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세상읽기] 일본 제국대학 유학생들
오현주 기자 승인 2019.07.12 14:17 호수 678 댓글 0기사공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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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본가·외가·처가 대부분 제국대, 고등관료 출신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제국대학을 나온 한국인들이 궁금했다. 어떤 이들이며 졸업 후의 행적은 어땠나. 그들은 왜 조센징이라는 차별과 멸시를 받아가며 엄청난 비용의 사치스런 유학을 떠났을까. 그런 의문이 조금 해소됐다. 최근 발간된 ‘제국대학의 조센징’(정종현·휴머니스트)을 읽고 나서다.
제국대학은 1886년 도쿄를 시작으로 교토, 도호쿠, 규슈, 홋카이도, 게이조, 다이호쿠, 오사카, 나고야 순으로 총 9개가 설립됐다. 조선에선 미 선교사가 최초의 사립학교 배재고보(1885년)를 세웠던 무렵이다.
제국대학에 들어간 한국인은 1000여명이다. 이들 대부분은 ‘금수저’였다.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을 비롯한 남작 조동윤·민종묵 등 귀족계급의 자제들이 비싼 수업료를 물었다. 한일병합 직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작위가 수여된 사람은 75명이다.
제국대학의 수업료는 연 120엔이었다. 이 수업료를 빼고도 평균 월 47엔의 높은 학비가 들었다. 이 비용의 1년 치가 평균 684엔이다. 1930년대 초 조선인 자작농의 연평균 수입이 544엔이고 소득수준이 높은 편이던 평양시민의 1년 소득이 1000엔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 액수다.
식민지의 귀족들만 간 것도 아니다. 교토제국대학 옆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를 다닌 시인 정지용(1902~1950)은 옥천의 가난한 농가 출신이다. 정지용은 학업을 마친 후 모교 영어교사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 교비 장학금을 받아 유학했다. 휘문고보 창립자는 친일 자산가 자작 민영휘였다.
조선의 명망가 집안 자제들도 유학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이를 가로막으려다 살해된 궁내부대신 이경직의 손자인 이관구는 교토제국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서유견문’을 쓴 개화파 양반관료 유길준의 아들들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했다.
도쿄제국대학 입학시험 과목은 영·독·불문 일역, 일문 영·독·불역, 작문 등 세 가지였다. 당락은 어학실력에서 판가름 났다. 당시 일본 고등학교는 외국어 시간이 총 수업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외국어 중심 교육이었다.
제국대학 학생들의 취미와 오락은 영화가 단연 1위이다. 1925년 조사에서 1위 바둑 두기, 2위 음악 감상, 3위 연극 관람, 4위 영화 감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바둑은 뒤로 밀리고 영화가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1938년 설문에서는 영화가 음악의 2배 이상 달했다.
제국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가 대법관 출신의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선후보이다. 그의 본가·외가·처가는 제국대학, 고등문관시험, 식민지 관료 출신들로 구성됐다. 이회창의 할아버지는 충남 예산의 지주다. 이회창의 백부는 교토제국대 교수 이태규이며 아버지는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으로 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이후 검사를 역임한 이홍규다.
이회창의 외가는 담양의 만석꾼 지주 집안이다. 외삼촌인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와 고등문과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후 일본 군수성 관료를 역임했다. 김성용 등 이회창의 삼촌 3형제는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모인 김삼순은 홋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 출신의 농학박사다.
이회창의 장인은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해방 이후 대법원장 직무대행 및 대법관을 지낸 한성수다. 한성수의 장남인 한대현도 헌법재판관을 지냈다.
시인 임화(1908~1953)는 현해탄을 건너는 유학생들에게 ‘왜 가냐’고 물었다. 책의 저자는 서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은 ‘지사냐, 출세냐’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제국대학의 졸업생들은 결과적으로 다수가 출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제국 대학 입학은 입신출세의 티켓을 쥐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졸업생 다수가 식민지 체제에서 출세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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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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