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석's post도산 안창호, 정의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하던 분들끼리의 갈등은 옛 운동권의 정파 갈등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벌했다고 한다. 큰 갈래는 '서북파 vs 기호파'였다고 하는데, 서북 지역은 조선 시대 내내 차별 받던 동네다. 기호 지역은 조선 정치와 학문, 문화의 중심이었고. 서북파 독립운동가 가운데 유명한 분이 도산 안창호. 안창호는 몹시 실용적인 마인드를 지닌 분이었고, 진보적인 이들에겐 별 인기가 없다.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북한과 김일성 역시 안창호를 싫어한다. 지역으로만 보면, 김일성 역시 서북파 영향권이겠으나, 김일성은 기본적으로 주니어 세대이므로, 시니어인 안창호를 밟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 같다. 김일성이 김구를 밟았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 듯 싶고. 3.1운동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것 역시 어쩌면 그 맥락일 테고. 여기에 이념까지 겹치면, 말 그대로 굳히기 모드였겠지. 예전에는 안창호가 쓴 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기호파와의 대립' 을 머리에 넣고 나니, 단박에 이해가 됐다. 안창호는 이렇게 봤던 것 같다. '기호파 녀석들, 목숨 걸고 독립운동한다고 하는데, 그 녀석들 속내는 뻔하지. 독립해서 새 나라를 세우고 싶은 게 아냐. 자기네가 양반 노릇하던 나라에서, 일본 애들이 양반 노릇하는 게 고까운 거지. 일본 애들을 그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고, 자기네 역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심보일 뿐이야. 그들은 그저 일본 애들이 자기 자리 빼앗은 게 싫었을 뿐, '새 나라'를 세울 마음은 없어. 어쩌면 어설프게 독립해서 저런 녀석들이 양반 노릇하게 하느니, 제대로 실력을 쌓고, 좋은 교육으로 봉건 잔재를 머리에서 싹 씻어낸 뒤에 독립하는 게 나을 수 있어.' 뭐..다들 알다시피 역사가 요상하게 전개되면서, 한반도는 분단이 돼 버렸다. 상대적으로 시장경제와 기독교에 친화적이었던 서북 땅에 소련이 진주했다. 양반입네 하며 목에 힘주던 부류가 살던 땅에는, 신분과 종교의 차별을 혐오하던 이민자와 개척자의 나라 미국이 진주했다. 그러니까 서북파의 정서가 짙었던 이들이 적극적으로 남하했고, 그들은 남한에서 극우가 됐다. 서북파 전통의 극우 수렴. 한반도 분단이 낳은 비극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실용, 시장, 기독교 친화적인 서북 세력이 극우가 되니까, 그들에게 맞섰던 민주-리버럴-진보 세력은 그들 내부에 있던 기호파 분위기를 깨끗이 씻어내지 못하게 됐다. 민주화 운동이 유사 선비의 활동을 닮아간 면이 있었는데, 그 역사적 배경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 이야기를 한 건, 정의연 파문 때문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 정의연 측이 회계 처리를 허술하게 했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어제 회견은 최악이었다. 객관적인 근거를 통한 설명이 아니라, 그냥 읍소. 도산 안창호가 봤다면, 기호파 양반 녀석들의 잔재가 이토록 끈질기구나 하고 탄식했을 것 같다. * 그런데 정의연 측이 크게 해먹거나 한 것 같지는 않다. 아래 링크한 기사(22억 증발 운운)가 떴는데, 막상 내용을 보면 제목이 주는 느낌과 다르다. 22억 원이 증발하지 않았다. 이월됐을 뿐이다. 돈 자체는 그대로다. 회계처리 미숙 혹은 무능 차원에서 비판할 수는 있는데, 횡령으로 몰아가는 건 잘못이다. 요컨대 윤미향 씨는 저렇게도 돈 관리를 못하면서 어떻게 수백조 예산을 심사하는 국회의원 노릇 하겠다고 나섰는가, 차라리 이런 비판이라면 의미가 있겠다. *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469&aid=0000495336&fbclid=IwAR0RDLs1WsBnNHDgIejVDQ32YnHHEZ5mYgT2vi8fdwC_SOT72LMgImG0LzU) * 윤미향 딸 유학 건도 마찬가지다. 강용주 선생님이 페북에 적었던데, 윤미향 남편의 형사 보상금을 미리 당겨 받았다면, 딸의 유학 자금은 마련할 수 있다. 여기에 주변인들의 자발적 후원까지 곁들여지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 물론, 자식에게 음악 가르치기란, 보통 사람들에겐 아주 힘든 일이다. 시민운동가의 딸이 음악을 전공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화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기호파 양반 분위기를 떠올리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이런 부류 가운데서 정말 저런 사람들 있다. 맨날 라면 먹고, 여기저기 손 벌리고 다니는데, 지식과 문화 향유 면에선 거의 귀족 급이다. 좋게 볼 수도 나쁘게 볼 수도 있겠다. 내 입장은 그냥 중립이다. 물론 사실관계가 더 드러나면, 내 입장도 바뀔수 있겠다. * 내가 정말 답답한 것은 이 대목이다. 어제 회견 참가자들은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서 논리적으로 해명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 같다는 점이다. * 나이만 많았지, 정말 어린애 같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철 들기를 거부한 채로 나이 먹고 교수도 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끔찍하다. * 철이 든다는 것은 돈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걸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가 채 여물기도 전에, 정규 교육을 다 끝내기도 전에 철이 들어버린다. 그건 슬프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방끈을 끝까지 늘이고, 중년 나이가 되도록 철이 들 필요가 없다. 철이 들 필요가 없다는 점 역시 특권이다. 그건 화가 난다. 양극화 어쩌고 그러는데 양극화가 별 게 아니다. 누군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야 했다. 다른 누군가는 실컷 영리해 진 뒤에 아주 천천히 철이 드는 특권을 누렸다. 그게 바로 양극화다. * 거듭 이야기하는데, 회계처리가 엉망이면, 대개는 문제가 생긴다. 이미 생겼을 수 있다. 고의로, 조직적으로 횡령을 한 정황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 돈 관리가 엉망이었다면, 누군가가 조금씩 해먹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22억 증발' 운운하는 수준은 아닐 듯 하다. 철이 들 필요가 없었던 이들은 대개는 간도 작다. * 역시 거듭 이야기하는데, 진짜 문제는 회계 처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순위를 꼽자면, 노선과 방법이 1번, 돈을 쓰는 방식이 2번, 회계처리는 3번이라고 생각한다. * 소녀상 세우기 운동은 끔찍했다. 우리가 할머니들의 고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이 순결한 소녀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 먼저 근대화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사람들을 짓밟았다. 남성이 여성을 짓밟았다. 역사의 폭력이 덮친 가정 안에서는 어린 여성에게 그 폭력을 몽땅 뒤집어 씌웠다. 이런 문제가 중첩된 자리에 할머니들이 계셨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대부분 지금도 이어진다. * 남매가 있던 가정에서 남자 형제에게 고등 교육 기회를 몰아주고, 여자 형제는 백화점 점원 같은 걸 하면서 가계를 책임지던 문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흔한 풍경이었다. 가문의 대를 이을 남자 형제는 곱게 숨겨두고, 여자 형제는 위안부로 보냈던 일제 강점기 어느 가정 풍경과 얼마나 다른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머니들의 삶을 기억하며, 오늘을 돌아보고 미래를 바꾸려 한다. 정의연 운동이 의미가 있으려면, 불편하더라도 이 부분을 짚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택한 길은 흔한 여러 감정들을 성찰 없이 물신화 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은 철들지 않은 채 나이 먹어 버렸다. *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목소리 역시 시대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미향이 활동을 시작했던 1990년대에는 이런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일본 문화 개방을 밀어붙일 때는 대체로 민주-진보-리버럴 쪽에서 환영목소리가 나왔다. 당시는 영화의 시대였던 탓에, 일본 영화 개방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도 있었다. 오히려 왜색 운운 하며 감성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반응은 <조선일보>부류에서 먼저 나왔다. 그런 시기에는 윤미향 같은 분들은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것 같다. 그런데 역사의 바퀴가 돌고돌아, 윤미향의 단체에 거금이 몰리는 때가 됐다. 그들은 더 이상 고립된 소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굴리는 돈과 영향력에 어울리는 태도를 익혔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고립된 소수였던 시절에 익힌 습속을 버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게 편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글 머리에서 언급한 '기호파 양반 출신 독립운동가' 문화라는 봉건 잔재를 씻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다. '선비는 역사와 정치를 논해야지 돈 세는 것 아니다.' 뭐 그런 문화. 윤미향 부류 말고도, 50대 이상 중산층 상당수가 그런 태도다. 그들은 이제 약자가 아니며, 오히려 기득권층인데,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 정말이지 그러면 안 된다. 내 생각에 도산 안창호가 되살아난다면, 아주 진작에 호통을 쳤을 것 같다. (점심 먹고 몽롱한 상태에서 인터넷 뉴스 보다 휘리릭 썼는데요.글이 퍼져가며 예상치 못한 논란도 생긴 듯 합니다. 그래서 첨언 합니다. 정의연 사태가 가벼운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제기를 말끔하게 털지 않으면, 시민운동 전체가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조직 보위 논리를 들이대자는 것은 아니고요. 과거 박원순 시장이 아들 병역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반박하면서, 오히려 반등 계기를 잡았는데, 그와 같은 대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호파 양반의 습속 어쩌고 하는 자극적인 표현을 썼습니다만, 제가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림자 노동'의 가치 인정입니다. 양반의 습속이라는 게 결국 밥상을 받을 줄만 알고, 설거지는 나몰라라 하는 것이잖아요. 활동에 쓰인 영수증을 모아 챙기고, 엑셀 창에 숫자 입력하고, 계산 결과를 다양한 방식으로 검산해보고, 이런 종류의 일을 하찮게 여긴다면, 자신의 지적, 정서적, 정치적 성장에만 도움이 되는 일만 하려 한다면, 그게 바로 양반의 습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 사태가 보여준 것은, 얼핏 그림자 노동처럼 여겨지는, 그래서 양반 선비가 할 일은 아닌 듯 싶은 일에서, 빈 틈이 생기면, 운동 자체가 위기를 겪는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수증 챙기는 일이 거창한 담론이나 정책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죠. 이런 실무의 중요성을 깊이 자각했던 운동가? 그 때 떠오른 사람이 서북파 안창호였습니다. 그래서 안창호 이야기를 한 거고요. 흔한 감정을 성찰 없이 물신화하면 위험하죠. 담론이나 정책 등 정신활동을 특권화, 신비화해도 나쁘죠. 그건 지식 계층과 육체 노동자를 다른 신분으로 구획하던 봉건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숫자와 물질, 실무를 물신화해도 위험합니다. 안창호 이야기를 한 게 실무를 물신화하자는 취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냥 균형이 필요하다는 거죠. 숫자를 챙기자는 이야기가 자칫 경제, 경영 전문가를 지금보다 더 우대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질까봐도 걱정스럽습니다. 그런 취지 아닙니다. 시민단체의 일상적인 회계 처리에 경영학과에서 배우는 수준의 지식이 필요할 리는 없습니다. 무슨 이슈가 나오면 대뜸 그 분야 전공자를 찾는 것 역시 나쁜 의미의 전문가주의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조직의 살림살이를 세세하게 챙기는 일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라고 봅니다. 그래서 습속 이야기를 자꾸 한 것이고요. 반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겁니다. 피곤해서 좀 자얄 듯요. * "남매가 있던 가정에서 남자 형제에게 고등 교육 기회를 몰아주고, 여자 형제는 백화점 점원 같은 걸 하면서 가계를 책임지던 문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흔한 풍경이었다. * 가문의 대를 이을 남자 형제는 곱게 숨겨두고, 여자 형제는 위안부로 보냈던 일제 강점기 어느 가정 풍경과 얼마나 다른가? *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머니들의 삶을 기억하며, 오늘을 돌아보고 미래를 바꾸려 한다. 정의연 운동이 의미가 있으려면, 불편하더라도 이 부분을 짚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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