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첫 물증은 성경책과 십자가였다
<연재> 최재영 목사의 방북기(7)-신천박물관 참관기①
기자명 최재영
입력 2014.12.29 00:36
수정 2014.12.29 00:45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지금과 같이 남북이 적대적인 상황에 있을 때는 해외 교포의 입장에서 남북을 오가며 양측 사회를 소통하게 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회 통합 운동을 벌인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 화평케 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철저한 중립을 지켜야 하기에 나는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긴장과 고뇌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남과 북이 워낙 전혀 다른 이질적인 체제이다 보니 사회 통합 운동을 하다가 보면 혹시라도 이쪽 저쪽 모두에게 욕을 먹거나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통일지향적인 ‘세계적 보편성’이며 ‘분단 극복의 방향성’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건강이 힘든 상황에서도 신천박물관을 찾았다. 거창한 연구와 조사를 하기보다는 한 조각의 모자이크처럼 작은 단서를 얻어 가서 진실을 규명하는데 작은 역할을 하고자 했다. 신천박물관의 북측 정식 명칭은 ‘미제 신천양민학살기념 박물관(이하, 신천박물관)’이다. 비록 6.25 전쟁 중에 발생했지만 현대사에 있어 전무후무한 야만적 학살 사건이므로 나와 학술원에서는 그동안 준비한 자료들을 대비하며 신천 사건 해석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자 했다.
가련하고 불쌍한 신천군 영령들의 죽음에 대해 철저하게 진실을 규명하여 가해자에게는 정의의 심판을 내리고 그 다음 단계에 가서 용서와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러한 작은 발걸음들은 우리 겨레의 한풀이 작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풀이는 원한이 맺힌 것을 풀어주는 것이다. 한이 맺힌 피해 당사자는 가해자를 응징할 때만 그 원망과 원한이 풀리는 법이다. 그러나 아직도 신천 학살 사건과 6.25 전쟁 중 미군의 학살 범죄 규명 요청에 대해 UN측은 거부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고 미국은 발뺌을 하거나 부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우리 내부에서 학살에 가담한 당사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오히려 망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6.25 전쟁 중에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남과 북 전역에서 벌어진 미군의 학살적 만행들과 당시 황해도와 신천을 구심점으로 벌어진 역사적 배경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을에 투하된 미군의 폭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의 어머니의 가슴에 평생토록 박혀 있는 포탄 파편들과 그 피고름 나던 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온 쇳물이 섞인 듯한 모유를 먹으며 자란 나의 가슴 아픈 가정사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어 신천박물관 탐방기는 서너 차례에 걸쳐 써야 할 것 같다.
‘Then there(그때 거기서)’와 ‘Right now(지금 여기서)’의 논리로
이미 공개된 이야기다. 지금부터 15년 전인 1999년 1월 중순에 실향민 출신의 김모 목사를 비롯한 각 종교계 인사 7명이 이북의 ‘아태’와 ‘민화협’의 공식 초청을 받아 7박 8일간 방북을 했다. 김 목사는 한국 교회에서도 개혁적인 지도자급에 속하는 인물로서 마침 방북 일정 중에 포함된 신천 박물관 참관을 하게 되었다. 박물관 전시실을 돌아보던 김 목사는 해설사와 북측 일행들에게 “저렇게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한 범인들이 반드시 미국 군인들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지 않느냐? 학살자들 중에는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 후 관람을 마친 일행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북측 위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말았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수 없는 사람들이 박물관을 방문했지만 그런 잘못된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런 근거 없는 질문을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행들은 그들의 항의를 무마시키느라고 그날 무척 애를 썼다고 한다.
미군이 저지른 범죄라고 수십 년간을 신념처럼 굳게 믿어온 북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경우는 매우 불순한 질문이거나 이단적 질문이며 자신들에게 반박 도전장을 내민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비록 질문 내용이 신빙성 있고 논리적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북측 당국과 주민들의 정형화된 기존 의식을 배려하지 못한 것이다. 피해자로서 학살 문제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여 적개심이 가득 찬 북의 주민들에 대한 정서적 이해가 부족하거나 신천사건에 대한 기초적인 역사 지식을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내던지는 질문들은 그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행위라고 여겨진다.
특히 남측이나 해외 동포 인사들이 신천 박물관을 찾는 기회가 주어질 경우에는 김 목사의 경우처럼 다양한 해석과 시각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부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반미 감정에 흥분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설마 하고 의심을 품거나 심중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처해 있는 북의 입장에서는 절박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정과 형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이제는 북측 당국도 좀 더 열린 자세와 입장에서 신천학살 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의 창구를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분명한 입장은 신천군 전체 인구인 14만 2,786명의 약 25%인 3만 5,383명이 누군가에 의해 분명히 학살당했다는 사실과 이 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된 미군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에 동의한다. 6.25 당시 미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회복하여 북진하던 중에 1950년 10월 17일 신천을 통과하여 점령한 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12월 17일까지 무려 52일간 인민공화국 정권과 인민군에 협력한 혐의가 있다고 확인된 관련자들과 그 일가족들에 대하여 남녀노유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했다.
비록 사건의 발단 단계는 미군과 무관하게 우리 민족 구성원 내부끼리 적대심이 표출되어 후퇴하던 유격대와 서북청년단 등 많은 우익 반공단체들에 의해 자발적인 학살이 이뤄지는 등 손에 피를 묻힌 건 우리들 자신이었지만 전쟁의 기선을 잡고 적을 제압하려는 미국 정부와 미군, 그리고 실무적으로 그 일을 수행한 미군 방첩대가 전략적으로 깊숙이 개입하면서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양민 학살은 주로 배후에서 미군 정보기관에 의해 교묘하고 은밀하게 수행되기 때문에 일반 미군들과 미군에 협력했던 반공 우익단체들도 주동자 외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당시 신천지역을 군사적 점령지로 둔 미군들이 이 사건을 배후에서 진두지휘 하였기에 결코 미군과 미국 정부에게는 면죄부가 허용되지 않는다.
▲ 전시실 참관을 마친 후 여성 해설사들과 함께. [사진제공-최재영]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두고 그 동안 좌우로 대립되어 신천학살의 주범이 ‘미군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끼리 내분의 결과인가?’에만 초점을 맞추며 상대의 주장을 서로 반박해 왔다. 지금도 한국사회의 지식층들 중에는 황석영 씨의 소설 ‘손님’의 영향과 신천사건을 다룬 mbc 다큐멘터리 등의 파급 효과로 “우익 단체들과 치안대에 의해 저질러진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이지 미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견해를 가진 이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전쟁 후 지금까지 미 국립문서보관서에 보관된 6.25 전쟁 문서들과 그 외 각종 관련 자료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양파 껍질 벗겨지듯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신천 사건에는 미군과 미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배후에서 깊숙이 개입한 사실은 확실한 사실이며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한국은 중도 노선에 속한 부류들이 의외로 많다. 또한 극단적인 좌익과 보편적 좌익 그리고 중도좌익이 존재하며 아울러 중도우익이 있는가 하면 완만한 보편적 우익과 극단적 우익이 존재하고 있다. 마치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다양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 모여 구성된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며 그것이 곧 한국의 강점이자 저력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것을 발판으로 통일을 앞둔 이 시점에서 이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6.25 전쟁에 대한 ‘통일 지향적인 객관적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나와 학술원에서는 ‘오폭이나 오인사격 같은 실수나 우발적 사고 혹은 작전상 오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6.25 전쟁시의 미군의 학살적 만행에 대한 객관적 연구를 지속적으로 병행하고 있다. 6.25 전쟁 기간 중에 발생한 미군의 학살적 범죄 기록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와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그동안 전문적으로 조사하여 실사를 벌였는데 그 최종 문서들을 읽어 내려가며 검토하다 보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이다. 그뿐 아니라 6.25 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전쟁 이후 현재까지 미군의 범죄들을 보면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 있어 민족적 존엄과 자주가 철저히 짓밟힌 가장 치욕적이고 불행한 사건들이라는 것을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인식했으면 좋겠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의 학정에 36년간을 시달리다가 힘들게 해방을 되찾았는데 곧 바로 미제라는 외세에 의해 다시금 참혹한 피해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분노를 넘어 자괴감이 짓누르는 일이다.
신천군 학살 사건을 규명하거나 올바른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6.25 전쟁이라는 큰 ‘숲’에서 ‘나무’라는 신천 사건을 조명해야 하며 더 나아가 신천 인근지역에 있는 사리원과 신막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비롯하여 황해도 전체에서 7만 4천여 명이나 학살당한 사건을 연계해서 종합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6.25 전쟁시 남과 북, 전체 영토에서 자행된 미군의 학살적 범죄 사건들을 모두 연계해서 연동성 있게 다루어야만 신천 사건의 윤곽과 실체적 진실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더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미 제국주의의 아시아 패권 전략과 6.25 전쟁에서의 미국의 의도와 주도적 역할에 대해서도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천사건은 미 국립문서보관소Ⅰ,Ⅱ에서 아직도 잠자고 있는 다양한 관련 문서들을 얼마만큼 들춰내느냐에 따라 진실 규명의 속도는 빨라 질 것이라고 본다.
또한 우리는 신천 사건을 다면적으로 접근하여 “Then there(그때 거기서)”와 “Right now(지금 여기서)”의 논리로 해석해야 하며 남과 북은 물론 세계가 공감할 수 있도록 ‘메시지화’ 해야 한다. 신천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일하는 남과 북과 해외동포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감성을 앞세우기보다 좀 더 냉철한 이성과 과학적 논리를 가지고 자료를 모으는데 열중해야 하며 백지 상태에서 각자 모자이크를 맞추듯 서로 협력해서 진실의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아직도 이 땅에 남아있는 쓰라린 전쟁의 상흔과 억울한 영령들을 편히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분단 이면의 기억으로 역사를 다시 쓰고자 신천 박물관을 향하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 6.25 전쟁 당시 학살 참극이 벌어졌던 신천군 인민위원회청사(지금은 개건공사를 통해 박물관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제공-최재영]
▲ 전시실이 있는 박물관 본관 건물. [사진제공-최재영]
▲ 대기실, 휴게실, 교양실 등의 시설을 갖춘 박물관 별관. [사진제공-최재영]
수만 명의 한 맺힌 넋들이 깃든 박물관을 찾아서
우리 일행은 평양시를 빠져 나와 서너 시간이 걸려 황해북도 사리원을 거쳐 황해남도 재령을 지나 신천읍에 도착했다. 초소가 딸려 있는 정문을 통과 하니 ‘밤나무골’이라고 부르는 곳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신천박물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건물에 들어서니 울타리 같은 둔덕에 붉은 글씨로 “미제 살인귀들을 천 백배로 복수하자!” 라는 섬뜩한 구호판이 눈에 띄었다. 박물관의 건물 규모와 배치는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학교 건물과 운동장처럼 평범하게 보였다. 정면으로 봤을 때 우측에는 빨간색 음각 글씨체로 “신천 땅의 피의 교훈을 잊지 말자!” 라는 구호가 적힌 건물이 보였다. 방문객들이 대기할 수 있는 휴게실, 방명록을 적을 수 있는 공간 등을 비롯해서 교양 마당, 매점, 화장실 등 다양한 부대시설들을 고루 갖춘 2층짜리 건물이었다. 또한 부지 정면에는 6.25 전쟁 당시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2층짜리 박물관 본관과 전시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본관 전시실 내부에는 신천군 전체 군민의 1/4에 해당하는 인구가 잔인하게 피살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실제 머리카락과 신발, 비녀 등의 각종 장신구들을 비롯해 유품들이 진공유리 보관함에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각종 학살 도구와 학살자들과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6.25전쟁 중에 발생한 신천지역 폭격 피해 현황과 세균전 및 화학전에 대한 자료들, 6.25전쟁에 대한 종합 전과 게시물이 설치돼 있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위원회의 조사 보고서를 비롯해 다양한 현장 사진들과 관련 자료들, 학살 당시를 고증하여 재현한 그림들과 각종 설명 문구들, 통계 자료와 수치 등 수천 점의 전시물들이 테마별로 서로 연계되어 전시되었다. 박물관 전시실은 본관 전체 2층 공간을 활용하여 1층(1관)에 16개실과 2층(2관)에 3개실 등 총 19개의 전시실을 갖췄다.
전시실 참관을 마치고 본관 건물을 빠져 나와서 운동장 좌편 방향으로 이동하면 유대인들을 죽인 나치 독가스실을 떠올리게 하는 지하 방공호가 나온다. 이곳은 수백 명의 주민들이 수류탄과 휘발유 불에 의해 한꺼번에 숯덩이로 몰살당한 장소로서 무거운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방공호에서 나와 1분 거리에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계단에 올라서면 무고하게 학살당한 주민들의 시신과 유골들이 무려 5,605명이나 안장되어 있는 ‘애국자묘’가 왕릉처럼 나타난다. 이곳에서 헌화하고 나면 곧 바로 차량으로 이동하여 20분 거리에 있는 원암리 학살 현장으로 떠난다. 이곳은 900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한 화약 창고가 두 개가 있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아이들만 102명, 아이 엄마들이 500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아이들은 위 창고에, 어머니들은 아래 창고에 가둬 넣고 살해했는데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생존자의 증언을 뒤로 하고 학살 현장 바로 옆에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신 ‘102 어린이 묘’와 ‘500 어머니 묘’에 환화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해설사의 답변과 현장 생존자의 증언들은 전시실 참관부터 모든 일정을 마칠 때까지 함께 이뤄지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됐으며 세밀하게 살피거나 집요하게 파고드는 나의 스타일 때문에 관계자들이 다소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주어진 참관이다 보니 주어진 시간 내에 큰 성과를 얻어야 하기에 잰 걸음으로 움직였다.
▲ 황해도 전 지역에서의 학살 통계. [사진제공-최재영]
▲ 신천군 전 지역에서의 학살 통계. [사진제공-최재영]
이승복 군과 신천 피살자들이 오버랩 되는 이유
박물관 전시실로 향하는 이 시점에서 나의 머릿속에는 뜬금없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무장공비에게 학살당했다는 이승복 군이 떠올랐다. 물론 내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은 이승복 군의 외침이 아니라 “조선일보사의 외침”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집요한 연구에 의하면 이승복 군이 무장공비에게 살해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해당 언론사의 과장되고 의도적인 왜곡 보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승복 군은 죽음의 과정마저 참혹했는데 죽어서도 억울하게 극우들의 반공주의를 위해 철저히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신천 학살 사건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어떤 이유에서도 실체적 진실은 호도되거나 왜곡되면 안 된다. 누군가 “국익이 우선이냐? 진실이 우선이냐?”라고 물을 때 우리는 당연히 “진실이 우선”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처럼 유명을 달리한 수만의 신천 영령들이 60년을 넘는 세월 동안 진실보다는 어느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이 이용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이다.
원한의 이 신천 땅과 기념관 건물 부지 안에도 이제 분단 70년의 새 봄이 찾아온다. 하나님의 은혜와 화해와 상생의 새로운 기운이 이곳에 넘치기를 조용히 기도하며 본관 입구에 도착했다. 교양 과장으로 있다는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해설사 박영숙 선생과 곱디고운 미모의 김정심 해설사와 또 다른 아리따운 여성 해설사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곧바로 전시실로 이동하며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다.
“지금까지 모두 몇 명이나 여기를 다녀갔는지 정확한 통계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박물관이 건립된 후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1,600만 명에 달하는 방문자들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425만명이 우리 박물관 해설 강사들을 통해서 이동식 강의를 받았고 해외 동포가 22만 명, 세계 각국의 외국인이 3만 명이 넘게 다녀갔습니다.”
“이 박물관은 언제 개관이 됐나요?”
“우리 수령님께서는 전쟁 복구가 끝난 어느 날, 신천군에서 감행한 미제와 계급적 원쑤들의 야수성과 잔인성을 폭로하는 각종 증거물들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발굴하여 전시하라는 말씀을 주셔서 1958년 3월 26일에 력사적인 개관을 하게 되었으며 올해로 개관한지가 56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해마다 개관일이 돌아오면 신천군 당 책임비서가 주관하여 기념 보고회를 갖고 있으며 그 동안 10년에 한 번씩은 기념일마다 우리 수령님과 장군님을 모시고 대대적으로 기념 보고회를 개최하여 왔습니다.”
“제가 연구를 하면서 사진 자료들을 확인해 보니까 전시실 내부가 여러 번 바뀌었던데요?”
“네, 우리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박물관 건립 40돌 기념 보고회에 참석하신 자리에서 신천 박물관의 개건공사를 지시하셨습니다. 우리 박물관이 개관한 지가 40년이 지나다 보니 여러 가지 보완할 시설들이 많아서 다시 내부적으로 개건 공사를 시작하여 주체 87(1998)년 11월 22일에 새롭게 단장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김정은 위원장께서는 아직 여길 다녀 간 적은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여기를 이미 다녀 가셨더랬습니다. 우리 김정일 장군님께서 1998년 3월 25일에 열린 40돌 기념행사를 마치신 후, 우리 장군님과 함께 경외하는 김정은 원수님께서도 이곳을 친히 다녀가셨습니다. 아마 머지않아 이곳에 또 한 번 현지 시찰을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그럼 그때 당시 김정은 위원장께서는 14살 청소년 시절이셨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건 선생님이 직접 계산해 보시면 됩니다. 우리 수령님은 생전에 이곳을 1953년 8월 13일과 1958년 3월 26일에 두 번에 걸쳐 찾아 주셨고, 우리 장군님도 1962년 1월 22일과 1998년 11월 22일, 모두 두 번을 친히 다녀가셨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실제로 내가 박물관을 다녀 간지 두 달 후인 2014년 11월 25일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곳에 현지 시찰을 다녀갔으며 신천 박물관을 시대에 걸맞게 재보수할 것을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신천 학살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방향에서 제시를 해준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한 명이라도 학살 현장의 증인을 더 만나보고 싶어 생존자인 정근성 선생 외에도 다른 생존자를 더 요청했다.
“아, 참, 제가 평양에서 출발할 때 미리 요청을 했어야 하는데 깜빡했습니다. 혹시 ‘복수하리라’ 어머님을 잠시라도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예, 일 없습니다. 저희가 좀 알아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 저기 전화를 걸던 박물관 측에서는 만남이 성사될 수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신천 사건 피해자 중에 매우 유명한 분인데 그녀의 증언을 듣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오늘은 ‘복수하리라’ 어머님이 급한 사정들이 있어서 만나기 힘들 듯 합니다.”
신천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어느 여인이 나중에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그런데 오죽 원한이 맺혔으면 첫째인 장녀 이름을 ‘복수’, 둘째인 아들의 이름을 ‘하’, 셋째인 막내딸의 이름을 ‘리라’로 지었겠는가? 미군에 의해 두 팔이 잘렸다고 하는 이 아주머니는 몸뚱이가 마치 절구통처럼 불편한 생활을 하며 한 맺힌 생을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세상 어느 부모가 사실이 아닌데도 자식의 이름을 거짓으로 지어줄 수 있겠는가를 잠시 생각해 봤다.
“그러시면 대신에 평양으로 떠나실 때 ‘양장리’에 한번 들렸다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양장리에는 왜요?”
“그 동네는 미제 놈들이 마을 사람들 중에 남자들은 씨를 말리려고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잔인하게 죽여 버려서 한 동안 여자들만 살던 유일한 마을입니다.”
“아. 참 그렇게 기막힌 경우가 있다니......”
인간의 잔인함이 어디까지인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날은 밤늦게까지 원암리 화약 창고 일대를 참관하느라 날이 어두워서 양장리 마을은 가지 못하고 평양으로 북귀했다.
학살 근거의 첫 전시물은 성경책과 십자가 묵주였다
제1전시실 안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길다란 유리관이 눈에 띄었다. 유리관 속의 전시물은 학살 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밝혀 주는 도표와 함께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이윽고 해설사의 까랑까랑한 설명이 시작됐다. 원래 참관자들은 기본적으로 해설사와 눈을 마주치며 설명을 들어줘야 예의를 지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선은 자꾸 유리관에 전시된 진열품으로 신경이 쏠렸다. 진열된 물건들은 다름 아닌 성경책들과 십자가 묵주들이었기 때문이다. 직업이 목회자인 내가 어찌 성경책과 십자가를 보고도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있겠는가? 자세히 보니 분명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손때 묻은 여러 종류의 성경책들과 소책자들이었고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 묵주와 종교 물품들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도표를 그려놓은 게시물을 자세히 바라보니 ‘신천지구 미강점군의 통치 체계와 반동 단체 조직표’ 라고 쓰여 있었고 학살의 총 지휘 체계의 우두머리를 ‘신천강점 미군장교 해리슨. 디. 매든’이라고 적어 놓았으며 그 수하에는 두 조직을 밝혀 놓았다. 그 중 하나가 ‘신천강점 미군 첩보장교 뇨크’라고 적혀 있으며 그 ‘뇨크’의 예하 조직으로는 ‘경찰대’, ‘학생 무장대’, ‘치안대’, ‘자치회’, ‘대한 청년단’, ‘멸공단’, ‘부인회’를 열거해 놓았으며 또 하나의 조직은 ‘차프링, 우두머리 미 종군목사’ 라고 표기해 놓고 그 예하 조직으로는 ‘서부 교회’, ‘동부 교회’, ‘신천성당’, ‘각 면 교회당’이라고 지목하여 열거해 놓았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성경책들과 십자가 묵주 꾸러미들을 바라보니 갑자기 발바닥이 얼어붙는 듯한 전율과 절망감이 나의 전신을 휘감는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란 말인가? 사람을 살리고 죄인을 구원하는 종교라는 기독교가 무슨 연고로 이 엄청난 학살 사건의 주범이란 말인가? 해설사가 관람 시작부터 당차게 내놓은 증거물이 성경책과 십자가라니 나 보고 어쩌란 말인가? 다리에 힘이 풀리고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처음 접하는 사실 때문에 받은 충격이 아니라 이미 내가 그 동안 연구하여 알고 있던 자료들이 하나씩 사실로 확인 됐기 때문이다.
해설사의 주장과 전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해리슨(Harrison D. Maddon)이라는 미군 우두머리가 학살을 진두지휘 했으며(다음 회에는 해리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됨) 그 밑에서 학살 전략을 보좌한 두 명의 실무자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요크(Captain York)라는 미 방첩부대 요원이고, 또 한 명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 군종목사라는 것이다(전시실 게시물에 한글로 표기된 ‘차프링’은 군종 장교의 영어 이름이 아니고 ‘Chaplain(군목)’을 한글로 발음한 것을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리슨을 돕는 이 두 명의 미군 장교들을 돕는 예하 조직 단체들과 그 구성원들은 모두 서북 청년단원들을 비롯해 기독교 색채가 농후한 여러 외부 청년 단체들도 있었지만 주로 신천지역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회 청년,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
성직자의 신분인 군종목사는 전시나 평시에 군인과 장교이면서 동시에 목회자의 신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종목사가 전쟁터에 파견되어 사역 하는 것을 종군목사라고 한다. 이런 미군의 종군목사가 우두머리 장교인 해리슨의 휘하에서 학살 지역의 교회와 성당의 신자들과 연대해서 무고한 양민들의 학살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해설사의 주장을 자세히 들어 보면 단순하게 미 제국주의 앞잡이인 기독교와 선교사를 배척하기 위해 북측이 습관적으로 내세우는 무모한 주장이 아니었으나 우선 상식적으로는 믿기 어려운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또한 ‘뇨크’라는 대위 출신의 방첩대 장교가 거느리고 있는 예하 조직들과 단체들의 구성원들도 역시 모두가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 청년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루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들을 알아 본 후에 참관 이야기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
▲ 학살을 주도한 미군 조직 체계와 협력 단체 조직표. [사진제공-최재영]
▲ 신천지역 교회에서 사용한 성경책들과 소책자들. [사진제공-최재영]
▲ 신천지역 성당에서 사용한 십자가 묵주들과 종교 물품들. [사진제공-최재영]
신천지역 교회 내부에서 형성된 좌익과 우익
해설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직접 학살 연루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 mbc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때 일어났던 이야기들과 황석영의 소설 ‘손님’의 실제 주인공인 류태영 목사님의 이야기들을 먼저 살펴봐야 할 듯하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2년 4월에 접어들면서 mbc방송국은 방송 사상 최초로 신천 학살 사건을 집중해서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한 해 전에 있었던 황석영의 소설 ‘손님’의 파급 효과를 타고 이 프로그램은 다각도로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가져 왔으며 신천학살에 대한 연구와 논의에 불을 지폈다. 나 역시 이 방송 테이프를 입수해서 수 없이 반복 시청했으며. 방송 내용을 녹취해서 30페이지 분량이 넘는 녹취록을 팸플릿으로 만들어 수 없이 읽으며 연구 자료로 삼았다. 심지어 당시 방송에서 다루지 못한 여러 궁금증들을 풀기 위해 서울 시내 모처에 있는 신천군민회 사무실을 찾아 가기도 했으며 여러 번 문전 박대를 당했으나 우여 곡절 끝에 두 차례 만남의 기회가 주어져 추가적인 학살 증언 자료들을 수집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평소 지니고 있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반북정서와 반공의식에 경악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북의 정권은 그 자체가 악이며 사탄의 세력이었고 타협할 수 없는 영원한 적이었다. 또한 북한이라는 국가와 국내의 진보 세력들을 동일시하며 적대심과 증오심에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은 자신들도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면서도 매우 평범하고 젊은 목회자인 나를 접촉할 때마다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고 꺼려했으며 아직도 고향 땅 신천에 살고 있을 가족들이 자신들로 인해 혹시 피해를 입는 다거나 자신들이 북으로부터 자칫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심지어 당시 유행하던 전화번호부 책자에도 가명으로 등록할 정도로 피해 의식에 빠져 있는 심각한 모습을 목격함으로써 그들 대부분이 바로 신천 학살에 동참한 가해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더 나아가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라는 것을 최종 확인한 나는 한 동안 충격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증언을 들어보니 그들은 신천 지역 교회의 청년들이나 젊은 지도자들로서 게릴라전을 펼치기 위해 ‘동키(Donkey)부대’라는 유격대를 조직하거나 일시적인 자체 ‘치안대’를 조직해서 한 동네에 살고 있던 좌익 세력들을 모두 이 잡듯이 잔인하게 잡아 죽였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 살면서 언덕에서 함께 뛰어 놀거나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이좋게 놀던 친구들이나 이웃 주민들을 빨갱이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 남녀노유 가리지 않고 모두 잔인하게 처형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그들은 보복을 피해 대부분 월남해서 한국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올랐으며 특히 그들 중에는 한국교회의 목사와 장로 혹은 교회의 중추적인 일꾼들이 많아 한국 기독교 교계의 헤게모니를 잡았다. 그중에는 개신교 최대 교단의 총회장과 부총회장을 지낸 목사와 장로들도 여러 명 있었다.
나와 대화할 때 살펴 본 바로는 자신들의 행위를 지금도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오히려 공개적인 대중 장소에서는 자신들의 과거 학살 행적이 마치 전장에서의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나 한듯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큰일이나 한듯 공산당을 때려잡았다는 식의 무용담처럼 자랑을 일삼아 왔다. 그 결과 1960년대부터 한국교회가 온통 반공주의 일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이 된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로서 반공 투사가 된 그들은 신성한 교회 강단을 반공 강연장과 본거지로 둔갑하게 만들거나 자신들이 속한 교파와 교단에서는 절대적으로 친미를 주장하는 동시에 반공주의를 신봉하여 왔던 것이다. 아무리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보복성 살인이라 해도 그렇게 많은 숫자를 살해하고도 털끝만큼도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고 회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을 보며 나는 무수히 절망했었다.
내가 만나 본 신천 출신의 실향민들은 6.25 당시 일부 지주와 중농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의 사고 의식의 저변에는 노비와 빈농 출신들이 대부분인 좌익 계열의 주민들을 매우 업수이 여기고 모멸하는 정서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나에게 “그런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김일성 정부가 들어서며 시절이 바뀌니까 몇 달간 어디 가서 빨갱이 교육을 받고 와서 우리들 앞에 나타나 거들먹거리며 상전 노릇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중략) ... 결국 보복이 두려우니 그들을 안 죽이면 내가 죽으니 그들을 먼저 죽였어야 마땅하다”는 말을 당당히 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모습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작농이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가 수확물의 절반을 상회하였고, 심할 경우 80%에 달했기 때문에 소작농과 빈농들은 1년 내내 아둥바둥 죽어라 일해도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중국의 간도(지금의 연변지역) 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양보와 타협과 배려는 전혀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해방이 되자 국민(인민) 구성원의 절대 다수인 농민들의 최대 숙원이자, 사회의 최대 현안 문제로 떠오른 것은 토지개혁 문제였다. 1946년 3월에 시작된 이북의 대대적인 토지개혁은 지주들의 땅을 모두 몰수한 후에 이들을 타지로 보내서 그곳에서 땅을 재분배해 주는 ‘무상 몰수’와 ‘무상 분배 방식’이었다(알려진 대로 지주들에게 무조건 강제로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결국 좌우 대립의 단서가 됐던 토지개혁 문제는 황해도 지역의 교회를 둘로 분열시키고 말았으며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출석했던 개신교 교회 안에서는 토지 개혁 문제로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지게 됐다. 지주나 부농 출신의 신자들은 토지개혁을 적극 반대하는 반면 전답이 없는 신자들은 적극 찬성함으로써, 결국 교회가 찬반 양론으로 나눠져 급기야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했다. 교회안의 좌우익 분열 현상은 점차 사회로 확대되어 사회도 좌와 우로 양분되는 사태로 확대된 것이다. 바로 이들 좌익 기독교의 뿌리가 김일성 주석과 함께 토지개혁 문서에 직접 서명 날인을 했던 강양욱 목사가 이끈 ‘조선기독교도연맹(현재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며, 우익 기독교는 ‘이북 5도민 연합노회’를 따로 구성해서 활동하다가 이들이 모두 월남하여 한국교회의 중추적인 보수그룹을 형성한 반공세력의 핵심 그룹이 되었던 것이다. 끝내 이들 우익 기독교에 속한 반공우익 청년들이 세운 서북청년단은 급기야 야밤에 강양욱 목사의 집을 급습해 수류탄 투척과 기관총을 난사하여 강 목사의 장남과 외동딸이 즉사했고 손님으로 와서 윗방에서 잠을 자던 두 명의 목사도 현장에서 즉사를 하는 비극을 안겨 주는 악행을 저질렀다.
▲ 신천 학살을 소재로 한 황석영의 소설책 ‘손님’. [사진제공-최재영]
▲ 소설‘손님’의 실제 주인공인 류태영 박사(원로 통일운동가이자
뉴욕 The Bedford Park 장로교회 원로목사). [사진제공-최재영]
황석영의 ‘손님’과 주인공 류태영 목사가 주장하는 진실
남북이 모두 주목하는 소설가 황석영 선생은 1989년에 불법으로 방북했을 때 부친의 고향인 황해도 신천에 찾아 간 적이 있었다. 해방 전부터 황석영의 외조부는 기독교 목사였다. 또한 황석영은 그의 부친 때문에 호적상의 원적도 ‘황해도 신천군 온정면 온정리 103번지’로 되어 있었다. 그가 막상 신천에 가보니 일가친척은 아무도 없었고 신천박물관을 둘러보고 왔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한국으로 가지 않고 독일을 거쳐 도피하듯 미국에 와서 몇 년을 생활하게 됐다. 마침 뉴욕에서 통일운동을 하며 목회를 하던 류태영 박사를 알게 되었고 류 목사는 동포의 입장에서 그를 힘껏 도와주었다. 황석영이 동부 지역을 방문할 때는 류 목사가 직접 차를 운전하거나 비행기에 합승하여 같이 움직일 정도였다. 문제의 발단은 시카고를 함께 방문했던 어느 날에 벌어졌다. 류 목사는 자신이 개신교 목사로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 중에 신천이 고향인 자신이 19세에 겪었던 고향마을에서 일어난 잔인한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해 줬다. 그런데 그 후 세월이 흘러 2001년 6월에 황석영은 신천 학살을 소재로 다룬 장편소설 ‘손님’을 발표했는데 느닷없이 류태영 목사가 이 소설속의 주인공인 류요섭의 모델로 둔갑을 한 것이다.
그리고 황석영은 두 달 후인 8월에 방북단을 이끌고 두 번째 방북 길에 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북측에서는 그의 소설에 문제를 제기했는데 남과 북의 기자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북측의 문학 평론가 조정호와 황석영이 작은 논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황석영은 자신의 소설에 대해 “남조선 사회에 있는 우익의 뿌리를 찾기 위해 시도한 소설”이라는 해명을 하면서 사태는 일단 무마되었다.
문제가 된 소설 줄거리는 학살의 원인을 인민군에 협력 했던 빈민층, 머슴들이 주축이 된 좌익 세력과 황해도 곡창지대의 지주 계급이 대부분이었던 우익 기독교 세력들 사이의 정면충돌로 묘사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천 사건을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대결로 인한 결과물로서 미군과는 상관없이 우리 동족 내부에서 저질러진 학살로 결론짓게 된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류태영 목사님은 거주 지역이 나와는 다르지만 미국의 어느 인터넷 신문에 편집위원으로 함께 소속된 적이 있었기에 서너 번 만날 기회가 있었으며 통일운동 관련 행사에서도 간혹 뵐 수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 류 목사는 황석영을 향해 언제나 불만스러워 보였다. “나는 신천 학살에 대해 미군이 저지른 부분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 무슨 의도로 그런 소설을 썼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무리 소설 속 줄거리라 해도 류요섭의 입을 빌려 신천을 이야기하면서 미군 학살을 부정하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황석영의 면전에서 실제로 전해 준 증언내용은 자신이 살던 ‘부종리’라는 시골 동네에 국한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며 3만 5,000명이 넘게 학살당한 신천군 전체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 이야기가 신천군 전체에서 미군의 학살이 자행됐는지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단서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된 불만 내용이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이고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작가가 아무리 어느 특정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해도 독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 창작에 있어서 작가는 자신이 의도하는 주제를 떠 받쳐주는 일부 소재만을 활용할 뿐, 나머지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것이 소설의 특성이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도 실제로 신천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의 일부 소재를 근거로 꾸며진 소설이므로 황석영의 문학적 평가와는 상관없이 신천군 학살 사건의 실체적 진상은 별도로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류태영 목사가 말하고자 했던 진실은 무엇이었나? 류 목사는 ‘신천군 남부면 부종리’ 마을에서 3대째 내려오는 목회자 가문에서 태어나 기독교의 영향으로 형님과 함께 자연스레 친미, 반공주의자가 됐다. 1950년 가을,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이 들어오고 인민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나돌면서 같은 마을에 살던 좌익 성향의 청년들과 주민들이 모두 산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들은 2주가 못돼 배고픔을 못 이겨 마을로 내려 왔는데 이때 류 목사가 다니던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치안대가 산에서 굶주림에 지쳐 내려온 이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했으며 바로 류 목사의 형님도 이 학살에 가담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군이 인해전술로 투입되면서 사태가 역전되자 보복이 두려운 형제는 1·4 후퇴에 가족들을 남겨 두고 남쪽으로 도망치듯 내려왔던 것이다. 몇 달 후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누님과 형수와 어린 조카들에게 인사조차 못 하고 내려와서 수십 년을 생이별한 것이다.
그 후 5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1990년이 돼서야 류 목사는 고향 땅 신천을 방문하게 됐는데 누님은 평양에 살고 있었고 형수와 조카는 여전히 신천에 살고 있으면서 조카는 노동당원의 신분으로 시멘트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류 목사의 방문을 알게 된 시멘트 공장장이 오히려 류 목사에게 환영 행사와 만찬을 베풀어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더구나 학살자의 가족들에게 이미 심한 보복과 앙갚음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제 확인을 해 보니 자신의 가족들은 오히려 아주 편안히 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류 목사가 황석영에게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었다.
실제로 사회주의라고 하는 북에서는 오히려 학살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보복을 하지 않았고 보듬어주고 품어주며 잘 살도록 이끌어 주었다. 부모 자식을 처참히 죽인 원수들은 3대를 이어가면서 복수를 하는 것이 동서양의 기본 정서임에도 불구하고 북의 사회는 이들을 모두 관대히 용서해 주고 오히려 다독여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으로 내려간 학살 당사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면서도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이 오히려 남쪽 사회에서 반북정서와 반공사상을 통해 북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키우는 역할에 앞장서 있다는 것을 류 목사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농사나 짓고 살던 무지렁이 같은 순진한 주민들이 색깔 논쟁과 사상 논쟁에 휘말려 서로 죽고 죽이는 보복의 악순환에 희생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으며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이웃을 죽인 당사자들은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도 철벽처럼 아무런 죄의식이나 가책이 없이 살고 있는 것이 슬프다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의 대명사를 지니고 있는 기독교 복음의 가치는 그 어떤 사상과 이념의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하고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학살자들과 피살자들의 태도와 반응이 뒤바뀐 슬픈 현실을 살고 있다.
▲ 박물관 전시실에서 해설사와 함께. [사진제공-최재영]
전시물은 학살의 책임을 미군에게만 돌리지 않았다
오늘 제1전시실에 보관된 첫 번째 전시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본 결과 그 동안 우리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북측은 학살의 주범을 결코 미군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으며 미군에게 협력하고 순복한 우익 단체들도 학살자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동안 수십 년을 들어 왔던 북측의 증언들과 주장들은 학살의 주범과 원흉을 앵무새처럼 미군을 지목했으나 이곳 박물관 첫 전시물 내용에는 반드시 미군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의 수확이었다. 전적으로 미군의 소행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된 많은 반공 우익 단체들도 미군들과 함께 학살의 공범으로 포함시켰다.
다만 북측은 학살 사건 발생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학살자에 대한 공격의 화살을 우익 단체들에게 돌리지 않고 미 제국주의에 돌렸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신천 학살을 배후에서 주도한 미군의 역할을 외면한 채 “신천 학살은 동족끼리의 학살극일 뿐 미군에 의한 학살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거나 “학살은 오직 미군에 의해서만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식으로 본질을 왜곡하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미군을 지목하는 북의 태도와 관점은 우선적으로 우리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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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9191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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