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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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을 괴롭힌 근친 간의 밀애
세종과 15세기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도덕과 윤리를 문명의 척도로 여겼다. 그런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사회 현실은 비참하였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는 자유분방한 이성 교제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적인 기준에서 크게 빗나갔다.
왕은 도덕의 기치를 세우리라 결심하였고, 공권력을 동원해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적발하였다. 범죄자는 모두 중벌로 다스렸는데, 대형사건도 일어났다.
세종 5년(1423) 9월 25일, 대사헌 하연이 지신사(도승지) 조서로를 고발했다. 조서로는 퇴직한 대신 이귀산의 처 유씨와 내연 관계였다. 왕은 조서로의 관직을 빼앗고 경상도 영일로 유배보냈다. 그의 정인(情人) 유씨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였다(세종 5년 10월 8일).
“유씨는 대신의 아내인데도 음탕한 짓을 하였다”라며, 임금은 그를 사흘 동안 저잣거리에 세웠다가 목을 베었다. 조서로는 개국공신 조반의 큰아들이라 극형을 모면하였다.
조서로와 유씨는 친척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출가한 유씨는 승복을 입고 친척 조서로의 집에 출입하였다. 조서로가 14세 될 때부터 그들은 연인이었다. 얼마 후 환속한 유씨는 대신 이귀산과 결혼했으나, 조서로와의 연인 관계는 이어졌다. 유씨는 이따금 조서로에게 편지를 보내 친척 집에서 밀회하였다.
이 사건을 끈덕지게 추적한 이는 사헌부 지평 남지였다. 그는 조서로의 하인(丘史)들을 체포해 상전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하였다.
또, 밀회 때 유씨의 심부름을 한 노인을 다그쳐 두 사람의 내밀한 관계를 확인하였다. 세종이 혼외관계를 척결할 의지를 가진 때문에, 남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했다고 전한다.
<<실록>>에는 혼외정사로 고발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대개 친척 관계였다. 세종 10년(1428) 윤4월 1일자 실록은 홍양생과 유연생의 사건을 기록하였다. 양반 홍양생은 모친 상중이었음에도 사촌 유연생과 몰래 만났다. 유연생은 어엿한 관리의 아내였고 부친상을 입은 처지였다.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가 드러나자 유연생은 매를 맞고 경상도 울산으로 귀양갔고, 홍양생도 매질 당한 후 유배지인 경상도 고성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세종은 풍속을 뜯어고칠 결심을 더욱 확고히 다졌다.
“중국은 남녀 간의 분별이 엄해서 친자매의 얼굴도 못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풍속은 남성이 자매를 만나는 것을 미풍이라 한다. 그래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세종 11년 6월 16일)
왕은 누나든 누이동생이든 남성이 여성을 만나면 절대 안 된다고 믿었다.
우의정 맹사성은 반대의견을 넌지시 밝혔다. “이성 사촌이면 상복은 입지 않는 친척이지만, 서로 만날 수 없게 하신다면 풍속이 너무 야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종은 도덕 최우선 정책을 고집하였다. “풍속이 박해지더라도 남녀 간의 분별은 뚜렷이 하겠다.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세종 11년 6월 23일)
유교 고전을 중심으로 예법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 세종의 목표였다. 왕은 대신 황보인에게도 거듭 강조하였다.
“옛사람이 말씀하기를, ‘형수와 시동생(嫂叔)은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풍속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니 크게 잘못된 것이다.”(세종 12년 윤12월 24일)
왕은 성리학의 고전을 기준으로 삼는 한편, 자신에게 익숙한 궁중의 관행도 새 예법에 포함시킬 뜻을 보였다. 부왕 태종 시절의 관행대로 왕비의 처소(내전)에서 잔치를 열 때면 왕자는 물론이요, 사위(부마)도 함께 자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왕은 이 문제를 중대한 사안이라고 여겨, 대신의 의견을 널리 청취하기로 하였다. 대신들은 왕의 사위가 내전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고, 왕은 두말없이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 참 너그러운 왕이었다.
앞에서도 서술했듯, 근친 간의 은밀한 애정 관계가 흔한 시대였다. 왕은 이를 악습으로 규정하고 그 뿌리를 뽑으려고 하였다. 마침내 왕은 조혼제도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세종 9년의 일이었다.
왕이 이 문제로 대신들과 거듭 상의하였는데, 변계량은 법령을 엄격히 집행해 친척 간의 이성 교제를 금하자고 하였다. 허조는 조선 여성의 경박한 정조 관념을 문제 삼는 한편, 남성들도 성폭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도덕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보았다.
대신들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세종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였다.
“여성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은 결혼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혼기를 절대 놓치지 않게 만들자고 왕은 주장하였다. 그러자 변계량이 결혼 연령을 15세로 정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세종 9년 9월 4일)
조혼법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대신들의 지지를 얻자, 세종은 이 문제를 자세히 논의하여 결과를 보고하라고 주문하였다. 10여 일 뒤 신하들이 숙의한 결과가 윤곽을 드러냈다.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즉 주희(朱熹)가 정한 예법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예법을 주관하는 예조가 올린 최종 보고서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현행법에 명시한 대로 남성은 15세, 여성은 13세부터 결혼을 허락한다. 다만 언제까지 결혼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서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이 많은데, 이제부터는 《주문공가례》에 따라서 여성은 14세부터 20세까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관청의 허락을 얻어 조금 미룰 수 있다. 관청은 혹여 약속한 기한을 넘기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서 법대로 처벌한다.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법에 조혼을 상세히 규정했다.
또, 왕은 동성혼의 금지법도 정밀하게 살펴보았다. 일찍이 어느 대신이 아뢰기를, 고려 때는 왕족들도 서로 결혼하였고, 양반들도 근친혼을 했다고 하였다. 성리학자 정몽주가 동성혼을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대신의 말을, 세종은 기억하였다.
조선왕조는 동성혼을 법으로 규제하였고, 타성이라도 5~6촌까지는 결혼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은 이 법이 좋다고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그 영향으로 근친 간에 연애 사건이 발생하는지 모르겠다고 근심하였다.
왕은 의문을 풀기 위해 집현전에 명하여 결혼제도를 역사적으로 조사하게 하였다. (세종 12년 12월 18일) 친족 간의 이성 교제를 근원적으로 타파하기 위해서 왕은 실로 다방면에 걸쳐 노력하였다.
다년간 애쓴 효과가 없지 않아, 조혼은 조선의 새로운 관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근친인 남녀의 사귐도 사회적 금기로 굳어졌다. 우리 귀에 익숙한 조선사회의 엄격한 남녀구별이야말로 세종이 만든 신풍속이었다.
출처: 백승종, <<세종의 선택>>(사우, 2021)
사족: 우리는 보통 세종대왕이라는 이름 아래서 현대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가치를 무조건 다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합리성, 과학성, 창의성, 민주주의 등 현대적 가치를 600년 전의 인물인 세종에게서 모두 재발견하려는 것인데요. 그렇게 될 수는 없어요.
역사는 이미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옛날의 사건과 언행에서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엄연히 제한된 것입니다. 세종도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왕에게는 훌륭한 정신과 태도가 있었으나, 21세기의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시대적 한계라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종은 "유교적(정확히는 성리학적) 문명화"를 정열적으로 추구한 왕이었고요. 우리가 찬탄해 마지않는 그 시대의 발견, 발명, 창안도 대개는 바로 그 문명화를 위한 도구였습니다. 한글도, 천문학도, 의학이나 역사 연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종 시대의 발전은 이미 한계가 명확한 것이기도 하였고요.
세종의 업적을 기릴 적에도 우리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를 전지전능한 위인이라 치켜세우는데, 불필요한 일이고 잘못된 평가일 것입니다. 물론 그가 이룬 수많은 업적을 시대적 한계라는 틀에 가둬놓고 폄하하는 것도 명백한 잘못이지요.
지나친 미화나 우상화도 아니고, 현대적 가치로 함부로 재단하지도 않으면서 세종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을까요. 저는 이런 고민을 가지고 <<세종의 선택>>을 썼습니다. 색안경을 벗고, 말짱한 맨눈으로 역사를 한번 읽어보자는 것입니다.
왕은 도덕의 기치를 세우리라 결심하였고, 공권력을 동원해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적발하였다. 범죄자는 모두 중벌로 다스렸는데, 대형사건도 일어났다.
세종 5년(1423) 9월 25일, 대사헌 하연이 지신사(도승지) 조서로를 고발했다. 조서로는 퇴직한 대신 이귀산의 처 유씨와 내연 관계였다. 왕은 조서로의 관직을 빼앗고 경상도 영일로 유배보냈다. 그의 정인(情人) 유씨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였다(세종 5년 10월 8일).
“유씨는 대신의 아내인데도 음탕한 짓을 하였다”라며, 임금은 그를 사흘 동안 저잣거리에 세웠다가 목을 베었다. 조서로는 개국공신 조반의 큰아들이라 극형을 모면하였다.
조서로와 유씨는 친척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출가한 유씨는 승복을 입고 친척 조서로의 집에 출입하였다. 조서로가 14세 될 때부터 그들은 연인이었다. 얼마 후 환속한 유씨는 대신 이귀산과 결혼했으나, 조서로와의 연인 관계는 이어졌다. 유씨는 이따금 조서로에게 편지를 보내 친척 집에서 밀회하였다.
이 사건을 끈덕지게 추적한 이는 사헌부 지평 남지였다. 그는 조서로의 하인(丘史)들을 체포해 상전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하였다.
또, 밀회 때 유씨의 심부름을 한 노인을 다그쳐 두 사람의 내밀한 관계를 확인하였다. 세종이 혼외관계를 척결할 의지를 가진 때문에, 남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했다고 전한다.
<<실록>>에는 혼외정사로 고발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대개 친척 관계였다. 세종 10년(1428) 윤4월 1일자 실록은 홍양생과 유연생의 사건을 기록하였다. 양반 홍양생은 모친 상중이었음에도 사촌 유연생과 몰래 만났다. 유연생은 어엿한 관리의 아내였고 부친상을 입은 처지였다.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가 드러나자 유연생은 매를 맞고 경상도 울산으로 귀양갔고, 홍양생도 매질 당한 후 유배지인 경상도 고성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세종은 풍속을 뜯어고칠 결심을 더욱 확고히 다졌다.
“중국은 남녀 간의 분별이 엄해서 친자매의 얼굴도 못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풍속은 남성이 자매를 만나는 것을 미풍이라 한다. 그래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세종 11년 6월 16일)
왕은 누나든 누이동생이든 남성이 여성을 만나면 절대 안 된다고 믿었다.
우의정 맹사성은 반대의견을 넌지시 밝혔다. “이성 사촌이면 상복은 입지 않는 친척이지만, 서로 만날 수 없게 하신다면 풍속이 너무 야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종은 도덕 최우선 정책을 고집하였다. “풍속이 박해지더라도 남녀 간의 분별은 뚜렷이 하겠다.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세종 11년 6월 23일)
유교 고전을 중심으로 예법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 세종의 목표였다. 왕은 대신 황보인에게도 거듭 강조하였다.
“옛사람이 말씀하기를, ‘형수와 시동생(嫂叔)은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풍속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니 크게 잘못된 것이다.”(세종 12년 윤12월 24일)
왕은 성리학의 고전을 기준으로 삼는 한편, 자신에게 익숙한 궁중의 관행도 새 예법에 포함시킬 뜻을 보였다. 부왕 태종 시절의 관행대로 왕비의 처소(내전)에서 잔치를 열 때면 왕자는 물론이요, 사위(부마)도 함께 자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왕은 이 문제를 중대한 사안이라고 여겨, 대신의 의견을 널리 청취하기로 하였다. 대신들은 왕의 사위가 내전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고, 왕은 두말없이 그들의 의견을 따랐다. 참 너그러운 왕이었다.
앞에서도 서술했듯, 근친 간의 은밀한 애정 관계가 흔한 시대였다. 왕은 이를 악습으로 규정하고 그 뿌리를 뽑으려고 하였다. 마침내 왕은 조혼제도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세종 9년의 일이었다.
왕이 이 문제로 대신들과 거듭 상의하였는데, 변계량은 법령을 엄격히 집행해 친척 간의 이성 교제를 금하자고 하였다. 허조는 조선 여성의 경박한 정조 관념을 문제 삼는 한편, 남성들도 성폭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도덕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보았다.
대신들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세종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였다.
“여성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은 결혼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혼기를 절대 놓치지 않게 만들자고 왕은 주장하였다. 그러자 변계량이 결혼 연령을 15세로 정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세종 9년 9월 4일)
조혼법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대신들의 지지를 얻자, 세종은 이 문제를 자세히 논의하여 결과를 보고하라고 주문하였다. 10여 일 뒤 신하들이 숙의한 결과가 윤곽을 드러냈다.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즉 주희(朱熹)가 정한 예법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예법을 주관하는 예조가 올린 최종 보고서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현행법에 명시한 대로 남성은 15세, 여성은 13세부터 결혼을 허락한다. 다만 언제까지 결혼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서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이 많은데, 이제부터는 《주문공가례》에 따라서 여성은 14세부터 20세까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관청의 허락을 얻어 조금 미룰 수 있다. 관청은 혹여 약속한 기한을 넘기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서 법대로 처벌한다.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법에 조혼을 상세히 규정했다.
또, 왕은 동성혼의 금지법도 정밀하게 살펴보았다. 일찍이 어느 대신이 아뢰기를, 고려 때는 왕족들도 서로 결혼하였고, 양반들도 근친혼을 했다고 하였다. 성리학자 정몽주가 동성혼을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대신의 말을, 세종은 기억하였다.
조선왕조는 동성혼을 법으로 규제하였고, 타성이라도 5~6촌까지는 결혼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은 이 법이 좋다고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그 영향으로 근친 간에 연애 사건이 발생하는지 모르겠다고 근심하였다.
왕은 의문을 풀기 위해 집현전에 명하여 결혼제도를 역사적으로 조사하게 하였다. (세종 12년 12월 18일) 친족 간의 이성 교제를 근원적으로 타파하기 위해서 왕은 실로 다방면에 걸쳐 노력하였다.
다년간 애쓴 효과가 없지 않아, 조혼은 조선의 새로운 관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근친인 남녀의 사귐도 사회적 금기로 굳어졌다. 우리 귀에 익숙한 조선사회의 엄격한 남녀구별이야말로 세종이 만든 신풍속이었다.
출처: 백승종, <<세종의 선택>>(사우, 2021)
사족: 우리는 보통 세종대왕이라는 이름 아래서 현대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가치를 무조건 다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합리성, 과학성, 창의성, 민주주의 등 현대적 가치를 600년 전의 인물인 세종에게서 모두 재발견하려는 것인데요. 그렇게 될 수는 없어요.
역사는 이미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옛날의 사건과 언행에서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엄연히 제한된 것입니다. 세종도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왕에게는 훌륭한 정신과 태도가 있었으나, 21세기의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시대적 한계라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종은 "유교적(정확히는 성리학적) 문명화"를 정열적으로 추구한 왕이었고요. 우리가 찬탄해 마지않는 그 시대의 발견, 발명, 창안도 대개는 바로 그 문명화를 위한 도구였습니다. 한글도, 천문학도, 의학이나 역사 연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종 시대의 발전은 이미 한계가 명확한 것이기도 하였고요.
세종의 업적을 기릴 적에도 우리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를 전지전능한 위인이라 치켜세우는데, 불필요한 일이고 잘못된 평가일 것입니다. 물론 그가 이룬 수많은 업적을 시대적 한계라는 틀에 가둬놓고 폄하하는 것도 명백한 잘못이지요.
지나친 미화나 우상화도 아니고, 현대적 가치로 함부로 재단하지도 않으면서 세종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을까요. 저는 이런 고민을 가지고 <<세종의 선택>>을 썼습니다. 색안경을 벗고, 말짱한 맨눈으로 역사를 한번 읽어보자는 것입니다.
551이동해, Woo Fa and 54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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