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종교실태와 종교정책] <상> 「가정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 영위
조선기독교 연맹의 지도받아
83ㆍ84년에 걸쳐 신ㆍ구약 발간
해방당시 가톨릭 신자 5만… 현재 7백여명으로 추정
발행일1988-07-10 [제1613호, 6면]
최근 통일논의가 각계각층에서 광범위하게 일고 있는 가운데 종교계에서도 이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종교계의 통일논의는 북한선교라는 사목적인 관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지난달 26일「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천주교 북한선교위원회 담당 이동호 아빠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번침묵의 교회를 위한 메시지발표에 즈음해서 북한의 종교 실태와 종교정책 및 북한선교 등에 관해 상ㆍ하편으로 나누어 알아본다. 이번 편에는 박해상황과 현재의 실태를 살핀다.
분단 44년이 흘러간 오늘날 북한에 과연 종교가 살아남아 있을까?
공산주의사상으로 주민들을 철저히 세뇌, 통제해온 북한정권아래 종교는 사실상 완전히 말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지하에 숨은 극소수의 신자들이 조직도 없이 개별적으로 신앙을 보존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북한에는 종교가 없다」는 이 기본적인 시각은 분단 이래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혹독한 종교탄압정책에 크게 기인하고 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은 해방직후 정권창건 때부터 6ㆍ25전쟁을 전후로 한 약10년에 걸쳐 천주교를 비롯한 개신교 불교, 그리고 천도교 등 모든 종교들을 철저히 탄압한 끝에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정권은 성당 교회사찰 수도원을 약탈하거나 파괴했으며 성직자 평신도 수만명을「반동분자」로 낙인찍고 투옥시키거나 처형했다.
해방당시 신자 5만
천주교의 경우 해방당시 북한지역에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덕원교구(면속구)등 3개교구와 서울교구 및 춘천교구의 일부지역에 5만여명의 신자와 2백여명의 성직ㆍ수도자가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48년 소련을 등에 업고「조서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본격적인 탄압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공산정권은 제일 먼저 덕원분도수도원에 손을 댔다. 덕원수도원은 당시 북한에서 가장 큰 수도원으로서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를 비롯하여 한국인신부ㆍ수사ㆍ수녀 등 1백여명이 있었으며, 빵공장과 인쇄소도 가지고 있는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정권은 처음에는 경리부정ㆍ불온 유인물배포 등을 트집삼아 관계자들을 연행 수사해오다 마침내 건물을 불법 수용하고 수도원에 있던 1백여명의 신부수사ㆍ수녀들을 투옥했다.
투옥된 사람들 중 대원장 자우어(Sauer宰) 주교 등 상당수가 감옥에서 순교했다.
공산정권은 또 원산, 고산, 영흥, 흥남등지에서도 67명에 달하는 성직ㆍ수도자들을 체포했으며 덕원수도원몰수에 항의한 평양교구장 흥용호 주교가 정치 보위 부원에게 납치돼 행방불명됐다.
50년에 접어들면서 공산주의자들은 남침을 앞두고 광분, 이북의 모든 지역에서 남아있던 신부 26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모두가 옥사하거나 피살 또는 행방불명됐다. 성직ㆍ수도자들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신자라는단한가지 이유로 투옥되거나 인민재판에 회부돼 처형되는 예가 부지기수였다.
한편 덕원수도원과 원산등지에서 붙들린 외국인 신부ㆍ수사ㆍ수녀들은 4년간에 걸친 강제수용소생활과「죽음의 행진」끝에 225명이 죽고 나머지 42명은 본국으로 송환됐다.
그 뒤 50년대 말까지는「김 신부 사건」이나「원산 십자가사건」등을 통하여 천주교신자들의 종교자유를 위한 투쟁소식이 간간히 들려왔으나 60년대 들어서면서 「중앙 집중 지도사업」등의 성분조사로 인해 그나마 은밀히 유지해오던 종교조직과 신자들이 색출돼 신앙의 등불은 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신부 사건」은 선천군 내 비밀 가톨릭단체들이 점조직으로 구성돼 활동하다 발각, 김 신부가 처형된 사건이다. 「원산 십자가사건」은 1960년 철도공장의 한 젊은이가 목욕도중 십자가를 떨어뜨려 그것이 발각돼 관련된 가톨릭신자 70여명이 처형된 사건을 말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북한정권의 철저한 대외 폐쇄정책과 더불어 남북이 대치된 상태아래의 경직된 냉전논리로 말미암아 북한의 종교에 관한 소식은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제한적 신앙생활
그러나 최근 들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거나 학술교류를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재미교포 학자와 성직자들이 북한기행문형식의 책자들을 잇달아 출간, 그 속에서 북한의 종교 실태를 단편적이나마 밝히고 있어 북한의 그리스도교존재에 관해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최근 언론통제가 다소 완화되는 추세에 따라 출간된 이 책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북한에도 개신교신자를 비롯한 천주교신자들이 소수 존재하며 당국의 허락아래 제한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한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을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재미학자들로서 81년 7월 양성철 교수(캔터키大)와 박한신 교수(조지아大)등을 비롯한 9명의 정치학자들이 대거학술교류를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이래 88년 현재까지 2~3백명 선이 되는 것으로 비공식 추정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홍동근 목사와 같은 개신교 성직자도 몇몇 있으며 이들은 북한의 종교 실태를, 여태까지 한국에서 널리 인식된 북한종교사정과는 달리 밝히기도 했다. 천주교 쪽으로는 84년 북한선교위원회로부터 북한선교의 임무와 가족방문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고종옥(마태오) 신부가 있다.
북한을 방문한 이들은 대부분 미국등지의 간행물에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내용의 기고를 하거나 단행본의 책자를 출판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양성철ㆍ박한식 등 9명의 정치학자가 쓴「북한기행」과 양은식 교수 등 12명의 학자 및 성직자가 쓴「분단을 뛰어넘어」그리고 비매품인 고종옥신부의「아, 조국과 민족은 하나인데」등이 출간되고 있다.
북한방문자 들은 책자들을 통해 북한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통일전략ㆍ주체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종교에 관해 일치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건물 없어
북한에는 현재「조선기독교연맹」산하에 30여명의 목사와5천명에서 1만여명의 개신교 신자 및 7백여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신자가 있다. 이들은 공식적인 교회건물은 가지고 있지 못하며 일요일 아파트등과 같은 신자가정집에서「가정예배」를 10여명의 신자들이 모여 드리고 있다. 이러한 가정예배장소는 평양에만도 40여개 있다.
예배장소는 조촐하게 꾸며져 있으며 벽에는 김일성초상화외에는 십자가와 같은 종교적 상징물은 전혀 없으며, 예배진행방식은 기도 찬송 성경봉독 설교 등의 형식으로 진행되고 헌금은 일절 없는 것이 특징이다.
김동수 교수(노프크大ㆍ사회복지행정학)는「분단을 뛰어넘어」에서『또한 방문기간에 15명 정도 모인 가정예배에 두 곳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비록 정치선전을 약간 섞은 설교였으나 예배는 퍽 감격적이었고 은혜스러웠다. 교인들은 다 노인층이고 헌금순서가 없는 것이 이색적 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신ㆍ구약 성서 발간
북한에서는 83년에 신약성서를, 84년에 구약성서를 잇달아 출간하였으며 교포들이 북한을 방문할 때 성서를 들고가 기증하기도 했다.
전충림씨(뉴코리아 타임스발행인)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1월 11일(조선)기독교연맹에서 이 성서 증정식을 거행했지요. 약30명의 연맹직원과 평양의 목사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서를 증정 했지요』
또 평양에는 기독교신학원도 있으며 15명가량의 학생들이 장차 목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재미교포학자들이 주장하는 이 같은 부분적인 북한종교 실태는 국내연구소가 간행하고 있는「공산권연구」의 북한교회소개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일본의 저명한 북한문제연구가 모쯔모도(松本二郞)씨가 86년 6월 북한을방문하고 극동문제연구소가 발간한 공산권연구 87년 9월호에 기고한「평양의 가정교회」란 제목의 글을 통해 밝힌 북한 교회소식은 훨씬 더 자세하다.
가정에 배에 참석한 모쯔모도 씨에 따르면 북한에는 가정교회가 무려 5백개소에 이르며 평양에는 3년제 신학교가 있고 학생들은 15명가량 있다고 한다. 이 신학원과 가정 교회는 1946년 창설된 조선기독교연맹에 소속, 지도를 받는다.
연맹의 강령은▲헌법옹호▲국가정책지시▲신도의 국가부강통일에의 헌신 장려▲사유ㆍ평등박애ㆍ정의사회에 찬성하고 신도의 신앙자유, 권리보장▲남ㆍ북한 평화통일에 찬성 등으로 되어있다. 한편 고종옥신부도 그의 북한방문기(천주교 북한선교위원회 및 정의평화위원회공동발간)에서 북한종교 실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번 북한 방문 시 기독교연맹의 김 목사와 고 목사 등 두 분의 목사를 만났고 그분들로부터 주일예배 등의 종교생활 실태와 83년 신양성경과 찬송가책을 출판한 사실을 듣고, 또 그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선물로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LㆍA에 살고 있는 김성락 목사 같은 분은 평양 방문 시 김일성의 오찬초대를 받은 바 있었고, 또 김일성으로부터 신전기도를 부탁받고 기도를 바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김 목사는 평양에 성경책 2백권을 친히 가지고 간사 실이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목사들의 평양방문을 통해 개신교 선교의 서광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동안 북한을 방문한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북한에는 자유세계의 교회와는 규모와 수준에 있어 비교조차 못할 정도로 초라하지만, 나름대로의 교회와 신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해진 코스만 방문
한편 방문자들의 방문코스가 그의 뜻대로 변경될 수 없으며, 정해진 코스만 안내원과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방문형식의 제약성으로 말미암아 방문자들은 이른바「관제종교인과 신자들」을 만났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즉전시용의「종교증거물」만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보고 북한당국이 선전하는 1만여명의 기독교신자와 30여명의 목사들의 가존재를 사실로 인정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추측은 지난 74년 8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북한기독교연맹이 가입신청을 했다가 WCC측으로부터 종교 실태와 그 증거를 요구받고 즉각 신청을 철회한데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제한된 방법이지만북한의 종교 실태를 직접 둘러본 사계의 권위자들의 전문가적인 식견 또한 가벼이 보지 못할 것 같다. 한두 사람도 아닌 수십 명의 저명한 학자들의 일치된 주장들은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평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북한의 기독교에 대해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낡아빠진 찬송가와 성경을 앞에 놓고 경건히 꿇어앉아 예배드리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의 눈에서 비늘은 떨어져 나갔다』한 방문자의 고백이다.
아무튼 현재 북한에는 사회주의체제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정권의 갖은 정치적 목적에 이용 가능한 공식적인 관제교회가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한 그「교회」 안에는
우리와 같은 하느님을 고백하며 애처로운 신앙생활의 명백을 이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에는 50년대 대박해이래 현재 주교의 정당한 권의에 의해 서품 받은 신부는 없는 것 같다. 이점은 고종옥신부도 북한당국자의 말을 인용, 밝히고 있다.
그리고 몇백명에 불과한 천주교신자들은 기독교연맹속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들은 개별적인 기도를 바치는 외에는 「은총의 물길」인 성사를 받을 길이 없이 오늘도 조선왕조 때의 성직자 없이 1백여년 동안 신앙을 지키며 애타게 신부를 기다리던 신앙선조들처럼 기다리고 있다.
전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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