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7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

by유정호Aug 24. 2020




김원봉(1898~1958)을 빼놓고는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월북하여 북한 고위 관료층으로 활동한 이력으로 김원봉 석 자는 이야기해서도 안 되던 시기가 있었다. 김원봉의 외조카 김태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원봉의 월북 이후 4명의 형제가 처형당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신분을 숨기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냉전이 무너지고 역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오늘날 김원봉은 다시 등장하며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김원봉은 1911년 일장기를 화장실 똥통에 버리고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밝혔다. 이후 여러 학교에서 학문을 익히던 김원봉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의 나이 21살이 되던 해이다. 의열단은 일본 고관, 친일파 등 칠가살(七可殺)을 정하고 많은 의거 활동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등이 있다.

그러나 의거 활동은 성과와 비교해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너무 컸다. 김원봉은 의거 활동만으로는 독립을 끌어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군대 양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6년 본인부터 중국의 황푸군관학교에 입소하여 군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과 함께 북벌을 함께 수행하며, 활동을 인정받아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할 수 있었다.









1935년에는 독립운동 단체 5개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훗날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 때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일제에 맞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였던 최창익이 48명을 데리고 민족혁명당을 탈당하면서, 김원봉은 남은 세력을 데리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부장으로 한국광복군을 이끌며 독립을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주축이었던 김원봉은 일제에겐 눈엣가시였다. 김구의 현상금 60만 원보다 많은 100만 원은 김원봉의 독립운동 활약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하지만 독립이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합국이 일본에 승리하면서 얻은 광복은 임시정부 요원들의 귀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에서 고난을 예견하고 있었다.









실제로 미‧소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권력을 잡으려는 일부 세력에 의해 통일된 정부 수립은 어려웠다. 그 와중에 미군정에 의해 다시 권력을 잡은 친일파는 독립운동가를 핍박하였다. 친일파들에게 있어 의열단을 통해 매국노와 친일파를 처단하던 김원봉은 두려운 존재이며 가장 먼저 처리할 대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군정 하에 있을 때, 필히 제거해야 했다.

1947년 8월 11일 수도경찰청은 남로당 폐쇄조치와 대대적인 검거 과정에서 김원봉의 자택을 수색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또한 극우세력의 김원봉에 대한 살해 위협도 매우 많았다. 미군정도 김원봉과의 남로당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하며, 김원봉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이 가운데 친일파 출신의 경찰에게 당한 고문은 김원봉에게 치욕과 고통을 크게 남겼다. 이 당시를 의열단원 유석현은 이렇게 증언했다.


“장택상은 수도청장이 된 뒤…. 이승만이 정적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때려잡을 때, 약산과 조소앙을 붙잡아 갔다. 특히 약산은 붙잡혀 갈 때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제 경시 출신 노덕술이 그대로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약산(김원봉)은 장택상 앞까지 강제로 끌려가, ‘여기는 왜놈들만 오는데지, 나를 잡아 올 놈이 누구냐. 조선 놈으로 날 잡아 올 놈이 누구냐.’며 격분했고,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이놈아 두 분을 모셔 오랬지, 누가 쇠고랑 채워 끌고 오랬냐.’며 짐짓 능청을 떨고 수갑을 풀어줬다. 약산은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고 나에게 와서 사흘을 울었다. 그는 울면서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고 했다. 그는 48년 남북협상 때 김구와 함께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 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김원봉은 생명에 대한 위협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남한에서 통일된 정부를 만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있었지만, 연안파와 남로당 등 다양한 세력이 북한 정권을 구성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표면적으로 통일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김원봉과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도 북에 많이 있었다. 김원봉은 남한보다는 북한에서의 활동이 통일된 나라를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북한도 남한보다 정통성과 대의명분을 갖기 위해 김원봉이 필요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김원봉이 통일 정부를 주장하는 북한에 가담했을 때, 분단의 책임을 남한에 떠넘길 힘이 가중될 수 있었다. 또한 김일성은 김원봉을 통해 남로당을 견제하고자, 적극적으로 김원봉의 월북을 종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되고 있다.

월북한 김원봉은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서 고위 관료로 참여했고, 6‧25전쟁의 비극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서는 남측 정당‧사회단체의 대표로 활동하며 서열 5위에 해당하는 국가검열상으로 초대 내각에 참여했다. 전쟁 당시에는 서울에서 임정 요인과 저명인사를 만나 북한 체제 선전을 요구하며 전향을 권유하였다. 분명 김원봉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북한 고위 관료였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은 이루어져야 한다. 김원봉의 월북 이후의 활동이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김원봉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그래야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김원봉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어떤 세력하고도 과감히 손을 잡았다. 1937년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개설하며 소련의 지원을 끌어내면서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맞섰다. 국민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합작을 반대하며 최창익 등 사회주의 의열단 일부가 떨어져 나갈 때도 꿋꿋하게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그렇기에 모든 역사학자들은 공통으로 김원봉을 ‘비공산주의자’, ‘비남로당’으로 분류한다.

김원봉이 독립운동 과정을 살펴보면 통일된 독립국이 제일 우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광복 이후 남한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활동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매우 작았다. 그런 도중 북한에서 통일을 내세우며 김원봉을 필요로 했다. 수많은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을 주도하며 정치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김원봉은 김일성의 의도를 파악했지만 월북하였다. 남한보다는 북한에서 통일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김일성을 견제하던 연안파와 소련파들이 완전히 제거하는 1958년 김원봉은 숙청된다.

냉전 체제하에서 독재정권이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자 일명 ‘빨갱이’는 모든 정적을 없애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 폄훼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원봉이다. 그 결과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평생을 바쳤던 그의 의지와 노고 그리고 업적까지 말이다. 김원봉의 북한에서의 활동과 독립운동은 별개로 평가되어야 한다.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는 올바른 역사 세우기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재평가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당면과제이다.

참고 : 김원봉의 월북 배경과 이후 정치활동 궤적, 2019 한상도, 한국근현대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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