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범의 문화탐색
지하철은 ‘혁명’을 싣고 달린다
중앙일보
입력 2019.03.28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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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 디자인 평론가
파리, 스탈린그라드역
파리 지하철의 차내 방송은 시크하다기보다는 썰렁하다. 정차역 안내라고는 어쩌다 생각났다는 듯이 한 번 해주는데, 그것도 역명만 짧게 두 번 읊는 게 전부다. 자문자답하듯이 한 번은 끝을 올리고 한 번은 끝을 내린다. “콩코르드”(↗) “콩코르드”(↘) 이런 식이다. 외국어 방송이나 환승 안내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는다. 정차할 때마다 창밖을 두리번거리니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역’이 나온다. 루스벨트? 루스벨트라면 미국 대통령 아닌가. 파리 지하철역에 왜 그 사람 이름이? 심지어 그다음은 ‘조지 5세역’이다. 어라? 여기가 프랑스야 영국이야? 조금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각기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도와주었던 우방국인 영국과 미국에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당시 국가 원수의 이름을 붙인 듯하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스탈린역’도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스탈린역’ 대신에 ‘스탈린그라드역’이 있었다. 아하, 2차 세계대전에서 동부전선의 전세를 역전시킨 바로 그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프랑스가 속한 서부전선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전이 결정타였지만 동부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분기점이었다. 그리고 양 전선을 통틀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아마 냉전 분위기로 인해, 스탈린의 이름을 직접 넣지는 못하는 대신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를 역명으로 삼은 것일 게다. 프랑스인들의 노회함이 느껴져서 빙긋 웃음이 나왔다.
서울, 독립운동역
역사 내부를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으로 꾸민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뉴시스]
얼마 전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독립운동 테마역’으로 바뀌고 역사 내부가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으로 꾸며졌다. 통로와 승강장, 안전문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언행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승강장 가운데의 기둥들을 사각으로 감싸고 흰색으로 마감했는데, 사면의 기둥 아래 부분에 돌아가면서 설치된 벤치는 좌판의 끝 부분을 둥글게 굴려서 멋을 냈다. 나폴레옹 무덤의 양끝 장식을 닮은 것이 나폴레옹 제정기의 ‘앙피르(Empire)’ 양식을 연상시킨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안국역 승강장의 리노베이션에 적용된 조형 언어가 프랑스 혁명기의 지배적 양식이었던 신고전주의임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안국역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바쳐진 지하 신전이자 그 자체로 독립기념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변신하였다.
2번과 3번 출구 쪽으로 들어와 개찰구로 향하는 벽면에는 전체 테마에 대한 설명판 같은 것이 붙어 있다.거기에는 세계 3대 혁명선언문(영국 권리장전, 미국 독립선언문, 프랑스 인권선언문)과 기미독립선언문이 병치되어 있다. 3·1운동을 근대혁명과 같은 수준으로 올려놓으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 반대편인 5번 출구로 이어지는 통로 벽면에는 ‘100년 강물’이라는 제목의 전시물이 붙어 있다. 여기에는 말 그대로 1894년 동학혁명, 1919년 3·1혁명, 2017년 촛불혁명이 하나의 강물이 되어 흐른다. 대한민국은 저 멀리 동학혁명에서 시작하여 촛불혁명으로 완성된 혁명국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양쪽 통로의 전시물들은 서로를 비추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혁명 서사화하고 있다. 북한에 ‘조선혁명’ 서사가 있다면 남한에는 대한민국 혁명 서사가 있는 것이다.
혁명역은 어디로 향하는가?
하지만 이러한 혁명사적 의미 부여에는 커다란 간극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 독립선언, 프랑스 인권선언은 모두 그 주체가 ‘인간-시민’임에 반해, 기미독립선언은 ‘민족’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근대혁명이 인간-시민이 주체가 되어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해갔다면, 한국은 민족이라는 집단적 주체를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사적 특수성의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사 해석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대한민국이 봉건주의와 외세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탄생했다는 서사 속에는 식민지의 경험이나 연합국에 의한 해방 서사는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파리처럼 서울 지하철에 루스벨트나 처칠, 장제스의 이름을 딴 역이 생기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 서울지하철 안국역은 민족이라는 승객을 태우고 달리는 혁명역이다. 과연 다음 정차역은 어디일까?
최범 디자인 평론가
2015****2019.03.28 13:54
세계사적 보편성에 있어서 마치 서울의 지하철역 이름이 파리의 지하철 이름보다 못난 것처럼 글을 쓴 것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판단 오류에 기인한다고 본다. 주지하듯이,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통해서 혁명을 유럽에 전파했지만,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프랑스도 명백한 전범국가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프랑스는 세계사적 보편성이라는 입장을 취했고, 그로 인해서 무수히 많은 자국민을 죽인 스탈린의 이름까지도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직접 점령한 히틀러는 쓰지 않았다. 한편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침략을 당했고, 조선은 일제에 의해서 멸망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에게 '민족'이 아닌 '세계사적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을 욕보이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히틀러처럼 나폴레옹이 전쟁광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다 알 수 있지만, 어느 못난 프랑스인이 그렇게 평가하는가? 서구적인 시각으로 훌륭한 선조들까지 욕보이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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