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4

[이우연 칼럼] 미우리(身賣り)라는 계약과 위안부

[이우연 칼럼] 미우리(身賣り)라는 계약과 위안부



[이우연 칼럼] 미우리(身賣り)라는 계약과 위안부
식민지기 매춘산업의 배경이었던 “미우리(身賣り)” 관행 ... 위안부 계약설의 또다른 증거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등록 2021.09.19 11:06:01

[이우연 · 전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위안부를 연구하는 한국이나 일본 학자들이 그동안 식민지기 조선의 “미우리(身賣り)”라는 계약 형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다.

조선 여성이 위안부가 되는 경로 그간 이야기해 온 것은 “강제연행”, “취업사기”, 그리고 “인신매매”다. 단, 취업사기와 인신매매 모두 식민지기 당시에도 불법이었으며, 양자는 결합되어 하나의 범죄를 이루었다. 즉 법적으로 “유괴”로 규정되는 취업사기를 벌여 여자를 확보하고 그녀를 본인이나 부모의 의사와 무관하게 유곽이나 매춘숙이, 또 위안소에 팔아 넘기는 행위다.

만약 가난한 부모가 자신의 딸이 매춘부나 위안부가 된다는 것을 알고도 당시 계약관행인 미우리에 따라 판매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합법이었다. 통계가 없으니 단언할 수 없지만, 미우리는 당시 성매매산업에서 여성을 조달하는 기본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계약에서 대부분의 부모는 딸이 무엇을 하게 될지 잘 알면서 매춘숙이나 알선업자나 주인에게 딸을 양도했다. 부모는 대신 전차금이라는 돈을 받았고, 딸은 정해진 계약기간동안 성노동을 하면서 급료의 일부로 그 돈을 상환했다. 전차금 상환 이후 그녀들은 자유를 회복했다. 그들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했지만. 미우리라는 합법적 계약은 “유괴-인신매매”보다 빈번했을 것이다. 후자에 비해 이윤이 적지만, 징역 등 처벌의 위험이라는 비용이 컸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거래와 관련하여, 미우리를 노예나 조선의 노비 거래와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노예나 노비와 같은 계약은 인간을 완전하고 영구적으로 양도하는 것이다. 단, 미우리는 도쿠가와 시대부터 존재하여 제2차 대전 종전까지 존속한 일본 특유의 관행이었다. 조선에는 그러한 거래관행도, 상응하는 용어도 발견되지 않는다.

미우리라는 새로운 계약형태는 1900년경에 조선에 도입되었고, 식민지기를 통해 정착되었다. 가정에서 여성의 권리가 약하다는 점, 호주제가 가부장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점, 그리고 공창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에서, 조선과 일본은 사회적ㆍ법적으로 유사한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일반 평민 가장(家長)이 딸, 아들, 가족, 심지어 직접 자신을 아예 노비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특히 조선 경제가 위기를 맞이하는 18-19세기에 많았는데, 나는 1910년의 사례까지를 확인하였다. 이러한 인신매매 관행을 “자매(自賣)”라고 한다. 다른 노예나 노비처럼 “자매노비”는 사회적 지위가 법적으로 세습되었다. 두 번째로 자매와 함께 작성하는 “자매문기(自賣文記)”에는 일반 노비매매 문서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 봉사한다”거나 “자신을 영원히 판다”는 문구가 판에 박힌 듯이 등장한다. 이렇게 자신(이나 가족)을 완전하고 영구히 판다는 점도 자매 거래가 일반 노비 거래와 같은 점이다. 이와 달리 미우리는 수 년의 기간과 성노동으로 한정되는 거래였다. 노예나 노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식민지기 신문을 통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불법적 인신매매와 합법적 미우리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1926년 ‘2ㆍ26 구테타’의 원인 중 하나는 농촌 출신의 병사들이 비참하게 빈곤하여 매춘업자에게 여동생을 미우리로 넘겨야 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전 위안부 중 한 명은 위안소 주인보다 자신을 팔아넘긴 아버지가 더 밉다고 말했다.

부모의 관점에서는 매춘숙이나 위안소로부터 받은 돈, 즉 전차금은 자신이 판 딸의 몸값이었다. 그러나 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되돌려 받아야 할 채권이었다. 어린 여성에 대한 거래는 불법적 인신매매와 합법적 미우리의 경계에 있었다. 여하튼 이 거래는 하도 빈번해서 경찰과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재판이 빈번했다. 그러나 경찰이 입건한 대부분의 용의자는 결국 무죄가 되었다.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미래사)에 따르면, “유괴”나 “약취”로 경찰에 검거된 용의자의 약 90%가 검찰로 송치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소수만 검찰에 기소되거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4-41년간, 두 범죄로 검찰에 송치된 용의자는 무려 40,553명이었지만, 기소된 것은 2,506명에 불과했다. 1924-43년간, 경찰에 검거된 자 중 87.5%가 기소되지 않은 것이다. 단, 재판에 넘겨진 자 중에서 85%가 유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유곽, 매춘숙, 위안소 등 매춘산업에 종사했던 알선업자나 업주들이 불법적 유괴와 인신매매보다 합법적인 미우리를 선택하였음을 뜻한다.

미우리라는 계약을 통해 딸을 거래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딸이 결국 무엇을 하게 될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설령 계약서가 없다고 할지라도 만약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들이 이룬 합의는 명백한 계약이다.

국내나 해외에서 한국사, 특히 위안부 문제나 램자이어 교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를 격렬히 비난한 연구자들이 공격의 초점으로 삼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램자이어는 계약서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과 같은 사실, 당신 조선의 매춘산업과 그 배경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울러 관심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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