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7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0 "신촌마을" - 한들신문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0 "신촌마을" - 한들신문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0 "신촌마을"

한들신문
승인 2019.11.26 15:40

신촌마을의 가을

조선시대 적화면 소재지였던 신촌마을

신촌마을은 하성초등학교에 이르기 전 아주마을에서 마을 표지판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확 트인 벌판을 앞에 두고 마을이 앉아 있다. 가을은 신촌마을 들판에서 시작된다.

신촌의 옛 이름은 신기촌이다. 새로운 터에 마을이 자리 잡았다고 해서 신기촌이라 불렀다는 설과 평산 신씨가 맨 처음 마을에 터를 잡았다는 의미의 신기촌이 신촌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마을은 1914년 적화면이 웅양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조선 후기 적화면 소재지였다고 전해진다. 16살에 강원도로 시집을 간 이순분(1926년생) 할머니는 면사무소를 본 적은 없으나 어른들로부터 면사무소 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면사무소 터 앞에는 너른 들판이 있었는데 그곳에 하성초등학교를 지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촌마을에서 학교를 지을 땅을 기부할 만큼 부자가 없었다. 적화 술도가를 하던 김성구 씨와 적하의 천석꾼으로 불리던 이한영 씨(경덕재의 주인)가 학교 부지 마련을 추진하여 하성초등학교가 오산마을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살아 온 걸 어째 다 이야기 해.” 처녀공출을 이야기 하시는 할머니들

일제 강점기 신촌동네

일제 강점기 동청을 ‘농민 도장’이라 불렀다. 농민 도장 마당에서 여자들은 밤에 ‘몸빼(왜바지)’를 입고 제식훈련을 받았다. 그때 농민 도장은 일본교육을 했다고 한다.

이순분 할머니는 16살에 결혼을 하였다. “처녀 공출을 보내라고 사람이 나왔는데 마을 처녀들은 친정집 다락에 사다리를 놓고 들어가 숨었다”고 하였다.


“처녀 공출 안 보낼라꼬 나이가 작으나 많으나 치야 뿌리는 기라.”

“공출이 나오니까 어른들이 이래가지고 안 되겠다 카면서 디나깨나 나를 치웠거든.”

이순분 할머니는 시집을 가서 얼마 안 있어 남편은 만주로 돈 벌러 갔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만주로 농민이주 계획을 하였는데 적화에서도 청년 농민들이 만주로 가는 이가 많았다. 일본 군인들은 총을 들고 일을 시키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죽였다고 한다. 이순분 할머니는 남편이 만주에서 겨우 탈출하여 거창까지 걸어서 왔다고 하니 그 고생이 오죽했을 것이냐고 하였다.
“우리 이야기가역사야.” 함께 만들어 가는 마을 역사

마을과 동네 산

신촌마을 뒤쪽 응달은 마을에서 관리하던 ‘동네 산’이 있었다. 토지 등본을 떼어보니 1919년 신촌마을로 등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해방이 되고 나서 거창군으로 명의가 넘어갔으나 마을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박경동 군수 시절이었는데 거창 00 출신인 000 씨가 불하를 받았다. 이 사실을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마을에서는 산 되찾기 운동이 벌어졌다.

유종윤 조합장과 홍판룡 교장의 중재로 000 씨와 신촌마을이 산을 반씩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하였다. 마을 전체가 십시일반으로 장래쌀 10되씩을 거두어 절반의 산을 찾아오게 되었다. 장래쌀 10되를 빌리면 다음 해 이자가 붙어 20되를 갚아야 했다. 그때 마을에 52가구가 살았는데 김건일(79세) 씨는 군대에 갔다가 오니 장래쌀 이자가 붙어 그것을 갚느라고 몇 년을 고생하였다고 한다.

산을 되찾았으나 동네 이름으로 등기를 할 수 없었다. 동네 대표를 뽑아 두 사람 이름으로 등기를 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강동세무서에 세금을 내지 못해 산 전체가 압류를 당해 창원 석유공사로 넘어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산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동네 소유라며 진정서와 탄원서를 넣었다. 당시 마을에는 똑똑한 양반이 있었는데 산이 개인 땅이 아니라 동네 재산이므로 개인이 세금을 안 냈다고 해서 동네 산을 국가에서 입찰을 통해 넘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동네 산을 되찾았다. 산을 찾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똘똘 뭉쳤다’고 한다.
마을역사공부 2019년 1월

둥구리 한짐

신촌 뒷산으로 올라 구듬재를 지나면 산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을 경계로 고제면과 웅양면으로 나뉜다. 산 아래는 고제면 봉산마을이다. 신촌에서 나무나 풀을 베기 위해 산을 넘어가는 일이 잦았다. 신촌에서 고제로 풀을 베거나 나무를 하러 가면 고제 사람들은 자기 동네라며 풀과 나뭇짐을 뺏기도 하였다. 신촌 사람들은 고제로 넘어가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서둘러서 풀이나 나무를 해 오곤 하였다. 비료가 귀하던 시절 논에 넣거나 소에게 먹여야 했기 때문에 풀 베는 일은 농사꾼에게 중요한 일이었고, 나무는 땔감이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야 했다.

여기 둥구리 한 짐 하러 갔다가 3년을 고생한 마을의 두 청년 이야기가 있다.

1960년 20살, 21살이던 두 청년은 구듬재를 넘어 고제까지 나무를 하러 갔다. 한 사람은 둥구리를 지고 한 사람은 삭다리를 지고 넘어오다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을 만났다.

남의 동네까지 나무하러 왔다고 다짜고짜 낫과 톱을 빼앗았다. 그중 한 청년이 빼앗긴 낫을 되찾으려고 실랑이를 하다가 노인 팔등이 낫에 긁혔다. 노인은 나무하러 온 것도 괘씸한데 상처까지 입었으니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을에서 그 노인과 절친한 한술이 양반을 찾아갔다.

두 청년은 이 일에 대해 사과하러 갔으나 노인들은 벼락같이 꾸지람하였다. ‘저 두 놈이 나를 지근지근 밟았다’는 백 노인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분노하여 더 크게 욕을 하고 나왔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두 청년은 산림법에 걸리게 되었다. 나무 한 짐에 대한 벌금으로 7~8,000원을 받았다. 거기다가 상해죄까지 걸려 재판을 받게 되었다. 억울했던 청년들은 백 노인 집에 몰래 가서 나무를 해 놨는지 안 해놨는지를 확인했다. 집 뒤꼍에 나무가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보고 경찰에 곧바로 고발했는데 조사는 다음 날 나왔다. 낌새를 알아차린 노인은 나무를 벌써 치워버렸고 무고한 사람을 고발하였다고 두 청년에게는 무고죄까지 더해지게 되었다.

나무 한 짐에 산림법으로 걸려 벌금에다, 상해죄, 무고죄까지 걸려 대구고등법원으로 재판을 받으러 다녀야 했다. 억울했지만 그 당시 돈이 없어 변호사를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조사를 받으러 대구로 다녔는데 차비가 없어 하루 이틀 일하고 차비를 마련하였다. 자꾸 불려 다녀야 하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거창에서 대구까지 조사를 받으러 다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대구 친척 집으로 갔다. 그래도 “자꾸 뭐가 날아와서” 서울로 도망을 갔다. 서울에 가서 온갖 고생을 하다 보니 3년이 지났다. 백 노인이 죽고 청년들을 꾸지람하던 ‘한술이 양반’이 이사 갔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상해죄, 무고죄는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다. 20살, 21살 청년들은 나무 한 짐에 3년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때 청년은 “내가 죽고 지내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 빨간 우체통이 있는 신촌마을



대부분의 주민은 일제 강점기 때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청소년기에 6·25를 겪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지붕을 개량하고 동네 길도 넓혔다. 여기에 시집온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보태져서 마을 역사는 한층 더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마을의 역사는 마을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소중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한들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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