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9

Philo Kalia | Facebook [3] 신비주의

Philo Kalia | Facebook

5 Ma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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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성찬 우리의 삶, 특히 우리의 종교적 묵상은 오래된 익숙한 것을 계속 지속적으로 곱씹어,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체험하는 시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흔치 않지만 때로 새로운 것을 찾고 만들어가는 행위 속에서 활력을 얻기도 한다. 달리의 작품 특히 그의 후반기 작품인 성화에서는 불쾌하지만 파고드는, 무엇인가 실재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힘을 느낀다. 그의 작품은 이상하지만 눈이 끌리고 마음에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전통적 성화에 익숙해진 눈으로 달리와 금새 친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달리에 대해 공부도 하고 작품을 한참 들여다보면 화가로서의 그의 기량과 예술적 완성도와 침투해 들어오는 마력에 혼이 나가는 것 같은 체험을 한다. 그러나 그를 신앙적으로 완전히 믿기가 주저주저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신앙의 다른 표현, 다른 양상 때문이다. 다르고 다양한 타자들의 형태들을 수용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고 축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달리의 종교화를 보면서 실감한다. 1950년도 이후 그의 그리스도 그림은 믿을 수 없는 자의 예술작품이다. 사도-마조히즘적 기질, 그를 십자가형과 종교 재판소에 묶어 놓는 그림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본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회색빛이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주제와 결부시켜 생각하게 만든다. 달리에게는 이중의 바닥이 그의 정신의 심연에 옹송그리고 있다. 거기에 그의 천재적인 소질과 그의 과시적인 기질이 함께 묶여 있다. 그의 존재론적 상처를 드러낸 작품은 우리를 설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놀람과 어리둥절함과 충격을 준다. 그가 그려낸 모든 작품은 사실 지성적이고 인위적이며 정확히 계산된 그림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모든 그림들이 그때마다 하나의 충격적인 선포를 담고 있는듯하다 달리의 작품 뿐 아니라 그의 사상에서도 엿보이는 편집증적-비평적 방법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들고 모든 것을 동시에 흐트러트린다. 그는 1968년 파리에서 한 팜프렛에 <나의 문화혁명>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나 살바도르 달리는 로마-가톨릭 사도적 교회의 회원으로서 깊이 비정치적이며 정신적 관점에서 군주주의자(Monarchist)이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과 유쾌한 마음으로 오늘날 창조적 젊은이들의 데모는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그 힘이 모아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달리는 1930년대 쉬르리얼리스트의 그룹과 직접적인 교제를 맺고 그 후 바로 탈회했지만, 그는 자신만이 유일한 초현실주의자임을 구체적인 고백을 통해 선언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리스도적인 관련성과 분명히 선을 그은 작가들이다. 달리에게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기독교적인 것은 그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섰다. 달리는 1948년에 교회의 품으로 되돌아갔으며 가톨릭교회로의 호화찬란하게 연출된 회심을 감행했다. 그는 1949년 로마에서 교황 비오 XII세를 비공식으로 알현했으며, 1950년에는 그의 작품에서 종교적인 모티브가 활발히 나타나고 있고, 1951년에는 <신비적인 선언>(Mystisches Manifest)을 하는데, 그 내용은 <핵 신비주의>를 변호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개발한 편집증적-비평적 방법을 적용했다. 평론가들은 달리의 신앙을 의심하기도 하고 그의 후기 종교 작품은 현대회화의 추상성을 상실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952년 작품인 <성찬의 정물화>(Eucharistic still life)는 미술 상인에게 넘어가기 전 <복음의 정물화>(Evangelical still life)였다고 한다. 사실 복음의 은총은 성찬에서 구체화된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서 스페인 Catalan 지역의 가톨릭 신앙을 평생 떠난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신앙에 대한 태도는 모든 초현실주의자들이 종교를 떠난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달리의 1926년 작품 <빵 바구니>“Basket of Bread”는 빵의 도상에 대한 평생의 관심이며 성찬의 신비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빵과 물고기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특징들이다. 빵을 나누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다는 것은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환대에 대한 상징이며 실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한 기적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다. 물고기는 고대 기독교이 예술작품과 가르침에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상징어로 사용된다. 달리는 이 작품에서 모든 위대한 작가들이 점점 새로움을 만났을 때 지향하는 그 핵심 지점, 곧 성찬의 표상에서의 ‘단순성’을 정확히 포착해냈다고 생각한다. 색채를 통해 실재를 수정같이 맑게 표현하고자 하는 꿈을 달성한 작품이다. 하느님의 생명이 사물들을 통해 세상에 전달되며 스며든다. 세계의 사물들과 사람들은 하느님의 생명의 숨으로 사무쳐 있다. 사물들은 그 안에 구원의 신비를 감추고 있다. 상징적이며 성사적인 것들이야말로 인간 실존의 깊은 곳에 미치는 차원들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성찬의 신비는 사물이 사물로만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성사(聖事)가 됨을 말해준다. 이 때 세계와 세계의 사물은 달라지며 동시에 인간의 실존도 달라진다.(보프의 <성사> 참조) 초월적인 것이 현재적인 것으로 인식될 때 사물이나 사건은 성례전적인 것으로 된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자연은 역사와 연합한다. 역사의 중심에서 자연은 성령의 완전한 지체이자 경험인 몸으로 완성에 이른다. 물론 이것은 성사(성례전)로서의 성찬의 토대이다. 성사적 사유와 실천에서 성인됨은 도덕적 복종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 즉 도덕과 그 밖의 다른 결과물들을 산출해내는 실체를 의미한다.(폴 틸리히의 사상을 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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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May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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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성만찬 성사 스페인 출신의 화가이며 1920-30년대의 초현실주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종교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대부분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기독교와 분명한 선을 그은 반면 달리는 가톨릭 신앙으로 귀환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 비평가들과 몇몇 신학자들은 달리의 후기 작품들, 특히 종교화를 평가절하한다. 그의 가톨릭 신앙은 신실하지 못하다느니 현대 예술의 추상성을 거절한 그의 후기 작품은 창조적인 불꽃을 상실했다는 식이다. 틸리히의 미술 해석으로부터 영양을 받기 시작한 나는 그의 혹평의 오랜 편견 속에서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볼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틸리히는 이 작품은 오늘날 미술에서의 종교적 부흥의 가장 나쁜 예형이라고 말한다. 달리가 그린 그리스도의 모습은 틸리히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감성적이지만 미국 야구 선수단의 한 선수와 같다. 회화의 기법도 가장 나쁜 종류인 미화하는 자연주의이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공포를 느낀다. 그 그림은 단지 쓰레기(junk)에 불과하다”(틸리히). 선입견이나 편견은 다른 관점을 진지하게 듣고 진심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한 참으로 오래가며 심지어 사물이나 사람에 대하여 파괴적인 치명적 오류를 범한다. 달리는 초현실주의가 최고 상한가를 누렸을 때의 최대의 작품 <기억의 지속>(1931)으로 기억된다. 이 작품을 보면 꿈같은 풍경 속에서 말랑말랑 해진 시계가 늘어져 휘어지고 풍경 안으로 파고들어간다. 이 작품은 상대성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암시한다. <성사> 이 작품은 다른 어느 그리스도에 대한 작품에서보다 화가가 후기에 추구환 <핵 신비주의>(nuclear mysticism)를 인상 깊게 발현(發顯)했다는 생각이다. 핵신비주의는 종교와 현대 물리학의 대화의 시도이다. 상대성 이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후 깊게 심취한 핵물리학 등, 인간의 무의식의 차원과 종교를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이 작품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신비와 세속화된 현대인의 종교적 표현을 잘 결합하고 있다.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과학과 수학에 대한 열정이 녹아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하나의 성경 이야기의 재현이 아니라 성사이다. 그래서 제목도 “최후의 만찬의 성사”(‘The Sacrament of the Last Supper’)이다. 성찬 성사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구원자의 몸과 피로 축성을 통해 변화한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정신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의 변화된 물질성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자신의 실팍한 몸 안에 고동치며 흐르는, <루터>가 말한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real presence)을 발견한다. <칼뱅>이 부연하고 <웨슬리>가 받아들인 성령의 임재하심 속에서 우리는 함께 주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맛보아 알게 된다. 우리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눈과 코와 혀와 목구멍과 위와 내장과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이르는 실핏줄 안에서 성육신의 신비를 경험한다. 주님의 사랑의 <건넴>과 주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과 귀의를 담은 <받음>이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실체의 변화(transsubstantiation)는 살과 피로 상징된 주님의 몸을 받고 주님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수반되는 삶과 존재의 변형(transformation)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교회 일치적> 성찬(ecumenical Eucharist)을 통해 나타나는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이다. 성찬은 보이지 않는 실재를 보이게 하는 표징이다. 달리는 긴 식탁의 중앙에 깨끗하게 면도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6명의 제자들을 배치했다. 톡 튀어나온 그리스도의 몸은 수평선으로만 이루어진 분위기의 중심축을 만든다. 12명의 제자들은 누가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의 차이다. 좌우에 대칭으로 앉은 제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각각 거울 이미지처럼 보인다. 고개를 숙인 그들은 얼굴은 볼 수 없다. 잠에 빠졌거나 깊은 기도에 잠긴 사람 같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육안으로 볼 수 없으나 우리의 기도와 예배 속에서 감지되며 인식되는 것이다. 투명체처럼 보이는 그리스도는 산으로 둘러싸인 바다로부터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그의 몸 뒤편으로 배들이 보인다. 그리스도 앞에는 와인 잔이 있고 식탁 전면에는 갈라진 빵 두 조각이 놓여 있다. 달리는 그리스도-하느님의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을 찾은 것이다. 유카리스트에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밝게 빛나는 빛의 투명성(claritas)은 중앙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가슴으로부터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이 빛은 다락방의 문을 열어 바닷가로 열려진 판유리를 투과한다. 이 빛은 아침의 여명이나 저녁의 황혼처럼 공간의 분위기를 영광의 빛으로 신비하게 색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중심인 허리로부터 시작된 빛의 투시성(translucídĭtas )은 안과 밖, 물질과 빛, 식탁과 고깃배, 포도주와 파도 사이에서 펼쳐진 공간을 명상의 공간으로 만든다. 식탁을 중심으로 12 사도들이 앉아있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영광의 찬연한 빛의 힘에 압도되어 바라보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변화산의 제자들 같다. 달리는 제자들의 얼굴 모습을 감춤으로써 실제로 성찬이 해해지고 있는 식탁과 그 위의 빵과 포도주에 주목하게 만드는 효과를 노리는것 같다. 그리스도는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고 오른 손으로는 천상으로 승천한 영화화된 자신의 거대한 몸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에서 빌립은 예수께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자신의 몸을 가리키는 예수의 왼손과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 손은 빌립에게 답하는 예수의 모습 같다. 하늘로 승천한 몸의 좌우로 벌린 양팔은 십자가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 위에는 그릴 수 없는 성부가 계시고, 빌립에게 보일 수 없는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본다. 아버지는 초월적인 분이기 때문에 볼 수도 그릴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왼쪽 머릿결을 따라 턱 옆 자신을 가리키는 손등 위에 비둘기가 앉아 있다. 비둘기는 도상학에서 성령을 상징한다. 달리는 그림 안에서 세미하게 삼위일체의 현존을 성공적으로 훌륭하게 그려냈다. 그리스도의 몸의 삼중적 현현, 즉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 성찬을 진행하는 실제의 몸으로, 그리고 승천한 천상의 몸으로의 나타남은 그의 몸의 투과성과 민첩한 현존을 의미한다. 그림의 틀인 거대한 12면체는 플라톤에 의하면 체화된 우주이며 우주의 공간을 포함한다. 성찬이 일어나는 공간은 신비한 하늘의 공간이다. 그것은 뉴턴 물리학이나 경직된 실증주의로만 설명할 수 없는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만찬이 현실의 시-공간을 넘어 통시적, 공시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현존하는 초현실의 하늘의 공간으로 변형시키는 힘은 하늘의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주 공간에 두 팔을 힘껏 벌려 성령 안에서 하늘과 땅을 감싸 안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의 은총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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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Dec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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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출 3:8)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시간론’이면서 동시에 ‘공간(장소)론’이다.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의 배경을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각각 다르게 제시한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가 배경이며,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해방과 관계된 출애굽이다. ⑴“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출애굽기 20:11). ⑵“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신명기 5:15). 교회는 안식일을 유대교에서 지키는 계명으로 생각하여 안식일의 의미를 주마간산 식으로 보았거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로 옮겨 생각하였다. 안식일 자체의 신학적 의미를 크게 알게 된 것은 몰트만의 창조론을 통해서이다. 그는 『창조 안에 계시 하느님』(1985년)에서 창조론은 안식일에 대한 이론이며 안식일에 창조가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유대인 철학자 로젠츠바이크(Rosenzweig)를 인용, 예수는 안식일을 무효화,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안식일의 기쁨, 자연과의 평화, 창조의 축제임을 전개한다. 안식일은 창조의 완성, 창조의 축복, 창조의 성화 그리고 구원의 축제이다. 안식일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메시아적 파송과 관련하여 메시아적 안식일이며, 삶의 메시아적 기쁨으로 이스라엘의 안식일을 그것의 특유한 전조인 그 기쁨으로 지양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일요일(주일)은 시작의 축제로서, 안식일이 하나님의 휴식에 참여하고, 생각과 감사의 날인 반면 주일은 부활절의 축제로서 새 창조의 힘에 참여하고, 시작과 희망의 날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시작하는 자이다. 완성시키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몰트만은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Ende gut, Alles gut)는 독일의 격언을 “시작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라고 바꾼다. 아브라함 J.헤셸도 『안식일』(김순현 목사 옮김)에서, 유대교는 시간의 성화를 목표로 삼는 시간의 종교이며,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화폭 위에 신비하고 장엄한 창조의 절정을 그리는 것과 같으며,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집’보다 ‘하나님의 날’을 더 중시했다고 말한다. 몰트만이나 헤셸 두 사람에게 안식일의 의미는 시간에 있지 공간(장소)에 있지 않다. 이들은 이방종교의 장소(공간) 강조를 이스라엘의 시간과 역사체험을 통해 그들과의 다름을 말하려고 한다. 이방종교의 성스러운 공간이 시간성을 거세하거나 윤회적 시간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시간이 공간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언약이 시간과 공간을 거룩하게 만든다. 또한 인간은 구체적으로 그때마다 어떤 장소(창조세계, 에덴동산)에서 시간경험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공간이 없는 시간은 대단히 추상화 될 우려가 있다고 본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는 시간과 더불어 공간이며, 2-3장의 창조는 구체적으로 에덴동산에서 전개된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의 의미는 인간의 유일한 삶의 터전인 지구(대지)인 하나님의 창조를 처음의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게 경작하며 지키고 향유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안식일』을 번역한 김순현 목사는 여수 갈릴리 교회 비밀의 정원을 일군 세월의 경험을 토대로 『정원사의 사계. 비밀의 정원에서 창조 영성을 일구며』(2019년 7월)를 냈다. 이 책은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작이기도 하다. 김순현 목사는 『정원에서 하나님을 만나다』(비겐 구로얀 지음, 2008)을 옮긴이이기도 했으며, 나는 이 책에 대한 리뷰를 개인적으로 보낸바 있다. 새 책도 지난 8월에 받아 리뷰를 하고 싶었던 차에, 안식일 계명의 탁월한 이행의 예를 이 책에서 구하고 싶은 것이다. 김순현 목사는 계명을 “에덴 프로젝트”로써 수행한다. 이 책은 ⑴겨울에서 시작하여 ⑵봄, ⑶여름, ⑷가을, ⑸다시 겨울, 이렇게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김순현 목사는 자신의 거룩한 부름(聖召)를 정원사의 길이이라고 고백한다. 정원을 그느르고, 정원 식구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는 일, 정원 식구들이 지어내는 신비에 안기는 일, 그것이 바로 정원사의 일(11)이이라고 말한다. 그는 즐겨 다음의 말들을 인용한다. “정원의 일은 우주의 가장 깊은 신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행위다.”(토마스 베리) “자연은 지극히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어서 창조주조차도 입 맞추고 포옹하기 위하여 연인으로 가장한 채 자연에 다가가신다.”(숀 맥도나휴). “그대에게 생명을 주는 숲이 그대 안에 있어요. 그것을 찾으세요.”(루미) 김순현 목사는 성경대신 정원의 꽃들을 가꾸면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시고, 개개의 피조물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에 관해 기록된 한 권의 책이고, 개개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원에 가는 것을 꽃들과 “또 연애하러 가는 거예요?”라고 말할 정도로 꽃에 대한 애정이 오래되었고 점증하고 깊다. 2.이 책은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사계를 통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돌보고 가꾸는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에서 본 복음을 풀이한다. 봄은 정원에서 님(꽃)을 맞이하는 계절이다. 정원은 삶과 죽음의 신비, 소멸과 생성의 신비를 가장 원초적으로 들어내는 곳이다. 정원은 그 속에 자리한 생명 하나하나를 온 마음을 다해 응시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내밀한 비밀을 털어놓는다. 따라서 정원사의 길은 생명의 신비를 찾아 나서고 발견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49). 정원을 가꾸는 일은 하나님의 대지에 성심을 다하는 행위이다. 김순현 목사는 꽃을 가꾸면서 꽃들로부터 오히려 처방을 받는다. 꽃은 웃음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슬픈 빛이라곤 없다. 하여 슬픈 꽃은 없다! 꽃에는 환한 웃음만 있다. 꽃은 웃음이다, 미소다. 웃음꽃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미소나 웃음을 빛이라는 말로 옮겨도 좋다. 모든 꽃, 모든 미소는 다 환한 까닭이다. 꽃 = 미소 = 빛!(77) 그래서 그는 창세기 1장 3절을 이렇게 읽는다. “하나님께서 ‘꽃이 생겨라!’하시니 꽃이 생겨났다. 그 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 ‘웃음이 생겨라!’하시니 웃음이 생겨났다. 그 웃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78) 꽃들은 하나같이 시샘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키재기를 하는 법이 없다. 나는 나만의 빛깔이 있어요 당신을 환하게 해드릴 빛깔이지요 다른 데를 기웃거리지도 남과 견주지도 않아요 당신은 원본을 좋아하시고 나는 대체할 수 없는 몸이니(90) 메뉴얼이란 게 아예 없는 자기만의 고유란 삶,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의 삶을 영위하다니, 꽃들의 내적인 힘(내공)은 정말 대단하다.(90) 정원사의 눈에는 모든 꽃이 다 예쁘다.(91) 정원사는 제 빛깔과 향기를 발현하고 표출하는 화초들에게서 그들의 창조적 자발성을 본다. 내면에 고인 창조 에너지, 내면에 샘솟는 생명 에너지인 것이다. 식물은 저마다 자신이 뿌리 내린 터(존재 이유)가 최적화되기만 하면 여지없이 창조적 자발성에 골몰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고유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로 자기만의 매혹적 분위기, 이른바 매혹의 아우라(aura)를 발산하며 주위를 끌어당긴다고 표현한다. 3. 5월 이후 여름이 오면서 정원사는 하나님의 빛깔에 완전히 젖어드는 사람이 된다. 녹색으로 물든 대자연은 하나님이 거니시는 신의 정원(숀 맥도나휴)이며, “창조주의 능력에서 대지의 성분들이 지닌 생명력이 나오고, 이 활력은 이 세계를 껴안아 따뜻하게 하고, 촉촉하게 하고, 단단하게 하고, 녹색으로 물들입니다.” “온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과 입맞춤으로 감싸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늘 푸르시고, 언제나 싱그러우시며, 줄곧 꽃을 피우고 계십니다.” 그래서 김목사는 성령의 상징 색깔이 불의 빛깔 적색에서 자연의 빛깔 녹색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116-117) 한국교회협의회는 2018년 갈릴리교회를 “녹색교회”로 선정했다. 정원사는 꽃 한 송이가 내뿜는 아름다움에 놀라고, 그 아름다움이 촉발하는 환한 울림을 내면 깊은 곳에 아로새기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원사의 길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탐하는) 길, 필로칼리아(Philokalia, 愛美, 探美, 耽美)의 길이다.(123) 김순현 목사는 신앙인의 에로스 회복을 과감하게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에로스를 아가페와 분리하여 소극적으로, 심지어 부정적으로 인식해온 것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저으기 놀랍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의 하나님은 에로틱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강렬한 입맞춤으로 피조물을 간질이시며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김순현 목사는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비롯하여 중세의 여성 신비주의자들, 힐데가르트 빙엔,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드, 그리고 줄리안 노르비치의 글들을 좋아한다. 빙엔은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에로틱한 관계를 즐겨 멀한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높이 떠 있는 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넘쳐흐르고 모두에게 애정을 품는 가없는 사랑, 그것이 왕이 하는 평화의 입맞춤이다”(힐데가르트 빙엔) 뜨거운 입맞춤으로 피조물을 달아오르게 하시고 피조물을 춤추게 하시는 하나님은 정녕 에로틱한 하나님이다. 내가 빛을 내면 너는 달아오르고, 내가 넘쳐흐르면 너는 촉촉하게 젖는다. 네가 사모하면 나의 거룩한 마음이 네 속에 들어갈 것이고, 네가 나를 그리워하여 눈물지으면 나는 두 팔로 너를 안아주리라. 네가 사랑하면 우리 둘은 하나가 될 것이고, 우리 둘이 하나가 되면 결코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에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드(136-137) 하나님은 놀고 기뻐하고 낳고 축제를 벌이고 열정을 느끼는 분이다. 신앙생활의 알짬은 이 에로틱한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에로스는 만물에 골고루 미치고 있다(마 5:45) 하나님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에로틱하시다. 김순현 목사는 에로스를 밀어내는 사회 한복판에서 에로스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에로스는 가까이 다가가서(nearness), 느끼고(feeling), 보살피고(care), 친교 맺는 것(intimacy)을 의미한다”(매튜 폭스) 그러므로 에로스의 상실은 영적 나병이다. 무감각이 지배하는 병이다(141). 에로스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삶에 치유와 구원, 기쁨과 웃음, 축제와 환희를 몰고온다. 그는 에로스 살기를 제언한다. 마더 테레사는 에로스를 산 수녀로서, “우리는 하루 종일 가난한 사람들과 나환자들 속에서 슬픈 모습을 하고 계신 예수와 접촉하고, 날이 저물면 성소에서 기도로 그분과 다시 접촉합니다.” 4.김순현 목사는 가을의 문턱에서 새롭고, 낯설며, 특별한 세상을 경험한다. “사물들과의 거룩한 접촉을 통해 그것들 속에 갇혀 있는 거룩한 실재”(마르틴 부버)를 알아보고, 마주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보아내고,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정현종)이자 은총의 순간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154). 그는 우렁차게 파고드는 풀벌레소리, 풀벌레의 이름, 베짱이붙이, 여치, 쌕새기, 귀뚜라미, 방울벌레, 먹종다리, 철써기, 서로 놓았다 잡아당겼다 하면서 예민하게 관찰한다. 마치 풀벌레소리의 팔중주곡 같다. 은총을 알아보는 감각은 놀람과 감사와 찬미를 생산한다. “마음의 감각은 이따금 하나님을 놓쳐버린 채, 하나님이 사라지셨다고 잘못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큰 위안이 되는 자리에 있을 때 했으면 하던 그 일을 쓰라린 고통의 자리에 있을 때도 하십시오, 마치 큰 위안을 받는 자리에 있다는 듯이 처신하십시오. 하나님을 놓쳐버린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으라. ... 여러분이 하나님을 놓쳐버렸다면, 하나님을 마지막으로 소유했을 때 하던 것과 똑 같이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김순현 목사는 정원사의 체험을 토대로 성지 순례를 앞두고 성지순례를 위한 세 가지 마음가짐을 말한다. 첫째, 어는 것이든 잘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다. “그대의 앞길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참된 겸손과 사심 없는 마음으로 온화하게 마주하십시오” 둘째, 매순간 마주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이다.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는 통로가 될 수 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그리고 셋째, 감사다.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스페인의 격언“ ”그대가 일생토록 바치는 기도가 ‘감사합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정원사는 식물을 통해 열려 있음을 배운다. 가령 박각시라는 나방이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면서 꽃 속의 꿀을 빨아먹는 것을 가만히 보면서, 실상은 꽃들도 애타게 기다렸다는 듯 활짝 열린 채 그들을 흔연히 맞아들인다고 말한다. 박각시들의 뜨거운 방문과 꽃들의 화끈한 자기 개방!, 그는 하나같이 열려 있지 않은 꽃이 없음을 본다. 그들이 열매를 맺는 것도, 그들이 열려 있어서다. 열려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꽃 속에 있다. 열려 있는 꽃들은 서로 스며든다. 학명과 분류가 달라도, 꽃들은 서로 가지를 뻗고, 서로 접촉하며, 서로 스며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이 2002년부터 대테러용이라는 명목으로 요르단 강 서안에 건설한 장벽, 장장 730km나 되는 장벽 앞에 삭막하고 비정하고 무자비한 인간의 두려움을 간파한다. 5.정원사에게도 겨울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교회력에서 강림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면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이듯이 겨울은 그에게 봄에 다시 올 꽃들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는 기다리면서 많은 것들을 분주하게 준비한다. 그 일부를 적으면, “사흘에 걸쳐 구근들을 식재할 구역들을 정하고, 그 구역들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흙을 20cm 두께로 퍼냈다. ... 퍼내어 마당에 더미로 쌓아올린 흙을 아내가 곱게 부수고, 잔돌까지 골라주었다. 곱게 부서진 흙을 상토 및 유박(油粕)과 골고루 섞었다.”(203) 그는 횔덜린처럼 겨울과 겨울의 대지를 성스러운 시간이며 공간으로 바라본다. “나는 저 엄숙하고 괴로워하는 大地에 숨김없이 내 마음을 바쳤다. 그리고 흔히 성스러운 밤이면, 대지가 진 숙명의 무거운 짐과 더불어, 두려움 없이, 죽는 날까지 대지를 성실히 사랑할 것과, 또 대지의 어떠한 수수께끼도 무시하지 않을 것을 대지를 향하여 맹세했다. 그리하여 나는 죽음의 끈으로 대지와 맺어졌다.”(프리드리히 횔덜린) 정원사는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꽃을 기다린다. 나의 사랑, 멋있어라. 나를 이렇게 황홀하게 하시는 그대!(아가 2:10) 그래서 사람이 일상을 사는 게 참 꽃 같아야함을 시인과 함께 노래한다.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 박제영 ​ 며느리도 봤응께 욕 좀 그만 해야 정히 거시기해불면 거시기 대신에 꽃을 써야 그 까짓 거 뭐 어렵다고, 그랴그랴 아침 묵다 말고 마누라랑 약속을 했잖여 이런 꽃 같은 ! 이런 꽃나! 꽃까! 꽃 꽃 꽃 반나절도 안 돼서 뭔 꽃들이 그리도 피는지 봐야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정원사의 맺음말은 광대한 하늘을 우러러 마음이 가없이 고양되는 장엄하고 숭고한 순간을 삶에 맞이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에덴 프로젝트(Eden Project)라고 말한다. 에덴 정원을 조성하신 하나님, 정원 일의 대가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에덴을 일구는 동료 정원사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227)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은 위대하고 관대하고 아름답고 선하며,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그분의 신성한 작품 속에는 그분의 善이 가득 차서 끊임없이 흐르고”(노리치 줄리안)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식일 계명 수행의 탁원한 본기기가 김순현 목사의 에덴 프로젝트에 잘 드러나 있다고 믿는다. *꽃 이미지는 모두 김순현 목사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온 것이다. **책에서 읽은 꽃 말 모음: 수선화, 튤립, 히아신스, 크로커스 알뿌리들, 수선화, 히야신스, 청매나무, 홍매나무, 동백, 튤립, 영란수선, 무스카리, 산수국, 능소화, 클레메티스 덩굴, 산수유, 복수초, 모란, 수선화, 히아신스, 노루귀, 미선나무, 곰쥐, 삼나물, 어수리, 명자나무, 팥꽃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동백나무, 남빛 무스카리, 새하얀 마가렛, 주황빛 금잔화, 팬지, 지면패랭이, 섬백리향, 서양말냉이, 이끼용담, 피나물, 철축꽃, 모란, 마가렛, 애기말발도리, 공조팝, 목향장미, 황매, 위실, 백합, 산수국, 낮달맞이꽃, 수레국화, 금계국, 다알리아, 금어초, 니코티아나, 채송화, 백일홍, 제라늄, 참제비고깔, 나리, 폴록스, 인디언국화(에키나세아), 루드베키아, 베고니아, 오스테오스페르뭄, 부들레아, 설악초, 두란타, 홍접초(바늘꽃), 단풍잎촉규화, 연화바위솔, 풍접초, 폴록스, 상사화, 금관화, 금목서, 꼬리박각시, 란타나, 히비스커스, 아게라텀, 루셀리아(폭죽초), 선파체스, 서파니아, 추명국, 담쟁이, 클레마티스, 국화, 대국, 화살나무, 애기송엽국, 임파첸스, 거베라, 천사의 나팔, 패션플라워(시계초), 아부틸론, 두란타, 에리스리나(홍두화), 목(木)가자니아, 알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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