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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 목사는 순교자인가? 미제 간첩인가?
<연재> 최재영 목사의 방북기(8)-신천박물관 참관기②
기자명 최재영
입력 2015.01.05 13:20
수정 2015.01.05 16:27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신천박물관측의 주장들을 듣고 있노라면 표면적으로 볼 때는 ‘반미’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박물관의 용도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선동)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6.25전쟁 중에 발생한 모든 학살 행위들을 볼 때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은 ‘작전으로서의 학살’이 더 많았던 반면, 우익과 군인, 경찰과 미군에 의한 학살은 주로 ‘처형으로서의 학살과 보복으로서의 학살’이 더 많았다. 물론 잔인성에 있어서는 보복적 학살이 매우 심했으며 ‘작전상 학살’은 ‘국가 권력이 주도한 것’이지만 ‘보복으로서의 학살’은 특정 정치세력과 맞물려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의 역학관계로 인해 신천군 민간인 학살은 궁극적으로 미국에 의한 정치적 학살(Political Massaccre)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제1전시관 걸려있는 신천사건 학살자 조직에 왜 신천읍에 있는 서부교회와 동부교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주동자가 누구인가를 살펴보며 과연 북에서 지목한 이 두 교회들이 실제 학살사건에 어떻게 가담했는가에 대한 여부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 동시에 유리관안에 진열된 성경책들과 십자가 묵주들은 과연 이 신천 사건에 어떤 연관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제1 전시관의 기독교 관련 게시물들은 과연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입증될 만한 신빙성 있는 근거 자료들인가를 한 가지씩 계속 해서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미국 선교사들의 선교보고서에 첨부된 김익두 목사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전시관 속에 걸려 있던 대부흥사 김익두 목사
함흥이 고향인 실향민 출신인 남서울교회 이모 목사는 방북단과 함께 1999년 10월 30일부터 11월 6일까지 제9차 대북 지원품을 전달하느라 평양을 방문하는 기간에 신천박물관을 찾았다. 그런데 박물관의 전시물들 중에는 미국에서 16년간을 살았던 자신이 차마 부끄러움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더구나 박물관의 해설사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와 같은 선교사들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싸잡아 비판했으며 심지어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기적의 부흥사였던 김익두(金益斗) 목사를 가리켜 ‘미제의 이중간첩’이라며 육두문자를 써가며 비판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는 내용을 그의 방북기에 언급한 적이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신천학살 사건 당시 신천 서부교회를 담임했던 현직 목사이며 서부교회에서 분립해 갈라져 나간 동부교회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신천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벽에 걸린 김익두 목사의 사진은 이번에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철거된 듯 했지만 그동안 수십 년에 걸쳐 이곳 제1관 벽면에 걸려 있었다. 그 동안 전시실의 여러 게시물 중에 유독 해외동포와 남측 방문객들의 눈길을 가장 끌었던 것이 바로 “신천 서부교회당과 목사로 있던 미제의 고용간첩 김익두놈” 이라고 적힌 문구와 김익두 목사의 흑백사진이었다고 한다. 박물관이 설립된 이후 그 동안 거의 모든 해설사들은 김익두 목사를 가리켜 “우리 신천지역에서 미제의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날인 1950년 10월 14일에 우리는 미제가 고용한 간첩이었던 신천교회 김익두 목사 놈을 처단했다”며 가르쳐 왔다. 도대체 김익두 목사가 누구길래 무엇 때문에 신천 사건과 연관지어 그토록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 왔는지 잠시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신천군에 소속된 15개의 면단위로 분류된 피해자 통계표. [사진제공-최재영]
신천군 전체면에서 피살된 청소년들에 대한 인원 통계표. [사진제공-최재영]
신천군에서 발생된 미군의 파괴약탈과 폭격 통계표. [사진제공-최재영]
오늘날도 한국교회는 김익두 목사에 대해 뛰어난 목회자와 부흥전도자로, 교단 행정가와 교회지도자로 평가하고 있으며 신천교회당에서 새벽기도를 드리던 도중에 인민군의 총탄에 맞아 절명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최근에는 순교자로까지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한국교회가 인정하는 전설적인 대부흥사인 그가 이곳 신천박물관에서는 미제의 앞잡이로 지목되어 통렬하게 비판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대로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에서 출생했다. 1900년, 그의 나이 26살 때 동네 친구의 권유로 이웃 동네 금산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소안론(W. L. Swallon)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으며 1906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입학하여 5년만인 1910년 6월, 제3회로 졸업하고 그해 제4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안수 후에는 신천읍교회를 비롯한 묘골, 새동안, 장촌, 정례동, 도촌, 문화, 보평, 송화골꼿 등의 여러 교회들을 미국 선교사 사우업(Charles E. Sharp)과 함께 동사목사(Team ministry)로 목회를 시작했으며 이때가 37세였다.
그의 수고로 신천교회가 크게 부흥했으며 그가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면 전무후무한 치유와 기적들이 일어났으며 이윽고 그의 명성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황해노회장의 직책을 거쳐 그의 나이 46세였던 1920년에는 제9대 장로교 총회장이 되었고 그 후 서울의 남대문교회와 승동교회를 연이어 담임하다가 해방 이후 직전리교회를 담임하였고 얼마 안 되어 재령에 해창교회에 청빙을 받고 잠시 시무하다가 1946년에는 신천 서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는데 그 당시 나이가 72세였다. 그 후 신천 서부교회에서 목회를 한지 4년이 지난 1950년 10월 14일, 새벽기도회 시간에 인민군의 총격으로 교회당 강단위에서 절명하게 된다. 겉으로는 김일성 정부에 협력하며 북조선기독교연맹을 이끌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은밀하게 신천읍내 반공 우익 청년들을 규합한 배후 세력이라고 단정한 좌익들로부터 보복성 응징 살해를 당한 것이다.
김익두 목사, 김일성 수상과 같은 길을 걷다
해방직후와 6.25전쟁 중에 이북 지역만을 집중적으로 조사해서 입수한 ‘북한에서 노획한 문서’라는 이름의 160만 쪽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가 미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되어 있는데 문서들 중에는 당시 김익두 목사가 시무한 신천 서부교회(信川 西部敎會)가 ‘매 주일 1천 5백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아울러 평북, 평남 각 지방에서도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3년에는 김 목사가 세운 신천교회에서 신천 동부교회가 분립해 나감에 따라 신천교회는 신천 서부교회로 이름을 변경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통계에 의하면 김익두 목사는 목회생활 50년 동안 국내,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고, 150여 곳에 교회당을 세웠으며 무려 2만 8,000여회의 감동적인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질병을 신적인 치유능력으로 고쳐주었고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당시 우리나라의 기독교계와 사회의 존경과 신망을 받아 온 김익두 목사는 드디어 해방 이후에는 김일성 수상과 같은 길을 걸으며 협력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해방 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서기 강양욱 목사)에 선출되었는데 이는 이북 지역을 총괄하는 중앙행정기관으로서 토지개혁 추진과 함께 생산수단의 국유화 조치 등을 단행하는 최고의 집행기관의 수장이 된 것이다. 물론 김일성 위원장의 곁에는 언제나 그의 외종조부가 되며 창덕소학교의 담임선생이었던 강양욱 목사가 그림자처럼 지켰으며 이런 와중에 이북의 각 시도 지역에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조직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계 단체로서 조선민주당(대표 조만식 장로, 이윤영 목사, 최용건), 기독교자유당(김화식 목사, 김광주 목사, 황봉찬 목사), 기독교사회민주당(윤하영 목사, 한경직 목사 등), 기독교민주당(감리교계열 목회자) 등의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이때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각 도에서 발족될 때 예기치 않게 기독교계 인물들이 대표자로 부상되는 등 위원회 측의 안목으로 볼 때 정치 판도에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더구나 1946년 10월 20일, 우익 기독교 연합체인 ‘5도 연합노회’에서 선거를 반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자 김일성 위원장과 강양욱 목사는 기독교에 대한 획기적인 정책을 강구할 필요가 절박했다.
결국 임시 인민위원회는 ‘5도 연합노회’의 결정에 당황했지만 당시 전체 인구의 약 2~3%에 불과했던 연합노회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미미했고 이에 김일성 위원장은 서기를 맡고 있던 강양욱과 함께 북조선 기독교도연맹(이하, 조기련)을 조직했다. 조기련에서는 ‘①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② 우리는 남조선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③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④ 교회는 선거에 솔선해 참가한다’는 4개항의 성명을 발표하며 인민위원회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이에 이북지역 개신교 목사의 1/3 가량이 이에 동조하고 나섰고 결국 1946년 11월 3일에 실시된 선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날 선거는 이북 전역에서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어 총 3,459명의 위원들이 선출되었고 이어서 1947년 2월 17일 평양에서 인민위원회, 정당, 단체 대표 1,157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시, 도, 군 인민위원회 대회’가 개최되어 간접 선거로 선출된 237명의 대의원들이 ‘북조선 인민회의’를 구성했다. 그리고 인민회의는 제1차 회의를 통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를 결성하였는데 이는 ‘북조선인민회의(人民會議)’와는 별도로 조직된 당시 최고집행기관이었다. 이후 1948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가 구성되고 9월에 김일성 위원장이 내각 수상에 선출되며 드디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정식 국가로 출범하게 되었다.
조기련이 창립된 이후 북한의 교회들은 친사회주의적인 교회와 정권에 반대하는 교회로 양분됐으며 당시 이북지역에 남아있던 20만명 정도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85,118명이 조기련 회원이 되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1949년에 이 조기련의 초대 총회장에 바로 김익두 목사가 취임하며 본격적으로 이북의 개신교회들을 이끌어 간 것이다. 이때 부회장에는 증경 총회장 출신의 김응순 목사, 서기는 조택수 목사를 선임했다. 이때부터 김익두 목사는 김일성 수상과 같은 사회주의노선의 길을 걷게 된다.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읍내 성당을 복구하는 신자들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인민군 무기구입 자금을 헌납한 김익두 목사
한편 김일성 위원장은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그해 9월 내각 수상에 당선되었고 1950년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해 6.25전쟁을 직접 총 진두지휘했다. 빠른 속도로 정치적 입지를 굳히며 승승장구하는 김일성 수상 곁에 김익두 목사가 본격적으로 힘을 보탰다. 1949년, 조기련 총회장에 취임한 김익두 목사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 5월 1일, 평양 만경대 운동장에서 개최된 노동절 경축식에 김일성 수상과 함께 참석해서 연설을 했다. 훗날 여기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들이 분분하지만 연설을 마친 김 목사는 단상에서 실제로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쳤고 그 실황 중계가 며칠 동안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녹화방송 되기까지 했다.
김일성 정부를 지지하며 이북교회들을 이끌던 핵심 지도자였던 김 목사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인민군이 사흘 만에 서울 중앙청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에는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서울 탈환 환영예배’를 주최했다. 그뿐 아니라 1950년 8월 5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는 북조선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들과 각 시도 지역 기독교도 연맹 대표들 그리고 북한 전역의 목사, 장로, 전도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6.25 전쟁을 언급하며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스러운 성전”이라고 강조했다. “불의와 죄악을 제거하기에 어떤 것도 아끼지 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정의로운 우리의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영웅적 우리 인민 군대에게 비행기, 탱크, 함선을 더 많이 헌납하기 위한 기금 거둘 운동을 신도들 사이에서 더욱 맹렬히 전개하자!”고 호소하던 그는 필승을 기원하는 예배와 합심기도를 앞장서서 주도했다.
연이어 김익두 목사는 사흘 후인 8월 8일에 열린 궐기대회에서 “미제의 무력 침공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인민군대의 비행기, 탱크, 함선 등의 전쟁 무기(軍器)를 구입할 자금을 후원하기 위해 당시 액수로는 상당한 거액인 10만원을 자원하여 헌납했다. 이 같은 그의 군기구입 헌납운동은 이북 전 지역의 교회들로 확산되어 갔으며 전쟁의 승리를 위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그의 열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닷새 후인 8월 13일에도 궐기대회를 열고 이북지역의 교회들을 향해 더 많은 전쟁무기 구입기금 헌납운동을 호소하면서 ‘침략자인 미제국주의자들과 망국노 이승만 도당을 완전히 소탕하는 전승 기원의 날’로 정할 것을 제의했다. 이날 평양 신양리교회에서 시작된 그의 열정적인 기도회는 새벽부터 불이 붙어 이북 전 지역으로 ‘전승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었다. 평양 시내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군기헌금 모금과 전쟁 독려를 위한 전승기도회가 연달아 열렸으며 그 기세를 남한까지 몰아 인민군 점령 지역과 도시들에서도 궐기대회와 전승기도회를 열었다.
특히 1950년 7월, 김창준 목사를 포함한 북조선 기독교연맹 대표들이 서울에 와서, 1947년에 결성됐다가 활동이 중지된 ‘기독교 민주동맹’을 재건했으며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월북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일부 남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민주동맹’을 지지하며 인민군 환영대회, 국방헌금 모금, 노동력 동원, 기독교인 궐기대회 등을 통해 인민군들의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수복과 함께 이들의 활동은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한 가지 웃지 못 할 사실 중에 하나는 6.25전쟁 기간에는 남과 북으로 양분된 교회들도 덩달아 전쟁에 깊이 간여하면서 마치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교회와 영국교회가 각각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승리하게 해달라고 군목들을 중심으로 전승기도회를 열었듯이 남과 북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이북교회처럼 남한교회도 마찬가지로 1950년 7월 3일, 피난지 대전에서 한경직 목사를 위시한 교회 지도자들이 ‘대한기독교 구국회’를 결성해서 전선을 따라 다니며 국군을 선무하고 기독청년들을 모집해서 전선으로 내보내며 전장을 독려했다. 9월 28일 서울수복 다음 날은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서울수복 기념예배’에서 “하나님 은혜로 싸웠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복하게 되었다”고 설교하며 전쟁승리를 기원했다.
북조선기독교연맹 총회장을 지내던 시절의 김익두 목사의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13일의 금요일’에 반공우익 청년들을 규합한 김익두
강양욱 목사와 함께 김일성 수상을 협력하던 김익두 목사는 언제나 마음 한켠에는 자신의 과오와 행적에 대한 뉘우침과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되기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해 왔고 교단의 황해노회장과 장로교 총회장를 역임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해방 전에는 순수한 부흥목회에만 주력했는데 해방이후 이북의 교회가 사회주의 교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자신이 그 일에 주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았을 것이다. 전쟁 중이라 해도 남아 있던 500명 정도의 신자들을 거느리며 신천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던 김 목사는 라디오를 들으며 남쪽소식을 접하거나 날이 갈수록 우익 세력들과의 접촉을 갖는다. 특히 남북을 오가며 우익 지하운동하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이북에서도 가장 기독교 세력이 왕성한 지역이다 보니 반면에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이에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 온다는 정보에 맞춰 반격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진격한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너무 서둘러 10월 13일이라는 날짜에 반격을 한 것이 가장 큰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감행됐고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은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연합군의 기습으로 허를 찔린 인민군은 당황했고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서울 점령 사흘 만에 국군은 38선을 넘었고 뒤 이어 미군과 UN군도 북진에 가세했다. UN군이 38선을 돌파해서 북진을 하니까 그 소문이 재령과 신천지역에 퍼지면서 김익두 목사의 주변에는 아주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당시 신천지역에는 남과 북을 오고가며 음성적으로 우익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백색테러로 유명한 한독당 당원, 백의사, 서북청년단 요원을 비롯해 김구 노선에 있는 인물 등 다양한 우익 조직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승만 정부에서 파견된 권총을 소지한 첩자들도 남북을 오가며 몰래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김익두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신천 서부교회 청년들과 읍내에 소재한 교회 청년조직들을 규합하여 국군과 UN군의 전황을 알려주며 반공궐기와 반격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국군과 UN군의 북진 소식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에서는 은밀한 거사가 계획됐다. 구월산에서 봉화를 피우면 신천, 재령, 나무리벌, 북율, 남율, 소호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거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교회의 반공 우익청년들의 계획은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황해도 일대에서 반공 봉기를 일으켜서 미리 주도권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목표물은 신천군의 행정을 주관해 온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 그날은 이른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이날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10월 13일 저녁 5시경이 되자 드디어 우익들의 반공 봉기가 일어났고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다양한 자체 치안대원들 한 사람이 아카보총을 대 여섯 정씩 메고 나타났다. “대한민국만세!. 국군만세!” 하면서 신천읍과 각 마을에는 청년들이 삽시간에 떼를 지어 나타나서 흥분한 상태로 좌익들을 체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현재 신천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신천군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를 접수하고 봉기에 성공한 우익은 대대적인 좌익 색출에 돌입했고 끔찍한 학살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모든 사건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인 10월 13일에 도화선이 되어 터진 것이다. 마침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던 좌익계열 청년들이 우익반공계열 수백 명을 대상으로 예비 검속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지하에서 우익반공 조직 운동을 하고 있던 신천 서부교회와 동부교회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온천교회, 구당교회, 석당교회, 간성리교회, 은천교회, 지봉교회 등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학생들 수백 명이 반발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13일 이후,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와 관공서를 장악한 우익청년들은 닷새간의 전투 끝에 신천군 전역을 장악하여 평양탈환을 목표로 북진하던 미군 제1기갑 사단의 통로를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10월 13일, 미군과 신천 반공무장 세력들이 사용했다는 무기들과 학살도구들. [사진제공-최재영]
새벽기도를 드리던 중에 총격을 당한 김익두 목사
광란의 살육전이 계속되던 13일 밤이 지나고 어느덧 14일 새벽 4시가 되었다. 이제 신천지역은 우익 반공세력과 미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모든 전세가 끝났다고 판단한 김익두 목사는 교회의 종탑으로 가서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새벽종을 치고 교인들에게 새벽예배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시기였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이 여기저기서 50명 정도가 모였다. 김 목사와 교인들은 긴장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라고 선언하며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는 것으로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를 모두 마치고 이윽고 광고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 서너 가지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내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어 우리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 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넷째는 신앙고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마음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릅시다.”
김 목사는 광고시간을 이용해 교인들과 함께 신앙적인 만세삼창을 우렁차게 했다. 그는 이어서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우리 교회가 환영회를 개최하자’는 말로 모든 광고를 마치고 예배를 끝냈다. 예배를 끝내자 참석한 신자들의 절반 정도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김 목사와 함께 예배당에 계속 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강대상 옆 방석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도 예배당 밖에서는 좌익세력과 우익반공세력이 밤이 맞도록 서로 쫒고 쫒기는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던 살벌한 시간이었다. 때마침 전세가 불리해진 좌익세력들이 간혹 교회 뒷산 길목을 이용하여 간간히 도주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김익두 목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좌익과 인민위원회 대원들은 김 목사를 제거하기 위해 교회당 담 밖에 몰래 숨어서 예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예배를 마치자 어둑어둑한 예배당 안에 구둣발로 진입한 그들은 강단 위에서 기도하던 김익두 목사를 찾아냈다. 그리고 깜짝 놀라 기도를 멈추고 말리려던 교인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했다. 이어서 총구는 김 목사를 향하여 발사되어 현장에서 모두 6명이 즉사를 하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교회의 기둥이었던 채 장로와 임성근, 김채호 전도사, 그리고 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청년 두 명, 이렇게 모두 6명이 절명했으며 당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던 21살의 처녀 이순일은 창문을 넘어 밖으로 도망치다가 죽창에 뒷 어깨가 찔려 실신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박물관 참관을 모두 마치고 ‘학살의 진상이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질 것을 소망하며’라는 글귀를 방명록에 적고 있는 필자 [사진제공-최재영]
순교인가? 변절자에 대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인가?
북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천지역에서의 은밀한 반공우익 행적을 보인 김익두 목사를 제거한 것은 자신들의 활동무대인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기독교 측에 몽땅 넘겨주었다는 초조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좌익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 동안 자신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충성했던 김익두 목사를 과감히 처단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김익두 목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 조기련 총회장으로 사역한 경력 때문에 사후부터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좌경인물로 낙인 받아 왔으며 반면 북에서는 그곳대로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힌 불운한 인물이 되었다. 마치 박헌영처럼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는 듯한 처지가 되어 보였다. 인생 말년의 김익두가 신천 지역에서 은밀히 행했던 친미 반공행각은 북측 입장에서 볼 때는 단죄할 수밖에 없는 변절자이며 배신자에 해당됐다. 그의 인생은 ‘역사의 악’과 ‘개인사의 불행’이 서로 뒤엉켜 있는 듯한 구조를 지니며 좌우의 이념 대립을 떠나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당시 사회와 교회를 구원한 걸출한 시대적 인물이었다고 본다. 역사의 정량론(定量論)으로 보아서 김익두 목사만이 그 시대에 좋은 것을 모두 다 갖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한국교회에서는 김 목사를 순교자로 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가 과연 순교자로서 적합한 자격을 지녔는가의 문제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북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총회장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연맹가입에 한사코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상당수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익두 목사는 당시 부총회장이던 김응순 목사와 함께 이북교회 목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회를 살리는 길은 연맹에 가입하는 길뿐이 없다”며 의도적으로 목사들을 연맹에 가입시켰으며 거부하는 목사들에게는 협박도 주저하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 목사나 이성휘 목사, 산정현교회의 방계성 전도사, 이기선 목사 등은 끝내 가입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처럼 김 목사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가운데 굳이 한국교회가 순교자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직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김 목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과정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음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신천 반공무력 사태에 대한 북측과 좌익계열의 보복 살인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이 반공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반공 그 자체로는 순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그의 사역 전반에 대한 과학적 자료와 김일성 정부에 협력했던 과거 행적에 대한 신빙성 있는 자료들이 더 많이 수집되어 철저한 고증과 절차를 거친 후, 객관적 평가를 통해 순교자 규정 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북측의 주장대로 겉으로는 김일성 정부에게 협력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은밀히 미군과 국군 그리고 남한 정부와 내통했을 뿐 아니라 신천지역 기독교 청년들을 한데 묶어 반공연대세력을 꾀했던 김익두 목사는 중국 길림에서 선교목회를 하던 손정도 목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사회주의 목회를 시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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