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9

Philo Kalia | Facebook [2] 하나님

Philo Kalia | Facebook:

4 Jun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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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며, 욕망의 본질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2.기도와 욕망의 시각으로 젠더 다시 생각하기 욕망이 신적인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고, 기도의 과제가 인간의 욕망을 혁신적으로 조정하고 정련하는 것이라면, 그 욕망은 성과 젠더보다 더 근본적이며, 따라서 젠더에 관하여 문제가 있는 오늘날의 세속적 문제를 푸는 참된 열쇠를 삼위일체 교리와의 신학적 연관성 안에서 찾을 수 있다 ⑴젠더는 문화가 인간을 규범적으로 둘로(오직 둘로) 쪼개는 강력한 상징적 수단이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강화 의식절차를 통해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형태의 삶을 강요하기 때문에 중요하고 또한 문제적이다. 그 요점은 젠더의 이원성이다. 그러므로 코클리는 ‘젠더 이원성gender binary’에 대한 대중적 반대라는 ‘수행적’ 행동들 만이 실행적 저항의 한 형태로 문화적 지배력을 이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젠더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한 죄로부터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과의 최종적인 재결합을 추구하고 있는 인간 역할과 관련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 위에 있기 때문에 젠더의 문제는 신학적 분석의 중요한 차원이며 몇 가지 점에서 세속적 젠더 이론과 차이가 난다. 첫째, 세속적 젠더 이론은 젠더에 관하여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부지중에 자주 복제되는 문화적 추정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골몰하는 반면에, 기도와 금욕적 실천을 토대로 한 관상신학은 젠더를 개인의 영적 성숙과 사회적 변혁 모두에 관해 전개되는 통시적 이야기 안에 위치시킨다. 둘째, 젠더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의 사건들에 확고하게 근거하는 소망을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젠더는 단지 염색체 중 억압 유전자의 자리인 것이 아니라 체화된 구원의 잠재적 수단과 같은 것이다. 셋째, 젠더는 관상적 금욕주의에서 다르게 이해되는 바, 주디스 버틀러의 활동에서처럼 단지인간의 저항 전략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독특한 힘에 대한 복종의 행위이며, 삼위일체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이미 발생되었다고 믿는다. 이 발생이 세속적 젠더와 구별되게 하는 것은 삼위일체적 신적 욕망의 논리와 흐름에 의해, 기도 안에서의 성령의 일차적 개입에 의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형상 안에서 재-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⑵젠더, 삼위일체, 성육신 성령은 ‘가부장적’ 한 쌍을 이룬 ‘성부’와 ‘성자’에 대한 부가물, 초과물, 혹은 중재자일 수 없다. 오히려 성령은 영원부터 성부/성자 관계의 형성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세상의 인간은 타락한 젠더와 타락한 이위성(남성/여성)이라는 허위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인간이며 신이신 분을 만나며, 그분은 정확히 성령 안에서 이위성을 중단시키는 변화를 일으키셨다. 그분은 성육신을 통해 초월적 하나님과 피조된 세계의 존재론적 이위성의 경계를 넘으셨으며, 성령 안에서 피조된 세계에 신성을 새롭게 불어넣으신다. 그러므로 세속적 젠더의 ‘고정된 ’ 타락한 차이점들은 세밀하게 중단하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의해 변화되며, 성령은 젠더를 삼위일체적 정화와 변혁으로 이끌어가신다. 젠더는 신적인 변화에 대해 신비스럽고 유연한 개방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삶이 창조세계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것이며, 신적 욕망의 추진 안에서 매혹시키고 기쁘게 하고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틈을 구별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을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셋으로 만들며, 동시에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고 또한 결속시킨다. 【제2강】: 기도, 삼위일체론의 근원(Re-Thinking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as Prayer) 삼위일체론의 근원적 자리가 교부들의 논쟁이나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예배와 성례전임을 말하는 학자들은 많이 있었다. 코클리는 그 근원이 기도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를 로마서 8장의 성령의 기도(탄식)에서 찾는다. 코클리는 삼위일체론 정통교리의 발생이 교회의 억압적인 권력놀이일 뿐이며 따라서 정통 신조들의 발전을 단지 패권을 가진 교회의 ‘권력’ 또는 ‘억압’의 수단들로 설명해버리려는 주장들을 참고하지만 따르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다. 코클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삼위(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충분한 동등성을 주장한다는 수사학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종속관계에로 다시 격하시킬 수 있는 유혹의 형태로 반어적 비정통성이 남아 있는 잠재성을, 영적 힘과 젠더에 관한 은밀한 쟁점들이 이 유혹에 깊이 포섭되어 있다고 문제제기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에 대한 성령-주도적인 접근이 지닌 대안적 시각이 초기 기독교 세기들에서 중앙집권화된 교권적 반대의 집중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공격의 하나는 성령에게 전적으로 내맡긴 삶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분파적인’ 또는 ‘순수한’ 경향들을 초래할 수 있도록 하였고, 둘은 성령 안에서의 깊은 기도에 대한 특별한 헌신이 에로스적 힘을 강화하는 위험이 수반되었고, 여기서 인간의 영적 욕망과 성적 욕망이 복잡하게 얽히는 문제가 초래되었다. 이런 역사적 사정을 분석한 코클리는 “처음의 성령-주도적인 대안이 비록 여러 가지 방식들에서 더 위험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훨씬 더 영적으로 심오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1. 그래서 코클리는 기도에 근거한 삼위일체 모형은 성령과 함께 시작된 모형이라고 주장한다. 이 모형은 ‘단선적’ 계시적 모형과 대조를 이루는데, 단선적 모형은 성부/성자 관계성에 일차적인 초점을 두기에 성령은 이 관계성을 교회에 이차적으로 조달하는 자가 된다고 지적한다. 코클리는 자신의 모형을 기도에 근거한 ‘포함적’(incorporative), 혹은 ‘재귀적’(reflexive) 모형이라고 칭하면서, 이것은 성령이 단지 그리스도의 계시를 확장하는 분이거나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분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피조영역이 하나님의 삶 안으로까지 실제로 따라가게 하는 분으로 이해한다(롬 8:29). 이 모형에 따르면 삼위일체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와 함께 지니시는 은혜로운 방식들이다. 즉, 창조세계를 ‘성자’의 삶 안으로 이끄시고 그것을 본받게 한다(롬 8:15-16). 성령은 바로 하나님이기에 성부나 성자에로의 확장을 꾀하지 않고, 기도가 내면으로부터 인격적이고 신적으로 활성화된다는 점이다. 코클리의 기도에 대한 본질적 이해란, 기도는 기도자와 신적 單子 사이의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신적 재귀성의 운동(a movement of divine reflexivity), 즉 기도자 안에서 그리고 기도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행하시는 일종의 응답이라는 점이다(롬 8:26-27). 기도의 이러한 활동은 단지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아니라 “기도자가 이끌려 들어가고 포함되는 더 이상 줄어들 수 없는 양극적 신적 활동, 즉 신적 욕망의 부름과 응답의 활동”이라고 코클리는 해석한다. 기도에서 성자는 과거의 지상적 예수이거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적인 삶을 의미한다(롬 8:19-25). 기도에서 기도자는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발견하게 된다. ‘성부’는 신적 욕망의 ‘근원’이며 궁극적 대상이다. ‘성령’은 창조세계 안에서 그러한 욕망을 가능하게 하며 포함하는 자이다. 즉, 창조세계를 신적이 되도록 만드는 자이다. 그리고 ‘성자’는 신적으로 완전케 된 창조세계이다. 로마서 8장의 기도에서 성자는 예수님의 인간적 삶으로 한정되거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라는 교회론으로 제한되지 않고, 훨씬 더 확장되어 성육신의 충만한 우주적 함의들을 포함하고, 온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최종적 기독론적 목적에 대해 탄식하는 것을 포함한다(롬 8:18-21). 이것은 기도의 사회적이고 우주적 의미이기도 하다. 기도의 우주적 잉태사건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은 ‘산고’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바, 전통적 그리스도적 사건을 산고의 여성의 탄식으로 이해한다(롬 8:22-23).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젠더의 통상적 사회적 함의를 받아들이되 동시에 변혁시키는 것과 같으며, 또한 성령 안에서의 기도가 그 함의들을 변화하게 하고 우주적이 되도록 한다(창 3:28). 2 초기 기독교는 성령론에 근거하여 삼위일체적으로 기도하였다. 2세기는 교리사가 모리스 와일즈가 평가한대로 성령론의 ‘휴식기’가 아니다. 몬타누스주의가 분파적 한 예이지만 동, 서방의정통 기독교 흐름에서도 순교자 유스티노스의 합리성에 근거한 신학을 따르면서 성령을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 성령의 예언적 수위성이라는 더 오래된 유산에 충실한 것인가라는 고민이 있었다. 코클리는 요한복음이나 사도행전의 로고스 유형(종속 유형)이 아니라 로마서 8장의 성령유형을 따른 대표적 인물로 오리게네스의 『기도론』의 사상을 분석하여 네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①기도의 본질과 목적의 이해에서 성령의 우선순위와 수위권이 강조된다. ②로마서 8장이 중요하게 인용되며,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과 혼합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③이러한 기도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두드러질 정도로 성교와 출산 드에 비유된다. ④기도와 에로티시즘(eroticism)사이의 고유한 연관성들은 너무 가까워서 피해질 수 없고, 또한 너무 위험스러워서 무제한의 자유가 허용될 수 없다. 오리게네스는 <아가서>에 관한 주석과 설교에서 영혼이 그리스도의 에로스적 포용을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친밀하게 나아가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적 이해로 성경본문을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성적 유비는 오직 ‘신비적’인 상승의 최고의 단계에서만 적절하다. 성적 비유는 ‘내적인 영적인 의미들’에 적용되는 것이지, 외적‘ 신체적 의미에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클리는 오리게네스의 연구에서 ①성령과의 관계가 지닌 에로틱한 차원들에 대하여 더 깊은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②오리게네스는 성령의 종속을 주장하지 않았다. ③기도론이나 아가서 강해에서 젠더와 관련, 남자는 암묵적으로 ‘여성적’ 역할을 영적으로 취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코클리는 젠더에 대한 힘들고 복잡한 재협상(혹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역할들로부터의 해방)은 관상적 상승의 더 높은 비상을 알게 된 자들에게 요구되는 영적 변혁들에 내재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본다. 【제3강】: 고전적 삼위일체론의 기도, 욕망, 성의 관계와 오늘날 함의(Prayer, Desire and Gender in Classical Trinitarianism and Today) 다음 논의를 위해 앞서 말한 코클리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도, 욕망, 젠더는 서로 중요한 관계이며 성경과 기독교 전통 안에 고유하며 함께 속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욕망(desire)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활동이다. 이것을 통해 욕망과 젠더의 신학적 관계에 대해 로마서 8장을 기초로 한 기도에 근거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둘째, 성령의 권능이 억압되는 곳에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경향이 존재하고, 성적 욕망과 신적 욕망 사이의 복잡하고 종종 혼돈스러운 관계를 어떻게 판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과제가 남는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론을 표현하되 어떻게 하면 한편으로 세 위격들 모두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진실하고, 철저하게 동등한 방식으로, 다른 한편 인간적 수준에서 기도, 금욕적 덕, 영성과 남성 모두의 번영의 삶에 강렬하게 관련을 맺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과제가 남는다. 본 강의에서는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니케아 신조에 기초해서 발전한 동방교부(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서방교부(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비교한다. 1.코클리는 동방적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삼위일체론(몰트만Moltmann, 지지울라스Zizioulas, 볼프Volf, 건튼Gunton, 보프Boff)이요, 서방적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이라는 최근의 규정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전자가 후자에 비하여 정치적 그리고 교권적 이유들로 더 선호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거부한다. 그러므로 동방적 삼위일체 모형이 ‘셋에서 출발하여 하나로 나아가고’ 서방적 모형은 ‘하나에서 출발하여 셋으로 나아간다’는 교과서적 설명도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코클리는 최근의 이러한 대비는 계몽주의의 파괴적 개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설정된 정치적 또는 교회적 프로그램을 위한 이상적 원형으로서, 반-계몽주의적 의제들을 하나님의 삶에 직접 투사하여 사회적 유토피아주의라는 새로운 우상 숭배적 기획을 무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통렬히 비판한다. 2. 젠더와 관련하여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의 상징체계에서 인간의 창조는 비-신체적, 비-성적 천사 창조이며, 오직 그런 다음에 임박한 성적 분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여성은 에[덴동산과 종말에서 영예로운 무성(sexless)의 남성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남성 또한 종말에서 무성의 ‘여성’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젠더의 고정 관념들 안에서 잡을 수 있고 붙들 수 잇는 것이 없으며, 궁극적으로 그리고 본래적으로 우리는 신체적으로 남자와 여자로서 구분되는 성별있는 존재이기보다는 오히려 모두 ‘휴머노이드/엔젤로이드’(humaoid/angeloid)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바울의 서신들에 근거하여 젠더 이해가 모호하지만 갈 3:28절(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에 근거해 이성적 정신이 그리스도의 통합적 세례를 통하여 새로워질 때, ‘누가 여성을 배제하겠는가? 왜냐하면 여성은 우리와 함께 은혜의 공동상속자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의 마지막 권인 XV권에서 하나님 안에서의 통제적 인지적 질서의 건물을 신중하게 해체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의 넘쳐흐르며 불타오르게 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통합적‘ 흐름에 관한, 그리고 우리 마음에 ’부어주심‘에 관한 담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삼위일체 전체가 우리 안에 거주하신다’라고 말한다(XV, 18장). [결론] ⑴인간의 기본 욕망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신 포괄적인 삼위일체적 욕망에 우리가 어떻게 일치시키는가에 관한 성찰이다. ⑵젠더의 관계는 하나의 어떤 규정된 견해가 있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야 하며, 또한 분명히 우리 안에서 중단시키는 기도적 힘의 활동, 즉 성령의 활동이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의 여정에 함께 하신다. ⑶여성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적절하게 부를 수 있는가? 코클리는 ‘가부장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바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겸허로 드리는 ‘케노시스’ 기도가 지닌 자기비움의 행동을 통해서, 거짓된 가부장제적 악령들로부터, 심지어 자신의 영혼 안에 깊이 존재하는 악령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배양되며 그럼으로써 가부장제의 한계 밖에서, ‘부성(父性)됨’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용기가 주어진다, 라고 주장한다. 사라 코클리(Sarah Coakley) 박사는 그리스도인 삶의 알파요 오메가인 ‘기도’라는 근본적이고 전통적인 주제를 성경을 근거로 제시하고 고전을 통해 면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좋은 신학자이며, 기도의 주제를 신학의 근본 주제인 ‘삼위일체론’ 뿐 아니라 목하 뜨거운 인간학적이고 심리학적 사안인 ‘욕망’과 ‘성’, 그리고 여성학적이고 사회학적이며 문화인류학적 문제인 ‘젠더’의 맥락에서 시의성 있게 논의하고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관점에서 생각을 펼칠 수 있는 훌륭한 사상가이다. 이 분의 책들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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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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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 독서 리뷰: “근대세계와 기독교 신학” 신학의 주제는 ‘하느님(하나님, God)’이다. 이는 단순하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신학도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존귀함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뇌다. 하느님은 우리의 물음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은 그의 창조 안에 계신다. 빛 속에만 계신가? 어둠 속에도 계신다. 화해와 평화 속에만 계신가? 갈등과 전쟁 속에도 계신다. 하느님이 거하길 좋아하는 장소는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다. 역사와 세계이다. 근대 이전에 신학은 하느님의 장소를 인간의 내면적 영혼에 제한했다. 근대신학은 세계와 역사로 확장했다. 고-중세 신학의 주제가 ‘하느님과 영혼(인간)’이라면, 근대신학 특히 과정신학은 ‘하느님과 세계’(God and World)로 주제화한다. 1.헤겔은 유럽의 근대의 시작을 1492년으로 잡는다. 1492년은 유럽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침략이 시작된 해이다. 그들은 그들의 확장과 침략을 ‘발견’이라고 미화했다. “발견은 숨겨져 있는 것을 단순히 찾아낸다는 뜻이기보다는, 오히려 낯선 것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발견된 것에 발견자의 이름이 붙게 된다.”(21) 유럽은 세계를 소유하기 위하여 침략하고 정복했다. 우리도 오랫동안 유럽인의 이러한 역사인식을 넋 놓고 반복 학습했다. 그래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즈텍과 잉카 제국의 고유한 삶과 문화는 결코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채 다른 것, 낯선 것으로 밀려났으며 그 자신에게 제물로 바쳐졌다(E.Dussel).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후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은 근대의 학문론에 힘입어 그들의 시각에 따라 발견된 ‘새로운 세계’를 정당화했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토마스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등으로 유럽의 확장은 서양의 유토피아로 여겨졌다. 몰트만은 이 지점에서 서양의 근대 세계가 메시아적 희망과 결합되어 탄생, 확장되었음을 지적한다. 근대의 메시아니즘의 맥락에서 칸트는 “무엇이 우리를 근원과 결합하는가?”라고 과거회귀적으로 묻지 않고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미래지향적으로 물은 것이라고 분석한다. 2.그러나 ‘근대 세계’는 세계의 1/3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근대 “제1세계”이지만, 2/3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는 근대 “제3세계”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새로운 시대는 아벨과 가인, 곧 ‘상층부 근대’와 ‘하층부 근대’를 낳았다. ‘상층부 근대’는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빛 속에서, 자신의 과거 역사와 타자의 문화와 역사를 어두움으로 돌렸다. “유럽 민족의 승승장구하는 진보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막대한 손실을 남긴 후퇴를 가져왔으며, 이성 중심의 문화와 함께 육체, 느낌, 감각에 대한 근대인들의 정복이 시작되었다.”(28) ‘하층부 근대’(제3세계)의 고난과 어둠의 역사 없이 ‘상층부 근대’(제1세계)의 성공과 번영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①마르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의 성곽교회에서 그의 종교개혁적인 논제를 내걸고 종교개혁을 시작할 당시, 헤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에 있는 테노츠티틀란(아즈텍 제국의 수도)을 향해 항해하였다. ②루터가 보름스에 있는 독일 제국 의회에서 파문과 국외추방을 당할 무렵, 코르테스는 1521년 아즈텍 도시를 정복하였다. ③레싱과 칸트가 그드의 계몽주의 저서들을 출간할 때, 해마다 수십만의 흑인 노예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인신매매되었다. ④근대 세계의 산업 건설은 언제나 자연에 대한 정복과 파괴의 희생제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세계의 진보는 언제나 다른 민족들의 희생의 대가(代價), 자연의 희생의 대가, 미래 세대의 희생의 대가, 이성에 의한 육체와 감각의 억압의 대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복자는 피정복자의 고난을 보지 못한다. 가해자의 기억은 짧지만 희생자의 기억은 매우 길고 진하다. ‘상층부 근대’는 ‘하층부 근대’를 먹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상층부 근대’의 개인적 자유는 ‘하층부 근대’에 가한 억압과 착취의 대가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누가 이 희생자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가? 만일 종교개혁과 계몽주의가 추구하는 자유가 타자에 대한 억압을 해방하고 착취를 멈추는 자유가 아니라면 그것은 더는 자유일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근대의 개인적 휴머니즘은 그것이 충분히 인간적(humanistic)이지 않기 때문에 고발되어야 한다. 그것이 충분히 인간적이지 않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이름으로 신을 고발하고 죽였다.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직결된 것이다. 3.몰트만은 승리주의와 천년왕국주의 없는 메시아적 희망, 곧 ‘생명의 영’을 통해 근대의 기획이 바뀌고 근대 세계가 재탄생할 것을 요구한다. 몰트만은 신학의 주제인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묻는다. 십자가에 달린 하느님은 인간의 고난 속에 계신다. “우리의 지배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고난 속에서 오시는 하느님은 그의 살아 있게 만드는 영을 통해 현존하신다. 우리의 강력한 힘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는 힘이 있다.”(37) 그러나 불의하고 억울하게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그들 옆에서 그들과 함께 고난당하신다는 사실만으로 위로와 힘이 되는가? 고난당하시는 하느님 사상은 결국 우리를 고난의 현장으로 불러내며 그들과 연대할 것을 촉구한다. 고난을 무의미하게 견디고 인내하라는 교훈이 아니라 연대를 통한 불의한 고난의 극복이 관건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평등’을 말한다. “오늘날 그 누구도 모든 인간의 ‘평등’, 특히 경제적 평등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의 근본적 평등 없이 모든 개인에게 보편적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 없이 자유는 보편적이지 않다. 경제적 평등 없이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평등의 사회적 개념은 정의를 의미한다. 정의롭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관계 없이 인간과 민족들 사이에 평화는 실현되지 않는다. 평등의 윤리적 개념은 연대성, 곧 사랑이다.” “미래의 사회적 사명은 ‘평등’이다. 이는 ‘우리의 형상에 따른 평등이기보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인정하고, 우리의 희생자들에 대한 원상회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등이다.”(40-41) 4.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①하느님은 인간의 영혼 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그리고 종교적인 사회 안에, 무엇보다 황폐화되어가는 자연(창조) 안에 생명의 영으로 살아 계신다. “누구든지 생명을 침해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침해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은 전체 생명, 모든 생명, 공동의 생명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구티에레즈, <생명의 하느님>) ②서양의 지배에의 의지(Wille zur Herrschaft)로 무장된 인간의 정복 중심의 근대 신학과 역사는 희생당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의 고난의 역사를 통해 수정되어야 한다.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야베스의 기도 중 ”영토(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는 토지와 건물(아파트) 투기의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기도임에 틀림없다. ③그동안 배제되어 왔던 차원인 인간의 육체와 감각도 편견과 속박에서 해방되어 다시금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인간은 ’오성과 의지의 주체‘ 그 이상이다. 만약 우리가 오성과 의지를 다시금 육체와 감각적 인지들과 통합할 수 있다면, 인간의 문화도 다시금 이 땅의 유기체의 자연에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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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 Ju Kim, Young Joon Kim and 11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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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Nov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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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선조들의 하나님 -> 이스라엘의 하나님 -> 인간역사 전체의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 여기서 하나님은 역사의 전능한 소유자로서가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주는 자로서 역사를 요구한다. 어려운 말이지만 하나님은 이름 없이 현존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이스라엘과 예수와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사건으로, 창조와 구원과 해방, 즉 사랑의 사건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성경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 전적으로 뜨거운 정열의 힘(능력, 권능)을 발휘하는 것은, 곧 이 사건을 회상하고 기억해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거룩한 이름 주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건이요, 행동이요, 삶이다”(한스-요아킴 크라우스). 사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 이해가 주안점이다.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시 103:8-9). 성경은 존재로 시작하지 않고, 존재에 대한 놀람으로 시작한다. 존재론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묻고 신학은 창조로서의 존재를 묻는다.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로서의 존재는 없다. 계속되는 ‘존재로-됨’이 있을 뿐이다. 존재는 행동이면서 사건이다. 그분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하나님의 행위를 보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할 때, 그분이 생물학적 혹은 심리학적으로 살아계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결코 어떤 사물이나 유기체로, 어떤 힘이나 원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삶은 창조하고 명령하고 표현하고 응답하는 의식적인 행위의 통일이다. 그분은 사물성의 술어가 아니라 행위의 술어로, 순간의 술어로 인식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행위의 이름이다"(John Caputo) 신학의 중심 과제는 신학이 아니라 윤리학이다. 서양 기독교의 초점이었던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에 관한 문제는 이제 이차적인 것이 되었으며, 존재론과 형이상학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의 특징적인 활동은 하나님의 존재나 비존재에 대한 고뇌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살려고 노력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하나님에 적합한 신학의 전개는 미학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질문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의 유한함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장엄함과 신비함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35:3) 야훼의 아름다움은 뜨거운 정열의 힘(권능)으로 뜨거운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생명의 힘인 에로스를 자극하고 강화시켜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형태의 삶도, 심지어 그것의 무한한 반복마저 긍정하도록 한다. 하나님의 뜨거운 정열에 직관적으로 응답한 이들이 예언자들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동정(공감, sympathy)이야말로 예언자의 영감에 대한 응답이요, 계시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한다. 예언적 공감은 초월적인 감수성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자의 감정적인 삶이 거룩한 분에게 동화되는 것이다. 존재의 동화가 아니라 기능의 동화이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감정적인 경험이 하나님 이해를 위한 초점이 된다. 헤셸은 하나님의 뜨거운 정념과 맺는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동정(공감)이란 종교적 범주로 사용한 최초의 사상가이다. 베토벤의 합창에 나오는 ‘기쁨의 송가’를 니체는, 음악이 우리를 사로잡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거기에 빠진다. 베토벤 음악은 그 시대의 실존을 모두 껴안고 고통을 이겨내는 생명력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음악이 없는 삶은 실수다. 예술은 그렇게 우리가 살아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생명력을 증대시킴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보다 현실을 긍정하게 한다. 이처럼 야훼의 아름다운 이름은 차가운 빛의 풍경이 아니라 뜨거운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며 우리를 끌어당기는 에로스다.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움은 단테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그의 삶을 ‘새로운 삶’(Vita Nuova)을 부르는,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도록 내몬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순간, 가장 진실하게 말하건데, 가장 비밀스러운 마음의 방에 머물던 영혼이 너무나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해 내 몸의 가장 작은 맥박마저 그와 함께 떨었네. 그리고 떨림 속에 이렇게 말했네. ‘여기 나보다 강한 신이 있구나’. ... 말하건데, 그 순간부터 사랑이 나의 영혼을 단단히 지배했다” 니체에게 아름다움이란, 대상과 ‘거리’를 둔 차가운 광경의 즐거움이 아니라, 대상을 껴안는 뜨거운 정념의 즐거움이다. 아름다움은 현실의 고통마저 기꺼이 껴안는다. 성경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같다. 하나님의 이름은 전적으로 수행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름이 있되 이름이 없다, ‘이름 없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일리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명명할 수 없는 이름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며, 구원활동을 하는 이름이다(시 23:3, 79:9, 106:7-8). 심지어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신앙 깊은 시인은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시 20:7)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창 4:26)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출 20:7). 하나님은 관념이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구원활동을 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10:13, 행 2:21). ①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에서 생명으로 부르신다. 원역사적 부름이다. ②하나님은 멸망에서 구원, 구속에서 자유와 해방으로 부르신다. 역사적 부름이다. ③하나님은 영원한 삶(풍성한 삶)으로 부르신다. 종말론적 부름이다. “아침 동이 틀 때에 새벽이슬이 맺히듯이, (주님의 부름에) 젊은이들이 임금님께로 모여들 것이다” (시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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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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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마르크스주의(무신론) 대화(3) 무신론의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세속와와 무신론의 정신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거룩한 분위기가 세속은 물론 성전 안에서도 사라진 시대에 도대체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가?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대응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무시하는 것이다. 제일 속편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정신적 상황과 담을 쌓게 된다. 둘째, 무신론을 교회와 신학 안에서 추방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비도덕적, 비시민적이라고 정죄하는 태도이다. 교회의 담론 권력이 세상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셋째는 무신론을 공격하고 기독교 신론을 변호함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변증하려는 태도이다. 가장 많은 입장이다. 넷째, 합리적 반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치열한 합리주의적 지성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으로 무신론을 수용하여 강화시키는 태도이다. 바르트의 계시신학, 1960년대 미국의 반문화운동과 함께 했던 신죽음의 신학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통해 신학을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아래에 언급하는 네 신학자들도 무신론 및 니체의 허무주의와 격렬히 씨름하면서 신론을 전개한다. 모두 본인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시기, 1970년대 어간의 일이다. ①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리스도 신학의 근거와 비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으로> 방향을 튼다. 1972년에 나온 이 책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를 기독교 신학, 즉 하느님을 말하고 느낄 수 있는 근거뿐 아니라 비판으로 제시한다. 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6장이 가장 핵심이다. 몰트만은 “하느님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이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무신론에 선을 긋는다. 이어 그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전통적 유신론은 물론 무신론도 비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양자택일을 극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차안에도 계시며,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며, 지배나 권위나 율법이 아니라 고통을 당하며 자유케 하는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아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② 에베하르트 융엘, 『세계의 신비이신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 1977). 무신론과 유신론 논쟁 사이에 서 계신 십자가에 달린 자 예수 그리스도. 융엘은 관념론 특히 헤겔과 피히테, 포이어바흐, 니체의 ‘신 죽음’을 깊게 논의하고 십자가의 달린 자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인간성을 말한다. ③ 한스 큉,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근대의 신물음에 대한 대답』(Existiert Gott?, 1978). 큉은 근-현대 철학자들의 무신론 연구와 신학의 기여도와 비판에 860쪽 책의 600쪽 넘게 할애한다. 근-현대 무신론의 본질과 신학이 생각하지 못한 것, 그리고 비판이 매우 잘 정돈되어 있다. ④니체의 허무주의와 깊이 논쟁한 철학자, 철학적 신학자는 바이셰델의 <철학자들의 하느님, 1+2>(Gott der Philosophen I,II, 1972)이다. 허무주의의 긴 다리를 가진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의 그늘 속에서 과연 신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것인가? 철학적 신학은 가능할 것인가? 바이셰델은 철학하기의 추진력을 물음, “철저한 물음”(radikales Fragen)에서 찾고 철학자들의 하느님을 “철저한 물음의 출처”(Vonwoher der radikalen Fraglichkeit)라고 명명한다. 나는 하이데게, 바이셰델, 벨테의 탈형이상학적 하느님(1991)으로 학위논문을 제출하고 97년에 번역하고 마지막 장을 보완하여 출간했다. 탈형이상학은 미국의 카푸토와 프랑스의 마리옹이 깊게 이어가는 것을 기쁘게 본다. 모두 하이데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이다. 1980년대 이후 나오는 신학에서는 포이어바흐-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로 이어지는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한 논쟁은 거의 사라지고, 신학에서는 신론으로 삼위일체론이 급부상하고, 철학계에서는 아감벤, 바디우의 바울연구와 지젝의 ‘유물론적 신학’이 새롭게 나타났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해 예수운동을 바울이 희석시켰다는 비판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최근의 바울연구에서는 이 입장을 뒤집어 놓는다. 관점, 시점이 가지는 무서운 힘이다. 파도처럼 새로운 사상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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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un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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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았다고 노래한바 있다.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신현정은 하나님과 놀 수 있는 사람, 아니 하나님에게 놀자고 권면하고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학자들이 하나님에게 지운 무거운 짐을 벗겨주는 이는 시인 밖에 없다. “화내며 잔뜩 부어” 있는 하나님을 끌어내려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염소와 어울리게 하는 ‘동물의 사육제’의 세계와 통한다.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 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 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신현정, <하나님 놀다 가세요> 전문 시인은 하나님에게 “내려 오세요”, “섞이세요” “놀다 가세요”, “서로 부딪치세요”, 하고 말한다. 권위에 찬 종교적 외경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을 포용해 섞이고 더불어 노니는 행복한 하나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를 그린다. 신성모독이라기보다는 세상의 작은 생명과도 같은 자리에 앉아 노닐며 즐기는 모습이지 ‘홀로 거룩하신’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신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천국의 모습이란 연일 찬양의 목소리만이 가득 찬 단성적인 세계가 아니라 세상 만물 모두가 크고 작음을 떠나 두루 평화를 누리는 다채로운 다성적인 세계가 아닐까. 신이 창조의 차원으로 내려와 온갖 피조물과 어울리며 노니는 신의 모습이다. 노닐 때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자재한 존재가 된다. 신과 사물과 생물과 인간이 모두 한데 어울려 놀며 소통하는 세계, 그것은 이사야가 꿈꿨던 세계(사 11:6-8)이며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한”(사 11:9) 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이다(계 21장). 하늘의 놀이(天遊)를 하는 세계, 만물이 모두 생명의 창문을 열고 상통하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세계가 새 창조의 세계이다. 웨슬리의 설교. “보좌에 앉으신 그분은 모든 만물의 모습을 바꾸시고 그의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푼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의 무시무시한 상태는 사라질 것입니다. 새 땅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다른 것을 죽이고 해치며 고통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전갈은 독을 뿜는 침을, 독사는 독을 분비하는 이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잔인함을 사라질 것이며 야만적이고 사나운 기질은 잊힐 것입니다. ... ‘늑대는 양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 ‘그리고 사자는 양과 함께 놀게 될 것입니다’”(설교 113, “새로운 창조”, 17) 놀이란 경쟁적인 게임들로 이해되는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육체적인 항해의 기쁨, 해변 위에서 느끼는 존재의 기쁨, 등산의 기쁨, 먹고 마시는 기쁨, 개인적인 만남의 기쁨, 그 자체가 그에게 제시하는 것을 보고 삶에 통합하는 기쁨이다. [이미지](1)틴토레토, <동물의 창조>, 1551-52; (2)지그프리트 안칭어, <하나님이 사자를 창조하다>, 2000;(3)『동물신학의 탐구』(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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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J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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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난 것을 믿을 것이다”(출 4:5) [성찰]“아브라함의 하나님” 이 그림은 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로 알려진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의 것이다. 기베르티는 Florence 성당의 세례당 문 가운데 하나인 동쪽문, 일명 천국의 문(미켈란젤로가 명명)에 10개의 작품을 새겼다. 이 작품은 그 중 네 번째 작품으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신약의 이야기를 예견하고 있다. 그림 상단 오른쪽 배경에 새겨진 이삭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왼쪽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천사는 삼위일체의 계시를, 사라가 준비한 음식은 성찬을 예견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 말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회심 후에 고백한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성과 머리의 생각 속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난 인격적인 하나님을 총칭한다. 틸리히는 <성서적 종교와 궁극적 실재에 관한 물음>이란 작은 책자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며, 모든 종교적 물음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틸리히는 당대의 신학적 동료이며 다른 길을 걸어갔던 바르트의 철학과 신학,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대립에 대해 양자의 통합을 모색한 사상가이다. 나는 존재 물음에서의 희열, 기쁨, 놀람을 정말 공감하고 인정하면서도[특히 바이셰델(Wilhelm Weischedel)의 <철학자들의 하느님>(Gott der Philosophen)을 통해] 파스칼이 만났던 아브라함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탁사 최병헌과 이용도의 하느님 그리고 성경책도 떠듬떠듬 읽으셨던 우리 어머니 故 김 중현 권사가 97년 평생 기도와 찬양 속에서 만났던 하나님에 대해 더 마음과 생각이 쏠린다. 나의 어머니로부터 평생 이 가슴에, 이 삶 구석구석에 스며든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입니다. 「당신」 / 복효근 가시기 며칠 전 풀어 헤쳐진 환자복 사이로 어머니 빈 젖 보았습니다 그 빈 젖 가만히 만져보았습니다 지그시 내려다보시던 그 눈빛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처연하고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으니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도 내가 다시 매달려 젖 물고 싶은 당신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 파스칼은 이어 “확신, 확신, 기쁨, 평화”라고 수정같이 맑은 용어로 마음에 쏟아진 감동을 표현하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한다. 기베르티가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징적 예표를 찾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게서 반짝반짝 빛나는 신앙의 다이아몬드를 말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사(창세기 12~50장)에는 삶의 고뇌와 시련, 인간들 사이의 갈등은 있을지언정 창세기 앞부분(3~11장)에서처럼 에덴추방, 가인의 형제 살해, 대홍수, 바벨탑 등 그렇게 광범위하게 큰 위기에 해당하는 사건은 없다. 그리고 사사기 이후에서처럼 민족 간의 큰 전쟁도 없다. 독자는 족장들에게서 거룩한 공간, 거룩한 시간, 거룩한 삶의 예배, 예배의 삶의 원형을 느낀다. 우리는 누차 반복해서 예배는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 왔다. 우리에게 예배는 삶이고 예배시간은 그 삶의 집약적 표현일 뿐이라고.... 창세기의 조상들의 예배는 그들의 삶이 의미 충만해지고 넘치는 체험의 순간이며, 따라서 그들의 삶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추동하고 찾게 하는 힘이고, 실의와 절망에 빠졌을 때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신비한 힘임을 알게 된다. 이들에게 건물로 갖추어진 성소와 성전은 아직 없고 돌무더기, 나무, 우물, 그리고 산 등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는 장소가 된다. 참 소박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는 은총의 선물을 제대로 감촉한다면 직접적인 것처럼 느껴져 제사장 같은 중재자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 그림은 피렌체 산 조반니 광장에 위치한 세례당 동쪽 문(제 3문),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는 별명을 붙인, 직접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탄할 청동 문에 새겨진 10개의 조각 중, 네 번째 그림이다. 이 문은 1425년에서 1452까지 무려 27년 동안 제작되었으니 그 수고와 노력을 어찌 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미지]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The Story of Abraham, 142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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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Ma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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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21) [성찰]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1) -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언제부터(20여 년 전)인가 나는 기독교 신앙이 형상화하는 아름다운 진리의 생명적 형태를 찾는 구도자이며, 그것을 말하고 전하는 전도자임을 자처하고 싶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이라 달기도 했다[➔이미지(1)]. 나는 <예술과 기독교 신앙>, <예술신학> 등을 신설하기도 했고, 2013년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되어 활동을 함께 하기도 했다.[➔이미지(2)] 이것은 무슨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 일은 마치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임한 자발적으로 강요받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 여기서 바울이 말한 복음이란 나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는”(엡 4:13) 가멸찬 기독교 신앙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아름다움이다.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얼굴의 하나님은 아름답고 감미로운 분(dulcedo Dei)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道)와 복음의 실천(德과 仁)은 복음의 아름다움(藝)에 놀라고, 그것에 끌려 노닐고 즐거워함으로부터 나오며(脫) 다시 거기로 향(向)한다. 요컨대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생각(思)하며 행(實行)하기에 앞서 느낄(感) 수 있어야 한다. 1) 지성을 찾는 신앙 기독교 신학의 대상은 오직 삼위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고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보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사유하고 말하는 그 언어적 문법이 신학이 되었다. 신학은 중세의 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남긴 유명한 명제에서처럼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다. 이 명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 뜻은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것이다. 안셀무스 이후, 신학과 교회는 오늘날까지 이 명제를 금과옥조로 받들면서 성서와 교회를 통해 전승된 기독교 신앙을 개념적이고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며 해석하는 데 방점을 두었다. 그 결과 신앙을 삶을 통해 함께 느끼고(共感) 서로 실천함(連帶)이 없어도 바르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만 있다면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다른 복음’, ‘다른 성령’, ‘다른 가르침’을 경계하면서(고후 11:4), 이를 이어 신앙의 바른 진리를 교회와 신학의 일차적 과제로 설정했던 고대 교회의 역사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뿐 아니라 교회론과 구원론을 중심으로 정통(신앙의 진리)은 세우되 이단(신앙의 거짓)은 정죄하고 배제하는 데 전심전력한 역사다. 이러한 역사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분열의 시기와 이를 잇는 정통주의에서 지속되었다. 특히 개신교 신학에서는 수도원을 신학하기의 파트너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의 생산지가 유일하게 대학이 되면서 이성의 한계 안에서 신앙을 논의하게 되었고, 역사비평을 신학방법의 근간으로 삼는 19세기의 성서학과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의 주지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신앙의 논리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태도를 좋아할 것이다. 이들은 다른 복음으로부터 명료한 개념과 일관성 있는 논리로써 “복음의 진리”(갈 2:5)를 바로 이해하고 변호하여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태도(눅 10:38-42)와 로마서의 “믿음은 들음에서 생긴다”(롬 10:17)는 주장을 강조한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를 잇는 교회는 ‘말씀듣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선(善)한 열매로 연결되지 못하는 진리는 고원(高遠)하여 삶에 번지고 삼투되지 못하며 실천하기 어렵게 된다. 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논리적 진리에 더하여 신앙에서 선을 찾고 행하는 전통 또한 오래되었다. 바울은 믿음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ides Caritate formata; 갈 5:6)으로 이해하였고, 루터는 은총으로 말미암는 선인(善人)이 선행(善行)에 앞섬을 전제했지만, 그 역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결같은 사랑의 삶임을 강조했다. 유럽의 정치신학과 제3세계의 해방신학은 “바른 교리”(orthodoxy)에 더하여 “바른 행동”(orthopraxy)을 주장한다. 신앙은 신앙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좋은 일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후 8:21). 특히 복음의 자유와 해방의 진리는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심리-사회적으로 억압되고, 문화적으로 주변화 된 상황 속에서 드러나야 함을 역설한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입과 귀를 그리고 눈과 모든 감각을 닫아버린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의 실천을 당연히 강조해야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그러나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은 실제로 도덕주의로 의무화되거나 계명 준수 수준으로 단순화 되었고, 그 결과 실질적 삶의 표현이 되는 소망과 기쁨의 호흡이 질식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므로 진리는 선(善)한 열매를 맺고, 선은 다시 아름다움(美)으로 활기와 자발성을 얻어 형태화(form)되고 기호화(sign) 되어야 한다. 삶보다 앞서 찾아오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영혼에 진동을 수반함으로써 진리추구와 선한 행위를 촉발하고 견지할 수 있다. 3)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최근 국내외 기독교 안팎에서 예술과 신앙, 미학적 경험, 기독교 미학에 관한 책들이 저술되거나 번역되고 있으며 ‘예술신학’과 ‘예술목회’라는 말도 활발하게 회자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것들을 통해 다시 표현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 관한 대화를 기독교의 진리의 영역 안에서만 추구하지 않고, 인간이 느끼고 활동하고 짓고 창조하도록 움직이는 열정 안에 현존하고 동행하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 한다. 개신교회와 신학은 신앙의 참(眞)되고 선(善)한 것을 설교하고 신학화하는 일에 큰 힘을 쏟았으나 신앙의 아름다움(美)과 신비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아름다움은 편안함이나 달콤함, 보기에 예쁨과 같은 유로 보아서는 안 된다. 고전전인 미의 개념에서도 아름다움은 고통을 내포하는 삶이 더해져야 최고의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에는 늘 고통이 배어 있다. 아름다움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경험은 진리와 선을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없는 세계에서는 혹은 최소한 “그것을 더 이상 발견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도덕적 선도 또한 왜 그러해야 하는지의 자명성과 매력을 잃게"[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43]되기 때문이다. 먼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 및 수반되는 감정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사물의 고유한 질서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명제적 진리를 추구하는 교회의 교리적 진술에 치우쳐 지나치게 논리적이 되어 반성 없는 교리의 동어반복에 머물거나, 도덕이 됨으로써 도덕적 계명으로 눌러앉게 되어 생동적인 신앙의 신비에 이르는 신앙의 감각을 소홀이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 Faith seeking Beauty), 삶을 아름답게 형성하고 조형하는 신앙, 내적 아름다움(內美)을 찾는 신앙이어야 함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지성을 찾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이해’(Undersatnding of God)하기 위해 신앙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경험’(Experience of God)과 느낌이 주된 목적이다. 헤셸은 『예언자』에서 ‘정념의 하나님’(God of Compassion)을 역설한다. 정념은 ‘선’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돌봄을 의미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예언자들이 만났던 하나님은 누멘(numen)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념,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의 보살핌이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는 사실 미적 사건이다. 그것은 인지의 대상이라기보다 상징적 체험의 세계이다. 성경은 인간의 구체적인 예술행위를 언급한다. 시작(詩作)과 찬미뿐 아니라 수금을 타고 퉁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인 유발과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인 두발가인도 언급한다(창 4:21-22). 또 출애굽기에는 주님께서 회막 기술자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기술을 넘치도록 주시고, 온갖 조각하는 일과 도안하는 일, 그리고 여러 가지 고안하는 창작력을 주셨다(출 31:1-11, 35: 30-35). 예술적 아름다움은 성전을 묘사하는 에스겔의 미의식(겔 40-43)과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계시록(21:10-23)에도 훌륭하게 나타난다. 미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예술과 종교의 불가피한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초감성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을 감성적으로 보게 하며, 이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힘을 가졌다”[하르트만, 『미학』, 25].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생활은 예술을 늘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종교는 예술이 그 충동과 열정을 가지고 제 사상을 실현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예술과 삶, 아름다움과 신앙이 하나로 묶이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찾아왔다. 전환기의 시대에 교회와 신학은 진리와 선이 스스로를 완성하고자하는 아름다운 예술의 길을 걷고자 한다. 이 길은 말씀을 들고 이해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체험하는 신앙, 자득(自得)적 신앙의 길이다. 20세기의 두 거장,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영광’을 하나님의 완전성의 최종 개념으로 제시하였고,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는 신학적 미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았다.[➔이미지(3)]. ‘영광’(Kabod)은 빛으로서 빛의 근원이며 동시에 빛의 발산으로서의 광휘로서 아름다움은 영광이 취하는 독특한 형식이요 설명으로서 아름다움에 대한 성경적 이름이다. 신앙의 진리(교리)를 행하는 사람(윤리)은 저절로 빛(미학)으로 나온다(요 3:21). [이미지](1)심광섭,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 다산글방 2003(표지); (2)예목원창립대회 사진(2013) (3)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르, 『신학적 미학』(3부작 전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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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Ma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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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요구를 온전히 이해하고 만족시켜주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기독교 신학의 주요 관심사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신학이 하나님을 배우고 사는 것이라면, 기독교 신학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사는 것이 옳을 수밖에 없다. 최근 한 선배가 안부를 물어왔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문태준의 <사랑>으로 감히 이렇게 답했다. 호박꽃 속을 한결같이 맴도는 호박벌처럼 젖을 빨다 유두를 문 채 선잠 든 아가처럼 나오지 아니하고 그 통통한 살내 속에 있고 싶은 -문태준, 「사랑」 전문 이 시를 읽고 난 후 입 안에 가득 향기가 고여 그 향기의 여운이 끊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찬연히 빛나는 사랑 자체의 사건이다. 사랑에는 적막한 상태가 있을 수 없다. 사랑의 사건이 그칠 때 사랑도 멈춘다. 호박벌처럼 하나님 사랑의 살내 곁에서 한결같이 맴돌다 그 속에 폭 빠져 잠기고 흡인되는 느낌의 체험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익애(溺愛)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바다로 몸과 마음의 배를 저어가고 싶은 것이다. 거룩한 영성화의 바다 속으로 잠입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감각을 온전히 회복하고 싶은 것이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전을 그린 리피(Fra Filippo Lippi)의 그림에서처럼 삼위 하나님이 쏜 사랑의 세 화살촉에 심장을 맞고 싶은 것이다[➔이미지 참조] 하나님의 존재가 다름 아닌 사랑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본성 또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심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하나님 사랑의 에너지 속에서 “나는 모든 것을 안”고, “모든 게 살아 있고 그래서 나도 살아 있을 수 있”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이 물로 가면, 물결이 일고, 손길이 흙으로 가면, 씨앗들이 부풀어 오르”고 싶은 것이다(파블로 네루다). 벽면에 그려지고 스며들어 벽면과 일체가 되는 모자이크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내 몸에 모자이크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하시디즘의 셰히나(Schechina, 하나님의 영광이 내 안에 거주함)에 대한 동경이며 셰히나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이모든 열망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의 그리움”(약 4:5)으로부터 나온다. 아이들이 생명에 귀한 가치가 있는 거라고 배운다고 해서 생명에 자연스럽게 눈을 뜨지 못한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의 배움에 따라 강아지를 관찰하고 실험하면서 지식 습득의 가치를 높이 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아지는 그 아이에게 관찰의 대상일 뿐이지 생명이 있고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귀한 존재라는 감정인식을 얻지 못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신학과 성경의 지식을 통해서만 익힌다면 하나님 사랑의 열정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신학의 도움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관성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다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신앙의 체험을 강하게 요구하며, 이것은 하나님 사랑에 푹 빠지는 난숙(爛熟)한 사랑의 체험이다. 이 체험은 조건이나 자질이나 유보조항 없이 전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는 대상에 복종하며 내맡기는 것이다. 이 체험은 행위에 앞서며 뒤따르는 행위의 원리이며 행위가 아니라 역동적인 존재의 형국이다. 하나님 사랑은 신 중심적인 자기초월이다. 초월적인 분이 나의 사랑의 대상이라면 그분은 초월자로서 내 마음(심장) 안에 계시며 내 안으로부터 나에게 실제적이 된다. 그래서 초월적 하나님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처음처럼 사랑할 수 있다.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었다. 내가 너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너희를 다시 천막에서 살게 하리라.”(호 12:10, 공동).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고 일하는 것이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스치면서 지나간 멋진 생각이나 추억 혹은 감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가운데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해가 닳도록, 달이 닳도록 영원무궁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식을 초월한다(엡 3:19). 이 고백과 기도는 그지없는 우리의 내적인 영광송이 되어야 한다. 본디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과의 사랑에 푹 빠지면 신앙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 사랑의 체험은 인간 주체를 사랑의 주체로 바꿔 전적인 타자적 사랑에 사로잡히게 하며, 자기초월의 가능성이 실현되면서 그 욕망은 기쁨이 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기쁘게 한다. 이 경험을 통하여 종교학자 하일러(Friedrich Heiler)가 말하는 7가지 새로운 실재의 영역을 경험할 것이다. ①초월적 실재의 긍정, ②인간의 마음 안에 내재한 초월적 실재, ③초월적 실재의 최고의 아름다움과 참과 의와 선함, ④초월적 실재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 ⑤회개와 자기 비움과 기도의 삶, ⑥이웃 사랑과 더 나아가 원수 사랑의 길, ⑦하나님의 사랑. [이미지]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 Vision of St Augustine, c.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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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Ma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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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잡을 수 없는 비틀거림은 하나님 외에 다른 목적지가 없으며 그분 안에서 사라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부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을 소리쳐 알린다.” 미켈란젤로의 하나님은 강하고, 아름답고, 근육질의 용사와 같은 붉은 옷을 두른 전능자 하나님의 모습이다. 몸이 되신 말씀. 창조적 주관성의 생생한 육감성이 르네상스 지성의 세련된 불꽃에 타고 있음이 맹렬하게 드러난다. 현대신학에서 창조는 전능자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사역이 아니라 창조된 세계와의 사귐이며 참여이고, 더 나아가 피조물이 자신과 공존하도록 허용하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고 ‘자기 비움’(케노시스)의 결정으로서, 궁극적으로 창조 안에 하나님의 ‘내주’에 목적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존 폴킹혼 엮음, 『케노시스 창조이론』). 하나님은 어둠과 빛, 밤과 낮, 하늘과 땅, 뭍과 물, 식물과 동물, 평일과 안식일을 분리하고 분화하는 방법으로 우주를 창조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다. 창조의 본문은주님만이 창조주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 사는 삶, 잘 놀이하는 삶을 위한 본문이다. 창세기 1장은 피조물에게 특히 인간에게 잘 놀이하는 삶을 위한 시간, 공간이라는 선물을 주신다. 시간을 이해하고 높이는 것(초, 분, 시, 일, 주, 월, 년)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는 데 가장 기본이 된다. 시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모든 삶의 행위를 해 내는 매개다. 시간의 모독은 가장 큰 죄다. 모독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서두름과 꾸물거림이다. 서두름이 소유, 통제, 강박을 가져온다면 꾸물거림(게으름)은 선물에 대한 부주의를 초래한다. 창세기는 서두르거나 꾸물거리지 않고 시간을 충만히 채운다, 마지막 때는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가 아니라, 그것이 현재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가 경배와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의 충만이라는 선물이다(유진 피터슨). 창조의 삶의 태도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미래를 기다리지 않으며, 현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이것이 성경적 실재관(the biblical concept of reality)이다. 성경은 존재와 생명의 본질적 선한 아름다움을 선포하며 그 안에는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보편적 도덕 질서를 함유한다. 미켈란젤로에게 첫째 날은 전능하신 하나님 혼자만의 날이다. 아직, 천사나 다른 신성한 존재들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 세 개의 패널 가운데 천사가 보이지 않는 것은 첫째뿐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두려우면서도 경이로운 외경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절대적 존재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거리를 두면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켈란젤로는 여느 화가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를 뛰어난 상상력과 필치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빛이 창조된 태초의 첫날 아침, 매일 아침은 이 아침의 변주곡이다. 그리고 이 아침은 다음 詩題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등불이 빛나는 아침이다. 춘설차 새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려운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머언 인생의 항로 위에 펄럭이는 의지의 깃발을 꽂고 우리네 사랑의 등불 하나 불 밝혀 빛나는 아침, 이제 돛을 올려라 두 몸이 한 몸 되어 힘차게 항로를 달리리라. 때로는 비바람 풍랑 속에 때로는 깊은 밤 어둠 속에 고난의 뱃길에도 사랑의 등불만은 더욱 빛나리니 主여, 어둠을 헤치시고 主여, 비바람을 막으시고 우리네 사랑의 등불을 지키소서. 영원에서 영원으로 빛나는 불빛이 사그러들지 않게 하소서. 꺼지지 않게 하소서. -허형만, 「사랑의 등불이 빛나는 아침」 전문 [이미지]미켈란젤로, <빛과 어둠의 분리>,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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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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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선포의 핵심이다. 하나님 나라는 병든 자의 건강과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이 충만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의 윤리적 이상 세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의 충만함 속에서 가시화되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이고 감성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질병에 걸린 자들은 건강을 되찾고 귀신에 지핀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를 모든 감각으로 경험한다. 하나님 나라의 육체적, 감각적 차원은 특별히 중요하며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명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동안 꿈꿔온 영혼의 불멸성 안으로 도피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욕망은 현세의 삶은 아무리 애써도 결함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라는 논리(교리)를 만들어 현세의 삶의 변혁을 위해 충실하게 책임을 지기보다는 방관하거나 안이하게 내세의 삶을 위해 ‘영혼불멸표’ 로또를 사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세상 안으로 생명을 가져오셨다. 이 생명은 이 세상 안에서 마르지 않고 축축해지며 충만해져야 한다. “생명의 샘물”(계 7:17; 21:6), “생명수의 강”(계 22:1) 등의 은유는 그 안에서 움트고 싹트며 자라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생명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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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Jun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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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인간의 기장 깊은 갈망은 하나님 안에서만 충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담은 그 유연하고 아름다운 몸을 대지에 수동적으로 기댄 채 다가오는 하나님의 손끝을 향하여 몸을 세워 팔을 내밀고 있다. 양쪽 손끝이 닿기 직전의 극적인 긴장감으로 가득한 두 손가락 사이의 작은 틈이 무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 사이로 바람-불꽃같은 하나님의 숨이 인간에게 넘어간다. 두 손가락의 형상이 발하는 자력과 같은 매력이 모든 천장화를 끌어 모으는 시각적 초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 하나님에 앞에 직면한 인간(Coram Deo)이다. 아담은 한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또 한 눈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아 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브를 보며 야릇한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팔 아래로 한 여자(이브)가 벌써 저 고혹적인 눈으로 아담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에게 생명의 힘을 전해 받으며 짓는 표정이다. 아직 신성한 생명력이 부족해서 께느른하고 무기력한 아담! 그러나 여기 아담은 모든 인간의 원형이며 우주의 축소판이다. 아담의 들어 올린 머리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에서 인간은 “창조의 첫 해방자”(헤르더)임을 읽는다. “하나님의 손은 사람을 움켜쥐지 않고 해방한다. 그 손의 창조력은 창조주의 친절한 사랑이 되어 지금도 피조물에 미치고 있다”(본회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 온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 존재로 지어졌음을 말해준다. 왜 그런가? “~를 위한 자유로움”이 없으면 “~로부터의 자유로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섬김이 없으면, 다스림도 있을 수 없다. 만물가운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 건넴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다. 교부 이레니우스가 말 한대로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이다”(Gloria Dei est homo)임을 실감나게 한다. 이에 종교개혁 시대 아만두스 폴라누스(Amandus Polanus, 1561-1610)는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이다”(Gloria homini est Deus), 하고 덧붙였다. 성경은 인간을 하님의 영을 품수(稟受)받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표현한 것만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흙을 손가락으로 빚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만들어 낸 생령이라고 말한다(창 2: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만이 아니라 ‘땅의 질료’(Materia Mundi)로 지어졌다. 인간은 자연적인 것(흙)과 초자연적인 것(하나님의 숨)이 결합된 유일한 존재이다. ‘숨’은 하나님 사랑의 향기다(페르시아 시인 루미Rumi).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영을 입은 몸으로 산다는 뜻이다. 몸을 회피하는 것은 사람다움을 회피하는 것이자. 영을 회피하는 것이다. 영이 몸의 실존 형태이듯이, 몸의 영은 실존 형태이다”(본회퍼). 그림에서 하나님의 손가락과 인간의 손가락은 서로 닮았으며, 하나님의 눈과 인간의 눈은 서로 상응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담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용택의 시 <그 사람>에서처럼 작은 바람결에도 흔들리고 얇은 산그늘에도 마음이 붙잡히는 민감한 서정의 사람, 달빛으로 시를 쓰는 사람, 이슬에 옷깃을 적시며 들길을 걷는 사람, 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늘 꽃피는 강길, 산길, 들길을 가진 그런 사람일 것이다. 작은 바람결에도 멀리 흔들리는 아주 작은 풀잎같이 얇은 산그늘에 붙잡혀도 가지 못하는 풀꽃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네 부모님과 동네 사람들이 지어 준 작은 강마을 작은 흙집에서 살며 그 집 그 방에 달빛이 새어 들면 달빛으로 시를 쓰고 해와 달이 별과 사람들이 찾아와 밥 먹고 놀고 잠자고 가는 집 아침에 새들이 불러 잠 깨우면 아침 이슬을 털며 들길을 가고 이슬이 옷깃을 적시면 무거워 쉬고 눈 맞으면 어깨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사람 아, 가진 것이 별로 없어서 이 세상을 다 갖고 이 세상에 꽃 다 져도 늘 피는 강길 산길 들길을 가진 사람 긴 고독과 오랜 적막과 고요를 가진 산이 되어 어린 산들을 데리고 걷는 사람이 있다네 작은 바람결에도 멀리 흔들리는 아주 작은 들꽃같이 산그늘 끌어다 덮고 꽃같이 행복하게 그는 산다네 그 사람 그런다네 -김용택, 「그 사람」 전문 [이미지]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1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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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Ap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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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다윗이 다시 앉았다, 하나님 앞에 그는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앉아 기도할 때에 그의 몸이 하나님이 현존하는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 다윗의 기도, 이것은 다윗이 행한 것 중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행동이다. 골리앗을 죽인 것보다도,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보다도 더 빛나는 위대한 행동이다. 다윗은 나랏일과 성전 짓기에 대한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그 안에 오로지 주 하나님으로만 채운다. 다윗은 왕권(다윗의 집)을 자신이 장악해야 할 권력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이었으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또한 그 백성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자였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그의 순명과 찬미와 참회는 백성에게 기도의 모범이 된다. 하느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로서 다윗이 바치는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충실한 믿음이며, 유일한 임금이시고 주님이신 분께 드리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신뢰였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다윗은, 시편에 나타나듯이,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기도의 첫 예언자이다. 참메시아이시고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의 기도는 다윗이 드렸던 기도의 의미를 드러내고 완성시켜 줄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579] ⑴❮주 하나님❯ "주 하나님, 내가 누구이며 또 내 집안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나를 이러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주셨습니까? 주 하나님,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것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시고, 주님의 종의 집안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 이것이 어찌 주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일상적인 방법이겠습니까? 주 하나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을 잘 아시니, 이 다윗이 주님께 무슨 말씀을 더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세우신 뜻과 목적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크나큰 일을 하시고, 또 그것을 이 종에게까지 알려 주셨습니다. 주 하나님,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우리의 귀로 다 들어 보았습니다만, 주님과 같은 분이 또 계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고, 주님 밖에 또 다른 하나님이 있다는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삼하 7:18~22) ⑵❮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 세상에서 어떤 민족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겠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찾아가셔서, 이스라엘을 구하여 내시고,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서, 주님의 명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여 내시려고 큰 일을 하셨고, 주님의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른 민족들과 그 신들에게서 그들을 친히 구원하시려고 이렇게 큰 일을 하시었고, 주님의 땅에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튼튼히 세우셔서, 영원히 주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또 주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과 이 종의 집안에 약속하여 주신 말씀이 영원히 변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이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하고 외치며, 주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높이게 하시고, 주님의 종 다윗의 집안도 주님 앞에서 튼튼히 서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께서 몸소 이 계시를 이 종에게 주시고 '내가 너의 집안을 세우겠다!' 하고 말씀하여 주셨으므로, 주님의 종이 감히 주님께 이러한 간구를 드릴 용기를 얻었습니다.(삼하 7:23~27) ⑶❮주님께서는 참으로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리고 이제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님의 종에게 이와 같이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의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셔서, 나의 자손이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대를 잇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 직접 그렇게 약속하여 주셨으니, 주님의 종의 집안이 영원토록,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게 해주십시오.(삼하 7:28~29) [이미지](1)Rembrandt, David in prayer, 1652; (2)Zanobi Strozzi, Initial B with David in Prayerr, 1450s; (3)Lucas van Leyden, King David in Prayer, 1520; (4)Pieter de Grebber, King David in Prayer, 16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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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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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나 한 것인가요? ⑵나의 하나님 당신을 내가 사랑할 때, 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피조물들 속에서 나는 나의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나를 기다립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 보기”와 동시에 “모든 것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 보기”, 이 모토는 이냐시오(예수회 창시자) 영성의 출발이고 목표다. 그는 하나님을 영적인 삶의 부분, 즉 기도나 성경 읽기나 자선이나 봉사 등 종교적인 주제만이 아니라 친구, 가족, 일, 성, 고통, 기쁨, 자연, 예술, 스포츠 등에서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는 그분은 하나님(행 17:28)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 ἐπὶ πάντων καὶ διὰ πάντων καὶ ἐν πᾶσιν”(엡 4:6)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하여 선(아름다움)을 이루기”(롬 8:28)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의 서기(瑞氣)와 광채 안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모든 것의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의 광휘를 경험한다. 그래서 몰트만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자신의 영혼의 깊은 성(궁방) 안으로 깊이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전통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⑶“오랫동안 나는 당신을 내 안에서 찾았고, 내 영혼의 달팽이 집 속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접근할 수 없는 장갑차를 가지고 나를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바깥에 계셨으며, 내 마음의 좁은 데로부터 나를 삶에 대한 사랑의 넓은 영역 속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 밖으로 나왔으며, 나의 영혼을 나의 <감각들> 안에서 발견하였고, 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내 <안>, 내 영혼의 달팽이 집 속으로 기어들어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달팽이집은 달팽이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다. 달팽이는 그 집 안에 들어가 외부와 차단할 수 있고 홀로 안전하게 살 수 있다. 몰트만은 달팽이집을 외부세계와의 교제를 차단하고 막는 철갑으로 된 장갑차로 비유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하나님을 내 영혼 안에서만이 아니라 내 영혼 밖에서, 다채롭고 생동하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찾고 발견한다. 하나님은 나를 “내 마음의 좁은 데로부터 나를 삶에 대한 사랑의 넓은 영역 속으로 이끌어내셨다”고 말한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니다”(시 4:1). 하나님은 나를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넓고 넓은 세상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 사랑은 인간의 모든 종류의 사랑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을 새롭게 방향 짓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에 대한 절대긍정이다. 나의 영혼은 다채로운 세상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나의 감각을 떠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나의 영혼을 나의 감각들 안에서 발견한다. 영혼과 감각은 양자택일의 사물이 아니라 서로 붙어 한 쌍이 된다. 나와 타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찾게”된다. 몰트만은 <감각신학>의 길을 열어놓는다. ⑷“하나님 경험은 삶의 경험들을 더 깊게 하였고, 그것을 위축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나는 더욱 더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 내가 보다 더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여기에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더욱 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의 무한한 원천을, 삶의 영원을 느낍니다.”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으로 서술된 몰트만의 고백을 통해 영적 감각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오밀조밀하고 촘촘히 이어주고, 서로 교감하고 사귀게 하며, 하나님과 온 피조물이 서로서로 거(居)하게 하는 매개임을 확인한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별의별 피조물 속에서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혹애(惑愛)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허접쓰레기가 된 미물에까지 미치는 하느님의 사랑, 생명에 대한 절대긍정.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내면적 인간 영혼의 비좁고 견고한 달팽이 집 속으로만 들어갈 것이 아니다. 고독한 그 영혼은 사실 찢기고 뭉개진 한 살점이 된 인생이다. 이제 그 영혼 촉수에 감지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시고 들이켜, 인간 영혼 바깥으로 나와 찬란하게 펼쳐지고 끊임없이 생성하는 삼라만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할 차례이다. 그래서 온 감각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접촉점을 찾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너는 사랑하는 나, 하나님을 관념 속에서 찾지 못한 채 방황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삼라만상의 역사 속에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너를 새롭게 얻는 데서 나 또한 새롭게 될 것이다. -Le Salon de K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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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목원TV] 예술신학강좌 제42강, 사랑의 예술(5) 몰트만의 사랑론: 하느님 사랑과 생명 사랑 / 심광섭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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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Ma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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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사 6:3) [성찰]“삼위일체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개역, 시 8:1)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아름다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 27:4) “자비로우신 모습”을 개역을 따라 “아름다우신 모습”으로 옮겼다. 지혜서는 하나님을 세상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서술한다. 지혜서는 이방인들이 태양과 달과 별을 신으로 예배하는 것을 비난하고 참된 하나님, 곧 모든 아름다움의 창조자는 그들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만일 이런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신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것들의 주님이 얼마나 더 훌륭하신 가를 알아야 했을 터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아름다움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이런 것들의 능력과 힘에 놀랐다면 마땅히 이런 것들을 만드신 분의 힘이 얼마나 더 큰가를 깨달아야 했을 터이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그것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서 13:3-5). 잠언은 지혜의 말씀이 아름답다고 말한다(잠 1:9; 4:9). 구약의 종말론적 본문들은 미래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사 52:1; 62:3; 슥 9:17), 메시아의 아름다움을 말한다(사 33:17). 마지막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아름다운 왕관,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신다(사 28:5). 이사야는 마지막 날에 백성들의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35:2)을 보며 기뻐할 것이라 말한다. 한국의 전통 가사에도 임금을 미인(美人)이라 칭하여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지었는데, 최고의 존재를 아름다움을 통해 교감하고 접하려고 한 시도들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은 바울의 사상에서도 중심적이다.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에게 속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었다(롬 1:21.23). 우리가 죄에 속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었다(롬 3:23; 살후 1:9).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우리는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후 3:18, 4:6).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영화롭게 되고 아름답게 되며(고후 3:18; 빌 3:21) 하나님의 빛나는 사랑의 광휘를 충분히 수용하여 영화롭게 변형된다.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말하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비추인 빛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의 전을 통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이 변화의 경험은 삶의 의미에 대한 가장 진실된 통찰이다. 서양 기독교 미술사에서 화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애썼다. 나는 이 주제로 그린 그림을 ‘삼위일체도’(三位一體圖)라 부르도록 하겠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한 그림을 “은총의 옥좌”(thronus gratiae)라 부르는데, 이 그림은 중세에 많이 그려졌다. 이 용어는 루터가 히브리서 9장 5절을 “은총의 옥좌”로 번역한데서 유래한다. 은총의 옥좌에서 특징적인 것은 성부가 십자가를 들고 있고 성부와 성자 사이에 비둘기 모습의 성령을 그려 놓았다는 점이다. 삼위일체론의 역설과 신비는 하나님의 존재가 그의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그의 신적인 살아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견디고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의 살아 있는 일치를 하나님의 존재로 드러낸 역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으로 발전된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준다. 인간과 함께한 하나님의 역사의 실제가 삼위일체에서 진실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존재는 삼위일체론에서 관념이 아니라 역사로서 설명된다. 많은 삼위일체도가 있지만 마사초(Masaccio)와 뒤러(Dürer)의 삼위일체도가 인상적이고 대중적이며 아름답게 다가온다. 여기서는 뒤러의 그림만 다루도록 하겠다. 그림에서 오른쪽 위에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도구들을 들고 있으며 생생하고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를 발산한다. 그림은 중앙의 맑고 순수한 하늘바다 혹은 호수를 중심으로 위는 ‘천상의 세계’(하늘의 도시, civitas Dei)를 아래는 ‘지상의 세계’(땅의 도시, civitas terrena)를 의미하는 것 같다.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눈부시게 나타나신다. (시 50:2)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림의 정상에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대개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밑에 그려져 있는데 여기서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위에서 날아오고 있다. 성령의 밝은 빛이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를 환히 비춘다. 왕관을 쓰고 황제의 옷을 입으신 존엄하신 아버지는 좌정하시어 창조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달린 아들의 양팔을 떠받치고 계시다. 성령, 성부 그리고 성자가 위에서 아래로 일직선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하늘에서 땅에 이르는, 땅과 하늘을 잇는 단 하나의 큰 움직임이다. 하나님의 오른 편에 성모 마리아를 위한 명예로운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고 모든 성인들, 세례 요한, 열두 사도, 순교자, 교부, 그리고 모세는 두 계명판을 들고 있고 다윗은 하프를 연주하고 있고 왕족의 상징은 담비털을 단 가운을 걸친 솔로몬 등이 보인다. 성인들은 두 개의 반원을 이루면서 하늘의 성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바티칸의 라파엘로 방에 있는 <논쟁>(1508)의 구성과 비스름하다. 성녀들은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는데, 이는 순교의 상징이면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찬미하기 위해 가져온 종려나무를 시각적으로 연상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에서 그린 하나님의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원한 지복과 무궁한 평화가 삼위일체도에 형상화 되어 있다. 그의 마음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하나님의 참된 선함의 아름다움을 갈망한다. “내 아름다움이 되신 하나님, ... 나는 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갈망하여 밤낮으로 한숨 쉬고 있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X.34.53] 아래 지상의 큰 무리의 인간이 천상을 향하여 들어 올려 지며, 영롱하게 빛나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새 노래로 찬양한다. 삼위 하나님은 참된 선함의 아름다움 속에서 영원무궁히 즐거워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만물을 보고 매우 좋다(아름답다)고 말씀한다. 만물은 하나님이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것을 좋다고 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의 봄’은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의 봄은 만물의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 안에서 선선하게 빛나며 산들거리는 기쁨이 모든 피조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며 완성한다. 삼위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은 세상을 삼위일체화(Trinification)한다. 전체적으로 뒤러의 그림은 매우 환상적이다. 인물상들의 양감과 중량감이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부유(浮遊)함을 느끼게 하며, 강력한 원근법 효과로 이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찾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순례기다. 그는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을 애타게 찾고 난후 기쁨의 마음을 이렇게 애절하게 노래한다. "그렇게도 오래 되셨지만 동시에 그렇게도 새로운 "아름다움"(Pulchritudo antiqua et nova)이 되시는 당신을 나는 너무 늦게야 사랑하였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계셨건만 나는 나 밖에 나와서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흉하게 되어버린 나 자신은 당신이 아름답게 만드신 피조물 속으로 거꾸로 떨어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계셨건만 나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나를 당신에게서 멀리 떠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피조물들의 아름다움도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당신은 부르시고 소리 질러 귀머거리 된 내 귀를 열어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은 당신의 빛을 나에게 번쩍 비추사 내 눈의 어두움을 쫓아 버렸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향기를 내 주위에 풍기셨을 때 나는 그 향기를 맡고서 당신을 더욱 갈망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맛보고는 이제 당신에 굶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당신이 나를 한번 만져 주시매 나는 당신의 평화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X,27,38] [이미지]알브레히트 뒤러,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함>, 1511. 나무위에 유채, 135 x 123,4 cm, 빈 예술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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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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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놀이로 만나는 하나님 나라] by #최지영 박사 왜 교회목회의 현장에서 연극놀이를 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어린 시절 마리아와 요셉, 동방박사가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연극을 기억하십니까? 교인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차이는 있겠으나, 주일학교 다니면서 연극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교회 속에서의 연극은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그러면서도 ‘연극’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에게는 화려한 의상과 무대장치, 대본을 완벽하게 암기해서 연기하는 배우 등의 모습들이 먼저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극’의 범주에는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공연예술의 형태’(theatre)와 함께,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둠으로써 참여자들의 체험과 과정 그 자체가 중요시되는 ‘drama’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놀이는 이와 같은 개념을 바탕으로 ‘공연되는 연극’보다는 체험을 통한 ‘과정중심의 연극’에 더 중점을 둡니다. 관객을 대상으로 한 무대 위에서의 공연에 치중하기보다는 참여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즉흥적인 활동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 전문 예술가교사이며, 전문 연극놀이 강사(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체험을 이끌어내기 위함에 있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theatre)과 차별성을 갖는 것입니다. 연극놀이를 통한 예술목회를 위하여 이처럼 짧게나마 교회학교와 목회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소개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주먹구구식의 관습적인 방법을 그대로 적용한다고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계획과 연구로 준비한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가 지속하고 실천될 수 있는 현장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씀’만을 위주로 진행되는 교육에서 ‘체험’과 ‘말씀’이 함께 하는 목회현장으로의 탈바꿈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교회학교와 성인을 위한 교육이 책상머리에서만 진행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생각이 바뀌고, 좀 더 구체적이고 미래적인 교육을 하겠다는 교회와 목회자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둘째, 교육환경의 변화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교육관을 새로 짓고 있습니다. 연극놀이뿐만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신앙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열린공간을 통한 체험 활동의 도전과 실행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셋째, 장기적으로 예술목회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환경과 투자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는 꼭 연극놀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론적인 신앙교육, 원칙론적인 강의와 함께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체험 활동이 꾸준히 병행돼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아름다운 예술목회의 현장이 풍성해지기를 기대하며, 그러한 현장에 함께 만들어 나가길 또한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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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Nov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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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다אֲנִ֥י יְהוָֽה 출애굽기 6장에만 ‘나는 주다’는 말씀이 4회 나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אֲנִ֥י יְהוָֽה”. (출 6:2) ⑴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강력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주다.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너희를 강제로 부리지 못하게 거기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건지고, 나의 팔을 펴서 큰 심판을 내리면서, 너희를 구하여 내겠다.”(6:6) ⑵주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을 드디어 이스라엘에게 선사하는 분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너희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나는 주다.'”(출 6:8) ⑶주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불선(不善)한 세력인 바로에게 분명히 말씀하는 분이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주다’. 너는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이집트의 임금 바로에게 전하여라” 하셨다. (출 6:29) ⑷주 하나님은 이집트의 모든 신을 벌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날 밤에 내가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두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신을 벌하겠다. 나는 주다.”(출 12:12) ⑸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다.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 곧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출 15:26) ⑹마지막으로 주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출 33:19) 출애굽기에서는 야훼 하나님의 섭리의 주권이 막힘없이, 거침없이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다스리는 역사를 감히 적대할 惡의 세력은 없어 보인다. 야훼 하나님은 강한 하나님, 악의 세력을 강한 손과 편 팔로 극복하는 하나님, 가난한 자, 약자, 모든 소외된 자를 돌보고 보살피며 바로 세우는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전면에 우뚝 등장하신다. 인간이 알 수 없는 깊은 곳에 숨어계신 하나님이 절대 아니다. 인간의 곤경 앞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요리조리 피하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후에 빈번히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물음은 낯설다 하겠다.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시 10:1)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렘 12:1) 그러므로 출애굽기를 읽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적 섭리에 대한 물음은 잠시 접어두고 싶지만, 견딜 수 없다,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미리 한 신학자의 말을 빌려 질문한다. “최후심판 때 나는 질문을 받기만하지 않고, 주님께 묻기도 하겠다.. ... 어떤 책이나 글, 교회의 교리나 교도권도 답할 수 없는 문제, 곧 ‘하나님은 왜 죄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라는 구원에 이르는 끔찍한 우회로를 마련하셨는지’ 답변을 듣고 싶다[로마노 과르디니, (Guardini, 1885~1968)] 악의 창궐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재의 경험, 하나님이 죽으신듯한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궁극적 구원의 신비를 믿나이다. 하오니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칼뱅)하게 하소서! [이미지]틴토레토Tintoretto, The Eternal Father Appears to Moses, 15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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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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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신앙의 정원』은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동산을 가꾸도록 책임을 준 하나님, 막달라 마리아에게 정원지기로 나타난 부활하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크고 넓은 정원을 지으실 성령의 새 역사에 참여하는 신실한 정원지기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일구고 가꾼 아름다운 책이 되고자 한다. 예술신학과 예술목회에 뜻을 같이한 예술목회연구원의 연구원 20여 명은 GospelToday에 2018~2020년까지 기고한 글들을 모아 주제별로 분류하여 편집하여 『예술신앙의 정원』이란 이름을 지었다. 예술목회를 출발로 시, 미술, 뮤지컬, 영화와 사진, 예술치유와 놀이교육 및 여가, 음식, 커피와 포도주, 생명 살림의 예술, 그리고 미학과 윤리의 과제에 이르기까지 실생활의 영역에서 신앙의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했다. 모든 연구원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녹녹하지 않은 출판의 현실 속에서 출판 기획을 이행하신 GospelToday 대표 박진석 목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표지 디자인을 해주신 강원경 목사님께도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4개의 표지시안 중 어느 것이 주제와 패션에 어울릴지 의견을 주시면 참고하여 택하겠습니다. 순서대로 1, 2, 3, 4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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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Ju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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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대고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세우기, 루터의 코람 데오(coram Deo)의 의미이다. ‘떠남’은 사물과 사람에 대한 ‘철저한 물음’(radikales Fragen)과도 통한다. ‘물음’이 ‘사유의 경건’(하이데거)이라면 ‘떠남’은 ‘경건의 사유’이다. 그러나 떠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현재보다 미래의 꿈을 꾸고 안고, 오늘보다 내일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 당신과 가는 길일 때......그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가는 길 앞에 당신이 있으니까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별빛이 쓸고 가는 먼 길을 걸어 당신께 갑니다.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간 벌판이 되어 길의 끝에서 몇 번이고 빈 몸으로 넘어질 때 풀뿌리 하나로 내 안을 뚫고 오는 당신께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동짓달 개울물 소리가 또랑또랑 살얼음 녹이며 들려오고 구름 사이로 당신은 보입니다. 바람도 없이 구름은 흐르고 떠나간 것들 다시 오지 않아도 내 가는 길 앞에 이렇게 당신은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도종환, 「당신과 가는 길」 (전문) 떠나기 전까지 지금,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지금, 샤갈은 위를 향해야 할 아브라함의 얼굴은 안으로, 앞을 향해야 할 눈은 아래를 향하고, 입은 굳게 다물려 있고, 그의 머리, 손과 발이 아무런 행동을 못하고 한 방향으로 나열되듯이 그려졌는데, 무기력하면서도 간절함을 느끼게 한다. 샤갈은 이렇게 멈추어서 공처럼 웅크리고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정지하여 안으로 침잠하고 집중할 수밖에 없던 모습, 결단하기 전 그의 실존적 고뇌의 모습을 담았다. 멀리 있는 것을 보기 위해 눈이 가늘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려고 내 안의 눈을 가늘게 뜨려고 애쓰던 때처럼, 아브라함은 지금 그분의 부름의 음성이 내 소리가 되고 제소리가 될 때까지 마음으로 몸으로 뜸 드리고 곰삭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림의 상단에 그려진 천사는 아브라함과는 대조적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입으로 외치며, 모든 몸을 펼치고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다. 천사의 모습에는 그 운동의 방향과 멈추어있는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려는 힘도 느껴진다. 부르심을 따라 당신과 가는 길, 시인의 노래에서처럼 얼마나 좋으랴! 하고 노래하는 날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지](1)라스트만(Lastman), Abraham’s Journey to Canaan, 1614;(2)샤갈, <아브라함>,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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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Ma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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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사무엘상 22:1~2 [성찰]“아둘람 동굴의 체험” 최근 3년, 나의 체험을 다윗의 아둘람 동굴 체험에 비유하여 생각하곤 했었다. 감히 그럴 자격은 없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숨을 쉬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주님의 은총이고, 은총은 생의 에너지이고 살라는 명령이고, 잘 살라는 손잡아 줌이고, 품어줌이고 격려고 ‘삶을 향한 용기’(Mut zum Leben, Courage to Live, 선생님 Alfred Jäger교수가 참 좋아한 표현)이니까. 다윗은 거기서 떠난다. 가드 왕 아기스 옆에서 생의 안전을 구했다가 되려 혼쭐이 난다. 그전에는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삶을 충전할 수 있었다. 거기서 40km 쯤 떨어진 가드로 달려 간 것이다. 피신하는 삶이다. 소나기가 내리면 멍청하게 맞지 말고 잠시 피하라고..., 누가 그리 말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으면, 아니 피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맨몸으로 비를 맞고 춤을 추면서 살자. 살다보면 이사람 저 사람을 만나지만, 그래서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그런데 가드 왕 아기스는 아니지 않은가. 다윗은 그 앞에서 미친 척 할 수밖에 없었다. 보호받기는커녕 그들에게 의심을 사 잡혀 갇히기까지 했다. 그래서 다윗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삼상 21:13). 다윗은 생각보다 욕망이 크고 성취욕이 강한 사람이다. 다윗은 욕심이 많고 집요한 성격의 사람이다.(삼상 17: 28-30).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에 대한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과하게 일한다(삼상 18:26~27) 다윗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통곡한다.(삼상 20:41). 게다가 연기까지 특급이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못할 짓이 무엇이 있겠는가? 완전 망가진 자신의 모습,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생이 여기까지 내려갈 수 있구나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서 떠나 다윗이 찾은 곳은 엔겐디 광야 서쪽 아둘람 동굴이다. 나는 내 안에 갑자기 광야가 몰려왔지만 다윗은 실제 피신처를 찾아 광야로 나갔다. 모든 것이 잘 풀리는듯했다. 직업을 통해 전문성을 얻었고, 의욕적으로 가르침, 연구, 행정에 몰두 했다. 스케줄을 잡아야 했으며 중요한 책임을 맡을 때는 우쭐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많고 많은 일, 왜곡된 관계 속에서 쌓이는 스트레스, 혈압을 잴 때 압박하는 기구처럼 몸과 정신을 점점 거세게 압박해 들어온다. 어느 날 갑자기 주님께서는 나를 광야에 내던졌다. 주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악마에 이끌려 광야로 내던져져 성령의 도우심을 만났다고나 해야 할까. 지리적인 광야,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본 경험은 없지만 상상력을 통해 그곳이 어떤 곳일지 공감은 가능하다. 황량한 광야. 일상에서의 모든 삶이 단절된 낯설고 생소한 환경. 사막교부들은 쾌적한 환경을 버리고 왜 광야로 나갔을까?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친 경우가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광야에 나가면 곧 감각(시각, 후각, 청각)이 예민해진다고 한다. 그러면 아니 보였던 것이 보이고, 듣지 못했던 세미한 소리까지 들리게 되고, 더욱 섬세한 부분, 요소들까지 냄새 맡고 맛볼 수 있게 된다. 고립과 고독 속에서 더욱 깊은 것, 더 근원적인 것, 거룩에 대한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일까? 지난 2월 5일 설날 쓴 일기다. 설날인갑다 새벽길이 이리도 한산할까. 교회 가는 길, 인도에는 사람이 없고 차도에서도 차량 몇 대 밖에 만나지 못했다. 기도하는 동안 기도는 되지 않고, 어제 000 부장에게서 받은 문자와 기사가 곰곰 마음에 입은 상처를 헤집고 파고든다. 그는 50대 한 회사 부장인데 000교회 일꾼으로서 우리가 집사라 불렀다. 그는 지난 해 6차례 나의 미술특강에 참여해 가장 열심히 듣고 응답해준 한 사람이다. 성격이 쾌활하고 부지런하며 교회개혁에 매우 열심이다. 새해 들어 보이지 않고 그리운 마음도 생겨 인사차 문자를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근데 이런 내용이다. “뉴스로 최근의 아래 기사를 보고 양들의침묵 팟캐스트 들으면서 심목사님의 현재 사정을 좀 더 알게 되면서 이런 사정에서도 헌신해 주신 것에 새삼 더 감사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지난 기사를 첨부해 보냈다. 또 다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지난 2년 반 동안 그 수치스러움이 몸속, 살속, 뼛속까지 서서히 침투해 내 오장육부를 밤낮 헤집고 매일 쓰라리게 녹이고, 결국 내 삶과 존재를 산산조각 내어 바람이 쓸고 갔는데. 그 뉴스들은 인터넷 세상 공간에 한낮의 태양처럼 크게 떠서 나를 조롱하고, 나에게 돌을 던지고, 나에게 침을 뱉는다. 주님, 제가 어찌 이 파도치는 수치감의 깊은 바다에서 헤엄쳐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한참 마음만 쥐어짜며 애태우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가짐이겠지요... 그래, 그 슬프고 수치스러운 기사들이 내가 네 몸과 마음에 새긴 낙인(τὰ στίγματα)이란다. 그래요? 주님! 정말인가요? 바울의 고백을 제 고백으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 6:17)라고 고백해도 되는 걸까요? 십자가가 커다란 치욕과 수치였지만, 예수님 당신이 지신 십자가 덕분에 이제 저에게 그게 주님의 구원과 성화의 상처자국이 될 수 있는 것인가요? 주님의 모습은 가물가물 사라졌지만, 내 두 눈에서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주룩주룩 흐른다.(감히 성 프란치스코의 五傷을 떠올린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차후에 곧 000 부장도 이렇게 썼다. “올해에 심목사님께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모든 과정에 아름다우신 성삼위 하나님의 온전한 인도하심과 목사님의 순종과 이웃의 공감이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주님께 順從 - 이웃에게 共感”, 나도 정말 좋아하는, 사태에 정말 적실(適實)한 표현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첨언했다. “목사님의 신앙과 신학, 미학, 정감, 인격이 부럽고 가까이서 더 배우고 싶은 일인으로 여건이 닿는 한 옆에서 응원하며 함께 걷겠습니다.” 내가 받기에는 사치스러운 찬사고 격려의 말씀이지만, 그래도 큰 힘이 된다. 나는 이날 새벽에 얻은 느낌을 영적 광야의 체험 속에서 내 몸과 마음에 생긴 ‘거룩에 대한 감각’, 신성함을 느낄 줄 아는 감각, 곧 ‘영적 감각’(spiritual sensation)이라고 생각한다. 동굴로 몸을 피신하자마자 다윗에게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형들과 온 집안사람들이다. 피붙이는 온갖 위험을 무릎 쓰고도 찾아온다. 잠시 후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 다윗 주변에 별의별 새로운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성경은 그 사람들에 대해,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사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삼상 22:2) 다윗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 그들의 구체적인 삶과 욕망의 에너지, 정과 한(情恨), 우리는 그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곰곰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광야는 다윗에게 모든 곳, 하늘뿐 아니라 스올에도 계신 하나님을 알아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시 139:8) 광야는 다윗에게 사망에서 생명을 보듬고 키우는 마음의 능력을 고취시켰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광야는 다윗에게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일깨웠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주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이 배불리 먹고, 주님이 그들에게 주님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합니다.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시 36:5~9) [이미지](1)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Landscape with David at the Cave of Adullam, 17c; (2)Giovanni Maldura, David at the Cave of Adullam, 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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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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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거룩한 신비에 감사드리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 세상을 향한 결단의 노래-좋은 나라/시인과 촌장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그곳에서 만난다면/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 까맣게 잊고 다시 인사할지도 몰라요/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 그 푸른 강가에서 만난다면/서로 하고프던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냥 마주보고 좋아서 웃기만 할꺼에요/그곳 무지개속 물방울들 처럼 행복한 거기로 들어가/아무 눈물없이 슬픈 헤아림도 없이 그렇게 만날 수 있다면/있다면/있다면 당신과 내가 좋은 나라에서/그 푸른 동산에서 만난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까맣게 잊고 다시 만날수 있다면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들을/까맣게 잊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 파송의 말씀 집례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정성껏 예배를 드리며 말씀과 성찬으로 주님의 뜻을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이번 주도 성령 충만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한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주의 일꾼들이 모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 중: 예,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그 길을 가는 참된 신자가 되겠습니다. 아멘. ◈ 축도: 백우인 목사 ◈ 교회소식 나눔 및 친교 2부 성서정과 및 <내가꿈꾸는교회> 나눔 손원영, <내가 꿈꾸는 교회>, 제1부 5-6장 “기도수행의 공동체”, “길 위의 공동체” 3부 후마니타스특강 강사: 고재백 교수(국민대, 기독교인문학연구원장) 주제: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 ◈ 광 고 1. 오늘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모임에 함께 하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특히 설교와 특강을 각각 해 주신 백우인 언님과 고재백 언님께 감사드립니다. 2. 예술목회연구원과 종교평화원에서는 매주 유투브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해 동영상을 감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도덕경> 강의(강사: 이명권 교수. 교재: <예수왈 노자가라사대>) 및 <예술신학> 강의(강사: 심광섭 교수) 3. 가나안공동체의 헌금계좌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한국영성예술협회 074301-04-077240 국민은행. 참고로,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복음 선교입니다. 따라서 선교목적으로 자신이 봉헌한 헌금의 범위 안에서 선교비를 100% 신청할 수 있습니다. 선교비 지출을 원하시는 분은 언제든 신청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4. 우리 가나안공동체는 개별 신자들의 재가수도를 돕는 목적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각 언님들께서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평상시 가정에서 수도(기도, 경전독서, 금식, 순례, 선행 등)에 정진해 주시길 바랍니다. 5. 8월 KASA 활동 안내입니다. 많은 응원과 참여바랍니다. 1) 예술목회연구원 예술신학콜로키움: 2021.8.23.월.오후7시 강사: 허진권(JinKwon Hur) 교수 주제: 삶이 곧 예술이다 2) 종교평화원 레페스콜로키움: 2021.8.16.월.오후7시 강사: 고동원(Paul Dongwon Goh) 박사 주제: 호주교회의 다문화 목회와 종교평화 3) 이수포럼 일시: 2021.8.19.목.오후7시. 강사: 조희형 교수. 주제: 과학의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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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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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은 고난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연대와 행동을 먹고 자란다. <영성과예술> 여섯 번째 zoom강좌는 안셀름 그륀의 책 <어려운 성경의 해석>, 전반부를 자료로 삼아 진행했다. 호학(好學)의 기쁨(悅)을 동학들과 나눌 수 있어 얼마나 즐거운(樂) 일이 아닌지 모른다. 호학의 열락(好學之悅樂)을 누리는 시간이다. 그륀은 신구약 성경을 공동체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일부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50곳을 선정하여 풀이한다. 그는 본문(Text)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내 앞에 놓은 본문에만 관련된 말이 아니라 나 자신과도 관련된 말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사람, 자신이 읽는 본문을 이해하는 사람, 결국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창세기부터 불편한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성경을 읽지 못하고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화를 내면서 덮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종교경전 중에 처음부터 낙원추방과 살인 사건이 나오는 경전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에 화를 낼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의 적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렇게 내 안에 있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무엇인가를 들춰낸다. 하느님의 말씀에 화내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존재에 알맞은 삶을 살도록 이끌어준다.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야 자신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본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항상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해한다는 것이다. 저자(성경)와 그의 삶의 자리와 독자와 그의 삶의 자리는 서로 비평적으로 만나고 대화해야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린다. 앙드레 라콕의 설명은 더 멋있다. “텍스트는 공동체로 인하여 존재하고, 공동체의 사용을 위하여 존재하며 그리고 공동체의 건설과 함께 최종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저자가 텍스트의 배경 혹은 과거와 관련이 있다면, 독자는 텍스트의 전경, 즉 미래와 관련된다. 따라서 우리는 후자가 전자의 범위보다 넓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14곳의 구약 성경 중에 12.열정적이고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열정을 지니신 분,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 그러나 벌하지 않으신 채 내버려두지는 않으신다”(나훔 1:2-3)과 13.저주 시편(시 137:8-9) 부분의 해석이 흥미롭다. 우리는 시편 중, 복수시편, 원수시편, 저주시편을 잘 읽지 못한다. 그러나 큰 소리로 낭송할 필요가 있다. 교회 안에서 말이다. 주님은 질투하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원수를 갚으시고 진노하시되, 당신을 거스르는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당신을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 (나훔 1:2) 주님, 주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 (시 94:1)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시 137:8-9) Nobert Lohfink는 “시인과 그의 원수”, 이 두 가지 요소는 시편의 압도적인 주제라고 강조한다. 증오, 적대감, 폭력, 보복 그리고 복수는 시편에서 결코 부가적인 모티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해를 신학과 심리학 그리고 교회는 끊임없이 거부해왔다. 거기에는 자기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두려움과 자기모순 그리고 위선적 거룩함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투쟁적이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시편에 놀랐을 뿐 아니라 당혹한 것이다. 종교는 감정을 억제하고 가능하면 조용하게(靜) 머무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시편의 시들은 고요한 영혼의 산실 속에서 행해진 명상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적대감을 느끼고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시인이 자신을 지키고자 저항하는 원수들 사이에서 발생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시편의 탄원과 원수에 대한 보복과 파괴에 대한 바람은 고통에 무감각하게 되어버린 차가운 침묵 속으로 도피하려는 평화를 여지없이 박살낸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곤혹스럽고 당황하는 것이다. 분노의 감정은 비이성적인 격정이 아니다. 정반대로 정의에 대한 높은 문화적인 사상이 진노를 유발한다. 진노할 줄 모르는 하나님은 예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신앙이 존재할 수 없다. 진노, 사랑 그리고 연민은 하나님의 심판직의 특성이며 세계를 정의롭게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이런 탄원과 파괴에 대한 바람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그대로,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하나님으로 인한 고난까지 하나님께 위임하는 일종의 원시 형태의 기도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표현하면서도 하느님을 향한다. 하느님은 정의로 심판하실 것이며 정의를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 시편의 탄원과 파괴에 대한 바람은 고통을 회피하고 고난에 무감각하게 되어버린 공감상실의 차가운 침묵 속에 기생하는 거짓 평화를 깨뜨린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고난에 대한 민감함을 자꾸만 상실해 간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이 기도하는 동안 쿨쿨 자고있는 세 제자들을 빼닮았다. 제자들은 그들이 꾸고 싶은 달콤한 꿈 속에서 스승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현실의 문제로부터 무한히 달아난다. 기독교 신학은 고난당하는 자의 정의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어느새 죄인의 속죄에 대한 질문으로 변화시킴으로, 처음부터 기독교 신학은 죄 없이 고난당하는 자의 정의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도망갔다. 시인들이 하느님께 저항하여 모든 것을 말하는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륀은 원수(복수/저주) 시편을 읽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지금 우리가 저주 시편으로 기도한다면 구체적인 원수를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내적인 적들, 곧 상처, 허약함, 무력함, 두려움, 우울함처럼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베네딕토 수도규칙에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악한 생각을 즉시 그리스도께 메어 바수고 그것을 영적 장로에게 밝혀라” 말한다. 지금도 삶을 방해하는 방식과 생각을 자신의 밖으로 내던지고 그리스도라는 바위에 메어쳐 부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나 내적인, 심령의 적들만이 아니라 외적인 적들, 억압, 강요된 가난, 구조화된 사회적 불의, 강자들의 권력과 부의 카르텔, 파괴되어가는 지구의 탄식은 그리스도라는 반석에 메어쳐 부수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라 새롭고 정의롭게 태어나야 할 시급한 과제들이다. 영성은 고통과 고난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강한 연대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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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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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이 오랜 기간 아래와 같이 제목을 바꿔가며 끈질기게 궁구한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인 칭의론은 가장 포괄적인 정의론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은 정의”라는 주장에 집약된다. (1)『생명의 영』(1985), “삶의 칭의” (2)『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1990), “희생자와 가해자를 위한 정의”, 103-127. (3)『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1997),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다”(부록 2) (4)『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2003), 제2부 제2장,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느님의 의와 삶의 거듭남”, 77-109. (5)『하나님의 이름은 정의다』(2008) (6)『희망의 윤리』(2010) 제4부 <정의로운 평화의 윤리> 몰트만은 서방교회 칭의론의 과오는 죄를 일방적으로 행위자ㆍ범법자들에게 제한시켜 그들의 죄의 용서만을 선언하고 희생자들의 고난을 방치했다는 점이며,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간과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교회는 죄의 시선을 언제나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구조적 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했음을 지적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본질인 칭의론은 세상은 물론 교회조차도 생소하게 되어 파리한 뼈만 남은 죽어가는 교리가 되어 현대인을 납득시킬 만한 새로운 언어를 찾지 않으면 박물관에조차 진열되지 못할 폐기될 유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거대한 몰락의 원인은 교회가 ‘순수한 교리’ 안에 진리를 확고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틸리히)하면서 구원을 확보했다는 망상 속에서 실제 세상에서는 온갖 권력과 맘몬의 영광을 쫓고 있다는 모순적이고 비극적 현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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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목원TV] 예술신학강좌 제36강, 정의의 미학(7). 칭의론(稱義論)은 정의론이다/ 심광섭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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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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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3) “오 나의 주 하나님,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제게 말씀해주십시오”(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기도문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물음만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물음은 곧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물음이다. 그는 이 물음을 통해 자신과 인간에 대해, 역사와 세계에 대해, 창조와 우주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다, 곧 생명에 대해, 전체 생명에 대해, 생명의 그물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나는 생명을 원한다. 그것도 ‘풍성한 생명’(abundant life)을 원한다. 나는 다른 생명체들도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소비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들,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모르는 긴 어둠, 빛이 왔으되 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고 꺼질 것만 같은 아주 작은 호롱불, 지구의 온 생명체들이 고통 받으며 죽지 않고 함께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생명(삶), 과연 가능할까, 어떻게 가능할까? 신학이 인간 밖에 오랫동안 엄연하게 존재해온 생명체들과 더불어 사는 과제를 의식적으로 취한 적이 별로 없다. 생명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면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생명의 과제는 신학의 긴급한 과제이다.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0:10). ‘그들’은 지구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안하고 우울한 분위기이지만 오늘 밤 생명의 춤을 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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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ov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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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 그 신음소리는 삶의 벼랑에서, 언제 이 어두운 고통의 터널이 끝날지 기약 없는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이며 그 어둠의 잔인한 횡포에 저항하는 고발이며 좌절과 절망,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겠다는 최후의 희망의 선언이자 그들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내맡기는 신뢰의 표현이며 죽음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는 생명의 절규이기도 했다. 어느 날 떨기 가운데 이는 불꽃 안에서 주님 나타나시어 모세를 부른다. 모세와 주님의 만남이다. 만남이후 모세는 더 이상 이전의 모세가 아니다. 미디안에서의 40년, 거룩한 침묵(holy silence)과 은둔의 생활 텅 비운 마음, 쓸쓸함과 공허함 때로는 무력감의 세월이 아니었을까. 바로로부터 피신한 모세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고 외로움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세는 황량한 곳이란 뜻을 지닌 ‘호렙’에서 주님을 뵌다. 황폐한 삶의 현장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뵐 수 있는 곳이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혼자 머물러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위대하신 분 앞에서 낯선 사람처럼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아빌라의 聖 테레사,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전문) "모세야, 모세야!" 이름을 두 번씩 부름은 그 이름의 중요성과 긴급성을 나타낸다(사무엘아! 사무엘아! 삼상 3:10) 모세가 주님을 찾아 헤매다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 부르셨다. 사명이 생기기 전에 소명이 먼저 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요 15:16) 부름을 듣고 가까이 다가가는 모세에게 주님 말씀하신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모세는 불타는 떨기는 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들을 수 있는 음성은 중요하고 볼 수 있는 떨기의 불꽃은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계시에서 보고 들음, 시각과 청각은 모두 중요하다. 볼 수 있는 불꽃이나 들을 수 있는 음성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투시하는 성사이고 하나님의 현존을 알리는 상징이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 하나님은 막상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멀리 있음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아주 가까이 있음 하나님과 인간이 차이가 사라지고 동일해 진다. 미완의 시대, 늘 부족한 미완의 경험, 완벽한 최상의 사건을 일순간 체험 하지만 인간의 유한성을 항상 인식하라는 뜻에서인지,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흠결과 허물이 생기는 인간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은 한결같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참 선한 아름다움을 향해 이끄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그 장소에서 인간은 조금 전까지 하던 습관대로 신 신고 마구 다닐 수 없다. 그 땅이 거룩한 땅인 것은 그 장소에서 생을 위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자연공간의 성스러움보다 사건의 발생, 즉 시간의 성스러움이 더 중시된다. 질적으로 다른 시간 경험이 공간을 다르게 구성한다. 이제 모세가 양을 치러 다니면서 신었던 신발과 바로의 폭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삶과는 같을 수 없다. 유명한 모세의 소명이야기에서 렘브란트는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불꽃을 순수하게 타오르는 빛의 형상으로 드로잉을 통해 보여준다. 모세를 향해 쏟아지는 빛이 강하게 부는 바람같다. 화가는 모세를 하나님의 현존의 신비한 현상 앞에서, 거기를 향해 정신 잃고 다가가다가 멈칫하고 당황하여 두려움과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렸다. 빛을 등지고 가는 양떼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인식은 사건을 통해 발생한다. 중요한 요소들이 빛과 공간의 완벽한 환상을 통해 탁월하게 구성되었다. 1650년대 렘브란트의 모든 그림에서 나타나는 놀라운 양식이다. [이미지]렘브란트, <모세와 불붙은 떨기나무>, c.1655. Pen and brush 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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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A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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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주 우리 하나님 1. 주 우리 하나님 하늘에 계시니 온 천하 만민 주 앞에 찬송하네 이 천지 만물도 주 앞에 엎드려 그 거룩하신 이름을 늘 높이네 2. 주 언약 하신 것 끝까지 지키니 저 하늘나라 향하여 곧 가리라 주 얼굴 뵈올 때 내 맘이 기쁘고 영원히 주의 영광을 찬양하리 3. 왕의 왕 되신 주 하늘에 계시니 이 세상 죄악 이기신 구주 예수 저 천군 천사들 주 옹위하고서 뭇 성도 함께 영원히 늘 섬기네 4. 성 삼위일체께 승리한 무리들 다 기쁜 소리 높여서 감사드려 창조주 하나님 내 주님 되시니 주 앞에 나도 엎드려 경배하네 아멘 ◈ 침묵기도(회개와 반성) -- 다같이 ◈ 성서정과 독서1 시편 84편 1.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3.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4.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 5.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8. 주 만군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야곱의 하나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 9.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10.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11.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12.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묵상 찬송가 430. 주와 같이 길 가는것 1. 주와 같이 길가는것 즐거운일 아닌가 우리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2.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손에 이끌리어 생명 길로 가겠네 3.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 하는 대로 주와같이 가겠네 4. 옛 선지자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 올라 갈 때 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후렴]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 성서정과 독서2 에베소서 6:10~20 10.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11.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12.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십시오.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16.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18.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19.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20. 나는 사슬에 매여 있으나, 이 복음을 전하는 사신입니다. 이런 형편에서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하여 주십시오. 묵상 찬송가 354. 주를 앙모하는 자 1. 주를 앙모하는자 올라가(올라가)올라가(올라가)독수리 같이 모든 싸움 이기고 근심 걱정벗은후 올라가(올라가)올라가(올라가)독수리 같이 2. 주를 앙모하는자 걸어가(걸어가)걸어가(걸어가)고단치 않네 길을 잃은 양떼를 두루 찾아다니며 걸어가(걸어가)걸어가(걸어가)고단치않네 3. 주를 앙모하는자 달려가(달려가)달려가(달려가)피곤치않네 천성 문을 향하여 면류관을 얻도록 달려가(달려가)달려가(달려가)피곤치않네 4.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올라가)올라가(올라가)독수리 같이 은혜안에 뛰놀며 주의 영광 보리라 올라가(올라가)올라가(올라가)독수리같이 [후렴]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 하는자 주앙모하는자 늘 강건하리라 ◈ 말씀의 증언 “내가 드리는 예배” 최승언 목사 ◈ 공동체 중보기도 및 봉헌기도(연도/連禱/Litanies)/ “키리에 키리에 엘레이손” -성찬의 예전-(개방형 성찬) 성만찬에의 초대/집례자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러분을 이 거룩한 식탁에 초대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정성껏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교독/다같이 집례자: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언제나 주님께 감사함이 당연하고도 기쁜 일입니다. 회중: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집례자: 때로는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나도 회중: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제정사/집례자 집례자: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던 밤, 떡을 손에 드시고(집례자),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 주는 나의 몸이니 먹을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라.” 다같이: 아멘. 집례자: 식후에, 주님께서는 잔을 드시고(집례자)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제자들에게 돌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을 마시라. 이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린 새 언약의 피니 이를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다같이: 아멘. 성령임재의 기원/집례자 거룩하신 아버지, 일찍이 주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던 성령을 지금 다시 보내 주사, 진설된 떡과 포도주 위에 임하셔서 이 식탁을 성별하옵소서. 또한 성령께서 여기 모인 우리 위에 함께 하사 이 떡과 포도주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시며, 이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새로운 몸을 입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의 기도/다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아멘. 평화의 인사/다같이 집례자: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회중: 목사님과도 함께 집례자: 다같이 맞절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다같이: 맞절 분병례/다같이 집례자: 이 떡을 나눌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이 잔을 나눌 때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합니다. 집례자: (빵을 떼면서) 이 빵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회중: (목례하면서) 아멘 집례자: (잔을 주면서)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회중: (목례하면서) 아멘. 분급/다같이 성만찬 찬송: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3번). 아멘. 성만찬 감사기도/다같이 집례자: 이제 다함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다같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거룩한 신비에 감사드리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 파송의 말씀 집례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정성껏 예배를 드리며 말씀과 성찬으로 주님의 뜻을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이번 주도 성령 충만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한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교회를 사랑하며,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주의 일꾼들이 모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 중: 예,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그 길을 가는 참된 신자가 되겠습니다. 아멘. ◈ 축도: 최승언 목사 ◈ 교회소식 나눔 및 친교 2부 현대신학특강 강사: 심광섭 교수(예술목회연구원장) 주제: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인간학과 무신론 ◈ 광 고 1. 오늘 재가수도가나안공동체 모임에 함께 하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특히 설교와 특강을 각각 해 주신 최승언 언님과 심광섭 언님께 감사드립니다. 2. KASA_예술목회연구원과 종교평화원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교양교육을 위해 매주 유투브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동영상을 감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학> 강의 (강사: 윤세형 교수), <도덕경> 강의(강사: 이명권 교수. 교재: <예수왈 노자가라사대>), <예술신학> 강의(강사: 심광섭 교수) 3. 다음 주일(8.29)은 5주차 주일이기 때문에 좋은 이웃교회 방문주일입니다. 따라서 가나안공동체의 예배모임은 없습니다. 착오가 없기를 바랍니다. 4. 우리 가나안공동체는 개별 신자들의 재가수도를 돕는 목적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각 언님들께서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평상시 가정에서 수도생활(기도, 경전독서, 금식, 순례, 선행 등)에 정진해 주시길 바랍니다. 5. 예술목회연구원 주최 예술신학콜로키움을 안내합니다. 많은 참여바랍니다. 일시: 2021.8.23.월.오후7시 강사: 허진권JinKwon Hur 교수(목원대) 주제: 삶이 곧 예술이다 6. 가나안공동체의 헌금계좌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한국영성예술협회 074301-04-077240 국민은행. 참고로,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복음 선교입니다. 따라서 선교목적으로 자신이 봉헌한 헌금의 범위 안에서 선교비를 100% 신청할 수 있습니다. 선교비 지출을 원하시는 분은 언제든 신청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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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Oc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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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찬양, 예배였던 것이다. 하나님 인식은 감사와 찬양과 예배를 통하여 표현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출 15:2)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인식한다. 여기서 인식은 만남이고 사귐이며 참여다. 인식하는 인간은 인식되는 하나님에게 참여하며 놀라움에 싸인 그의 인식을 통하여 인식된 자로 변화한다. 이 점에서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에서 이 중요한 지점을 강조한다.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를 직관하여 성령의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경험의 ‘표현’으로서 ‘찬미의 형태’를 가진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에서 무엇을 확정함으로써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어떠한 정의들도 허용될 수 없다. 측량할 수 없는 영원한 하느님을 지향하는 모든 종류의 사유와 이야기, 느낌과 행동, 고난과 희망은 ‘찬미의 성격’을 가진다.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경험들과 깊은 기다림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하느님 자신의 생동하는 현실로 인도하는 삶의 선들이다. 삼위일체적 진술과 노래와 사유는 이와같이 찬미와 연관하여 생성하였으며, 만일 그것이 신적인 대치성을 잃어버리고자 하지 않는다면, 이 연관을 언제나 의식해야 할 것이다.”(몰트만, 『생명의 영』에서) 삼위일체도를 그린 회화의 아름다움 중에 류블로프 외에 알브레히트 뒤러의 삼위일체론에 애정이 간다. 오늘은 뒤러의 최애(最愛)하는 이 작품이다. 그리고 미사곡 중 Credo를 빼놓을 수 없다. 모차르트Mozart의 다음 곡을 들어보자 – "Credo" from Mass in C minor, K.427 (Vienna Boys Choir, Bertrand de Billy) https://www.youtube.com/watch?v=Z1K2lTZd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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