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된 지 일주일도 넘었지만, 정태인이 하도 안타깝고 답답해서 기사창을 닫지 않고 그냥 두었습니다. 아직도 저러고 살고 있구나!! 1990년대 많이 아프다는 사람 인터뷰가 월간 '말'지에 나면 그 몇 개월 후에 그 분의 부음이 들여왔는데, 이 인터뷰도 월간 '말'지의 맥을 잇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정태인 글 본지 참 오래됐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본 것 같습니다. 박현채, 채만수, 정태인과 김철순(주대환), 최윤희(황광우)와 "현실과 과학" 그룹의 몇몇 필자(윤소영 등)들의 글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 중에서 지금 껏 활발하게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정태인 뿐인 것 같습니다. 주대환도 활발히 활동하고 발언을 하지만 이론가 행세를 하지는 않습니다.
정태인은 2000년대 중반 한미FTA반대 운동의 사도 였습니다. 듣기론 전국을 돌면서 강연을 500차례 이상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15년이 흘렀는데, 당시 그가 주도적으로 퍼뜨린 괴담에 대해서 깊은 성찰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검색해서 알아보려다가 말았습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정리해고 문제로 이른바 '희망버스'가 떴을 때도 발언을 많이 했습니다. "조남호회장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라는 형식의 글(정리해고 철회가 논지)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농공상을 도덕의 잣대로 훈계하던 조선 10선비의 실물경제에 대한 무지와 지적 오만의 냄새가 너무 났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 공개편지는 검색에 뜹니다.
"순수하게 저는 경영 컨설팅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조선산업을 공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산업경제학을 전공으로 삼았고 청와대에서 실물경제도 들여다봤으니 공짜 컨설팅치고는 혹시 건질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한진중공업이 살 길은 크루즈(여객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을 만드는 겁니다. 쇄빙선을 만든 자랑스러운 기억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2010년대 초에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 원장을 했고 이후는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을 했습니다. 이는 제가 비슷한 업(사회디자인연구소)을 해 봐서 눈에 들어온 겁니다.
정태인은 암 보다는 지적 오만병이 더 중한 것 같습니다. 글과 논문으로 세상을 분석하는 강단파의 한계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이론은 가설이고, 현실과 부딪혀 수정 보완 폐기 재구성 되어야 하는 운명인데(이건 정태인도 인정할 것입니다) 문제는 현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생기는 성찰과 통찰이 정태인에게서는 찾아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말 노동자의 길에 실린 주대환과 황광우의 글에는 현장에 발을 담근 혁명적 실천/이론가의 냄새가 진하게 났지만, 채만수, 정태인의 글은 창백한 강단/골방 지식인의 글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채만수는 오래 전에 붓을 꺾었던 것 같고, 정태인은 글을 40년 가까이 썼지만, 세상을 (피케티 책이나 외국어로 된 논문이 아니라) 복잡미묘한 현실 그 자체를 맨 눈으로 보려고 노력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한미FTA도, 한진중공업 구조조정 문제도, 정태인이 오랫동안 천착해 왔다는 불평등 문제도 산업, 기업 현장을 돌아다녀 봤으면, 뻘소리는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불평등 문제를 40년 넘게 연구해 온 정태인의 불평등 해소 실패에 대한 진단이 너무나 피상적, 일면적이어서 할 말을 잊게 됩니다.
불평등 해소는 진보의 과제이자 덕목인데, 왜 실패했을까요?
“두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관료들에게 끌려가는 문제예요. 노무현 정부 때는 관료들하고 다투기라도 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경우에는 대통령이 개입을 안 하니까 그냥 관료들한테 주도권이 넘어가 있는 상태죠. 관료는 ‘비즈니스 애즈 유주얼’(business as usual), 즉 쭉 해오던 대로만 하거든요. 두번째는 진보적 지식인이 상위 계층에 속하게 된 점입니다. 웬만한 지식인은 다 상위 10%에 들어가 있어요"
관료에게 끌려가지 않고, 강단 진보학자들의 주장대로 했으면 불평등이 좀 해소/완화라도 됐을지?? 두 번째 진단은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하나마나한 얘깁니다. 어느 나라나 대학이나 연구소에 일하는 지식인은 대체로 상중하로 계층 구분하면 상층에 들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과학이든 공학이든 사회과학이든 발전을 안할테니......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차칭 진보 지식인들과 자칭 민주/진보 정당들과 노조와 달리 가난한 민중과 기회 결핍에 우는 청년세대와 영세기업인의 애환을 가치, 제도, 정책, 예산 등으로 잘 받아 안습니다.
정태인과 비슷한 시기부터 비슷한 고민을 했던 많은 사람들 중 강단파들은 각기 특정 분야를 천착하면서, 세계적인 학문적 성과(이론)도 섭렵하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통계도 섭렵하고, 현장 서베이도 하면서 일가를 구축했습니다. 저 같은 부류는 정치, 행정과 산업,기업 현장과 강단파의 지적 성과를 종합하여,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변화와 개혁의 킹핀을 찾고, 가치, 정책의 선후완급 등을 고민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태인은 책과 논문의 세상에서 기어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사회를 위한 연구원장 시절의 책상 사진이 참 많은 것을 말해 주는 듯 합니다. 아무쪼록 암 4기의 구렁텅이에서 속히 탈출하시어, 진보학자의 한차원 높은 면모를 보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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