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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잡기 - 일본인의 조선정탐록 혼마 규스케 김영사 | 2008
한국은 독립한 적이 없는 나라이다. 4천년이나 된 오래된 나라이지만 상고부터 금일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의 속박에 관계되지 않은 시대가 거의 드물다./ 그러므로 조선은 진정으로 독립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인들은 무사태평이다. 일본의 목수가 반나절 걸려서 할 수 있는 일을 조선의 목수는 3, 4일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일본인의 눈으로 볼 때 그 작업의 태평함에 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이다./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매우 좋아하는 동물이다. 3척이나 되는 담뱃대를 걸어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앉아서나 누워서, 일을 쉬거나 침묵하는 사이에도 손에서 놓는 일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비굴하고 구걸 근성이 있다. 일본인들이 여행하며 숙박하면 근방의 한인들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실내가 좋아질 정도로 모여와서 구경한다. 안경의 가격은 얼마인가, 약은 갖고 있는가, 담배 한 모금 달라, 수첩을 달라 등 모두 구걸적인 언어이다./
조선에서 가장 심한 기이한 풍속은 조혼이라고 할 수 있다. 12, 3세의 나이로 벌써 장가를 간 자도 있다. 처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고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12, 3세짜리가 20세 전후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이한 풍속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어린 남녀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조선의 인구가 매해 감소하는 것은 여기에 원인이 있다.
공방전孔方錢 외에는 통화가 없는 나라 사람의 사상은 생각할 때마다 우스꽝스럽다. 어느 지방에서 내가 품에 넣었던 지폐를 보여주었을 때 일이다. 여러 한인들이 모여서 각자가 평하는 것을 들어보니, 한 사람은 이것은 금건金巾(면직물)에 부친 인쇄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통화라고 하다니 일본인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냐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만일 이런 것을 통화라고 한다면 도적을 만났을 때 많이 빼앗길 것이다(한전은 매우 무거워서 상당히 많은 도적들이라도 15관문 즉 우리 20엔 이상은 지고 갈 수가 없다)”라고 한다. 또 한 사람은 “이것을 한전으로 바꾸어 모아두면 안에 넣어두고 밖으로 빈 것처럼 하여 관인이 빼앗아 갈 걱정이 없을 것이다(관인이 재물을 빼앗아가는 것이 그 나라의 통폐이다)”라고 한다. 열 사람이 열 가지의 논평을 하여 그릇이 끓는 것 같으나 귀착하는 바가 없다.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평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중에 처음부터 가만히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이 나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지폐는 매우 편리한 것이다. 모름지기 이 지폐를 사용할 권리를 얻는 자는, 정부에 얼마의 세금을 내야 하느냐”고 물어본다. 아아, 이 문제가 더 기묘하다.
조선인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 집집마다 이것을 기르는 것은 반드시 집을 지켜 도둑을 경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부분은 그 고기를 먹기 위해서 기를 뿐이다. 조선의 개는 인분을 먹고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불결할 뿐 아니라, 어린아이가 방안에 똥을 싸면 개를 불러 그것을 핥아 먹도록 한다. 다시 씻지 않아도 된다./
한인은 허리 주위에 반드시 2,3개의 주머니를 항상 늘어뜨리고 있다. 하나는 연초를 넣는 것, 하는 도박도구를 넣는 것, 하나는 거울, 살쩍을 빗는 주걱, 담배 종이 등을 넣어두는 것이다. 그들은 몹시 용모를 꾸미는 버릇이 있다./
황해도, 평안도에서는 시신을 바로 흙에 매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삼남, 경기에서는 시신을 산기슭 혹은 야외에 지고 가서, 이것을 바로 매장하지 않고, 둥근 나무로 만든 십자가 두세 개를 세우고, 그 위에 관을 놓고 짚을 가지고 이것을 덮는다. 그리고 그 주위를 갈대로 싸서 비와 이슬을 맞게 두어, 살이 썩어 백골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방위를 정한 다음 개장한다./
팔도 가는 곳마다 있는 시장에서, 지나인을 보지 않는 지역이 없다. 삼삼오오 열을 지어서 시내를 누비는 자가 기백명일 것이다. 그들이 파는 물건은 하나같이 바늘, 못, 당지, 당실, 부싯돌, 성냥, 담뱃대 등으로 적은 자본을 가진 자는 금건 등을 파는 자도 있다. 한인과 섞여서 시장에 점포를 펴고 형편이 없는 것을 먹고 싼 옷을 입고 근검해서, 드디어 크게 벌어서 귀국한다./
양반이 소일하는 모양은 실로 한가해 보인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만 담뱃대를 몰고 방에 누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재산가의 대부분은 양반 종족이다. 이것은 대개 관리가 되어 서민으로부터 난폭하게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속담에 말하기를 관리가 되면 3대가 앉아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큰 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지방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신이 된 자도 지방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한다.
내가 처음 부산에 도항하자 바로 나의 눈에 비춰오는 것은 한인이 거류지 안을 돌면서 물건을 파는 광경이다. 노인과 어린이, 몇 사람의 한인이 파를 지거나 닭, 생선으로 가지고 여러 번 거류지를 배회하며 고객을 찾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말로 ‘닭은 어떻습니까?’, ‘파 있습니다’라고 이상하게 소리 지르며 팔고 있는 모습은 꽤나 가슴 아프게 들렸다.
한인들이 때가 끼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조그만 이익을 얻기 위해 고객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납작하게 하는 모양은 깊이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아아, 망국의 민이 되지 말지어다. 한인은 소수의 우리 거류지인에게 이길 수 없어, 상권을 우리에 바친다. 아아, 망국민이 되지 말지어다.
그들은 산악이 중첩하고 험악하여 산줄기를 드러내고, 봄의 물이 숲에 넘쳐 흐르고, 가벼운 바람에 잔물결이 일어날 때, 시를 음미하는 사람이 된다. 스스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얻을 수 없는 쾌락이다.
죄인은 옥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푼도 없는자는 굶어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반면 뇌물을 바치는 경우에는 어떠한 대죄인이라도 방면된다. 후일 상관에게 질책 당한 자가 있으면 그저 탈옥하여 가버릴 뿐이다. 부패의 풍속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관리가 인민을 괴롭히는 것이 私盜보다 심하다. 무엇 때문에 이들 관리를 죽이고 국가의 해를 제거할 것을 도모하지 않는가. 그렇다..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관리는 도적이 아닌 자가 없고, 가령 한 몸을 희생하여 관리 한 명을 죽여도 그 뒤를 계승하는 관리 역시 도적이 되는 것이다.
가마를 메는 사람 수는 신분에 의해 많고 적음이 있다. 나는 일찍이 신분이 높은 사람의 혼례에 20여명의 묘령의 여자가 말 위에서 유유히 앞서 호위하고, 경성을 조용히 지나가는 것을 본적이 있다.
조선사람이 숭배하는 유교를 보면 이것 역시 거의 이름 뿐이고, 각 군 각 현에 공자묘를 세워 때로 석전의 예를 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촌부자는 스스로 유자라고 이름부르고 아동에게 <논어> <맹자> 를 가르치지만, 학문의 깊이가 얕아서 겨우 주자의 집주를 금과옥조로 마음에 새기고, 퇴계, 율곡 두사람을 숭앙하여, 고금인이 서로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는데 그치고 있다.
주자이외에는 중요한 것을 내놓지 못하고, 주자 이외에 영웅호걸의 유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자가 없다. 관혼상제의 제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제도만을 항상 사용하고, 우리나라는 유교국이라고 하여 거만하게 사람에게 자랑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숭상하는 바는 유교이지만, 그 표상은 허례를 일삼는 것이고 실체인 도덕의 원천을 연구하는 바가 없다.
생각컨대 한인은 제어하기 쉬운 동물로서 감히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해도, 지나인의 세력이 우리나라 사람을 능가하여 한인에게조차 경모를 초래 하는 것은 우리 국권의 소장에 관계함이 크다.
중앙정부는 사대에 힘쓰고, 명조를 받들던 것을 바로 청조로 옮겨, 조공위문으로 청조의 환심을 사려고 힘썼다. 그리고 청국을 칭하여 대국이라고 말하고 중화라고 부른다. 스스로를 소국이라고 말하고 소화를 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르러 드러내지 않는 사이에 청조의 속방이 되는 형세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신하로서 청조를 섬기는 것이 뿌리 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 이후로 청이 조선을 대하는 정책방침이 불변하고, 조선을 한결같이 속방으로 보고 조선국왕을 신하와 같이 본다. 마침내 인습을 풍속으로 삼아도, 사람이 감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지금 조선국왕은 실로 청조에 대하여 정3품 예부시랑의 관직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불결은 조선의 명물이다. 경성은 말할 것도 없고, 팔도 가는 곳마다, 시가다운 시가를 볼 수가 없다. 우마의 인분은 주머니 안에 넘치고, 그 불결한 것은 말로 할 수가 없다. 시장의 중앙에는 공동변소를 설치 했지만 그것은 다만 짚으로 지붕을 엮고, 거적으로 사방을 두른 조잡한 것이다.
그 분즙으로 개 돼지를 길러, 사람이 들어가면 옆에서 기다렸다가 인분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거의 구토를 하게 된다. 음식물의 불결은 역시 이나라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썩은 생선과 야채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음식물을 조리하는 모양을 볼 때는 어떠한 호걸이라해도 수저를 드는데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요리하는 자가 삶고 볶은 것을 간을 보는 데에 반드시 자기의 손을 갖고 한다. 젓가락 같은 것은 오랫동안 거의 씻은 일이 없고, 콧물을 닦은 손으로 바로 김치 항아리를 젓는 등, 우리나라 사람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조선의 무예 중에 현재 존재하는 것은 다만 궁술뿐이다. 칼과 창이 없지는 않지만, 평일 그것을 연습하는 자는 없다. 활은 반궁으로서 화살의 길이는 우리나라의 것과 다르지 않고 표적은 한 칸 사방 정도의 판자에 ‘혼돈미판’의 표식( 참조)을 그려서, 백보의 거리를 재고 그것을 쏜다. 매년 시험이 있어서 잘 명중시키는 자는 선달의 칭호를 얻게 된다. 또 철포의 표적도 있지만 활과 같이 유행하지는 않는다. 활의 유행은 대개 패배와 승리를 결정하는 하나의 도박이기 때문에 조선 사람의 기호에 맞는 것이다.
경상도 유곡을 지나, 문경에 이르는 길 위에, 산세가 험하고 새가 아니면 통과할 수 없는 좁은 길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곳이 있다. 작년 전부터 이곳에 성곽을 경영했는데, 요즈음 점점 완성 되었다. 이름하여 노고성이라고 한다.
아마도 일본과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아 한인이 사정에 둔하여, 병기가 날로 진보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하다. 한 발의 야전포가 이 성곽을 능히 무너뜨린다는 것을 모르는가.
한인은 우리나라의 부녀가 다홍치마를 바람에 날리며 하얀 정강이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웃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선의 부녀가 유방을 일광에 드러 내놓고 걷는 것을 보고 웃는다.
혼마 규스케가 지었던 조선잡기(朝鮮雜記)에는 조선문제에 정통한 일본인 정탐인의 눈으로 본 조선이 여과되지 않은 채 기술되어 있다.
물론 식민통치를 목적으로 염탐한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그들의 우월의식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눈이었기에 걸러지지 않은 일상 서민들의 삶이 그대로 기술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일본에 건너가 1894년 4월 17일부터 6월 16일까지 이륙신보(二六新報)에 연재하면서 일본의 신민통치에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고 일본인들의 조선 이미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일본의 식민지 논리로 쓰였던 우울한 책이기도 하지만,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고증의 책이기도 하다. 탄생의 배경이 우울하기는 하지만, 100년 전의 과거를 체험해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을 준다.
혼마 규스케
1869~1818. 메이지 시기 조선 전문가로 알려졌으며 「이륙신보」특파원, 천우협天佑俠, 흑룡회黑龍會 회원으로 활동하고 통감부와 총독부가 설치된 뒤에는 관리가 되었다. 대륙경영에 뜻을 품고 우선 조선의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1893년에 처음으로 내한했다.
부산에 머물면서 경성, 중부지방을 정탐하고 행상을 하며 황해도와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정탐했다. 그 후 도쿄에 돌아가 1894년 4월 17일부터 6월 16일자까지 「이륙신보」에 조선 정탐내용을 연재하고, 154편의 글을 한권으로 묶어 7월 1일 간행했는데, 그 책이 바로 「조선잡기」이다.
「조선잡기」는 일본인이 1890년대 전후에 걸쳐 간행한 견문기나 서양인의 여행기 등에 비해 조선의 풍습과 일상생활을 민중들의 삶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밀하게 다루었다.
목차
『조선잡기』 서문 : 한산의 풍운이 정말로 급박하다!
글머리에 : 『조선잡기』는 어떤 책인가?
1부, 지금은 기백이 완전히 죽었다(언어와 역사, 그리고 조선인의 기질)
언어와 문장 / 언문과 이두 / 가야駕洛라는 국호/ 가라시駕洛食 / 먹는다고 하는 말 / 대ㆍ중ㆍ소화小華 / 독립한 적이 드물다 / 한인은 단순하다 / 지금은 기백이 완전히 죽었다 / 어른에 대한 예식 / 싸움 / 무사태평 / 야비野鄙 /풀草本 / 기후 / 호랑이와 산고양이
2부, 동학당의 괴수와 만나다(궁궐, 정치와 관료들의 사정)
국왕전하 / 왕거 / 혼돈을 구별하지 못하다 / 상소 / 과거급제 / 법정 / 형벌 / 무관 / 병정 / / 지방관 / 안성 군수 / 관인은 모두 도적 / 향응 /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 / 동학당의 괴수와 만나다
3부, 의식주와 기이한 풍속(풍속과 생활상, 그리고 습속)
묘지 / 상인喪人 / 혼인 / 조혼 / 조선의 부녀 / 창기 / 창기집 / 처를 손님에게 내놓다 / 남색 / 가마 / 만국의 첫째 / 관의 종류와 모자를 써야 하는 법 / 평상복 / 두루주머니 / 엿장수와 신발수선 / 부인의 기호 / 우산 / 뜨개질 / 세탁과 다듬이질 / 어린아이의 장난감 / 서방과 어린아이 / 지게꾼 / 남자무당 / 질병자 / 방房이라는 글자 / 남은 음식을 탐하는 것 / 상어고기 / 조선의 소금 / 정월놀이 / 풍년춤 / 잉어깃발 / 작은 백지 깃발 / 귀신을 쫓는 부적 / 개 / 고양이와 소 / 교외의 사냥 / 산목 / 하마비 / 하늘의 재앙 / 변소
4부, 시장과 거리, 양반과 평민(경제와 사회상)
지폐에 대한 평 / 통화 / 통화의 운반 / 객주 / 경성의 금리 / 경성의 큰 통로 / 도로 / 인삼 / 경성의 책방 / 경성의 종루와 지방의 고루 / 시장 / 남대문의 아침시장 / 한인의 물건 파는 광경 / 복권(만인설) / 가뭄 / 농기구 / 농작물을 재배하는 밭 / 제방 / 공동정신 / 목축업 / 토지소유대장 / 절영도 / 친척의 변상 / 양반과 상한 / 양반족 / 상한족 / 기생 / 노예제도 / 장례 / 여의사 / 정려문 / 일거양득 / 복통약 / 에다穢多_백정 / 유일한 이로움 / 우두의사 / 인천 / 송도 / 조령 / 사원 / 통도사
5부, 무예는 궁술만 남았다(문화와 예술)
무예 / 종교 / 석무정石無情 / 좋은 시화 / 속된 노래 / 기둥에 쓰는 글 / 시를 짓다 / 고 기와와 토우 / 골동품
6부, 청국의 야심과 일본의 열세(외국인과 국제관계)
방척주의 / 일본인과 청국인의 세력비교 / 청국의 야심, 한정의 유약, 일본의 무위 / 경성에 있는 일본인 관리 / 싼 물건 판매 / 중국인 / 신문지 / 교육의 일반 / 일본어 학교 / 자본이 필요하지 않다 / 부정한 과세 / 부산에 있는 한국 부인 / 어민보호 / 조선에 있는 일본인 승려 / 우물안의 개구리
7부, 목욕탕인가 초열지옥인가(조선정탐의 고락과 일담)
십리표 / 여름 여행 / 해주의 목욕탕 / 주인이 잡혀가다 / 조선의 옛 기물 / 선착장 / 약행상 / 여행자의 휴대품 / 요리점과 여관 / 촌락 / 시가의 불결 / 시가의 불결 / 길옆의 부뚜막 / 나쁜 새 퇴치 / 도적 / 새옹지마 / 나쁜 새 퇴치
8부, 잡조雜俎 : 기타 자잘한 정탐 내용들
해제 : 일본은 19세기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부록 : 사진으로 보는 19세기 말 조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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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삼
정탐인의 눈으로 본 조선이 "여과되지 않은 채"가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걸러서" 기술돼 있다.
이 시기에도 조선의 여인들이 겪는 빈궁함과 노고와는 별도로 날마다 흰옷을 빨아 깨끗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일본의 가난한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의 초라하고 불결한 행색은 왜 또 없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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