

한 가지는 나는 우리 육사 11기 이후의 군인들과 일을 하면서 한국정치의 민주화를 이룰수가 있었는데 역시 군사문화가 다른 구릅인 우리 육사출신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고. 12-12 사건은 일본식 군사문화와 해방후 훈련된 우리 육사의 문화의 충돌이고 두 구름이 결별하는 충돌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인맥을 끊게 되어 신군부가 등장하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의 친구 아들들을 많이 등용할 것 같은 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말 그러는 것 같고 적어도 80년대까지 서울에 들어온 사람들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그 이후 새로운 정권을 따라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은 아마도 우리도 그렇지만 잘 모르고 아무런 연관이  지어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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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창설과 일본 군사문화

        왜 한국의 군사지도자들은 일본군에서 근무했는가? 대체로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일군에 들어갔는가? 어떤 사람들이 일본 군인이 되었는가? 그리고 일본군으로부터 습득한 군사문화의 유산은 어떤 것이 남아 있는가? 등에 대해서 나는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고 나아가 “일본의 군사문화”를 이루는 역사적 배경은 무엇이며 일부분일지라도 제국주의 일본의 군사문화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필자가 미국의 미시건 대학에 유학하고 있는 1960년  대에 그 대학의 아시아도서관에서 우연히 몇 권으로 된 6․25동란 관련 책을 발견하여 탐독하였다. 그 책은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고 서울에 일본대사관이 설치된 1965년 이래 대사관에 근무한 자위대 무관 사사키․하루다카(佐佐木 春隆)라는 분이 쓴 『朝鮮戰爭/韓國篇』(上․中․下)라는 책이었다. 상권의 제1장이 “建軍의 土壤”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군 「창군」의 이면과 그 기초에 관해서 인적 구성이라 든가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군의 장교였던 사람들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사키 무관은 우리 나라의 강문봉(姜文奉)장군과 일본육사 동기생으로, 태평양 전쟁 중이라서 함께 육사를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강 장군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당시 생존한 일본군 출신의 장교들을 인터뷰하여 그 방대한 책을 썼다는 것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을 1977년에 유학으로부터 귀국하여 서울에서 구하였는데 1980년대 서울대학교 학생회 한 간부 (이광수 동문의 작은 아들)의 이념적 편향을 고쳐본다고 “한국군의 간부가 과거 그들과 같은 우수한 대학생이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하여 그 책을 빌려주었는데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여 아까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2003년 12월에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 다시 가서 일어판 원본을 복사하여 왔다.
        「창군」에 관한 부분은 필자가 한국의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왜 박정희 군사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으며 그 1961년의 거사가 가능하게 된 인적 구성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설명하려는 내용가운데 어떤 경위로 일본군 출신이 한국군을 창설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는가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사사키 씨의 저서 때문이다.
        1964년부터 1969년 사이에 미시건 대학교의 정치학과에 필자와 함께 장도영(張都暎)장군이 정치학을 공부한 일이 있었다. 장 장군은 1969년에 미시간 대학으로부터 북 월맹의 혁명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아 위스건신 대학의 교수로 미국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은퇴하였다. 그는 원래 일본 학병출신으로 한국군 창군에 합류하여 군번이 10080으로 우리 국방경비대의 초기에 육군소위부터 시작한 분이다. 이분을 통해서 필자는 사사키 씨의 설명에 대한 여러 가지 한국군 창설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 할 기회가 있었다. 이 밖에도 지난 90년대에 박창암(朴蒼岩)장군과 교분이 생겨 그의 창군당시의 역할에 관해서 들을 수가 있었다. 박 장군은 함남 북청 분으로 학병으로 일본군에 참여하여 해방 후 남한에서 번역한 일본식 교범을 가지고 북한의 인민군 창설에 참여했다가 1947년에 남하하여 한국군에 입대한 분이다.
        필자는 1960년대 초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시건 대학교의 일본학센터의 석사과정에서 일본의 역사와 인류학, 그리고 음악, 문학, 미술사, 등의 다양한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근대화와 정부 수립과정이 일본에 비하여 어떻게 다른가를 늘 생각해왔다. 필자 개인의 생각이나 읽게 된 서적들을 선택하는 데는 필자의 선입견이 배제될 수 없어 아무래도 여기에 기술하는 일들은 객관성이 부족하리라고 생각한다.

1.  한국 사람이 일본군에 입대하게 된 경위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의 군인이 되게 된 경위는 이렇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그 뒤에 이도․히로부미(伊藤博文)의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가 설치되면서 大韓帝國의 외교․군사권이 일본 통감과 일본 내각에로 넘어갔다. 한국군은 해산되고 고종의 시종무관도 해직되면서 모든 군사와 훈련교육은 통감부와 의논하여 진행되었다. 그 이후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출세 길로 일본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어 그 전선에 일본사람만으로는 전투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의 대학재학생은 물론 한국에 있는 젊은이를 징병으로 강제 입대시킨 것이다. 소수의 지원병과 공부 잘하는 식민지 출신 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사람도 일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일본군으로 입대하게 된 경위는 일본 정부가 대거 학병과 기타 징병으로 징집한 때문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된 이후에 일부의 소수 젊은이들이 일본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그 길은 개별적으로 일본군에 지원하거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경우다. 소년항공학교나 소년수병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는 16-17세의 어린 나이에 입교하여 특공비행을 하거나 하사관으로 일하게 되는 길도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젊은이들은 1943년에 태평양전쟁이 막다른 길로 들어서는 때, 일본의 군부는 조선청년이 “천황의 군대에 감히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한다”는 뜻에서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일반 사병을 모병하거나 강제로 징집하게 되었다. 당시 중학교(중학교는 4년제)의 졸업반이나 전문학교 학생들을 징집하였다. 일본에 유학을 하고 있던 대학 재학생의 경우에는 주로 1944년 초에 현해탄(玄海灘)을 건너다니는 한국 유학생들을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를 내왕하는 부관(釜關)패리 연락선 안에서 방학에 조선반도로 건너오는 200여명을 강제로 지원하게 하였던 일이 있다. 1945년 당시 한국 사람으로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전체로 700여명이라는 통계를 본 일이 있는데, 그렇다면 상당한 수의 대학생들이 일본의 학병으로 지원하게 된 셈이다. 일본의 군부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학병이 되었다는 말들을 하였다. 다음은 지금까지 필자가 알고 있는 세 가지 일본군에의 입대 길이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길은 주로 일본군의 장교가 되는 경위를 설명하는 것이다.
        한일합방 이전에 일본의 국가 건설에 관한 한국 지식인의 관심이 높아진 1880년대에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으로 1881년 9월 제3회 수신사 조병호(趙秉鎬)의 수행원 가운데 장대용(張大鏞), 신복모(申福模) 그리고 이은돌(李銀突) 등 3인이 육군호산학교(陸軍戶山學校)에 입학한 기록이 있다. 이들이 유학을 하고 귀국한 뒤에 어떤 일을 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이 경우는 논문의 주제와 거리가 있어 여기에서 논의하는 것을 피하기로 한다. 다만 일본이 일찍부터 서구식 근대국가 건설의 일환으로 신 군사교육에 치중하고 있는 것을 소수의 대한제국 지도자들이 명치정부의 근대 군사제도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인식하고 근대 국가의 젊은 군대를 양성하고 싶어서 유학생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한 이후 식민지의 한국 사람으로 일본의 국적을 가지고 일본군 장교가 되는 것은 특이한 경우로서 여기에 세 가지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첫 번째 길은 통감부시대와 한일합방이후에 대한제국의 고급관료의 자식이나 젊은 관리 중에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은 일본육사의 특별반으로 입학하여 정규사관생 교육을 받게되는데 이 가운데 이종찬(李鐘贊)장군의 경우가 전형적인 예다. 사사키 씨의 책에 따르면 이장군의 부친은 李王家의 자손으로서 한일합방 당시의 외상 이하영(李夏榮)의 손자이다.  일본 왕실의 子爵의 지위를 거부하고 일본육사 49기생으로 선박공병으로 전과하여 남태평양지역의 선박부대참모로서 전쟁이 끝날 때는 일본군 소좌(소령)이었다. 귀국 후에는 과거의 일본군이라는 죄책감에 근신하고 있었으며, 미군정청의 권유에 고사하다가 1948년 말에 입대하였다.
        또 다른 경우는 1891년생인 이응준(李應俊)장군은 한국무관학교 2년생일 때 日本陸軍中央幼年學校에 편입하여, 후에 일본육사 26기 생으로 보병과를 마치었다. 동경의 아자부(麻布)에 있는 제3연대에 근무하였으며 전쟁이 끝날 때에는 일본 육군 대좌(대령)였다. 1945년 8월 22일에 귀국하여 한국군의 창설을 준비하면서 조선군사위원회라는 군사단체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공부를 잘하는 젊은이로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하는 경우다. 그 가운데 일찍부터 일본육군의 장교가 되어 이미 1938년 2월에 일본 육군 中佐 (중령)가 된 홍사익 (洪思翊)과 김석원 (金錫源) 대위와 같은 이들이 서울의 당시 부민회관에서 강연하면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할 것을 한국의 젊은이에게 권고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에서 계급이 가장 높았던 홍사익 장군(일본군 준장)은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장을 지내고 A급 전범으로 사형된 일본군의 장군이었으며 이밖에도 이응준(李應俊)과 같은 일본군 대좌(대령)가 있었고, 김석원(金錫源) 중좌(중령), 백선엽(白善燁), 원용덕(元容德)과 같은 영관급 장교가 있었다. 이들은 후에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할 때, 군정청의 통위부 고문을 하고 있었다.
        일본육사 58기를 마친 정래혁 (丁來赫) 국방장관은 그 회고록에서 일본육사의 입학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 가지 길은 중학교 2년이 되어 3년간 군사학교인 “유년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육사로 진학 하는 길인데 이는 주로 직업군인의 자제들이 택하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중학교 4․5년을 수료하고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여 윤군사관 학교에 진학하는데 예과 3개월, 후보생과 본과 1년의 교육을 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길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경우와 정일권(鄭一權) 총리와 같이 만주 군관학교(滿洲軍官學校)를 거쳐서 우수한 생도로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는 길이다. 이들은 이미 일본말을 잘하여 일본육사의 3학년으로 편입된다는 것이다. 사사키 씨의 책에 따르면 함경북도 근처의 만주에 광명중학교(光明中學校)라는 학교가 있었는데 이학교의 조회시간에 졸업생인 정일권 소위(당시 일본군 소위)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방문한 것을 교장선생님이 단위에 세우고 칭찬하는 것을 본 강문봉은 감격하여 자신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고 쓰여 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서 지금은 그 모든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광명중학교 출신이 많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거치게 되고 이들이 5․16 군사 구태타의 주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비근한 예로 혁명 거사 전날까지 혁명공약의 전단을 찍은 광명인쇄소(光明印刷所) 주인인 김덕승(金德勝)도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세 번째 길은 동경 유학생가운데 학병으로 지원 또는 강제 징집된 한국의 대학생들이 일단 현지 사단에 입대하여 사병훈련과 하사관 훈련을 거쳐 간부후보생으로 발탁되는 경우이다. 1944년 1월경에 징집된 학병들은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이 혼합된 경우도 있고, 한국 학생만으로 구성된 징집병인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중국지역에 가서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다. 이 학병 출신에는 결과적으로 두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한 구릅은 일본군 부대에서 훈련도중 탈출하여 장개석(將介石)의 국부군(國府軍)에 합류하여 유격훈련을 받는가하면 서안(西安)에 가서 미국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훈련을 받으면서 임시정부의 光復軍으로 활약한 장교들이 있고, 다른 구릅은 서안과 소주(蘇州) 등지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자동차부대나 기마부대에서 전문적인 하사관 훈련을 거쳐, 남경(南京)에 있는 금릉(金陵)군관학교에서 간부후보생훈련을 받고 일본의 육군소위가 되는 경우이다.
        일본의 훈련부대를 탈출한 경우가 김준엽(金俊燁) 고대총장, 장준하(張俊河) 思想界誌 발행인, 신상초(申想楚)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같은 분으로 해방 후에 귀국하여 군에 입대하지 아니하고 학계나 사회운동가로서 지낸 분들이다. 1944년에 징집되어 종전이 될 때까지 거의 교육훈련을 받았다가 귀국하여 한국군의 창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는 많은데 여기에서는 장도영의 경우를 예로서 들기로 한다. 일본의 장교 간부후보생이 되어 종전 이전에 장교가 된 사람들은 장도영의 경우가 전형적이다. 이렇게 해서 장교의 훈련을 받은 사람은 상당수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일본군의 사병출신과 지원병 출신 등으로 상당한 수의 한국군 장교가 있었다. 장형순(張형淳 - 국회부의장), 민충식(閔忠植 - 호주대사) 등도 일본군내에 있던 韓籍將校들로서 중국에 있던 8,000명이나 되는 한국인 사병을 일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상해(上海)와 항주(抗州)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8․15 해방 후에 여러 구릅의 군인 집단들은 각자가 독립국가의 건설과 공산주의자 북한과 대결하기 위하여 귀국하는 데로 여러 단체를 구성하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소속되었던 일부 학병출신은 미국군의 힘을 입어 광복군의 제2지대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 장군(후에 국무총리를 지냈다)과 함께 학병출신인 장준하, 노능서(魯能瑞), 장덕기(張德棋)의 4명과 18명의 미군으로 구성된 일행이 1945년 8월 18일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하였으나 일본군 사령부는 미국 군과 아무런 종전에 대한 처리가 되지 않아 일행을 접수하지 못한다고 즉각 퇴거시켜 다시 중경으로 귀환 한 일이 있다. 당시 중국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청년이 일본군의 사병이 있었으며 이들 모두를 광복군에 편입시켜 국내로 진주한다는 방침을 이범석 중심의 광복군 간부들이 정한일 이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광복군은 물론 임시정부의 요인 모두가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기를 권했다.  
        결국, 미국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정청에서도 임시정부의 요인을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하였고 끝내 임정요인과 광복군 출신의 군인들을 특별히 기용하지 않았다. 사사키 씨의 책에서도 미군정에서 일군출신인 이응준 장군에게 열심히 권유하여 한국군 창설에 기여토록 하였다. 이 점에 관해서 필자는 장도영 장군에게 그렇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제국주의 군대는 제국주의 군대를 선택한다.”라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의 장교를 기간으로 창군토록 했다는 것이다. 광복군은 그 구성자체가 혁명군이었고 그 훈련과정에도 정규사관생도의 교육을 받은 일이 없어 일군출신 장교보다는 전문적인 군인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했다.
        또 한 가지 필자가 추측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권력 구조가 초기에는 임정 초대 주석인 이승만을 중심으로 국제적 활동을 강화하였으나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하면서 보다 민족주의적 인식이 강해지고 일본정부에 대항하는 전략이 강함으로서 외국의 지지를 잘 받지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의 요로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면서 교포중심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김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임정의 분열은 결국 광복군의 국내역할을 미군정으로부터 거절당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 가서 훈련도중 탈출한 학병들은 그들이 국부군이나 공산군을 선택하여 편입된 것이 아니다. 중국 땅에서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편입되고 보면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八路軍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 귀국하지 못한 이도 많다. 최근까지도 중국군의 고위 간부가 된 이도 있지만 대체로 팔로군 출신은 북한으로 돌아갔으며 행여 남한으로 해방 후 돌아왔을지라도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이런 사정 가운데 우리의 국군은 어떻게 창설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군의 창설에 관하여 연구한 책으로 고려대학교의 박사과정에서 쓴 한용원(韓鎔源)의 『創軍』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韓國戰爭史』(1984)를 기초로 소개한다. 이밖에 장도영의 회고록과 사사키 씨의 창군관련 기술이 정확하다고 생각되어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2.  한국군의 창설 경위

        35년간에 걸친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태평양전쟁의 종식과 함께 끝이 났다, 한국 사람들은 해방과 더불어 건군에 뜻을 둔 사람들이 새로운 독립국가의 군대를 창설하는 준비로서, 군사경력과 연고관계를 중심으로 군사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광복군, 독립군, 국부군 출신과 중공군 출신, 일본육사출신의 장교, 조선학도 특별지원병(학병), 조선특별지원병, 징병, 만주군 출신의 장교와 사병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들이 군사단체를 조직하게 된 것은 해방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행정의 공백을 수습하고, 미점령군이 진주할 때까지 잠정적으로나마 일본의 통치기능을 접수하여 사회질서와 안녕을 유지하려는데 있었다. 나아가서, 해방에 이은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에 주역을 맞고 국방군의 창설에 이바지하려는 동기에서 많은 군인들이 모인 것이다. 8․15 당시 정치적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않아 정치적 지도력이 약화 된데다가 이념적으로 좌우로 분열되어 있고 미군정당국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바람에 군인 단체에도 혼란과 좌익분자들이 날치기도 했다. 따라서 한국군의 건군 이념은 처음부터 반공을 표방하는 집단이 되고, 특히 북한의 공산화에 떠밀려 피난하게 된 북한출신 일본군인 경험자는 군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장도영은 해방을 맞아 남경에 있는 학병 동지를 규합, 무궁단(無窮團)을 조직하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고향에 돌아오니 이미 공산당은 토지를 몰수하고 지주를 축출하는 바람에 남하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로 피난 온 장도영은 좌익운동을 하고 있는 학병동맹에 대치하는 학병단에 들러 서울의 사정을 알아보았다. “이북에 가서 공산당을 몰아내려면 결국 군대의 힘이 있어야겠다는 극히 단순한 생각에서 강한 군대를 만들어 공산당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곤 하였다.”고 창군의 동기와 본인이 당시 신설된 大韓武官學校에 교관요원으로 들어가게 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대한무관학교의 교장은 명목상으로 김구 선생으로 되어 있고 부교장에는 전성호(全盛鎬)라는 이가 맡고 있었다. 장도영은 그 곳에서 몇 몇 학병동지와 일본군사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으면서 후에 군관학교 교육에 쓸 계획이었다. 1945년 11월 군정청에 등록된 군사단체는 이럭저럭해서 30여 단체나 되었다. 혼란 속에서도 대부분의 군사경험자들은 해방직후의 혼란 속에서 국내치안과 질서유지에 뚜렷한 역할을 하였으며, 후일에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대거 참여하여 국군의 신속한 발전에 기여하였다.
        사사키 씨의 책에 따르면, 미군 군정청은 일본군 출신을 근간으로 하는 한국군의 건설을 계획하고 이종찬, 이응준, 원용덕 등 일본군의 영관급 출신을 중심으로 1945년 11월에 군정청에 국방사령부(Office of the Director of the National Defense)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는 미 제24군단의 헌병참모인 Lawrence E. Schick 준장이 임명되었다. 군정청은 여러 차례 이응준에게 건군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사사키 씨의 책에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응준은 부친이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관계로 합방 후 일본의 권유로 일본육사에 유학하여 임관되면서, 일본군의 고급장교를 지내다가 해방이 되었기에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데 굳이 한국군을 창설하는데 참여하라하여 많은 괴로움이 있었다고 사사키 씨의 인터뷰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군정청은 미국의 국무성으로부터 한국군의 창설에 승인을 얻지 못해 25,000명 정도의 필리핀식 경찰예비대(police constabulary)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한편으로는 주한 미점령군 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는 동시에 한국군의 간부요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1945년 12월 5일에 지금의 감리교신학교 교사에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를 설치하고 1기생 80명과 2기생 80명이 입교하였는데 임관한 사람은 모두 110명으로 이 때 장도영은 임관당시 군번이 80번이라서 한국군번 10080이라고 한다. 이 때의 명단은 사사키 씨의 책에 모두 있으며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79번이었다. 그 후 이후락과 장도영은 한 번도 같은 부대에 근무한일이 없어 서로 잘 모르는 사이라고 장도영은 말하고 있다. 이렇게 110명의 학병출신과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교육시키어 창군의 기간을 삼았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1월 14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교사를 지금의 태릉으로 이전했다가 1946년 4월말에 폐교하였는데, 이 곳 출신의 대부분은 국방경비대 장교로서 크게 공헌하기도하고 일부는 경찰로, 또는 군정청의 공무원으로 등용되었다. 졸업자 가운데 소수만이 학계로 진출하였다. 폐교와 함께 국방경비사관학교가 1946년 5월 1일자로 창설되었고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는 陸軍士官學校가 된 것이다.
        8․15 해방당시 남한에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모두 700명 내외라고 하는 기록을 본 일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기백 명이 장교라고 하면 한국군의 시작은 상당히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간부요원들의 출신 배경을 보면 아무래도 학병 출신으로 38도 이북 출신이 많았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교 학생 일부도 교육 훈련을 받아 장교로 임관된 것으로 보아 한국군의 교육 수준은 전쟁 기간을 통해 아주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5․16의 군사 혁명을 지도한 장교들은 당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를 건설 해나가는데 있어 이러한 인적자원과 일본식 교육훈련이 된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 상기 할 필요가 있다.
        과연 일본의 군사문화가 만연되었던 1940년대에 20대를 보낸 한국의 청년들이 일본군의 장교 교육을 받았다면 해방 후 한국군을 통하여 일본의 군사문화는 한국사회에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18년간에 정부에서 일한 사람들은 얼마만큼이나 일본의 군사 문화에 영향을 받았는가? 사사키 씨의 책에 나오는 「창군」편은 아주 상세하게 일본군 출신의 사회진출, 즉 정부와 사기업의 경영자로서 국가의 기간산업을 운영할 때, 중화학공업을 일으킬 때, 국가의 도로 항만시설을 건설할 때, 이 모든 분야에서 일하던 한국군의 지도자들은 학병출신 장교이거나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다. 과연 일본의 군사문화의 진수는 무엇일가?

4.  일본의 군사문화

        일본군의 일부였던 한국의 군사지도자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하여 미국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하거나 전투에 투입되면서 한국의 장교는 어느 만큼이다 미국의 전술과 전쟁 이론을 습득하였는가? 미군들이 가지고 있는 군인 사회에서의 인권, 사회규범, 자유에 대한 신념, 그리고 국가관을 배웠겠는가?
        당시 1960년대 초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바로 필자는 미국유학을 떠나갔다. 물론 문화가 다르고 인간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사회였다. 한국의 사병 생활과 육군본부내의 군사문화는 미국사회와 아주 다른 불합리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3년간의 한국전쟁 중에 한국군의 장교들은 일본의 군사전술과 이론을 미국의 그것으로 바꿀 수가 있었는가는 의문스럽다. 필자는 아직까지도 일본의 군사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 많다고 본다.
        이 절에서는 일본의 군사문화가 될 만한 것을 나열하고 소개하려고 한다. 일본군은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그 기본 정신과 역할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봄으로서 다소 군사문화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을 구성하고 있던 장교와 사병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가치관, 신념으로 되어 있는 것을 여기에서는 군사문화라고 생각한다. 앞서 서론에서 밝혔듯이 일본의 군사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려고 한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1990년대 초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주도적인 군인의 사회조직을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제거시키고 국민정부의 기간에는 이념적 갈등을 다소 해소하고 이념적 다양성을 용납하면서 한국 사회는 급속히 변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정치문화와 일반 사회의 정서는 보다 문민적인 정서를 갖게 되는 시민들의 수가 확대하였다. 나아가서 지금의 노무현의 참여정부안에서는 젊은 지도자들에게는 거의 일본의 군사문화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을 것 같다.
        일본은 1868년에 도쿠가와(德川) 군사정권을 타도하고 메이지천황(明治天皇) 중심의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정부가 출범하였다. 당시 구라파의 여러 나라로부터 일본은 근대국가의 제도를 배워서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명치개혁은 “富國强兵”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고 정부를 수립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강한 군대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요청은 막대하였다. 이런 임무를 맡은 야마가타․아리도모(山縣有朋)는 1869-1870년 사이에 구라파로 파견되어 푸루시아와 프랑스의 징병제도에 대하여 세밀하게 연구하였다. 야마가타는 징병제도는 정부와 인민을 연계시키는 제도로서 국가를 위하여 인민의 에너지를 동원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1872년 야마카타가 새로 창설한 천황의 경호를 맞는 근위대(近衛隊)의 사령관으로 황군의 준장으로 진급하게 되어 모든 규정과 제도를 마련하면서, 일본의 징병제도를 구상하였다. 그가 육군성 차관으로 임명되면서 준비한 徵兵令을 1873년 1월에 선포하였다. 징병제도를 실행함으로서 비로소 “통치자와 피치자는 동일한 기초 위에 놓이며, 臣民의 권리는 동일하고, 군인과 농민의 단합을 위한 길이 트여진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프랑스의 징집 모델에 따른 것으로서 의무연한을 3년으로 하고, 장기 복무자는 4년을 더 연장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호주나 가업을 맞고 있는 자는 징집되지 않게 하였다. 이 제도는 사회적으로 사무라이 계급을 소멸시켜 사회적 평등을 이루는 것이며, 군사적으로는 국내적 치안을 담당할 수 있는 병력을 마련함으로서 당시 명치 신정부의 권위를 더 높이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창설 이래 불과 수 십 년 만에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징병제를 실시한 이래 사무라이와의 내전에서 성공적으로 신정부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1895년에는 대외적 도전인 청일전쟁에서 중국대륙을 공략하였고 1905년에는 일로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기게 되었다. 제일차세계대전에서는 성공적으로 연합군의 편에서 시베리아를 공략하고 1931년에는 관동군(關東軍)이 만주를 장악하게 된다. 방대한 대륙을 장악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하게 되는 1940년대까지 60년이 걸렸다. 이 짧은 기간 내에 일본군은 사무라이로부터 세계적으로 강력한 지상군이 된 것이다.
        일본군의 발전과정을 볼 때, 1887년의 兵制大改革을 단행하였으나 일본군의 기능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휘관인 간부, 즉 장교와 하사관의 자질이 우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일본도 초기에는 어떻게 우수한 소질을 가진 장교와 하사관을 보충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심하였다. 메이지 초기에 천황의 近衛隊員을 보충하면서 시작된 일본군의 충원은 한국에서 일본이 실시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무인 집안에서 지원자를 뽑았고, 메이지 신정부 수립에 공헌을 한 사무라이(한국의 경우에는 한일합방을 성공시키는데 기여한 사람) 가운데 계급을 정하여 등용하였다. 그러다가 징병령이 실시되면서 다음의 내가지 길로부터 간부들을 보충하게 된다.

        ①  사무라이(武士) 계급으로부터 충원
        ②  兵學校 또는 兵學寮로부터 충원
        ③  육군사관학교로부터 충원
        ④  陸軍敎導團 출신자로 보충

        일본의 징병제는 사회 평등을 증진시키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동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명치 헌법이 1889년에 공포되고 헌법상의 일본 군부는 그 지휘권이 내각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어 천황의 군대로서 軍令權과 指揮權이 현역 참모들에게 주어졌다. 명치헌법에서 보면 천황의 집행권과 행정권은 군사적인 것과 비군사적인 것으로 양분되어 있어 육군과 해군의 행정권만이 내각에 부여되었다. 명치 초기에는 문민통치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 일본의 군부는 내각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천황의 군대로서 천황이 바로 국가와 같은 천황제 이념에 따라 군은 오직 국가와 천황에게만 충성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일본의 군부는 천황의 이름으로 무엇이던지 할 수 있는 전통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군의 직업주의가 강한 반면에 내각이나 정치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군은 국가 발전과 경영의 중요한 도구로서 부패한 정당정치, 반의회적 당리당략에 대한 강한 반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본의 군사문화였다. 더욱이 농민출신의 장교들이 도시의 부패한 상인이나 정객에 대하여 증오하고 타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결사하는 군 내부 조직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결국 1936년 2월 26일에 동경을 장악하고 대신들을 살해하는 등 부패한 정치를 타도하는 거사가 일어났었다. 그 이후 군부가 갖고 있는 내각구성에서 육군성 대신과 해군성 대신을 천거하는 일에 수상을 실각시키는 일까지 있어 1940년대의 일본 내각은 군부 독주로 제국주의 침략의 일본을 만들게 되었다. 한국군의 장교들이 이런 일본의 군사문화를 기초로 교육을 받고 1930년대와 40년대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관계로 해방 후의 한국군의 군사문화에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나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일본의 군사문화의 한 단면들로서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①  군부의 우월적 지위가 국가의 재정이나 경제를 장악하려는 군인의 생각
        ②  정보 수집기관의 과다 노출과 인권 침해의 수사 (헌병 정치)        
        ③  주둔지에서의 위안부 공인(인권유린)
        ④  사병의 육체적 학대 및 지나치게 통제된 사생활
        ⑤  과도한 국가중심주의적 사고는 개인의 언론, 사상, 또는 정치참여와 결사의 자유를 용납하기 어려운 점, 등을 들 수 있다.

        일본의 軍備는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처음부터 국방에 관한 구상이 있어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명치유신 당시에 나라의 안과 밖에서 일러나는 위협에 대응하여 새 정부가 지위를 튼튼하게 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군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의 국방에 관한 새로운 구상이나 전략적 사고는 실제로 청일전쟁 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정부가 청나라와 대결을 생각하면서 국방의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본다. 물론 1860년대의 도쿠가와(德川) 군사정권이 끝난 즈음에 이르기까지 일본이라는 섬나라는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 대한 국가 방위의 구상이라고 불릴 만한 사건은 없었다고 한다.  만일 “국방구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국지적인 방위를 주도한 것으로서 “방위구상”을 모색하던 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의 전쟁은 바로 무력전 중심으로 생각되는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이 늘 있었던 전쟁 상황이었다. 명치유신을 성취시킨 당시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일찍이 이렇게 해서, 근대국가의 국방이 지니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한 整備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 지도자들은 “국방”이 독립 국가로서의 필수 조건인 것을 통감하였으며 한 층 더 “국방기반의 조성”에 힘쓰게 된 것이다.
        일본의 국방에 관한 여러 가지 저서 가운데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관해서 기술하고 있는 학자들은 대체로 “국방”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있다.  말하자면 패전 뒤에 일본의 경험을 통해서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일본의 국방은 “방위” (Self-defense)의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의도적으로 용어에 관한 설명을 하려는 것은, 일본 학자와 정부의 특성이긴 하지만 용어의 선정과 국가 정책 내용의 변화가 함께 고려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되어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가이하라ㆍ오사무(海原 治)씨는 전전에 도꼬 (東京)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5년간 병역을 마친 뒤에, 지방 경찰청에서 근무하다가 방위청의 방위국장을 지냈는데, 그가 펴낸 『일본의 국방을 생각한다.』라는 저서에 다음과 같이 일본 사람 특유의 발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전전의 군사적 지도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군사문화의 하나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개념론을 좋아하고, 환상적이고 구체성이 없는 논의를 즐기는 반면, 감정으로 사물을 결정하는 성벽을 갖고 있다.  자기에게는 바람직한 상황을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이상’이라 말하며 이와 같은 바람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을 검토함이 없이 목표를 향해서 저돌맹진 (猪突猛進)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표현되는 “이상”은, 말하자면 일본 사람들의 바람이고, 그 바람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거나, 합리적인 것과는 별개로, 일본 사람들이 추구하는 “National Security"에 관한 정책적 “이상”이며, 현실적으로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가이하라 씨가 서술했듯이 일본 사람들은 “이상"의 기준이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않았어도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서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지적했듯이 “화려한 말로 쓰인 작문으로 공중누각을 짓고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우리들의 성격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이 일본 군사문화의 특수한 의식 구조가 “대 일본 제국”을 멸망하게 했으며, 당시의 두뇌 좋은 엘리트 집단인 “大本營”의 참모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일단 근대 국가로 성립된 일본은 1936년에 “제국 국방 방침”을 개정, 발표하였으며,  이것이 일본의 새로운 국방 전략의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대 일본 제국은 명실공히 동아시아의 안정 세력으로써 국력을 무장으로 정비할 것이라는 것, 유사시에는 기선을 제압하여 신속하게 전후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당시의 강대국으로써 무장하고 있는 미국, 러시아를 목표로 하여 중국과 영국에 대하여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국방의 기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 러시아에 맞서서 싸우는 일이며, 나아가 중국과 영국마저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대비는 평화적 공존 이전에 적대적 관계를 상정하여 전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군사문화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까지 일본 방위청의 방위국장을 지났으며 내각 국방회의의 사무국장을 지난 가이하라(海原) 씨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 러시아, 중국 및 영국 등과 견주어야 한다”는 것은 굉장하고도 화려한 구상이긴 하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국력을 일본이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바람을 목표로 설정하는 것일 뿐,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며, 일본인의 의식이 갖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의 패턴은 오늘의 전략 개념을 결여하고 있는 군사문화의 일단을 가리키는 셈이다.
         일본 정부는 장교들의 전략적 사고와 외국에 진출하는 군사력의 운용을 위하여 육군대학교를 설치하고 참모의 전략적 사고의 폭을 넓히는데 도모하였다. 1938년에는 일본 육군의 정보전과 게릴라전의 훈련을 위한 나가노학교(長野學校)를 설치하고 불확실한 장래에 대비하는 정보학교의 훈련을 하였다. 한국군의 방첩대의 기원이 이 나가노학교로부터 이어진다. 한국의 육사 2기인 이철희(李哲熙) 소장은 나가노학교 출신이며 박정희와 군사혁명을 함께 모의하였고 오랫동안 그는 한국의 중앙정보부의 간부로 있다가 정보부차장을 역임하고 퇴임하여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국의 국가정보 계통은 두 갈래에서 훈련되었다. 하나는 김준엽, 장준하와 같이 미국 기관인 OSS로부터 정보전과 특전을 배웠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군의 나가노학교였다. 한국의 중앙정보부와 북한의 김정일 정치․군사학교도 나가노정보학교의 정신교육을 원용하여 간부를 배출하고 있다. 한국의 방첩대와 중앙정보부가 과거 저지른 불법적인 인권유린이나 고문은 모름지기 전전 일본 군사문화의 일부가 전수된 것으로 안다. 일제시대의 일본 헌병이나 방첩부대에서 활약하던 장교와 사병들이 이러한 정보기관에 많이 들어가서 일하였다. 예를 들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재춘(金在春), 최영희(崔榮喜), 김창룡(金昌龍) 등과 같은 일본군의 장교들이다.
        끝으로 일본군에 근무하면서 습득한 여러 가지 지휘경험과 내무반 생활은 특별한 기준이 없던 해방 후에 일제의 군사문화를 그대로 전승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의 국방경비대는 일본군복과 휴대품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병기도 미군이 두고 간 일본군의 장비;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훈련기간의 막사도 일군의 시설 그대로였고 육군본부의 건물도 그대로 일본의 그것을 인수하여 사용하였다. 이 같은 현실을 한 노병인 공국진(孔國鎭)장군은 그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국군의 창설 이후 “내무반 생활은 일본식 규범 그대로였다. 군복은 일본 것이고 일본군의 칼을 들고 …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의 군사문화의 진수를 공국진 장군의 그의 회고록에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징병으로 나가서 4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병과를 분류 받아 보병으로서 함경남도 나남의 76연대로 파견되었다. 여기에서 3년간의 교육을 받고 1944년 1월 필리핀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종전을 Mindanao에서 맞았다고 한다. 그가 받은 교육과목 가운데 정신교육덕목으로    ① 황국사관 -- 교제는 德富蘇俸의 『近代日本國民史』:
       ② 내무생활의 일반 교육원칙:
       ③ 기초 군사훈련 등이었다고 한다. 철저한 황국신민 사관과 내무반 생활과 예절 교육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뺑코
2013-02-21
01:42:21 윤교수 덕에 좋은 공부 많이한다.고맙다.
김승업 교수,강신표 교수도 아직도 정정하게 나와서 좋은글,연구논문을 올리는걸 보면
장하다고 생각한다..
강교수 몸조례 잘하게..처제님이 마음고생 많이하셨을 텐데...잘 보살펴주시구....
세분이서 건강하셔서 더욱좋은 연구논문을 발표하시기를.....감바레 마쇼....
 

조두영
2013-02-21
12:39:14 잘 읽었네. 체계적으로 일본의 근대 軍형성을 소개해주니 과연 일본전문가 답구나.
 

강신표
2013-02-22
11:03:49 우리의 전 세대가 일본군의 영향하에서 근대국민국가의 운영 방법을 배웠다면 우리세대는 미국 군대문화 속에서 성장한것 같다.
앞선 문물은 후진 사회와 국가에 일종의 롤(role) 모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윤교수의 한국군의 성립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은 우리 자신들의 오늘을 성찰해 보는데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윤교수, 수고가 많소. 잘 읽고 있습니다.
 

김태문
2013-02-23
15:31:05 윤교수의 글로 정보학과 우리의 창군사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웁니다. 한번 읽고 지나기에는 아까워 책(아니면 유인물)으로 냈으면 싶네요. 이번 글 중 "2. 한국군의 창설경위" 첫 머리의 "36년"은 "35년"으로 고쳐야겠습니다. 하도 "일제 36년"을 자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합방일 1910년 8월 29일부터 해방일 1945년 8월 15일까지"는 만35년에서 14일이 모자랍니다. 치욕의 역사를 늘려잡으면 안 되지요.
 

윤정석
2013-02-24
18:25:43 김태문의 섬세한 관심에 따라 일제 36년을 35년으로 수정 했습니다. 지긋 지긋한 1년을 지웠습니다.
이 글의 원본을 "한일군사문화학회誌"에 몇년전에 실었는데 그 글을 좀 뽑아 여기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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