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도피적 열광, 환각으로 평화 행복 이를 수없다”
등록 :2021-11-23 21:25수정 :2021-11-2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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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기자
[오강남 종교학자·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예수·부처 등 선각자들은
지금의 나에서 해방되어
‘참나’를 찾으라고 해
일상의 어려움 같은 것은
새옹지마·고진감래 원리를
기억하며 기다리는 편
에리히 프롬의 안식일 의미
6일은 소유 위해 산다 하더라도
하루는 존재 위해 살자는 것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해 활동량과 대면 접촉이 줄면서 활동반경은 줄고, 불안과 우울 지수는 높아졌다. 코로나19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 못지않게 지나친 불안과 우울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때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평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지혜를 찾아 <한겨레>가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시리즈를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다섯번째 멘토는 종교학자 오강남(79)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다.
기복적인 표층신앙인, 이기적 나를 벗어나 참나로 나아가는 심층신앙을 진정한 평화와 안락의 길로 제시하는 오강남 교수. 조현 기자
오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마스트대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지냈으며, <예수는 없다>와 <장자> <도덕경>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 <종교란 무엇인가>등 베스트셀러의 저자다. 지난 2006년 은퇴한 뒤엔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강좌나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2년 만에 귀국한 오 교수를 지난 17일 서울 중구 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여기저기 강연초대에 불려 다니느라 분주하다. 며칠 전엔 오대산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을 오르는 중에 달리는 차를 피하다 넘어져 눈 부위에 찰과상을 입었지만 미쳐 못 본 고국의 산하를 둘러볼 생각에 하산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캐나다 밴쿠버에 살면서도, 한국이 캐나다보다 훨씬 발전된 전자시스템을 보여 매번 놀라게 된다며 고국의 발전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갤럽이 한국의 종교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시대별로 변화는 있지만, 한국인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로 ‘마음의 평안’이란 답이 60~70%로 가장 많다. ‘죽음 뒤의 영원한 삶’이나 ‘복을 받기 위해’나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를 압도한다. 종교의 정수를 보여준 성현들의 사상을 예리하게 간추려내고 해석해 대중들에게 전해준 종교학자가 보는 ‘마음의 평안법’은 무엇일까. 개신교 가정에 자라 서울대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 재학 때까지도 기독교를 근간에 두고 공부하다가 캐나다에 유학 가서 불교와 노장 등 동양종교사상을 접하고,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의식의 큰 전환을 경험한 오 교수는 동서고금 모든 종교 사상을 회통한다. 그는 학자이면서도 이론보다는 ‘아하!’ 하며 깨달아가는 체험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종교체험’에 대한 강조는 자칫 오해를 불러오기 쉽다. 특히 고대부터 한민족의 의식과 문화 속에 깊게 내재해 있는 무교의 영향으로 개신교에서도 방언과 열광적인 성령 체험을 강조하며 반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오 교수는 그런 현실도피적이고 반이성적인 열광주의와 성령주의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위한 종교의 길과는 반대임을 분명히 했다. 인간의 의식을 3단계로 나누면 보통의 이성적인 의식을 초월해 이타적 사랑과 평화의 화신이 되는 게 종교적이라면, 히피처럼 마약을 해서라도 이성 이전으로 가는 것은 반종교적 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울고 웃고 광적인 열광으로 환각 상태로의 도피는 종교의 길과는 반대라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전(前)이성’과 ‘초(超)이성’,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을 ‘전초오류’”라며 “기독교적으로 보더라도 이성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쓰라고 준 것이므로 먼저 이성적이 되고 나서 사랑과 평화의 초이성체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기복적인 표층신앙에서 이기적 나를 벗어나 ‘참나’로 나아가는 심층신앙을 진정한 평화와 안락의 길로 제시한다.
특히 오 교수는 크리스천으로 자랐으면서도 개신교의 독선과 배타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문자주의적 맹신을 넘어서야 진정한 크리스천,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갖는 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일문일답이다.
―성령이 임했다든가, 거듭났다든가 등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랑이나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경우는 왜 그런가?
“이성을 넘어선 초이성 체험은 사랑이나 평화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 이전은 본능적이다. 어떤 사람이 산에서 기도 하고 성령을 받았다면서 집에 와서 폐물이 없어진 것을 보고, 성물까지 집어 던지며 타인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성령을 받았다면서 윤리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진짜 성령을 받으면 이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도, 사랑까지 넘친다. 이성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세에 신과 합일을 추구하고, 그것을 이룬 신비주의자들이 거치는 단계가 있다. 첫째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고, 흠이 많은 삶을 회개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정결 단계다. 두번째는 빛을 본다거나 내면의 깨달음을 얻는다. 세번째는 자신이 없어지니, 그대로 신이 되어 신과 합일을 이룬다. 내가 없어지는 단계에서는 최고의 겸손을 보인다.”
―현대인들의 마음 건강과 내적 평화를 위해 소개하고 싶은 현인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종교적 선각자들이 한결같이 가르치는 것은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므로 지금의 나에게서 해방되어 ‘참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를 따르는 조건으로 지금의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고, 부처님도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무아(無我)를 가르쳤다. 개신교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류영모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제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것이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한다. 지금의 내가 없어지고 큰 나를 찾게 되면 그 큰 나는 결국 절대자나 우주와 ‘하나’되게 된다고 가르친다.”
―삶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나 비난을 받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척추협착증으로 캐나다에서 두번 수술을 받았다. 그런 일상의 사소한 어려움 같은 것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 )나 고진감래(苦盡甘來·고생 끝에 낙이 옴)의 원리를 기억하며 기다리는 편이다. 단 고진감래만이 아니라 감진고래(甘盡苦來·즐거움 뒤에 고통이 옴)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한다. 순풍에 돛 단 듯이 가다가도 언젠가 파도나 태풍을 만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예수는 없다> 출간 이후 보수 쪽 목사들이 공격했지만, 별로 충격을 받지 않았다. 누구든 내 의견에 반대하고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위해 자신만이 하는 명상이나 기도가 있는가?
“한때 확철대오(완전한 깨달음)의 경험을 해볼까 애써보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알고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퀘이커(기독교의 한 교파)뿐 아니라 캐나다연합교회 모임에 종종 참석한다. 캐나다에서도 가장 열려있는 곳이다. 퀘이커는 한시간 동안 가만히 있다가 명상만 한다. 참선도 한다. 또 한국이나 일본의 선방에 가서 참선도 해본다. 학위 받고 혼자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마이애미대에 가 있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냉수마찰도 하고 열심히 명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부정기적으로나마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고, 독서삼매에서 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경험도 한다. 옛 영성가들의 저작을 차근차근 읽을 때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에스비에스비즈>티브이 프로그램을 통해 캐나다와 서울을 연결해 오강남 교수가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와 대담을 하고 있다. <에스비에스 비즈> 프그램 화면 갈무리
―예수님의 첫 가르침인 ‘회개하라’는 것은 죄를 뉘우치라는 것보다 새로운 의식, 새로운 가치관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율법주의를 버리고, 사랑을 가르친 이가 예수님이다. 그 당시 유대교에서는 사람들을 만나면 ‘누가 깨끗하냐 안 깨끗하냐, 정결하냐 더러우냐’만을 따졌다. 구약 레위기에 의해 당시 정결하지 않다고 여긴 창녀와 병자들, 장애인들을 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멀리한 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도왔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의로워라’는 구약을 ‘하나님이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며 누구든 자비롭게 대하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이 핵폭탄이자 빅뱅이다. 그러나 늘 내쳐지던 약자들에게 예수님은 진리요 생명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종교 성자들과 비교한 배타적 진술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한 개인들의 고백적 언어다. 그렇게 시작된 게 예수 운동이다.”
―종교에도 단계가 있다고 하셨는데, 종교적 성장이란 무엇인가?
“하버드대 심리학부에 있다가 에모리대로 옮겨간 제임스 파올로 교수가 <신앙의 발달 단계>에서 6개의 단계를 제시했다. 처음엔 직관적인 단계. 의심 없이 말한 대로 받아들이는 단계다. 두번째는 신화적·문자적으로 믿는 단계다.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듣고 정말 굴뚝으로 산타클로스가 들어온다고 믿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는 의심이 되는데 설명하면 받아들이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가 문자주의 단계다. 미국의 성직자들은 교인들이 이 3단계에 머물게 한다. 제일 높은 단계가 보편화의 단계로, 보편적인 것을 보는 단계다. 간디나 디트리히 본회퍼(독일 루터교회 목사·신학자)나 테레사 수녀 같은 인물들이 도달한 단계라고 한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은 안식일은 자연 파괴를 멈추는 것으로 보았다. 뭔가 일을 한다는 것은 건설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이므로, 적어도 하루는 훼손하지 말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라고 한다. 프롬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게 ‘존재냐 소유냐’다. 6일은 소유를 위해 산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하루는 존재를 위해서 살자는 것, 즉 얼마나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존재 자체를 즐기고 살자는 게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요수아 헤셀(유대교 신학자·랍비)은 좀 더 철학적으로 봤다. 이 세상에는 두가지의 정신적인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공간을 중시하고, 하나는 시간을 중시하는 것이다. 공간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성전이 발전했고, 시간을 중시하는 데서는 안식일이 나왔다는 게 헤셀의 해석이다. 안식일 자체가 성전 노릇을 하며, 신과 교통하게 한다는 것이다.”
― 2001년께 낸 <예수는 없다>는 널리 알려졌는데, 통상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알고 있는 예수와 진짜 예수는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은 50대 스웨덴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고, 눈이 파란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영국 <비비시>(BBC)에서 예수님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예루살렘 해골들을 분석해 보니 예수님은 머리가 까맣고, 코가 납작하고, 키가 작은 전형적인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 신체적인 것만이 아니다. 진짜 가르침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 무엇이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인가 하면, 죄를 지으면 다 용서해주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었는데, ‘회개하라’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테’다. 명사형은 ‘메타노이아’다. ‘뭘 넘어서다’, ‘바꾼다’는 뜻이다. 쉬운 말로 하면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노이아’는 의식이다. ‘우리의 의식을 넘어서라. 의식을 바꿔라’라는 것이다. 그건 ‘잘못했으니 뉘우친다’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가치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서 톡 떨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라는 소리다.”
―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는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에도 불교에도 표층이 있고, 심층이 있다. 전통마다 더 두껍거나 얕은 데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표층종교인들이다. 표층종교의 특징은 첫째 기복적이다. 헌금하고 기도하는 것도 자신이 잘되려고 한다. 한편, 지금의 나를 떠나서, 진짜 나를 찾으려는 노력이 심층종교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은 심층종교로 이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류영모 선생님은 ‘탐진치 삼독’(탐욕·성냄·어리석음)으로 꽉 차있는 ‘제나’가 ‘정신적인 나’이자 ‘참된 나’인 ‘얼나’로 변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져라’고 했다.
표층종교의 두번째 특징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무조건 믿어라’. ‘이성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 표층종교에선 독립적 사고를 몰수당할 위험성이 크다. 심층종교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해하고 헌신하는 태도가 ‘심층’이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 표층종교에서는 신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 신과 인간을 분리한다. 심층종교에서는 신과 내가 하나다. 신 속에 내가 있고, 나의 안에 신이 있다. 내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신인 것이다. 신이 내속에 있지만, 사실은 그게 나다. 동양에서 많이 쓰는 만물일체, 동귀일체가 심층종교의 핵심이다. 지금의 나를 없애고 진짜 나를 찾으면 신과 합일되는 경지에 이른다. 표층종교는 문자주의에 매달린다. 문자주의에 매달리면 종교는 그때부터 힘이 없어진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말한다면 문자 뒤의 속내를 알 필요도 없어서 결국 모르게 된다. 모든 문자는 상징인데 말이다.”
―문자주의는 왜 문제인가?
“‘호랑이 담배 먹는 시절’이란 표현은 아주 오랜 옛날이란 의미로 쓰이는데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호랑이도 그때는 담배를 피웠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피 스퐁 신부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맹신하는, ‘문자주의는 이단’이라고 했고, 문자주의 신봉자들은 2천년 동안 헛다리를 짚었다고 했다. 실제 당시 하나님이란 말을 못 쓰니 대신 하늘나라라고 썼다. 한국에선 이를 천국이라고 번역하는데, 그건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지배하는 ‘신국’이다. 문자주의에는 반동적 문자주의도 있다. 가령 산타클로스가 진짜 온다고 믿었다가 어른이 되면 안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다고 주장하는 게 반동적 문자주의다. 일반 신도들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신도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진다고 생각해서 이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등의 성경 구절을 예로 들면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는가?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구절을 살펴보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주는데, 다른 데를 보니 다른 신의 이름으로도 병을 잘 고치고 있었다. 제자들이 ‘우리도 다른 이름으로 고치면 어쩌냐’고 바오로에게 물으니 그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한 것이다. 다른 종교와 다 비교해서 예수님만이라고 한 게 아니다. 체구가 조그만 아이가 엄마를 따라 복잡한 시장에 갈 때 엄마가 ‘내 손 놓으면 죽는다’, ‘내 말 잘 들어야 돼’라고 하는 것은 ‘내가 길이요, 진리니 내 말만 잘 들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우리 엄마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다른 엄마들은 다 가짜라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 개신교인 중엔 강한 배타성으로 다른 종교와 종파는 이단이고, 마귀고, 그 종교를 믿는 이들은 지옥에 간다고 하는 이가 많지 않은가?
“예수님은 한번도 그런 하나님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구약의 야훼에 대해서도 한번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것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으니, 내 종교로 오라’는 게 아니다. ‘종교의 짐에서부터 벗어나라. 자유를 얻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보내, 영원히 불에 타도록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서구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미국 성공회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같은 기독교라도,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인습적이고 제례적인 종교와 변화와 변혁을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종교로 나뉜다고 했다.”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은 땅끝까지 전도하라는 게 예수의 명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가?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말을 몰랐고, 자신이 종교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 속에 살게 하려는 것이었지, 특정 종교제도 속에 우리 인간을 넣으려고 한 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든 나라에 보내, 너희는 땅끝까지 전도하라. 제자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일 수 없다. 거기서 나오는 삼위일체 사상은 서기 3~4세기 후에 나온 것으로, 예수님이 생존하던 당시엔 삼위일체 사상이 없었다. 예수님은 유대 땅을 다 돌기 전에 세상이 끝날 거라고 했는데, ‘땅끝까지 전도하라'고 했다니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는 없다>에서 캐나다 최대 개신교 교단인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빌 핍스 목사가 1997년 <오타와 시티즌>과 한 인터뷰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밝힌 내용을 소개해 한국 개신교 목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어떻게 보나?
“빌 핍스 목사는 변호사이고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인권 행진도 함께한 깨어있는 목사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했냐’는 질문에, ‘내 속에 살아계신다’고 하며,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핍스 목사의 인터뷰에 제일 반박을 많이 한 게 캐나다에 있는 한인교회 목사들이었다. 핍스 목사의 글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예수는 없다>가 됐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어떻게 그렇게 열려있나?
“은퇴하고, 밴쿠버 유비시알연합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어떤 수업에 들어가든 세가지를 강조하라고 했다. 첫째는 생태·기후환경. 두번째는 성평등. 세번째는 종교 다원주의를 강조하라고 했다. 그것이 학교 지침이다. 캐나다연합교회도 그런 지침이 현대 기독교가 나아갈 길이므로, 교회에서도 종교다원주의를 포함해 가르치라고 했으나, 한국교회는 이 지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교회가 소속된 가장 큰 연합기관이다. 캐나다에서도 한인교회들은 그렇게 폐쇄적이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폐쇄적이다. 원래 종교든, 문화든 번져갈 때 원래 있던 곳보다 새롭게 받아들인 곳이 더 근본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유럽보다 미국 기독교가 더 근본주의적이고, 미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이 더 그런 것처럼 말이다.”
―부활이 기독교의 핵심이고, 예수님 살아있던 그 당시에도 종말이 당대에 올 것처럼 여기기도 했는데, 부활과 심판의 날은 어떻게 보는가?
“심판의 날은 구약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종교들에서도 나오는데,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것이다. 무덤에서 새로 나오는 게 아니고,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으니,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게 천국에 가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보다 쉬운 게 없다. 그런 식의 믿음은 믿는 거라고 할 수 없다.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에 의하면 믿음은 ‘궁극 관심’이다. 내게 가장 중요해서, 궁극 관심의 대상을 무엇으로 하느냐.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부정부패로 돈을 벌어도 돈을 조금 내면 축복해주고, 교회 나가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한다. 영화 <밀양>을 보면 사람을 죽여 놓고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건 참된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가짜 믿음이다. 또 하나는 이념.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 과학주의 등 이런 것에 목숨을 거는 믿음은 진짜 믿음에 가깝지만, 이 또한 유사 믿음이다. 진짜 궁극적인데 관심을 갖는 것이 참믿음이다. 궁극적인 관심은 내가 없어지고,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한 철학>를 보면, ‘나와 브라만이 하나다’라는 그것에 관심을 갖는다. 하늘나라 가는 것을 ‘궁극 관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예수는 없다>를 읽은 세명의 목사가 공격을 했을 때 어떻게 반박했나?
“갈릴레오의 예를 들었다. 갈릴레오가 태양이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도는 것이라고 했을 때 교회는 반대했다. 갈릴레오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다며 갈릴레오를 정죄했다. 가톨릭은 뒤늦게 갈릴레오를 사면했다. 문자주의는 말이 안 된다. 신학적으로, 문자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성령 숭배라고 한다. 재밌는 게 가톨릭은 전통을 중요시하고, 개신교는 전통을 뒤에 놓고 성경을 절대화한다. 사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다. 당연시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게 받아들이는 게 프로테스탄트다. 이런 정신에 상반되게 한번 결정된 교리는 바뀔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다. 신학은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 주장하는 것들은 17~19세기에 그때 상황에 맞게 만들어 놓은 이론이다. 약으로 치면 그때 인간을 죽음으로 내모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내놓은 약이다. 지금은 앓고 있는 병이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면 성경을 옛날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후서 3장6절에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 했다. 문자 뒤에 있는 정신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스퐁 신부는 일관되게 문자주의 배격했다. 기독교가 살아나려면 문자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하는데,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 홍수’는 가능한 것인가?
“문자적으로 불가능하다. 공룡을 실으면 어떻게 되겠나. 모든 동물을 실으면 배설물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런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 해주신다고 하는데, 그럼 다른 방법을 쓰지 왜 홍수를 일으켜 배를 만들고, 다 거기에 싣는가. 노아의 홍수는 인간의 의식 발달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도 1장과 2장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1장 이야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되어있고, 2장4절 이후엔 야훼 다큐다. 1장에선 새들과 짐승을 만든 다음에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2장에선 인간을 먼저 만들고 나서, 인간이 심심할까 봐 짐승들을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경 편집자가 짜깁기하다 이렇게 된 듯하다. 따라서 성서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창조과학처럼 결론을 내놓고 하는 건 과학이 아닌 유사 과학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서 ‘아무 형상(이미지)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자 이미지, 즉 사진찍기를 거부해 운전면허증도 못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보수 개신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며 발목 잡는 근거로 삼는 동성애 반대도 성경에 근거하는가?
“성경에 동성애 하지 말라는 게 레위기에 있다. 성경에 하지 말라는 게 그것만은 아니다. ‘혼방으로 된 옷은 입지 말라’거나 ‘밭에 여러 씨앗을 뿌리지 마라’, ‘월경 때는 불경하니 성전에 가지 마라’, ‘장애인은 성전에 들어가지 마라’는 것들도 있다. 지금 기독교에서는 전부 무시해 버리는 것들이다. 다른 건 다 무시하면서, 오로지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것이 좋지 않다며 반대하는 것은 형평성의 원리에도 어긋난다. 지키려면 다 지키고, 버리려면 다 버리면 몰라도 말이다.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애가 안 된다는 것은 성경을 오남용하는 것이다. 특히 성경에 함의 자손이 흑인이라는 말이 없는데도, 흑인으로 규정해 흑인은 노예가 되어야지 친구가 되면 안 된다고 한다. 과거 미국 남부에선 아이들이 흑인들과 놀면 성경에 종으로 삼으라고 했다며 못 놀게 할 때도 있었다.”
―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대형교회 확장의 일등공신이 되었는데, 기복신앙을 어떻게 평하나?
“모든 종교의 거의 모든 신자들은 표층신앙부터 시작한다. 빌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점점 표층신앙에서 자라나서 심층신앙으로 들어간다. 더 성장하지 못 하고 표층신앙에서만 멈추면 종교적 발달 장애다. 기복신앙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기복신앙에서 출발해 더 성장하지 못 하고 끝까지 기복신앙에만 머물러 있으면 문제라는 것이다.”
―헌금을 하는 것도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경향이 적지 않은데, 십일조가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당시 사회는 12지파가 있어서 11지파가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를 먹여 살렸다. 그것을 십일조의 근거로 삼는데, 그러나 지금은 제사장 지파가 없으니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 특히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복 받는 것과 연결지었다. 그래서 백만원을 미리 내면 천만원의 복이 들어온다는 가불십일조까지 있다고 하고, 헌금 봉투에 구멍까지 뚫어 얼마를 넣었는지 볼 수 있도록 한다. 헌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내 욕심을 줄이고, 나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돈을 내고 복을 받기 위한 투자로 여긴다면 종교에서 버려야 할 자기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성경 이사야 1장을 보면 ‘정의를 짓밟고 불의를 행하고 드린 재물이나 기도가 하느님께는 다 역겨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 돈이나 가져오면 죄 사함 받아 면죄되고, 모든 게 능할 것이라는 건 성경과 반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돈을 바치는 것보다 정의를 실현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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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적인 표층신앙인, 이기적 나를 벗어나 참나로 나아가는 심층신앙을 진정한 평화와 안락의 길로 제시하는 오강남 교수. 조현 기자
오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마스트대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 등의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지냈으며, <예수는 없다>와 <장자> <도덕경>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 <종교란 무엇인가>등 베스트셀러의 저자다. 지난 2006년 은퇴한 뒤엔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강좌나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2년 만에 귀국한 오 교수를 지난 17일 서울 중구 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여기저기 강연초대에 불려 다니느라 분주하다. 며칠 전엔 오대산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을 오르는 중에 달리는 차를 피하다 넘어져 눈 부위에 찰과상을 입었지만 미쳐 못 본 고국의 산하를 둘러볼 생각에 하산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캐나다 밴쿠버에 살면서도, 한국이 캐나다보다 훨씬 발전된 전자시스템을 보여 매번 놀라게 된다며 고국의 발전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갤럽이 한국의 종교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시대별로 변화는 있지만, 한국인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로 ‘마음의 평안’이란 답이 60~70%로 가장 많다. ‘죽음 뒤의 영원한 삶’이나 ‘복을 받기 위해’나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를 압도한다. 종교의 정수를 보여준 성현들의 사상을 예리하게 간추려내고 해석해 대중들에게 전해준 종교학자가 보는 ‘마음의 평안법’은 무엇일까. 개신교 가정에 자라 서울대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 재학 때까지도 기독교를 근간에 두고 공부하다가 캐나다에 유학 가서 불교와 노장 등 동양종교사상을 접하고,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의식의 큰 전환을 경험한 오 교수는 동서고금 모든 종교 사상을 회통한다. 그는 학자이면서도 이론보다는 ‘아하!’ 하며 깨달아가는 체험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종교체험’에 대한 강조는 자칫 오해를 불러오기 쉽다. 특히 고대부터 한민족의 의식과 문화 속에 깊게 내재해 있는 무교의 영향으로 개신교에서도 방언과 열광적인 성령 체험을 강조하며 반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오 교수는 그런 현실도피적이고 반이성적인 열광주의와 성령주의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위한 종교의 길과는 반대임을 분명히 했다. 인간의 의식을 3단계로 나누면 보통의 이성적인 의식을 초월해 이타적 사랑과 평화의 화신이 되는 게 종교적이라면, 히피처럼 마약을 해서라도 이성 이전으로 가는 것은 반종교적 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울고 웃고 광적인 열광으로 환각 상태로의 도피는 종교의 길과는 반대라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전(前)이성’과 ‘초(超)이성’,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을 ‘전초오류’”라며 “기독교적으로 보더라도 이성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쓰라고 준 것이므로 먼저 이성적이 되고 나서 사랑과 평화의 초이성체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기복적인 표층신앙에서 이기적 나를 벗어나 ‘참나’로 나아가는 심층신앙을 진정한 평화와 안락의 길로 제시한다.
특히 오 교수는 크리스천으로 자랐으면서도 개신교의 독선과 배타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문자주의적 맹신을 넘어서야 진정한 크리스천,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갖는 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일문일답이다.
―성령이 임했다든가, 거듭났다든가 등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랑이나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경우는 왜 그런가?
“이성을 넘어선 초이성 체험은 사랑이나 평화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 이전은 본능적이다. 어떤 사람이 산에서 기도 하고 성령을 받았다면서 집에 와서 폐물이 없어진 것을 보고, 성물까지 집어 던지며 타인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성령을 받았다면서 윤리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진짜 성령을 받으면 이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도, 사랑까지 넘친다. 이성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세에 신과 합일을 추구하고, 그것을 이룬 신비주의자들이 거치는 단계가 있다. 첫째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고, 흠이 많은 삶을 회개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정결 단계다. 두번째는 빛을 본다거나 내면의 깨달음을 얻는다. 세번째는 자신이 없어지니, 그대로 신이 되어 신과 합일을 이룬다. 내가 없어지는 단계에서는 최고의 겸손을 보인다.”
―현대인들의 마음 건강과 내적 평화를 위해 소개하고 싶은 현인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종교적 선각자들이 한결같이 가르치는 것은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므로 지금의 나에게서 해방되어 ‘참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를 따르는 조건으로 지금의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고, 부처님도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무아(無我)를 가르쳤다. 개신교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류영모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제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것이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한다. 지금의 내가 없어지고 큰 나를 찾게 되면 그 큰 나는 결국 절대자나 우주와 ‘하나’되게 된다고 가르친다.”
―삶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나 비난을 받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척추협착증으로 캐나다에서 두번 수술을 받았다. 그런 일상의 사소한 어려움 같은 것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 )나 고진감래(苦盡甘來·고생 끝에 낙이 옴)의 원리를 기억하며 기다리는 편이다. 단 고진감래만이 아니라 감진고래(甘盡苦來·즐거움 뒤에 고통이 옴)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한다. 순풍에 돛 단 듯이 가다가도 언젠가 파도나 태풍을 만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예수는 없다> 출간 이후 보수 쪽 목사들이 공격했지만, 별로 충격을 받지 않았다. 누구든 내 의견에 반대하고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위해 자신만이 하는 명상이나 기도가 있는가?
“한때 확철대오(완전한 깨달음)의 경험을 해볼까 애써보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알고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퀘이커(기독교의 한 교파)뿐 아니라 캐나다연합교회 모임에 종종 참석한다. 캐나다에서도 가장 열려있는 곳이다. 퀘이커는 한시간 동안 가만히 있다가 명상만 한다. 참선도 한다. 또 한국이나 일본의 선방에 가서 참선도 해본다. 학위 받고 혼자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마이애미대에 가 있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냉수마찰도 하고 열심히 명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부정기적으로나마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고, 독서삼매에서 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경험도 한다. 옛 영성가들의 저작을 차근차근 읽을 때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에스비에스비즈>티브이 프로그램을 통해 캐나다와 서울을 연결해 오강남 교수가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와 대담을 하고 있다. <에스비에스 비즈> 프그램 화면 갈무리
―예수님의 첫 가르침인 ‘회개하라’는 것은 죄를 뉘우치라는 것보다 새로운 의식, 새로운 가치관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율법주의를 버리고, 사랑을 가르친 이가 예수님이다. 그 당시 유대교에서는 사람들을 만나면 ‘누가 깨끗하냐 안 깨끗하냐, 정결하냐 더러우냐’만을 따졌다. 구약 레위기에 의해 당시 정결하지 않다고 여긴 창녀와 병자들, 장애인들을 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멀리한 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도왔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의로워라’는 구약을 ‘하나님이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며 누구든 자비롭게 대하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이 핵폭탄이자 빅뱅이다. 그러나 늘 내쳐지던 약자들에게 예수님은 진리요 생명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종교 성자들과 비교한 배타적 진술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한 개인들의 고백적 언어다. 그렇게 시작된 게 예수 운동이다.”
―종교에도 단계가 있다고 하셨는데, 종교적 성장이란 무엇인가?
“하버드대 심리학부에 있다가 에모리대로 옮겨간 제임스 파올로 교수가 <신앙의 발달 단계>에서 6개의 단계를 제시했다. 처음엔 직관적인 단계. 의심 없이 말한 대로 받아들이는 단계다. 두번째는 신화적·문자적으로 믿는 단계다.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듣고 정말 굴뚝으로 산타클로스가 들어온다고 믿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는 의심이 되는데 설명하면 받아들이는 단계다. 세번째 단계가 문자주의 단계다. 미국의 성직자들은 교인들이 이 3단계에 머물게 한다. 제일 높은 단계가 보편화의 단계로, 보편적인 것을 보는 단계다. 간디나 디트리히 본회퍼(독일 루터교회 목사·신학자)나 테레사 수녀 같은 인물들이 도달한 단계라고 한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은 안식일은 자연 파괴를 멈추는 것으로 보았다. 뭔가 일을 한다는 것은 건설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이므로, 적어도 하루는 훼손하지 말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라고 한다. 프롬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게 ‘존재냐 소유냐’다. 6일은 소유를 위해 산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하루는 존재를 위해서 살자는 것, 즉 얼마나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존재 자체를 즐기고 살자는 게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요수아 헤셀(유대교 신학자·랍비)은 좀 더 철학적으로 봤다. 이 세상에는 두가지의 정신적인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공간을 중시하고, 하나는 시간을 중시하는 것이다. 공간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성전이 발전했고, 시간을 중시하는 데서는 안식일이 나왔다는 게 헤셀의 해석이다. 안식일 자체가 성전 노릇을 하며, 신과 교통하게 한다는 것이다.”
― 2001년께 낸 <예수는 없다>는 널리 알려졌는데, 통상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알고 있는 예수와 진짜 예수는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은 50대 스웨덴 사람처럼 얼굴이 하얗고, 눈이 파란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영국 <비비시>(BBC)에서 예수님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예루살렘 해골들을 분석해 보니 예수님은 머리가 까맣고, 코가 납작하고, 키가 작은 전형적인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 신체적인 것만이 아니다. 진짜 가르침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 무엇이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인가 하면, 죄를 지으면 다 용서해주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었는데, ‘회개하라’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테’다. 명사형은 ‘메타노이아’다. ‘뭘 넘어서다’, ‘바꾼다’는 뜻이다. 쉬운 말로 하면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노이아’는 의식이다. ‘우리의 의식을 넘어서라. 의식을 바꿔라’라는 것이다. 그건 ‘잘못했으니 뉘우친다’는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가치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서 톡 떨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라는 소리다.”
―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는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에도 불교에도 표층이 있고, 심층이 있다. 전통마다 더 두껍거나 얕은 데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표층종교인들이다. 표층종교의 특징은 첫째 기복적이다. 헌금하고 기도하는 것도 자신이 잘되려고 한다. 한편, 지금의 나를 떠나서, 진짜 나를 찾으려는 노력이 심층종교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 것은 심층종교로 이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류영모 선생님은 ‘탐진치 삼독’(탐욕·성냄·어리석음)으로 꽉 차있는 ‘제나’가 ‘정신적인 나’이자 ‘참된 나’인 ‘얼나’로 변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져라’고 했다.
표층종교의 두번째 특징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무조건 믿어라’. ‘이성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 표층종교에선 독립적 사고를 몰수당할 위험성이 크다. 심층종교는 깨달음을 강조한다.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해하고 헌신하는 태도가 ‘심층’이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 표층종교에서는 신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 신과 인간을 분리한다. 심층종교에서는 신과 내가 하나다. 신 속에 내가 있고, 나의 안에 신이 있다. 내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신인 것이다. 신이 내속에 있지만, 사실은 그게 나다. 동양에서 많이 쓰는 만물일체, 동귀일체가 심층종교의 핵심이다. 지금의 나를 없애고 진짜 나를 찾으면 신과 합일되는 경지에 이른다. 표층종교는 문자주의에 매달린다. 문자주의에 매달리면 종교는 그때부터 힘이 없어진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말한다면 문자 뒤의 속내를 알 필요도 없어서 결국 모르게 된다. 모든 문자는 상징인데 말이다.”
―문자주의는 왜 문제인가?
“‘호랑이 담배 먹는 시절’이란 표현은 아주 오랜 옛날이란 의미로 쓰이는데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호랑이도 그때는 담배를 피웠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피 스퐁 신부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맹신하는, ‘문자주의는 이단’이라고 했고, 문자주의 신봉자들은 2천년 동안 헛다리를 짚었다고 했다. 실제 당시 하나님이란 말을 못 쓰니 대신 하늘나라라고 썼다. 한국에선 이를 천국이라고 번역하는데, 그건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지배하는 ‘신국’이다. 문자주의에는 반동적 문자주의도 있다. 가령 산타클로스가 진짜 온다고 믿었다가 어른이 되면 안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다고 주장하는 게 반동적 문자주의다. 일반 신도들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신도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진다고 생각해서 이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등의 성경 구절을 예로 들면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는가?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구절을 살펴보자.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주는데, 다른 데를 보니 다른 신의 이름으로도 병을 잘 고치고 있었다. 제자들이 ‘우리도 다른 이름으로 고치면 어쩌냐’고 바오로에게 물으니 그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한 것이다. 다른 종교와 다 비교해서 예수님만이라고 한 게 아니다. 체구가 조그만 아이가 엄마를 따라 복잡한 시장에 갈 때 엄마가 ‘내 손 놓으면 죽는다’, ‘내 말 잘 들어야 돼’라고 하는 것은 ‘내가 길이요, 진리니 내 말만 잘 들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우리 엄마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다른 엄마들은 다 가짜라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 개신교인 중엔 강한 배타성으로 다른 종교와 종파는 이단이고, 마귀고, 그 종교를 믿는 이들은 지옥에 간다고 하는 이가 많지 않은가?
“예수님은 한번도 그런 하나님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구약의 야훼에 대해서도 한번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것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으니, 내 종교로 오라’는 게 아니다. ‘종교의 짐에서부터 벗어나라. 자유를 얻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보내, 영원히 불에 타도록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서구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미국 성공회 신학자 마커스 보그는 같은 기독교라도,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인습적이고 제례적인 종교와 변화와 변혁을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종교로 나뉜다고 했다.”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은 땅끝까지 전도하라는 게 예수의 명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가?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말을 몰랐고, 자신이 종교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 속에 살게 하려는 것이었지, 특정 종교제도 속에 우리 인간을 넣으려고 한 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든 나라에 보내, 너희는 땅끝까지 전도하라. 제자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일 수 없다. 거기서 나오는 삼위일체 사상은 서기 3~4세기 후에 나온 것으로, 예수님이 생존하던 당시엔 삼위일체 사상이 없었다. 예수님은 유대 땅을 다 돌기 전에 세상이 끝날 거라고 했는데, ‘땅끝까지 전도하라'고 했다니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는 없다>에서 캐나다 최대 개신교 교단인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빌 핍스 목사가 1997년 <오타와 시티즌>과 한 인터뷰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밝힌 내용을 소개해 한국 개신교 목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어떻게 보나?
“빌 핍스 목사는 변호사이고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인권 행진도 함께한 깨어있는 목사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했냐’는 질문에, ‘내 속에 살아계신다’고 하며,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핍스 목사의 인터뷰에 제일 반박을 많이 한 게 캐나다에 있는 한인교회 목사들이었다. 핍스 목사의 글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예수는 없다>가 됐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어떻게 그렇게 열려있나?
“은퇴하고, 밴쿠버 유비시알연합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어떤 수업에 들어가든 세가지를 강조하라고 했다. 첫째는 생태·기후환경. 두번째는 성평등. 세번째는 종교 다원주의를 강조하라고 했다. 그것이 학교 지침이다. 캐나다연합교회도 그런 지침이 현대 기독교가 나아갈 길이므로, 교회에서도 종교다원주의를 포함해 가르치라고 했으나, 한국교회는 이 지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교회가 소속된 가장 큰 연합기관이다. 캐나다에서도 한인교회들은 그렇게 폐쇄적이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폐쇄적이다. 원래 종교든, 문화든 번져갈 때 원래 있던 곳보다 새롭게 받아들인 곳이 더 근본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유럽보다 미국 기독교가 더 근본주의적이고, 미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이 더 그런 것처럼 말이다.”
―부활이 기독교의 핵심이고, 예수님 살아있던 그 당시에도 종말이 당대에 올 것처럼 여기기도 했는데, 부활과 심판의 날은 어떻게 보는가?
“심판의 날은 구약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종교들에서도 나오는데,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가 죽고,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것이다. 무덤에서 새로 나오는 게 아니고, 새로운 나로 부활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으니,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게 천국에 가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보다 쉬운 게 없다. 그런 식의 믿음은 믿는 거라고 할 수 없다.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에 의하면 믿음은 ‘궁극 관심’이다. 내게 가장 중요해서, 궁극 관심의 대상을 무엇으로 하느냐.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부정부패로 돈을 벌어도 돈을 조금 내면 축복해주고, 교회 나가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한다. 영화 <밀양>을 보면 사람을 죽여 놓고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건 참된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가짜 믿음이다. 또 하나는 이념.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 과학주의 등 이런 것에 목숨을 거는 믿음은 진짜 믿음에 가깝지만, 이 또한 유사 믿음이다. 진짜 궁극적인데 관심을 갖는 것이 참믿음이다. 궁극적인 관심은 내가 없어지고,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한 철학>를 보면, ‘나와 브라만이 하나다’라는 그것에 관심을 갖는다. 하늘나라 가는 것을 ‘궁극 관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예수는 없다>를 읽은 세명의 목사가 공격을 했을 때 어떻게 반박했나?
“갈릴레오의 예를 들었다. 갈릴레오가 태양이 도는 게 아니고 지구가 도는 것이라고 했을 때 교회는 반대했다. 갈릴레오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다며 갈릴레오를 정죄했다. 가톨릭은 뒤늦게 갈릴레오를 사면했다. 문자주의는 말이 안 된다. 신학적으로, 문자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성령 숭배라고 한다. 재밌는 게 가톨릭은 전통을 중요시하고, 개신교는 전통을 뒤에 놓고 성경을 절대화한다. 사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다. 당연시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게 받아들이는 게 프로테스탄트다. 이런 정신에 상반되게 한번 결정된 교리는 바뀔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다. 신학은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 주장하는 것들은 17~19세기에 그때 상황에 맞게 만들어 놓은 이론이다. 약으로 치면 그때 인간을 죽음으로 내모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내놓은 약이다. 지금은 앓고 있는 병이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면 성경을 옛날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후서 3장6절에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 했다. 문자 뒤에 있는 정신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스퐁 신부는 일관되게 문자주의 배격했다. 기독교가 살아나려면 문자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하는데,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 홍수’는 가능한 것인가?
“문자적으로 불가능하다. 공룡을 실으면 어떻게 되겠나. 모든 동물을 실으면 배설물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런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 해주신다고 하는데, 그럼 다른 방법을 쓰지 왜 홍수를 일으켜 배를 만들고, 다 거기에 싣는가. 노아의 홍수는 인간의 의식 발달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도 1장과 2장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1장 이야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되어있고, 2장4절 이후엔 야훼 다큐다. 1장에선 새들과 짐승을 만든 다음에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2장에선 인간을 먼저 만들고 나서, 인간이 심심할까 봐 짐승들을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경 편집자가 짜깁기하다 이렇게 된 듯하다. 따라서 성서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창조과학처럼 결론을 내놓고 하는 건 과학이 아닌 유사 과학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서 ‘아무 형상(이미지)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자 이미지, 즉 사진찍기를 거부해 운전면허증도 못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보수 개신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며 발목 잡는 근거로 삼는 동성애 반대도 성경에 근거하는가?
“성경에 동성애 하지 말라는 게 레위기에 있다. 성경에 하지 말라는 게 그것만은 아니다. ‘혼방으로 된 옷은 입지 말라’거나 ‘밭에 여러 씨앗을 뿌리지 마라’, ‘월경 때는 불경하니 성전에 가지 마라’, ‘장애인은 성전에 들어가지 마라’는 것들도 있다. 지금 기독교에서는 전부 무시해 버리는 것들이다. 다른 건 다 무시하면서, 오로지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는 것이 좋지 않다며 반대하는 것은 형평성의 원리에도 어긋난다. 지키려면 다 지키고, 버리려면 다 버리면 몰라도 말이다.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애가 안 된다는 것은 성경을 오남용하는 것이다. 특히 성경에 함의 자손이 흑인이라는 말이 없는데도, 흑인으로 규정해 흑인은 노예가 되어야지 친구가 되면 안 된다고 한다. 과거 미국 남부에선 아이들이 흑인들과 놀면 성경에 종으로 삼으라고 했다며 못 놀게 할 때도 있었다.”
―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대형교회 확장의 일등공신이 되었는데, 기복신앙을 어떻게 평하나?
“모든 종교의 거의 모든 신자들은 표층신앙부터 시작한다. 빌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점점 표층신앙에서 자라나서 심층신앙으로 들어간다. 더 성장하지 못 하고 표층신앙에서만 멈추면 종교적 발달 장애다. 기복신앙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기복신앙에서 출발해 더 성장하지 못 하고 끝까지 기복신앙에만 머물러 있으면 문제라는 것이다.”
―헌금을 하는 것도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경향이 적지 않은데, 십일조가 성경에 근거한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당시 사회는 12지파가 있어서 11지파가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를 먹여 살렸다. 그것을 십일조의 근거로 삼는데, 그러나 지금은 제사장 지파가 없으니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 특히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복 받는 것과 연결지었다. 그래서 백만원을 미리 내면 천만원의 복이 들어온다는 가불십일조까지 있다고 하고, 헌금 봉투에 구멍까지 뚫어 얼마를 넣었는지 볼 수 있도록 한다. 헌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내 욕심을 줄이고, 나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돈을 내고 복을 받기 위한 투자로 여긴다면 종교에서 버려야 할 자기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성경 이사야 1장을 보면 ‘정의를 짓밟고 불의를 행하고 드린 재물이나 기도가 하느님께는 다 역겨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 돈이나 가져오면 죄 사함 받아 면죄되고, 모든 게 능할 것이라는 건 성경과 반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돈을 바치는 것보다 정의를 실현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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