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5

현충원에 추모비 하나 없지만... 70년전 사선 넘나들던 화교용사들 - 오마이뉴스

현충원에 추모비 하나 없지만... 70년전 사선 넘나들던 화교용사들 - 오마이뉴스

현충원에 추모비 하나 없지만... 70년전 사선 넘나들던 화교용사들[한국전쟁 70주년 특집 - 화교용사들①] 그들은 누구였고, 왜 한반도에서 피를 흘렸나
20.06.23 07:15l최종 업데이트 20.06.23 14:21l
글: 김도균(capa1954)
사진: 이희훈(lhh)

1950년 6월 25일. 식민지시대가 끝난 지 5년도 안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혹은 '6.25전쟁'은 이후 한국사회의 모든 구조를 주조했다. 그 전쟁이 발발한 지 무려 70년이 흘렀다. <오마이뉴스>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또다른 상흔인 화교부대병 2세와 소년병, 월남민 2세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말]


▲ 이지성 주한대만대표부 부대표를 비롯한 화교 단체 회원 등이 5월 1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 외국인 묘역 한국전쟁 참전 종군화교 강혜림 위서방의 묘 앞에서 참배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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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성 주한대만대표부 부대표를 비롯한 화교 단체 회원 등이 5월 1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 외국인 묘역 한국전쟁 참전 종군화교 강혜림 위서방의 묘 앞에서 참배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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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5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 현충원 외국인 묘역. 비가 퍼붓는 가운데 30여 명의 사람들이 참배했다. 불붙인 향을 머리 위로 들고 세 번 고개를 숙이는 중국식 예법이 눈에 띄었다. 이들이 머리 숙인 2개의 묘비에는 각각 '강혜림'(姜惠霖)과 '위서방'(魏緖舫)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강혜림 묘비 기단부에 쓰여진 '의백장존(義魄長存, 의로운 넋은 오래도록 남는다)'이란 글자가 비에 젖어 더욱 비감하게 느껴졌다.

소속 군과 계급이 명기된 다른 묘비들과는 달리 두 사람의 이름 앞에는 '종군화교'(從軍華僑)라고만 돼 있다. 서울 현충원에 모셔진 18만2000여 위의 안장자 중 외국인은 이 두 사람 화교를 제외하면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 박사가 유일하다.

이날 행사에는 이보례(李寶禮) 한국화교협회연합총회장, 이지성(易志成) 주한대만대표부 부대표, 김육안(金育安)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을 비롯해 재한 화교와 주한대만대표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대만과 미국 등지에 거주하는 위서방 용사의 부인과 자녀들은 매년 빠지지 않고 현충원을 찾아 참배해 왔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참석하지 못했다.

화교에게도 동족상잔


▲ 한국전 당시 육군첩보부대 SC지대원 김성정(뒷쪽) 용사와 사촌 동생 김정의(앞쪽) 용사. 1951~1953년까지 무장공작원으로 활동한 김성정 용사는 SC지대 활동 공로을 인정받아 1973년 정부로부터 보국포장을 받았다. 김정의 용사는 1952년 겨울 낙하산으로 북한에 침투한 후 돌아오지 못했다.
ⓒ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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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화교가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연은 70년 전 한국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약 7만2000명(남한 1만2000명, 북한 6만 명)의 화교가 살고 있었다. 분단과 전쟁은 이들 한반도 거주 화교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미 중국은 4년(1946~1950)에 걸친 국공내전을 치른 터였다. 1949년 4월 수도 난징을 상실한 후 광저우, 충칭, 청두를 전전하던 국민당 정부는 12월 중앙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국부천대)했다. 대륙을 장악한 공산당은 같은 해 10월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대만에는 국민당 정부(중화민국), 대륙에는 공산당 정부(중화인민공화국)라는 두 개의 정권이 양립하게 됐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던 화교에게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었다. 한국전 발발 닷새 후인 1950년 6월 30일, 국민당 정부는 육군 3개 사단과 20여 대의 수송기를 파병하겠다고 한국 정부에 제안했다. 하지만, 중공에게 전쟁 개입의 빌미를 줄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중화민국의 한국전 참전은 불발됐지만, 일단의 화교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한국군에 합류했다. 이들은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결성해 북한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던 북한 거주 화교들이었다. 위서방(1923~1989)은 이 단체의 단장, 강혜림(1925~1951)은 부단장이었다. 바로 현충원에 안장된 두 사람이다.

화교수색대의 활약


▲ 5월 1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 외국인 묘역에 안장된 한국전쟁 참전 종군화교 강혜림의 묘비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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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 외국인 묘역에 안장된 한국전쟁 참전 종군화교 강혜림의 묘비에 적힌 문구.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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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한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현지사정에 밝은 화교 청년들은 1사단 정보처에 소속돼 정보수집과 치안유지 업무를 도왔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악화되자 이들은 국군을 따라 남하했다. 위서방 단장은 함께 후퇴한 40여 명의 화교청년들을 중국수색대로 개편했다.

중공군 참전으로 중국어와 한국어 모두 능통한 화교들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상황에서 군은 이들의 입대를 반겼다. 다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계급과 군번은 부여되지 않았다.

화교수색대는 1950년 12월 24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에서 중공군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함으로써 중공군이 처음 38선 이남까지 진출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이듬해 1월 이들은 소속을 1사단 예하부대인 15연대로 옮겨 중국인특별수색대로 이름을 바꿨다(화교부대 생존자 강춘덕씨의 증언에 의하면, 부대의 정식명칭은 15연대 수색중대 중국인특별소대). UN군이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아낸 후 화교 용사들은 서울 탈환 작전에 투입됐다.

1951년 2월 2일 과천 관악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화교 수색대원들은 중공군으로 위장하고 적진으로 돌입했다. 산기슭의 참호를 하나하나 접수해가는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15연대는 중공군을 격퇴하고 고지를 점령했지만, 선두에서 대원들을 이끌었던 화교 강혜림 부(副)대장이 전사했다.

가족이 없었던 강혜림 부대장의 영현은 부산 화교 소학교로 옮겨져 임시 안치됐다. 1959년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고, 1964년 12월 12일 서울현충원 24묘역에 안장됐다. 외국인으로는 첫 국립묘지 안장 사례였다.


▲ 한국전쟁 참전 화교 부대 약사 지난 2007년 한국 정부에 화교 용사들에 대한 기념비 건립을 청원하면서 화교사회가 제작한 참전 화교 부대 자료
ⓒ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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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3월 14일, 서울 탈환작전 당시 서울시내에 가장 먼저 진입해 수색·정찰을 했던 부대가 바로 중국인특별수색대였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 수복 직후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시작됐다. 4월 28일 중국인특별수색대는 서울 녹번동에서 벌어진 전투에 투입됐다.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포격 목표물을 알리는 깃발을 적진에 설치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중공군과의 교전 과정에서 위서방 대장이 가슴과 다리에 총상을 입고 다른 대원 다섯 명도 부상당했다.

육군첩보부대 SC지대의 창설... 한중합작

1사단 중국인특별수색대가 중공군과 격전을 치르고 있을 때인 1951년 3월, 부산에서는 또 다른 화교부대가 창설됐다. 서울(Seoul)과 중국인(Chinese)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딴 'SC지대'였다. 중국인특별수색대가 주로 북한 거주 화교 청년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다면, SC지대는 남한에서 모집한 화교들 중심이었다. 명령계통도 중국인특별수색대가 1사단에 속해 있었던데 비해, SC지대는 육군첩보부대(4863부대) 소속이었다.

눈여겨 볼 대목은 중국인특별수색대가 화교 청년들의 자생적 조직에서 출발했다면, SC지대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한국과 중화민국 정부간의 사전교감이 있었다는 점이다.

중화민국의 참전이 무산되고 중공이 전쟁에 개입하자 국민당 정부는 국부군(國府軍·국민당정부군) 대위 출신인 류국화(劉國華), 교사 출신인 왕세유(王世有) 두 사람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한국에서 화교 지원병을 모집해 중공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두 사람은 김종평(훗날 김종면으로 개명) 육군본부 정보국장과 박경원 육군첩보부대장과 접촉해 협상을 벌였고, 그 결과 한중 합작의 정보부대가 창설됐던 것이다.

원래 육본 정보국 내에 있었던 육군첩보부대는 1951년 3월 독립했다. SC지대는 육군첩보부대 산하로 편제됐다. 한국군이 SC지대에 무기와 군복, 식량, 수송편의 등을 제공하고 국민당 정부는 공작비와 대원 급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모자라는 금액은 한국 화교사회에서 조달키로 했다. SC지대장에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나아통(羅亞通)씨가 임명됐다.

나씨는 국부군 장교로 임관했지만,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강제로 공산군에 편입됐다가 한국전쟁에 끌려왔다. 이후 중공군에서 탈출해서 UN군 진영으로 귀순했던 사연 많은 사람이었다. 부(副)지대장은 한국군 이백건 대위가, 지도원은 대만에서 파견된 류국화씨가 맡았다.

SC지대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 모두 200여 명의 화교 대원이 복무했다. 이들 중 70명은 무장공작원으로 사선을 넘나들었고, 나머지는 후방에서 지원임무를 수행했다. SC지대는 강화도 북방 교동도에 본부를 두고 주로 중공군에 대한 정보수집 및 첩보활동을 벌였다.

휴전 직전까지 활발한 첩보활동... 이들의 마지막 작전


▲ 한국전 당시 육군첩보부대 SC지대 무장공작원으로 종군했던 김정의 용사의 종군 기장 수여증. 소속은 육군 제4863부대, 계급은 군속으로 나와 있다.
ⓒ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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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들은 경기도 파주와 서울 사직공원 등에서 약 10주 동안 기초 군사훈련과 정보교육을 받은 후 12명이 1개 조로 국군의 전방 부대에 분산 배속됐다. 이들은 도보로 황해도 연백·해주·철원·김화 등지에, 해상으로는 함흥에 침투했다. 수송기를 타고 평안남도 성천·순천 지역에 낙하해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적지 한복판에서 첩보활동을 벌여야 하는 임무 특성상 대원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침투나 퇴출 과정에서 발각돼 전사하거나, 검거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특히 공중을 통해 투입됐던 장거리 공작조는 무사 귀환한 사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사상률이 높았다. 이들 화교 첩보부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획득한 귀중한 정보는 한국군의 작전수립에 요긴하게 쓰였다.

휴전 직전까지 첩보활동을 벌였던 SC지대의 마지막 작전은 1953년 7월 '퇴조 해상침투작전'이었다. 화교 대원 30명과 한국인 통신병 10명이 2개조로 나누어져 한 조는 함경남도 갑산 지역에, 다른 한 조는 백두산 일대로 침투했다. 초반에는 비교적 순조롭게 작전이 진행됐지만, 침투 6일째 되던 날 적에게 발각됐다. 북한군 1개 중대에게 겹겹이 포위된 상황에서 대원들은 3시간 남짓 용감하게 싸웠지만,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고 말았다.

생존자들은 통신기와 주요장비를 모두 파괴한 후 무작정 남쪽을 향해 탈출했다. 악전고투 끝에 이들이 강원도 속초의 육군첩보대 제36지구대로 복귀했던 날은 7월 25일, 휴전협정 이틀 전이었다. 귀환자는 화교 대원 3명과 한국인 대원 2명이 전부였다.

휴전 직후 SC지대는 해산되었지만, 일부 대원은 첩보부대에 잔류해 중공군에 대한 정찰활동을 수행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SC지대 무장공작원 70명 중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는 20여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한국전쟁 당시 1사단 중국인특별수색대와 SC지대 외에도 미 극동군사령부 직할 공작·첩보부대인 KLO(Korea Liaison Office·주한첩보연락처)에도 소수의 화교들이 복무했다. 이 외에 통역과 심리전, 선무 공작, 포로 심문 등에도 상당수의 재한 화교들이 참여했다.

중국인특별수색대장 위서방 용사는 전쟁이 끝난 뒤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가 됐다. 1961년부터 30여 년동안 강원도 강릉에서 '장생 한약방'을 운영하면서 극빈자를 돌보고 장학사업에도 앞장서다 1989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12월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90년 3월 20일 국립 서울현충원 제12묘역에 안장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중 '대한민국에 공로가 현저한 외국인 사망자 중 국방부 장관의 제청에 의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지정하는 자는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다'는 당시 조항이 안장 근거가 됐다.

2012년 5월 15일에는 24묘역에 안장돼 있던 강혜림 용사의 유해를 위서방 용사의 묘소 옆으로 이장해 두 사람을 나란히 모셨다. 재한 화교사회는 매년 이날 현충원을 찾아 기념식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이 중화민국 국적을 포기한 이유

한국전에 참전했던 화교들은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략 3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현충원에 안장된 위서방·강혜림 용사를 제외하고는 참전에 걸맞은 예우를 받지 못했다.

1971년 12월 53명이 종군기장을, 1973년 9월 10명이 보국포장을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외국인(중화민국 국적자)이라는 이유로 '참전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참전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국가보훈처의 일관된 입장이다. 보훈 혜택을 받을 수 없었기에 전쟁당시 입었던 부상도 자비로 치료해야 했다.

국립묘지 안장을 원했던 화교 참전용사들은 한국인으로 귀화한 후에야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의 아버지 김성정(金聖亭, 2001년 별세) 용사는 1998년 3월 한국국적을 취득한 이듬해 '참전용사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 2015년 10월 세상을 떠난 오중현(吳中賢) 용사는 한국전 당시 SC지대에서 활약하면서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지만, 귀화하지 않는 이상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평생 유지해왔던 중화민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화교 참전용사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현재 확인되는 생존자는 경남 울산의 강춘덕(姜春德·94)씨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는 이수해(李樹海·88)씨 정도다. 고령에도 비교적 건강하던 강씨는 5개월 전부터 병상에 누워 있다.

강춘덕씨의 딸 계영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버님이 참전용사로서 보훈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올해 초 보훈처에 문의를 했지만, 아직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공식적 예우를 꺼리는 정부... "거창한 추모비 바라는 게 아니다"


▲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이 5월 1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 외국인 묘역 한국전쟁 참전 종군화교 강혜림 위서방의 묘 앞에서 참배를 마치고 서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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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화교 참전용사들은 정부에 한국 내 보훈시설에 화교 참전자 추모비를 설치해 달라는 청원을 냈지만, 이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참전 국가유공자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국가수호 관련 시설을 현충원에 설치할 수 있다. 하지만, 참전 화교는 한국국적이 아니어서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기에 관련 추모비를 설치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부는 지난 3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195만여 명의 유엔 참전용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예우와 22개 유엔참전국과의 우호증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유엔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공포했지만, 중화민국은 유엔 참전국이 아니어서 화교 참전자들과는 아무 상관없다.

"거창한 추모비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화교 참전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 하나면 충분하다. 만약 비용이 든다면 기꺼이 화교단체에서 부담하겠다. 그분들이 제2의 조국으로 생각했던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고 죽어갔다는 기록만이라도 부디 남길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한다."

김육안 여한화교참전동지승계회장의 간절한 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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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대표계정 입니다.lku****2020.06.23 08:21
와.... 애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고귀한 희생 덕분에 """김정은 동지 만세""" 소리 않하고 자유롭게 잘 살고 있습니다. 다시금 고맙습니다.

답글공감5반대0
프로필 이미지kakao 대표계정 입니다.하늘여행 황부호2020.06.23 18:30
보훈처, 너무한다 앞장서서 해결책을 찾아봐라!

답글공감0반대0
프로필 이미지twitter 대표계정 입니다.GreatKorea2020.06.23 09:5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화교들이 참전해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걸 처음 알았습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정부는 마땅히 이분들에게 걸맞는 예우를 해드려야 한다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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