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위 ‘문화평론가’가 아니다. ‘문화연구자’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빈센조나 조선구마사와 관련한 한국 주류 매체, 그리고 문화평론가란 분들의 말씀을 듣고, 많이 놀랐다. 내가 보기엔, 이분들 말씀은 중국의 ‘애국주의’에 상응하는 한국 민족주의의 표현이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지금부터 이분들의 주장을 상식적으로 반박해보겠다. 나는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도 아니고, 판타지 사극이란 장르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이번에 문제가 된 ‘조선구마사’나 그 작가의 전작이라는 ‘철인왕후’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중국에서 판타지 사극 특히, 철인왕후가 판권을 사왔다는 중국 드라마의 장르인 (관련 뉴스를 보다가 며칠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穿越 타임슬립 장르가 중국에서 매우 인기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중국 것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중국에서 왜 이런 장르가 인기 있는지는 안다. 하나는 과거와 현재의 좋은 것만 결합해서 보고싶은 시청자들의 단순한 판타지 소비 욕망때문이고, 또 하나는 현실 풍자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사회비평의 고육지책때문이다. 대부분은 상업적 동기가 강한 전자에서 비롯한다. 철인왕후를 사실 본 적이 있다. 몇달전 유튜브에서 10분짜리 클립을 열었다가, 끝까지 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아재인지라 극중의 ‘막장’요소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역시 젊은 사람들의 문화를 그대로 수용할 감수성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빈센조든 조선구마사든 굳이 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드라마를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은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할까 ? 그것은 아마 숨겨진 의도를 밝혀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논란에서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숨겨진 의도’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음모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에 이어 문화공정이란 것을 만들었으며, 이 ‘프로젝트'와 정책을 통해, 중국 자본이나 중국의 애국주의 네티즌 혹은 이에 야합한 한국내의 몰지각한 작가 (심지어는 조선족이라고 의심까지 되는)와 제작사를 이용해 한국 고유 문화를 중국 문화라고 주장하려는 것”, 아마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복,김치, 전파 - 문화XX공정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며 상상력을 부추기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인가 ? 그런 정책문서를 본 적이라도 있는가 ? 동북공정과 문화공정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동북공정은 실제로 존재했던 정책이고, 그 결과물도 있다. 그런데 지금 얘기하는 XXX공정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이 만들어낸 조어이다.
그런 의심이나 상상, 아니 음모론도 가능하다고 본다. 김어준은 늘 '합리적 근거'가 있는 의심을 제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류 매체에서 정색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한때 팩트체크라는 말이 엄청나게 유행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팩트에 근거해서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무슨 말씀을 하실지 대강 짐작이 간다. 한복 논란에서 중국의 관변단체인 ‘공청단’이 끼어들었고, 김치 논쟁에서 중국의 UN대사가 거들었다. 또, 실제로 중국 정부는 샤오펀홍이라고도 불리는 애국주의 네티즌들을 심심치 않게 국내외적 여론몰이에 이용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소위 위에서 묘사한 ‘문화공정’이라고 불릴 정도의 증거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위의 세가지 모두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우선 왜 중국의 애국주의 네티즌들이 사사건건 한국의 네티즌들과 충돌하는지 내가 관찰한 바에 따라서 설명을 하고 싶다.
중국내에는 분명히 어떤 막연한 생각과 부정적인 정서가 존재한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 문화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그 기원은 강릉단오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서 출발한다. 한국에선 아마 강릉시민들이나 민속 전문가가 아니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지 모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단오는 굉장히 의미가 큰 명절이다. 중국에서 단오절을 특히, 남쪽에서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이다.
두번째는 소위 ‘환빠’들, 아니 사실은 의외로 매우 많은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를 가진 분들이 내심 즐겨하는 일련의 주장들이다. "공자가 동이족, 그래서 한국인들의 조상이다.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사실은 중국 동북 요서지방에 존재했다. 백제의 영토가 중국 동쪽 연안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에 소재한 신석기 홍산문명의 주인의 후손은 한국 사람들이다." 등등.
이런 이야기들이 중국에 다 전해져서, 실은 중국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그 와중에 최근엔 도올선생이 노자가 고조선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중앙일간지에 원로학자가 주장하는 고조선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는 식의 진짜 판타지 같은 얘기들이 실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연히 동북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관련한 여러 논란이 있다. 당시 한국 여행자들이 단체 관광을 하면서 보였던 행동과, 이 유적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재와 관련됐던 여러 논쟁들은 실제로 발생해던 일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한국 정부가 광개토대왕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실제로 추진하다가 실패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와 비슷한 중국의 민족주의 정서를 가진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 ?
고구려 유적과 관련해서 소수민족, 분리운동에 민감한 중국 정부가 과거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실시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중국 정부가 그 다음 단계로 문화공정이라는 것을 펼칠만큼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은 거의 한화됐기 때문이다. 만주족도 마찬가지이다. 실은, 동북지방에도 아주 미약하지만 분리주의는 존재한다. 하지만, 소수민족이 아니라, 만주국이라는 전혀 다른 역사와 연관된 이야기이다. 개혁개방 이후 소외되고 낙후한 동북지역민들의 (대다수가 한족인) 불만에서 비롯한 것이다. 동북지방은 지금도 인구유출과 저출산율 때문에, 인구가 계속 줄고 있어서, 산아제한정책을 완전히 철폐하자는 논의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조선족 동포 얘기가 나왔으니 한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중국내 고구려 유적은 그렇게 아끼시는 분들이, 왜 우리 동포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야박할까 ? 디아스포라가 이중적인 아이덴티티를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굳이 그들을 마녀사냥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뭘까 ? 조선구마사 작가에 대한 조선족 동포 의혹이 불거졌다는 어이없는 얘기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갈등은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자발적인 민간 정서의 표출이다. 물론, 이런 애국주의 정서가 중국 정부의 전체적인 애국주의 진흥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동북공정의 결과물이 이런 생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와중에 미중간의 문화냉전에서 한국이 사드사건으로부터 시작해 미국의 대리전 양상을 펼치게 된 것도 훨씬 더 큰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중국 전문가들도 얘기하는 것처럼, 중국 청년들의 애국주의 정서는, 정부의 교육보다는, 국력신장과 문화산업의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자존감이 드러나는 것에 가깝다. 이런 민족주의나 애국주의가 건강한 자존감의 회복이냐 아니면 맹목적인 자기 미화, 그리고 이와 어울리는 타자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개방성이나 포용성, 그리고 자기 객관화 능력이 균형감있게 커졌는지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이것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와 같이 한국이 중국 전통문화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라는 막연한 정서가 존재하는 가운데, 너희가 그랬으니 우리도 중국내 소수민족중 하나인 조선족의 김치를 우리 거라고 얘기하는 게 뭐 그리 문제냐라는 일부 중국 네티즌들의 뒤틀린 심사가 김치논쟁을 유발했다고 생각한다.
한복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다. 최초에 문제가 된 샤이닝키키의 남성의복은 실제로 조선의 관복이지만, 조선의 관복은 명제관복을 수용한 것이 맞다. 여기서 한가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명이 청으로 넘어간 뒤에 중국인들의 복색은 만주족의 것을 따랐다. 이때부터 조선의 사신들은 베이징으로 갈 때마다, 중국의 한족들이 지조없이 자신들의 전통의관을 져버렸다고 흉보면서, 자신들이 명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때, 본격적인 소중화론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에도 조선 사실들이 한족 지식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고, 이것이 조선측 문서인 연행록에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최근 연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명의 관복은 사실 한족 중국인들에겐 보기에 따라 '좀 아픈 과거’ 유산이다. 게임 사건은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만들어 낸 문제이지만, 한국인들이 이 논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감정싸움으로 치닫기 쉬운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됐든, 중국인들이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어깃장을 놓기 쉬운 여러가지 역사적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이번 논란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빈센조의 비빔밥부터 이야기해보자. 얼마전 한 중국의 애국네티즌이 한국 식품업체가 냉동만두를 해외에 수출하는데, 코리안 푸드라고 설명하면서 판다고, 문화도둑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빈센조 이야기를 듣고, 아차 싶었다. 그러니까, 빈센조를 비판하는 논리대로라면 한국 식품제조회사들은 이제, 중국에서 기원한 음식을 제품화해서 해외로 수출하는 자국이나 외국 콘텐츠에 노출시켜서는 안된다…. 이를테면 CJ의 찐빵이나 호떡을 중국 드라마에 PPL로 내보냈는데 이것은 한국정부의 사주를 받아서 이 음식들을 한국문화라고 주장하기 위한 CJ의 음모라고 우겨도 할말이 없게 된다.
그나저나 치킨은 미국음식인가, 한국음식인가? 아니면 소울 푸드인 아프리카 음식인가 ? 인스탄트 라면은 일본 것인가 ? 아니면 닛신의 사장이 대만출신이니 대만 것인가 ? 일반적인 중국인들은 누구나 김치나 비빔밥이 한국 음식 혹은 조선족 동포들 음식이라는 것을 잘안다. 일찍부터 입맛을 들인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족들이 김치나 비빔밥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그것을 굳이 중국음식이라고 우기기엔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너무 많다…… 누군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위에 이야기한 비뚤어진 심사일 뿐이다. 그런 것을 일일이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번째 조선구마사… 음모론도 있지만, 중국풍이 맥락없이 과도하게 들어간 것은, 다분히 중국시장을 겨냥한 포석이었다는 추정은 나름 합리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중국에 드라마 수출도 못했고, 중국 네티즌과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한국내에서 싱겁게 끝나버렸다는 차이만 존재할뿐, 샤이닝 키키 한복사건의 중국측 내부 논란과 똑같다. 지난번 한복 논란을 보면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소위 판타지 역사물에 다양한 전통적 문화요소들이 반영되면서, 무협물의 오랜 전통속에 녹아 있는 ‘중국풍’을 피할 방법이 있을까 ? 아니 고려 이전만 해도, 복식 기록이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터인데, 앞으로 삼국시대 역사 드라마를 만드는 것만 해도, 중국의 역대 한족 의상과 비슷한 요소들을 완전히 피할 방법이 있을까 ? 그리고 신라가 당의 제도와 관복을 받아들인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의 이런 주장과 행동은, 결국 중국 사회가 벌인 그것들의 거울이미지이다.
미디어에서 어떤 전문가들은 이번 방영중단 사태를 프로슈머의 힘이라고 추켜세우던데, 중국의 애국 네티즌들이 자국에 진출한 해외 기업을 겁박하는 것을 비판하던 것이 바로 한국의 미디어이다. 지금도 신장문제와 관련해서, 여러 브랜드들이 위협을 받고 있다. 중국 네티즌들이 중국 정부의 잘못된 주장을 대리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말한다면, 이번 한국 네티즌들의 주장이 정확한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음모론+인종주의적 혐중정서의 표현이라고 지적해도 할말이 없게 된다. 경계인인 내가 보기에 한중의 애국주의 논란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다시 비대칭론을 말씀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 사람들이 ‘소국’인 한국을 협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본격적인 대국, 소국주의는 여기서 얘기하기엔 너무 길어질 것 같다. 하지만, 두가지를 지적해야 하겠다.
한국이 소국이라고 생각하나 ? 중국에 비교하자면 작긴 하지만, 한국은 소국이 아니라, 중국이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중소강국이다. 내 뇌피셜로는 상대적인 종합적 국력을 질적으로 따지면, 중국의 경제중심인 장강삼각지역이나, 주강삼각지역 중 한곳에 버금간다. 인구나 면적과 같은 단순한 수치로 비교해서 1/30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1/5쯤으로 높여 잡아도 된다는 이야기이다.
둘째, 지금 벌어지는 한중간의 문제는 단순히 양국뿐아니라 미국의 존재를 의식해야 한다. 한국인들이 피해의식을 느낀다면, 중국인들도 미국에게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고, 한국이 어쩌다보니 미국을 대리해서 문화전쟁을 벌이게 된 측면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행동대장이 돼, 다구리에 앞장서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다. 외교나 군사 측면만 놓고 보면 일본이 그런 상황인데… 이상하게 문화와 관련된 부분만큼은 한국이 그 역할을 맡아서, 한중 시민들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문제가 됐던 의주 기방 음식에 대해서 촌평을 하고 싶다. 문제가 된 피딴과, 월병이 놓인 모습을 보고 중국 사람들은 어이가 없을 것이다. 둘다 그렇게 손님상에 수북이 쌓아놓을 수 있는 음식들이 아니다. 수퍼마켓 진열대가 아니라면 말이다. 피딴은 삭힌 오리알이라 암모니아 냄새가 심해서 그대로 먹을 수 없다. 반드시 껍질을 벗겨 썰고, 초를 쳐서 중화시켜야 한다. 우리가 중국 음식점에서 시켜먹는 냉채에 나오는 것처럼. 생강초절임을 곁들여 먹으면 특히 좋다. 월병은 너무 달고 칼로리가 높아서 하나를 그대로 먹는 경우는 드물다. 크기에 따라 4~8조각으로 나눠서 한사람이 한두조각씩 먹는게 고작이다. 그것도 식후 디저트나, 차에 곁들이는 다과에 적합한 음식이지, 기방 술상에 올릴 음식이 아니다.
아니 거대한 갈비더미를 보고, 유목민족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의 서북지방이나, 동북지방, 신장, 티벳, 몽골과 같은 변경지역의 양갈비를 떠올렸다. 모르겠다, 이 국적불명의 음식 차림은 한국 것이 아니지만, 제대로 된 중국풍도 아니니, 정말 판타지 사극의 판타지 음식인 모양이다.
그래도 어제 한겨레에 좋은 평이 실린 것을 보고 위안이 됐다. 중국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어서, 두서없이 써갈긴 긴 글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드라마 '조선구마사' 폐지 결정...깊어진 '반중정서' - BBC News 코리아
BBC.COM
드라마 '조선구마사' 폐지 결정...깊어진 '반중정서' - BBC News 코리아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SBS 월화드라마 '조선구마사'가 한국 드라마 초유의 폐지 수순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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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조선구마사' 결국 폐지 결정...깊어진 '반중정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SBS TV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결국 폐지 수순을 밟는다.
SBS는 26일 공식 입장을 내고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여 '조선구마사' 방영권 구매 계약을 해지하고 방송을 취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논란은 지난 22일 첫 방송부터 시작됐다. 특히 태종과 충녕대군, 양녕대군 등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중국식 소품과 의복 등을 사용한 점이 논란이 됐다.
논란이 된 장면들
시청자들은 조선구마사에서 방영된 여러 장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특히 충녕대군(장동윤 분)이 서양 구마 사제(달시 파켓)를 대접하는 장면에서 월병 등 중국식 소품을 사용하고, 무녀 무화(정혜성)가 중국풍 의상을 입은 것이 논란이 됐다.
또 드라마 OST가 중국 전통 현악기인 고쟁으로 연주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의 불씨가 거세졌다.
이에 조선구마사 제작사는 앞서 지난 24일 사과 입장을 밝혔다. 다만 드라마가 "역사 속 인물과 배경을 차용했다"면서도 "판타지 퓨전 사극"이란 점을 강조했다.
제작사 측은 "실존 인물을 차용해 '공포의 현실성'을 전하며 '판타지적 상상력'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했으나, 예민한 시기에 큰 혼란을 드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며 사과했다.
제작사 사과에도 논란 계속
방송사인 SBS 역시 이날 "실존 인물과 역사를 다루는 만큼 더욱 세세하게 챙기고 검수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어 이미 방송된 1, 2회분 VOD 및 재방송은 수정될 때까지 재방송을 하지 않고, 결방 기간을 갖고 재정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제작사와 방송사의 사과에도 시청자들의 항의는 계속됐다.
'조선구마사'의 즉각 방영중지를 요청합니다'란 제목의 청와대 청원 글은 게재된 지 이틀 만에 20만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비판이 커지자 '조선구마사'에 제작 지원에 나섰던 업체들도 계약 해지를 알렸고, 논란이 계속되자 제작진은 결국 폐지를 결정했다.
SBS 측은 이날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여 '조선구마사' 방영권 구매 계약을 해지하고 방송을 취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방송사와 제작사의 경제적 손실과 편성 공백 등이 우려되는 상황이지만, 지상파 방송사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방송 취소를 결정하였음을 알려드린다"고 덧붙였다.
롯데컬처웍스, YG스튜디오플렉스, 크레이브웍스 등 조선구마사 제작 3사도 제작 및 해외 서비스를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조선구마사' 관련 해외 판권 건은 계약해지 수순을 밟고 있으며, 서비스 중이던 모든 해외 스트리밍은 이미 내렸거나 금일중 모두 내릴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깊어진 '반중정서'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논란은 최근 깊어진 '반중정서'가 반영된 것이란 분석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25일 유튜브 채널 '채널싸우나'를 통해 조선구마사 논란이 '민감해진 대중정서, 반중정서 건드렸다'고 평가했다.
그는 최근 중국을 둘러싼 '전파공정 논란'을 언급하며 "최근 문화적인 부분을 소개하거나 드라마에 담을 때 그것이 혹여나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 전파공정에 빌미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다"며 "그 불편함이 여기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최근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김치, 한복 등의 기원을 중국이라고 밝혀 한국 네티즌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 같은 '반중 정서'가 드라마 시장에도 이어졌다. 특히 올해 초 방영된 tvN 드라마 '여신강림에선 극중 여고생들이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훠궈를 먹는 장면에서 중국 브랜드가 노출된 것이 문제가 됐다.
또 현재 인기리에 방영중인 tvN 드라마 '빈센조'에서도 주인공 빈센조(송중기 분)가 중국 기업에서 만든 비빔밥을 건네받는 장면이 나와 논란이 됐다.
'소비자 권력, 과잉반응' 지적도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이번 조선구마사 논란에 대해 "한국 드라마는 글로벌화가 되어 정말로 많은 세계인들이 시청하고 있다"며 "제작진 역시 입장문에서 '예민한 시기'라고 언급했듯이, 이러한 시기에는 더 조심했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번 폐지 결정이 '과잉 반응'이란 지적도 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는 25일 페이스북에 이번 '조선구마사' 사태를 '마녀사냥'에 비유해 SNS에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한편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번 사건이 "소비자의 힘"을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BBC코리아에 이번 드라마 폐지 결정이 "소비자의 힘으로 퇴출시킨 것에 가깝다"며 "대중들이 이미 프로슈머(prosumer·생산에 참여하는 소비자)가 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례고, 소비자권력의 힘을 입증한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팩트체크와 제대로 만들어진 콘텐츠를 통해 K-콘텐츠 전반의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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