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2

「世の中を複眼で見る」 司馬遼太郎と親交結んだ在日朝鮮人作家、その生き様に学ぶ:朝日新聞GL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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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朝日)신문의 웹진 중 하나인 [The Asahisimbun GLOBE] 11월 19일자에 실린 <「世の中を複眼で見る」 司馬遼太郎と親交結んだ在日朝鮮人作家、その生き様に学ぶ>에 대해 몇 자 쓰고 싶어졌다. 얼마 전 페친을 통해서 알게 된 기사이다. 기사 제목 중에 ‘複眼’이란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단어인데, 굳이 번역하자면, “세상을 다면적으로 보다 / 시바 료타로와 친교를 맺은 재일조선인 작가, 그 삶에 배운다”라는 정도가 되겠다. 지난 11월 13일 일본의 가나가와(神奈川)근대문학관에서 개최된 <김달수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회>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재일 작가 김달수 선생이 전개한 문필 활동의 의의와 분단 조국의 정치 현실에 의한 쓰라린 경험 등을 설명한 내용이다.
김달수 선생은 재일조선인 작가로 출발한 사람이지만 1970년대부터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사에 대해 수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 더 유명하다. 후자의 작업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국민적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라든지 고대사 연구자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등과 두터운 친교를 쌓았다. 나도 그동안 김달수 선생의 저작, <일본 속의 조선 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講談社文庫) 시리즈(페북에서 몇 번 포스팅한 적이 있음)를 통해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행적을 아는 계기가 되었으며, 적지 않은 교시를 받았다.
그런데 나는 이 기사를 보고 나름대로 “재일 작가 김달수의 조국과 『계간 삼천리(季刊 三千里)』”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어졌다. 기사의 대부분이 남북 분단으로 인한 김달수 선생의 슬픈 경험이나 60년대 이후의 ‘귀국사업’(북송)으로 인한 동포 사회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 50호까지 발행된 『계간 삼천리』 만큼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 재일조선인이 처한 현실 등을 일본 사회에 널리 알린 잡지는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 후에도 재일동포 지식인들에 의해 유사한 형태의 계간지가 간행되었거나, 간행이 진행되고 있지만 말이다. 이제 『계간 삼천리』의 주요 필진들은 거의 타계하고 이 세상에 없다. 그들이 활동했던 잡지 ‘삼천리’라는 명칭은 어디까지나 한반도 전체를 지칭한 것이지, 결코 분단된 조국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문득 강덕상 선생님이 생전에 자주했던 말씀이 생각났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 국가는 각각 0.5인 셈인데, 서로 싸우면 0.5 * 0.5 = 0.25 가 되니, 즉 결국 서로에게 손해이므로 어떤 이유로도 싸우면 안된다는 것이다.

= Soon Ae Choi 1 h · 지난주에 다녀온 강연회에 대한 기사가 나왔네요. 김달수와 시바료타로등 일본 지식인과의 교류.재일조선인의 총련과의 갈등과 대립으로 치뤄야했던 불행한 가족사를 소개한 내용도 상세하게 쓴 기사입니다. 이에 관해 한국에 는 주류성출판사의 오문자[아버님 죄송합니다] 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습니다.재일조선인들의 북송선사업 이후 이념 갈등으로 인한 가족간의 불화와 절연으로 긴세월 희생된 개인사를 들려줍니다. 양영희 감독의 <디어 평양><스프와 이데올르기>에 담아낸 가족사와 같이 한반도 분단이 빚어낸 구구절절한 가족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한 개인으로써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사와 함께하며 남긴 개인서사가 많은 재일조선인의 문학 영화 잡지는 귀중한 자료이고,강연은 살아있는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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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복안으로 본다」 시마 요타로와 친교를 맺은 재일조선인 작가, 그 삶에 배운다


「세상을 복안으로 본다」 시마 요타로와 친교를 맺은 재일조선인 작가, 그 삶에 배운다
북한 인텔리전스2021.11.19담소하는 사마 요타로(왼쪽 끝)와 김달수(왼쪽에서 3명째)=오분코씨 제공




 


김달수(김달수=1920~1997). 전후 재일조선인 문학을 세운 작가이자 고대사의 연구자였다. 이미 그의 죽음으로부터 분반 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그의 업적은 지금도 빛나고 있다. 그 금달수가 생전 믿고 있던 북한에 배신당하고 고뇌에 굶주리고 있던 사실을 최근 알았다. 김달수는 만년 북한과의 관계로 가족과의 불화에도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북한에 절망하고 떠나간 재일조선인은 많다. 북한의 실태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김달수의 삶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 (마키노 아이히로)
■「재일조선인문학」장르 확립

김달수의 탄생 100년을 기념한 강연회가 13일, 가나가와 근대 문학관에서 열렸다. 김달수는 일본 통치 시대, 지금의 한국 남부, 경상남도에서 태어나 10세에 일본에 왔다. 전후, 「후예의 거리」 「현해탄」등의 소설을 발표. 시마 요타로와 친교가 있어 일본과 한반도와의 관계를 소개하는 기행문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근대문학연구자인 히로세 요이치씨는 강연에서 김달수의 특징에 대해 '재일조선인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확립한 왕성한 집필 활동을 꼽았다.김달수가 1950년대에 발표한 소설 '현해탄' = 오분코씨 제공

생전, 화려한 실적에 싸여 있던 금달수였지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에세이스트 오문자 씨는 강연에서 김달수가 1970년경부터 조선총련과 대립해 가정생활까지 영향이 나온 사실을 밝혔다.
■ 북한을 지지하고 배신당한

김달수는 당초 '차별이 없는 나라' '노동자가 주인공의 나라'를 기인으로 한 북한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1959년부터 본격화한 재일조선인과 그 일본인 가족들의 귀국사업을 적극 지원하는 원고도 썼다. 김달수의 친족에게는 귀국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은 1967년 당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유일하게 지도체제를 내세워 개인 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70년대에 들어서자 김일성 주석의 장남 김정일 총서기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우씨에 따르면 김달수는 이 무렵부터 '북한의 방식은 이상하다'고 반발해 조선총련과 원천을 알았다고 한다.

김달수들은 1975년 계간 '삼천리'를 창간한다. 창간호는 시인 김지하 씨의 특집을 거론하는 등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조선총련은 관계자들에게 '삼천리'를 읽지 않도록 지도했다고 한다.김달수 등이 1975년에 시작한 계간 『삼천리』 창간호=오분코씨 제공

당시 김달수가 주도한 잡지 '일본의 조선문화'를 애독하고 있던 재일조선인은 '금달수는 재일에 자부심을 되찾아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총련에서 나온 인간 하지만 활약하는 것은 재미없다는 분위기였다”고 증언한다. 김달수들은 '삼천리'에서 총련 기관지에 의한 '반민족적 행동'이라는 비판에 반박했다.

당시 김달수 등은 도쿄도 조후시에 있는 오분코씨의 자택에서 '삼천리'의 편집회의를 열기도 했다. 우씨에 따르면 김달수는 자주 “지금의 북한은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한편 “사회주의는 이런 사상이 아닐 것”이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우씨는 “당시 한국에 비해 북한의 실태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되었던 것이 남아있었습니다. 북한을 비판하는 일본인도 적었던 시대에서, 김달수 선생님도 북한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강연회에서의 오분코씨(왼쪽)=우레씨 제공

한편 김달수는 1981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우씨에 따르면 김달수는 제철소나 조선소 등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발전한 조국을 보고 '이마우라시마의 기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씨는 “총련은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빈 깡통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삼천리'는 한국에도 북한에도 빠지지 않는 제3세력과 같은 논조에 기울여갔다. 우씨는 “멤버는 모두 남북 통일을 강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1987년에 발행된 계간 『삼천리』의 최종호=오분코씨 제공
■ 말하지 않았던 과거

김달수는 저작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오씨는 13일 강연에서 조총련계 금융기관에 근무했던 김달수의 장남이 승진을 할 수 없게 되어 아버지와 서서히 소원해진 사실을 밝혔다. 장남은 몸을 부수고, 금달수의 사후에 사망했다.

오분코씨도, 금달수와 같이 가정이 파괴된 경험을 가진다. 아버지의 고관귀성(오귀성=오귀성=)씨는 오카야마현에서 사업에 성공한 재일상공인으로 귀국사업에 열심히 임하고 있었다. 우씨도 1959년 12월 13일 첫 귀국선이 출발하는 전야제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우씨는 “나 자신, 음대 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성 동맹(재일본 조선 민주 여성 동맹)의 간부로서, 대회의 식전에서 합창의 지휘를 하거나, 당이 내거는 사상에 대해 학습 지도를 하거나 하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관귀성씨는 60년 북한에 초대되어 시찰할 기회가 있었다. 세키 씨의 눈에 비친 북한은 '지상의 낙원'과는 거리가 멀고, 동행자가 귀국자들에게 둘러싸여 '당신에게 속아 평생을 막대기에 흔든 우리들을 어떻게 해준다'고 격렬하게 친숙해지는 장면 목격했다.

세키씨는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실정을 설명해야 한다」라고 총련에 호소했지만, 「귀국 사업을 방해하는 반동」이라고 레텔을 붙였다. 세키씨는 62년 북한의 실태를 고발하는 '낙원의 꿈을 깨고'를 출판해 딸 부부와의 관계를 거절했다.


그래도 총련은 우씨와 조선대학교에서 가르치던 남편을 비난해 자기 비판을 반복 강요했다. 학생도 남편에게 반항하고 더 이상 교육의 장소가 아니게 되었다. "이대로 조직에 달라붙어 부정하게도 눈을 감고 있어도 좋을까"라고 고민한 끝에 남편은 71년 조선대학교를 그만두었다. 세키씨는 86년에 사망했다.

우씨는 “저는 1990년경까지 아무래도 수령님, 원수님, 장군님이라고 말해버렸지만 단지 김일성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존경하지 않아도 불러낼 수 없다. 그것이 마인드 컨트롤의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1987년에 있던 계간 『삼천리』 종간 파티에 참석한 금달수(왼쪽에서 2명째)=오분코씨 제공

김달수가 사망한 뒤 북한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한 것 외에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반복하고 있다. 북한에 의한 심각한 인권침해 실태도 잇달아 밝혀지고 있다.

우씨는 “지금 김달수 선생님이 살아 있다면 전면에 서서 북한을 비판하고 인권과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분의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입장이 나빠지더라도, 나쁜 것은 나쁘다고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라고 말한다.

「금달수 선생님의 인생은, 자신이 아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물건을 판단하지 않고, 세상을 복안적으로 보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닐까요.」우 씨는 그렇게 말했다.


마키노 아이히로

「世の中を複眼で見る」 司馬遼太郎と親交結んだ在日朝鮮人作家、その生き様に学ぶ:朝日新聞GLOBE+



「世の中を複眼で見る」 司馬遼太郎と親交結んだ在日朝鮮人作家、その生き様に学ぶ
北朝鮮インテリジェンス2021.11.19談笑する司馬遼太郎(左端)と金達寿(左から3人目)=呉文子さん提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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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達寿(キム・ダルス=1920~1997)。戦後在日朝鮮人文学を打ち立てた作家であり、古代史の研究者だった。既に彼の死から四半世紀近くが過ぎたが、彼の業績は今でも光り輝いている。その金達寿が生前、信じていた北朝鮮に裏切られ、苦悩にあえいでいた事実を最近知った。金達寿は晩年、北朝鮮との関係が原因で家族との不和にも悩んでいたという。同じように、北朝鮮に絶望し、離れていった在日朝鮮人は数多い。北朝鮮の実態については、まだまだ明らかにされていないことが多い。金達寿の人生は、真実を追求することの大切さを教えてくれている。(牧野愛博)
■「在日朝鮮人文学」ジャンル確立

金達寿の生誕100年を記念した講演会が13日、神奈川近代文学館で開かれた。金達寿は日本統治時代、今の韓国南部、慶尚南道に生まれ、10歳で日本にやってきた。戦後、『後裔の街』『玄海灘』などの小説を発表。司馬遼太郎と親交があり、日本と朝鮮半島との関係を紹介する紀行文でも高く評価された。近代文学研究者の廣瀬陽一氏は講演で、金達寿の特徴について「在日朝鮮人文学」という新たな文学ジャンルを確立した旺盛な執筆活動を挙げた。金達寿が1950年代に発表した小説『玄海灘』=呉文子さん提供

生前、華やかな業績に包まれていた金達寿だったが、心に深い傷を負っていた。エッセイストの呉文子(オムンジャ)さんは講演で、金達寿が1970年ごろから朝鮮総連と対立し、家庭生活にまで影響が出ていた事実を明らかにした。
■北朝鮮を支持、そして裏切られた

金達寿は当初、「差別のない国」「労働者が主人公の国」を旗印にした北朝鮮を強く支持していた。1959年から本格化した在日朝鮮人やその日本人家族らの帰国事業を積極的に支援する原稿も書いていた。金達寿の親族には帰国事業で北朝鮮に渡った人もいたという。

ところが、北朝鮮は1967年の党中央委員会第4期第15次全員会議で唯一指導体制を打ち出し、個人崇拝を強要し始めた。70年代に入ると、金日成主席の長男、金正日総書記を後継者に指名する動きが起きた。呉さんによれば、金達寿はこの頃から「北朝鮮のやり方はおかしい」と反発し、朝鮮総連とたもとを分かったという。

金達寿たちは1975年、季刊『三千里』を創刊する。創刊号は、詩人、金芝河(キムジハ)さんの特集を取り上げるなど、韓国の軍事独裁政権を批判する記事が目立った。だが、朝鮮総連は関係者らに対し、『三千里』を読まないよう指導したという。金達寿らが1975年に始めた季刊『三千里』創刊号=呉文子さん提供

当時、金達寿が主導した雑誌「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を愛読していた在日朝鮮人は「金達寿は在日に誇りを取り戻してくれた人物だった。でも、総連から出て行った人間が活躍するのは面白くない、という雰囲気だった」と証言する。金達寿たちは『三千里』で、総連機関紙による「反民族的行動」という批判に反論した。

当時、金達寿らは東京都調布市にある呉文子さんの自宅で『三千里』の編集会議を開くことがあった。呉さんによれば、金達寿はよく「今の北朝鮮は間違っている」と主張する一方、「社会主義はこんな思想ではないはずだ」とも語っていたという。


呉さんは「当時は、韓国に比べて、北朝鮮の実態は十分明らかになっていませんでした。帰国した在日朝鮮人が悲惨な生活をしていることはわかってきましたが、まだまだ美化されたものが残っていました。北朝鮮を批判する日本人も少なかった時代で、金達寿先生も北朝鮮を見限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しょう」と語る。講演会での呉文子さん(左)=呉さん提供

一方、金達寿は1981年に初めて韓国を訪れた。呉さんによれば、金達寿は製鉄所や造船所など「漢江の奇跡」と呼ばれた発展した祖国を見て「今浦島の気分だ」と語っていたという。呉さんは「総連は、韓国では子どもが空き缶を持って物乞いをしていると教えていましたから」と話す。『三千里』は、韓国にも北朝鮮にもくみしない第3勢力のような論調に傾いていった。呉さんは「メンバーはみな、南北統一を強く願っていました」と語る。1987年に発行された季刊『三千里』の最終号=呉文子さん提供
■語らなかった過去

金達寿は著作で自身の私生活を語ることはなかったが、深刻な悩みを抱えていた。呉さんは13日の講演で、朝鮮総連系の金融機関に勤めていた金達寿の長男が昇進ができなくなり、父親と徐々に疎遠になっていった事実を明らかにした。長男は体を壊し、金達寿の死後に亡くなった。

呉文子さんも、金達寿と同じように家庭が破壊された経験を持つ。父親の故関貴星(呉貴星=オグィソン=)さんは岡山県で事業に成功した在日商工人で、帰国事業に熱心に取り組んでいた。呉さんも1959年12月13日、初の帰国船が出発する前夜祭で金日成をたたえる歌を歌った。

呉さんは「私自身、音大出身ということもあり、女性同盟(在日本朝鮮民主女性同盟)の幹部として、大会の式典で合唱の指揮をしたり、党が掲げる思想について学習指導をしたりして熱心に活動していました」と語る。

だが、関貴星さんは60年、北朝鮮に招かれて視察する機会があった。関さんの目に映った北朝鮮は「地上の楽園」とはほど遠く、同行者が帰国者らに囲まれ「あなたにだまされて一生を棒に振った僕たちをどうしてくれる」と激しくなじられる場面を目撃した。

関さんは「帰国を希望する人に実情を説明すべきだ」と総連に訴えたが、「帰国事業を妨害する反動」とレッテルを貼られた。関さんは62年、北朝鮮の実態を告発する『楽園の夢破れて』を出版し、娘夫婦との関係を断った。


それでも総連は呉さんと朝鮮大学校で教えていた夫を責め立て、自己批判を繰り返し強要した。学生も夫に反抗し、もはや教育の場ではなくなっていた。「このまま組織にしがみつき、不正にも目をつむっていていいのか」と悩んだ末、夫は71年、朝鮮大学校を辞めた。関さんは86年に死去した。

呉さんは「私は1990年ごろまで、どうしても、首領様、元帥様、将軍様と言ってしまい、ただ、金日成と呼ぶ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尊敬していなくても、呼び捨てにできない。それが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の怖いところだと思います」と話す。1987年にあった季刊『三千里』終刊パーティーに出席した金達寿(左から2人目)=呉文子さん提供

金達寿が死去した後、北朝鮮は日本人拉致の事実を認めたほか、核実験や弾道ミサイル発射を繰り返している。北朝鮮による深刻な人権侵害の実態も次々と明らかになっている。

呉さんは「今、金達寿先生が生きていれば、前面に立って、北朝鮮を批判し、人権や民主化運動の先頭に立っていたでしょう」と語る。「気持ちの熱い人でした。自分の立場が悪くなろうとも、悪いことは悪いとはっきり語る人でしたから」と話す。

「金達寿先生の人生は、自分が知っていることだけで簡単に物事を判断せず、世の中を複眼的に見ることの大切さを教えてくれ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呉さんは、そう語った。


牧野愛博朝日新聞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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