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5 h ·
5년전 페북에 올린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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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2i1 soinSSepteSaimbferords 20n1r6 ·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세계 어떤 문명권(文明圈)에도 뒤지지 않는, 아니 어떤 면에서는 가장 현대까지 관통하는 이념을 건국 정신으로 하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다.
공자의 ‘박시제중(博施濟衆)’과 불교의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을 뛰어넘는 우수함이 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유가(儒家)의 ‘논어(論語)’나 불가(佛家)의 경전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혹자는 천부경(天符經)을 이야기하기도 하나, 그것으로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
아마도 발견하지 못한 귀중한 문헌들에 대한 연구나 탐색이 필요하겠지만, 삼국 시대이후 이 민족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불교와 유학의 경전들을 재해석하여 현대까지 관통하는 다시 말해 현대의 첨단과학과 부합하는 그 정신의 정수(精髓)를 끄집어내어, 개인의 자아완성과 사회개혁과 세계완성의 운영원리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라는 위대한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근래 느낀 몇 가지만 제시해 보겠다.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리라.” (제9편 자한)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아는 것이 없다無知也’
요즘은 중학교 정도만 공부해도 과학적으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감각에 의한 상(像)과 자신의 정보에 입각한 판단을 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의 다음 문구는 공자의 말을 다른 문명권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고, 둘 다 현대과학과 부합하고 있다.
‘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모든 현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만일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본다면,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불교방송에 출연해서 강의(아직 방영되지 않앗음)한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무지를 자각한 자의 마음의 상태는 다음의 어떤 상태인가‘
① 막막함
② 불가지론
③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④ 허무
⑤ 설렘
다음으로 논어의 ‘공공(空空)’과 ‘고기양단이갈언(叩其兩端而竭焉)’은 무슨 말인가?
‘무지(無知)의 자각’은 소통과 탐구의 출발점이다.
핵심은 그 태도인데 ‘공공(空空)’이라고 ‘빌 공’ 자(字)를 두 번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많은 오해들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무지의 자각과 결부하여 자신의 지식·경험·가치관·신념 등을 다 비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특히 자기의 식견이나 가치관 또는 신념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반발하거나 허무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가치관이나 신념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야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사실은 그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는 순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지배되는 것이다.
단정하지 않고, 즉 주관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오히려 자신의 지식 등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지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식 등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공(空空)이란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만 ‘내 생각이 틀림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라는 전혀 과학적으로 근거없는 생각을 비우라는 것이다.
비우려고 애쓸 것 까지도 없다.
즉 자신의 생각은 실재와는 별개로 ‘자신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자각’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겠다.” 我叩其兩端而竭焉 는 것이다.
금강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공자의 공공(空空)에 바탕을 둔 철저탐구와 통하는 면이 있다고 보인다.
공자가 공공(空空)을 이야기하고, 석가가 무소주(無所住)를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의 주관이나 신념이나 가치관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전술(前述)한 바가 있다.
주장하되, 사로잡히거나 지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무소주無所住에 방점(傍點)이 찍히는 것으로 읽으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무소주無所住는 생기심生其心을 향한 태도이며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방점(傍點)은 생기심生其心에 있다.
이 두 거인의 세계는 비록 그 문화나 사회가 달랐지만, 진리를 향한 올바른 태도를 이야기하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공(空空)이나 무소주(無所住)를 목표로 삼아버리면, 허무(虛無)에 빠질 수 있다.
갈(竭)과 생심(生心)이 목표다.
자유롭고 풍성한 길이다.
그것이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마침내 밝혀 보겠다.” 我叩其兩端而竭焉 즉 철저(徹底)구명(究明)으로 가는 길이다.
이제 시대는 바뀌어 공자나 석가 정도의 현인이 아니면 알기 어려웠던 통찰이 누구나 과학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물질적·제도적 준비도 꽤 마련하였다.
나는 나라의 위기를 더 나아가 세계문명의 위기를 극복하여 한 단계 더 높이 비상飛翔할 수 있는 저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는다.
암울한 시대지만, 이것을 진정한 변혁의 과도기로 만들자.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를 살리는 길이다.
민족주의는 이렇게 진화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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