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전 총리 “한·중·일, 그만 으르렁대고 소통 채널 갖춰야”
최근 20년 일본 자민당 정권에서 한국,중국 등 이웃 나라와의 근린외교 중요성을 가장 강조한 지도자를 꼽는다면 단연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85) 전 총리다. 2007년 총리 재임 시 그가 제창했던 '미·일 동맹 강화와 아시아 외교의 공명(共鳴)'이란 깃발은 이후 아소 다로,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정권으로 이어지며 '미·일 동맹 일색'으로 퇴색하고 말았다.
2012년 정계 은퇴 후에도 한·중·일 30명의 각계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한·중·일 30인회'의 일본 측 좌장, 중국 보아오 포럼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동북아 3국 공존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래서 보수세력들로부터는 "전방위 굽신 외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후쿠다 전 총리를 아는 인사들은 "굽신 외교가 아니라 아시아와 미국을 하나의 틀에서 보는 묶음 외교"란 평을 내놓는다. 이제는 일 정치권에서 좀처럼 찾기 힘들어진 '존경받는 어른'에게 한일 관계의 앞날, 미·중 간의 갈등, 첫 부자(父子) 총리를 배출한 정치 명문가로서의 신념을 폭넓게 들어봤다. 애정이 큰 만큼 실망도 큰 것인지, 한국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 등에 대해선 쓴소리도 마다치 않았다, 인터뷰는 17일 오후 도쿄 롯폰기의 개인 사무실에서 70분간 진행됐다.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는 "현재 일본 국민은 한국을 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일 정부도 그 답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사진=김현기 순회특파원
-기시다 총리는 취임 후 전화 회담에서 한국을 8번째, 제2그룹으로 분류했다. 무관심을 보여주는 건가.
"순서 자체가 중대한 문제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종합해서 본다면 8번째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있다. 따라서 한시라도 빨리 그런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기분 좋게 한국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기시다 총리 스스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순서가) 미뤄진 것이라 생각한다. 이건 일본에 책임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여겨지는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 생각한다."
1] 한일관계
-기시다 총리는 줄곧 "볼은 한국에 있다"고 한다. 반면 한국은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2015년 기시다 총리가 외상일 때 한차례 결말(위안부 합의) 본 것을 두고 (일본이 한국에 볼을) 던졌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지금 볼이 한국에 있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한국이 볼을 제대로 던져줄 것인가, 제대로 된 볼을 던져 줄 것인가, 혹은 볼인지 뭔지 모르겠는 것들을 마구 던질 것인가 중의 하나라고 본다. 사실 최근 몇 년간 한국은 일본에 볼 같은 것들을 아주 많이 던져 온 것 같다. 예컨대 이번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표현)에 한국 (김창룡) 경찰청장이 상륙한 것도 그렇다. 나로선 그게 제대로 된 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찌그러진 볼이다.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본 국민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전화 회담을 처음 (한국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하는 사인(신호)이 한국으로부터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에는 어차피 한국과 뭘 합의해도 또 뒤집어질 것이라는 일종의 불신감이 큰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 일본 국민의 생각은 한국의 여러 모습을 보면서 '참, 이거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란 것이다. 일 국민은 물론 일 정부도 아마 그 답을 갖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먼저 (한국이) 제대로 된 볼 같은 볼을 주지 않으면 힘들다. 그것을 통해 여러 환경이 정리됐으면 한다."
-아시아를 상대적으로 중시한다는 평가를 받는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60)가 새로운 외상에 취임한 데 대해 한국에선 기대감이 있다.(하야시 외상은 2008년 후쿠다 전 총리에 의해 방위대신으로 첫 입각한 인연이 있다)
"결국은 인간 대 인간의 대화다. '아, 이 사람과는 이야기를 해도 좋겠다'란 기분이 들게끔 하는 건 필요하다고 본다. 인상이 사나운 사람과는 힘든 법이다(웃음). 한국의 마음을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하는 기대를 갖고 (한·일 간에)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새로운 (기시다-하야시) 체제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도 갖고 있다."
-한국 대선을 어떻게 예상하나.
"한국의 일이니만큼 특별히 의견이 없다. 다만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만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정권이 됐으면 좋겠다."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16일에 바이든과 시진핑이 온라인 화상 회담을 했다. 성공적이라 보나.
"미·중 회담을 앞으로 몇번이고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성급히 결론을 낼 필요는 없고, 보다 오래가는 결론을 내야 한다."
2] 대중정책
-시진핑 주석은 "대만 문제를 놓고 불장난을 하면 타 죽을 것"이란 강한 표현을 썼는데, 대만해협에서 무력 충돌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그 가능성은 없다. 충돌이 생기면 대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큰 전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극단적인 무기가 등장할 수 있다. 미·중 모두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 자유경제 시스템까지 파괴하는 그런 결정을 (양국 정상이)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미·중 무력충돌 시에는) 아시아가 괴멸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너무 대만의 위험을 요란하게 떠들지 않는 게 필요하다. 한·일 관계와도 비슷하다. 서로서로 자극하는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쿼드, 오커스(AUKUS) 등 아시아를 둘러싸고 미국 중심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여러 협의체가 생겨나고 있지 않나.
"난 쿼드에 중국, 한국, 동남아 국가 모두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해야만 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와 안정으로 이어진다."
-미·중대립이 심각해지면 미국이 일본에 서프라이체인 등 경제문제에서 중국과의 디커플링(분리)을 요구하고 나설 텐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미국이 좋냐 중국이 좋냐 그런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도 중요하고 중국도 중요한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중국 다 중요하고, 나아가 일본도 좀 거기에 넣어줬으면 좋겠다 (웃음). 모두가 그런 관계이어야 한다. 한·중·일 3국은 모두 미국, 그리고 3국 간에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게 지역안정에 필수적이고 나아가 전 세계의 안정으로 이어진다. 한·중·일 모두 양국 관계만 따로 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한일(중) 관계
-그런데 한·중·일 3국 정상 셔틀 회담도 중단된 지 2년이 넘었다. 한·중·일 30인회 같은 민간 협의체도 멈춰섰는데, 부활해야 하는 것 아니냐.
"지금 왜 그런 게 안 이뤄지고 있냐면 간단하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끼리만 그렇다면 모르지만 국민도 으르렁거리는 형편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좀 벗어나 민간차원에서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돼 준다면 자연스럽게 그런 것들을 활발히 하자는 기운이 생겨날 것이다. 민간이 협력의 틀에서 논의하고 그 결과를 정부에 전달하면 (한·중·일) 정부도 역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2016년 12월 일본 시즈오카현 니혼다이라호텔에서 열린 제11회 한중일 30인회에서 3국 좌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이 한국 측 좌장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 가운데가 일본 측 좌장인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왼쪽이 중국 측 좌장인 쩡페이옌 전 부총리.
4] 대북정책
-한국 문재인 정부는 종전선언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일본과 미국은 신중한 입장처럼 보이는데.
"종전선언은 결국 미국 입장에서 남북이 어떻게 하려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먼저 판단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보기엔 (북한) 국민은 적어도 현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 보다 자유롭게 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갖고 있을 것이다. 지금 같은 고립 상태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있을까. 그건 무리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듯 자연스러운 흐름이 북한에서도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핵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와 그걸 쓸 것인가는 별개의 차원이다. 안 쏜다. 북한이 왜 핵을 갖고 있느냐면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개인(김정은 위원장)인지 혹은 북한 국민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강하게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런 (핵 보유)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인데, 모든 게 해결이 된다면 핵은 필요하지 않다. 대가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유·발전'과의 교환이라 북한이 이해한다면 그걸(핵 포기) 택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 환경 조성을 해야 한다. 난 그것이 한국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5] 일본의 경제 상태
-일본의 저성장, 저물가로 세계 3위 경제 대국 자리를 내주는 게 시간문제란 지적도 많은데.
"기본적으로 일본은 현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거비가 별로 안 든다. 의료는 보험이 잘 돼 있고, 연금도 적당히 나온다. 그러니 모두 현 수준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젊은이들까지 이에 만족하면 결코 안 되지만 전체적으로는 일본 국민 대다수가 현상 유지, 현상 만족이다. 물론 이게 좋다고만 볼 순 없다. 다만 구매력 기준 GDP에서 한국에 추월당하고 역전당했다는 사실이 더 (일본에) 널리 알려지면 '아, 이대로 괜찮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제 필요 없는 걸 무리해서 사용할 필요도 없고, 대량소비·대량생산의 시대는 아니라고 본다. 좋은 물건을 길게 쓰면 된다. 많이 만들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것을 만들면 된다. 기후변동 대응 등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후쿠다 전 총리의 장남인 후쿠다 다쓰오 현 자민당 총무회장
-아들(후쿠다 다쓰오·54)이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뭘 기대하나.
"제대로 된 일을 했으면 좋겠다(웃음)"
-총리가 되는 걸 기대하나.
"그럴 일 없다. 아직 멀었다. (그렇다면 언제 될 것 같나) 내가 총리가 된 게 71살이고, 내 부친(후쿠다 다케오)도 71살 때 총리가 됐다. 그러니 좀 더 기다리는 게 좋겠다(웃음). 하지만 (총리가) 되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을 해야 한다. 국민에 대한 책임도 있어야 하고, 이웃 나라와의 근린외교도 충분히 배려해야 한다.그런 넓고 깊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평소 아들에게 조언하나.
"일체 않는다. 내가 오늘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 중앙일보에 게재된 것을 보고 '아, 역시 그렇구나'라 생각해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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