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의한 학살은 아직도 진행중이었다
<연재> 최재영 목사의 방북기(10)-신천박물관 참관기④
기자명 최재영
입력 2015.01.19 15:28
수정 2015.01.19 15:50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반미와 항미’보다는 ‘용미’의 지혜를 모아 ‘극미’의 단계로
해외에 살며 남북을 오가며 보니 7.27정전협정으로 휴전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미군에 의한 한반도(조선반도)에서의 학살적 범죄행위들은 여전히 남과 북에서 진행 중에 있었다. 그 근거로 미국은 북한에 대해 아직까지 일관되게 ‘전쟁위협’은 물론 갖가지 명목으로 국제사회에서 ‘경제제재조치’와 ‘고립압살정책’을 주도하며 북한의 목을 옥죄고 있으며 이런 미국의 모습들은 북한에 대한 또 다른 유형의 집단적 학살 만행이며 명백한 인륜범죄라고 생각한다.
북한뿐 아니라 남한을 대상으로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짓밟는 미군의 만행은 더욱 심각하다. 6.25전쟁 중에 남한전역은 미군의 학살적 만행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60년이 넘도록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은 가장 아름다운 지역 100여 곳에 최첨단 기지를 세워놓고 우리나라의 육지와 바다와 하늘을 점령하며 요새화하고 각종 환경오염과 자연파괴를 일삼고 있으며 강간, 살인, 방화 등 무려 10만 건에 달하는 각종 미군 범죄들을 그동안 저질러왔기 때문이다.
경남 함안의 장지리 마을에서 6.25전쟁 중에 발생한 미군폭격사건의 피해자인 황계일 씨는 폭격기에서 발사한 총탄이 부친의 턱을 관통한 뒤 곧이어 자신의 눈을 뚫고 들어가 그의 얼굴 반쪽은 지금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그의 눈에는 의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눈물샘이 60년 동안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다. 멈추지 않는 함 씨의 눈물을 누가 멈추게 할 것이며 누가 그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인가? 황 씨를 비롯하여 나의 어머니 강봉단 여사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고 살아오면서도 오히려 역사의 죄인처럼 음지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다.
특히 주한 미 공군전투부대가 전쟁 직후인 1951년부터 2005년 8월까지 경기도 화성의 매향리 사격장에서 전쟁훈련과 사격연습을 하는 동안 선량한 주민들은 사시사철, 불철주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무려 54년간 지속된 훈련의 피해와 후유증에 의한 심한 우울증, 불안증,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주민들의 자살율이 한 때 전국에서 최고조에 달했으며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행기 굉음과 사격소음에서 발생한 피해 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주민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었으며 사격훈련 중 발생한 피폭, 오폭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와 인명, 재산피해 등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될 수 없는 미군에 의한 최악의 인권유린 행위였다.
또한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주한미군들의 각종 범죄사건들은 지난 60년 동안 끝없이 이어져왔다. 여성의 음부에 콜라병을 박아 참혹하게 살해하는가 하면 길을 걷던 어여쁜 여중생들을 장갑차로 깔아 죽이는 일들을 자행한 것에서 보여지듯 미군들은 아직도 우리 겨레의 깊숙하고 은밀한 자존심까지 참혹하게 유린하고 있으며 떡잎처럼 파릇한 우리 겨레의 희망마저 깡그리 짓밟아 뭉개버리고 있는 중에 있다.
우리 민족이 분단된 지 어언 70년이 되었다. 이제 남, 북, 해외의 모든 민족 구성원들이 분연히 들고 일어서 우리나라의 참된 주인이 되어 미국이 우리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저지른 살육적 만행들과 온갖 범죄들을 세계의 양심들과 역사의 정의 앞에 낱낱이 밝혀내고 당당하게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반미(反美)나 항미(抗美)보다는 용미(用美)의 지혜를 발휘하여 마침내 극미(克美)의 단계에 진입해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되찾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원암리 화약창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어린 생존자들, 이들은 장성한 후 현재 박물관 강사로 활동중에 있다. [사진제공-최재영]
▲ 어머니들과 자녀들이 분리된 창고에서 아이들의 시신더미를 헤치고 살아나왔다는 생존자인 정근성 강사. [사진제공-최재영]
“시틀러 동상을 예루살렘에 세와보십시오”
원암리 화약창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정근성, 주상원 등 생존자들과 읍내 주민들과의 대화 도중에 6.25전쟁시 9.28서울수복과 인천상륙작전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정색을 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신천군과 황해도뿐 아니라 미군의 평양 탈환시 부녀자들과 아이들에게 저지른 온갖 종류의 범죄와 만행들은 너무도 사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듣기 민망하였고 때론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이북 전역에서 미군에게 피해를 입거나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최 선생님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유대인들을 수백만 명이나 학살한 시틀러(히틀러)의 동상을 예루살렘 한복판에 세와두면 유대인들이 가만 있갔습네까? 그런데 남조선에서는 버젓히 맥아더 동상을 세워놓고 기념한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됩네다.”
“그거야 남측이 전쟁에서 위기에 몰리고 있을 때 맥아더 장군이 나타나 도와줬으니까 은인으로 생각하거나 영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동상을 세우고 기념하는 것 아닙니까?”
“학살자들인 미제 놈들과 맥아더 놈만 아니었으며 이런 비극적인 신천학살만행은 일어나자 않았을 것이고 우리 공화국 전체에서 자행된 학살만행도 결코 안 일어났을 겁네다. 인천상륙작전은 미제의 인간살륙작전의 시작이 아닙네까?”
그들은 이미 미국을 향한 적개심이 도를 넘어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화석처럼 온 몸에 굳어 버렸으며 삶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 듯 했다. 서방세계와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자료를 보면 6.25전쟁 중 발생한 전체 학살사건의 가해자들은 미군을 비롯해 국군, 경찰, 그리고 우익반공단체와 비정규무장대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오히려 인민군, 빨치산,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적은 것으로 통계가 나왔다. 인민군들은 점령지역이라 해도(간혹 예외도 있었지만)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배려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와 그 후견인인 미국은 그들의 적국인 북한지역은 물론 아군 지역인 남한의 민간인들조차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인민군과 좌익분자 소탕이라는 미명하에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하거나 묵인했다는 증거가 지금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아군지역의 민간인들에게도 이렇게 대했는데 적군지역의 민간인들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 질의응답과 토론을 마치고 조국통일연구원 림용철 부원장과 함께. [사진제공-최재영]
▲ 질의응답 토론을 마치고 김철주사범대학 정기풍 교수와 함께. [사진제공-최재영]
이북지역은 민간인들만 123만명이 살해당하다
나는 6.25전쟁 중에 피해를 입은 북한지역의 정확한 통계가 알고 싶어 평양으로 올라온 후에도 평양호텔 회의실과 커피숍 라운지 등에서 김철주 사범대학의 정기풍 교수와 조국통일연구원 림용철 부원장 등과 각각 만남을 갖는 자리에서 미군에 의해 발생한 북한의 공식적인 피해 상황을 집중적으로 질문하며 그 문제를 다루었다. 그들은 뛰어난 대남 전문가들로서 남북문제는 물론 국제정세에 대해서 매우 해박한 지식을 소유했고 예리한 분석과 논평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한 학자들이었다. 비록 북한의 시각에서 증명된 역사인식이었지만 그들의 시사 분석력은 매우 실력이 있었다.
“전쟁 중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숫자의 북조선 민간인들이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피해를 입었는지 거기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있습니까? 한국과 서방세계의 통계들은 저마다 다르고 연구하는 기관이나 언론들마다 입장에 따라 차이들이 많아서...”
“아. 물론입니다. 저희 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중에 미제에 의해 피해를 입은 민간인 통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인민군들이 입은 피해는 제외하고 순수하게 주민들이 입은 피해상황을 저희가 작년(2013년)에 전승절 60주년을 맞아 유엔대표부에 있는 우리 공화국 대사관 성원들을 통해 유엔과 미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제기하였으니 참조해보십시오. 전쟁 시기에 미군에 의해 직접 피해를 입은 지역들이 공화국 내에서만도 전국적으로 100여 곳이 훨씬 넘습니다.”
전쟁 중 미군에 의해 피살된 민간인들과 피해상황을 기록한 북한정부의 공식문서는 3페이지 분량의 영문으로 작성되었다. ‘2013년 7월 15일’자로 발표되었으며 ‘DPRK Permanent Mission to the United Nations(주 UN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 명의로 작성되어 ‘US Crimes in Korean War(조국해방전쟁에서의 미국의 만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press release(보도자료)’라고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미 미국과 유엔 외교가에 배포가 된 듯했다. 첫 페이지 문장은 “The US imperialists committed thrice-cursed genocide, destruction and pillage during the Korean war”으로 시작되었으며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은 “The US can by no means evade its responsibility for its criminal atrocities it perpetrated during the Korean war and should clearly bear in mind that it should be surely brought under the international laws and reprehension”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이 문건은 그 동안 서방세계가 구구각색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추측성 통계에 쐐기를 박는 것으로서 북측이 대외적으로 공식 작성하여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북측 용어 위주로 번역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중략) ... 미제가 조선의 인민들에게 저지른 만행들은 세계 전쟁 역사상 전례가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비인륜적인 A-급 전쟁 범죄행위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미제는 전쟁기간에 민간인 보호에 관한 국제법을 무시하거나 위반하며 잔혹한 방법으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3년의 기나긴 전쟁기간 중에 1,231,540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미제 침략자들은 황해도 신천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동안에는 전체 군민의 4분의 1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에서 401,940명 이상, 함경북도에서 82,020명 이상, 함경남도에 115,300명 이상, 평안북도에서 116,220명 이상, 평안남도에 162,180명 이상, 강원도에서 129,390명 이상, 그리고 자강도에서 64,240명 이상, 그리고 평양지역에서 157,840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북의 각 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다.
미제가 저지른 또 다른 흉악범죄 중에 하나는 국제법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 대량살상무기인 화학무기를 다량으로 사용해 대규모 세균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교활하게도 전염성 병균을 자신들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이북의 절반이 넘는 곳을 대상으로 확산시켰다. 1952년 1월말에서 3월말까지 이북지역 400여 군데에 무려 700회 이상의 세균탄을 투척해 장티푸스, 페스트, 콜레라 등 각종 무서운 악성 급성 전염병 바이러스를 퍼Em렸다. 1951년 2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그들은 강원도,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방을 포함한 24개 시군과 접전지역에서 대량의 화학 무기를 사용했다
.... (중략) ... 이북에서 미제가 저지른 파괴와 약탈은 세계 전쟁사에서 그 전례가 없는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재난을 불러일으켰으며 ... (중략) ... 평화로운 도시, 마을, 주거 주택 및 건물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포격을 감행하여 그 도시와 마을들을 폐허로 만들었다. 미제는 564,436톤의 폭탄, 32,356톤의 네이팜탄, 587,189개의 로켓탄, 55,797개의 발연탄들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다.
또한, 50,941개의 산업시설과 28,632개의 각급 학교, 병원과 진료소를 포함한 4,534곳의 공중보건 건물과 의료시설들, 579곳의 과학 연구기관, 8,163곳의 출판 인쇄시설과 문화기관을 비롯해 2,077,226호의 주거주택들이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전국의 7,491개소의 예배와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종교시설물들이 파괴되어 사라져버렸다. 4,879km로 건설된 철도, 4,009km의 도로, 1,109km의 총 교량과 1,489량의 기관차와 4,803대의 트럭과 6,281척의 고깃배와 선박이 파괴되었으며 1,715개의 저수지와 관련 수리시설이 파괴 혹은 폭파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인적, 물적, 환경이 피해를 입었다.
563,755헥타르 규모의 경작지는 폐허가 되었고 155,500헥타르의 논과 비경작지들이 유실되는 손실을 입었고 농가의 소 369,101 마리와 돼지 764,604 마리와 수백만 마리의 가축들이 몰살당하거나 약탈당하였다. 그뿐 아니라 국가의 중요한 문화재 유산들이 무자비하게 파괴 또는 약탈되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고문서와 자료들, 전시되어 있던 각종 보물과 국보급 문서들을 포함한 수많은 고대문헌 자료들이 모두 40,755,640 개가 소실되거나 약탈을 당하였다... (끝) ...”
위의 문건을 입증하는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해 발생한 북한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은 아래와 같이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어 발생했다. 1차 시기는 1950년 10월 1일부터 12월 중순까지 미군이 40-50일 정도 3.8선 이북을 점령한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또한 그 후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51년 6월부터 53년 7월 27일(정전협정을 체결하는 날)까지 약 2년 동안 발생한 학살사건을 2차 시기로 규정했다.
▲ 북한이 정전협정 60주년을 기해 미국과 유엔에 제기한‘조선전쟁에서의 미군
의 만행(US Crimes in Korean War)’에 대한 영문문건. [사진제공-최재영]
▲ 미군 강점기(1차 시기)에 북한전역에서 피살당한 민간인 통계. [사진제공-최재영]
1차 시기에 피살된 이북지역 민간인 통계
우선 1차 시기에 피살된 민간인 통계를 보면 황해도가 127,367명, 강원도 30,790명, 함경도 4,430명, 자강도 1,750명, 평안도 26,011명, 평양시 16,400명이 학살되어 모두 20만명(206,748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들이 두달이 안된 기간에 살해를 당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지역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황북(7곳): 송림 1,000 사리원 950, 봉산 1293, 평산 5,290 토산 1,385(합계 9,918명)
2. 황남(12곳): 은천 5,131 은률 13,000 안악 19,072 송화 5,545 장련 1,199 신천 35,383
락연 802 재령 1,400 대탄 3,429 벽성 5,998 해주 6,000 옹진 15,000
봉천 3,040 연안 2,450(합계 117,449명)
3. 강원도(5곳): 문천 800, 원산 630, 안변 1,500, 철원 1,560 평강 1,000(합계 5,490)
4. 강원남도(1곳): 양양 25,300(합계 30,790명)
5. 함북(2곳): 길주 400 학성(김책) 350(합계 750명)
6. 함남(7곳): 단천 532, 리원 450, 북청 500, 장진 250, 함주 648, 영흥 500, 고원 800
(합계 3,680)
7. 자강도(2곳): 초산 900, 희천 850(합계 1,750명)
8. 평북(6곳): 선천 1,400 용천 800, 정주 3,000 구성 1,000 벽천 1,400 영변 900
(합계 8,500명)
9. 평남(8곳): 개천 1,800 순천 1,200 안주 5,000 숙천 2,000 평원 1,800 용강 1,200
남포 1,511 강서 3,000(합계 17,511명)
10. 평양시 지역(2곳): 평양 15,000 중화 1,400(합계 16,400명)
총 합계 206,748명
이와 같이 미군사령부의 지휘 감독하에 40-50여일 간 미군이 이북전역을 강점하는 동안 무려 20만명(206,748)이 넘는 민간인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다. 이 숫자는 미군의 노골적인 전시 전투행위나 1.4후퇴 이후의 전시 폭격으로 피살된 민간인들은 포함하지 않았으며 미군 강점 한 달 반 동안 저지른 보복적인 학살 피해자들만 다룬 것이다.
1차 시기에 미군이 저지른 학살방법은 믿기지 않을 만큼 인간 이하의 잔인성과 포악성을 보여주었다. 집단 생매장은 물론 밀폐된 건물 안에 감금시켜 질식사나 굶겨 죽이는 일도 많았으며 휘발유와 장작불로 태워 죽이거나 눈알을 빼내거나 귀와 코를 도려내기도 했고 톱이나 칼로 사지를 자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수백 명을 방공호에 몰아넣고 기름불로 태워죽이며 동시에 환풍구로 수류탄도 던져 죽이는 만행은 물론 산 사람의 피부를 벗기거나 불에 달군 쇠로 지져 죽이기도 했고 멀쩡한 사람을 탱크에 깔아 죽이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와 함께 죽이는 범죄도 감행했다.
이 당시 가장 큰 학살 규모는 황해도 신천과 안악, 그리고 강원도 양양에서 발생했다. 전쟁 중에 미군의 범죄행위가 세계의 여론을 악화시키자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다. 이 조사단이 황해도에서 가장 처음 확인한 곳은 19,000명이 살해된 안악이었으며 신천과 양양을 연이어 방문해 조사를 벌였다. 안악에 도착즉시 통풍할 창문도 없는 밀폐된 농가 창고에서 수백 명이 갇혀 떼죽음을 당한 곳을 목격한 조사단원들은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신천군 초리면 월산리에서는 미군 점령 첫날 우말재 씨의 가족을 대상으로 끔직한 학살을 저질렀는데 미군은 우 씨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으며 방에 있던 표창장을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죽을 때까지 고문했으며 5살부터 25살 이르는 11명의 자녀들을 모두 즉석에서 총살했다. 이를 목격한 우 씨의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말리려 하자 머리채를 잡아 나무에 매단 후 가슴을 베어냈고 심지어 국부에 막대기를 박고 기름을 부어 화형식을 하듯 살해했다.
50년 10월 25일, 사리원시에서는 MP완장을 찬 미군들이 칼을 들고 김창두 씨를 붙잡아서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산채로 피부를 벗기다가 뜻대로 잘 안되니까 돌로 때려 죽였으며 11월 11일에는 3명의 미군들이 처녀를 윤간했는데 강간 후에는 심한 구타와 함께 목구멍으로 물을 부어 고문하듯 죽였다고 한다. 또한 미군은 당시로서는 노인 연령에 해당하는 56세 된 여인을 강간 후 살해했으며 해주시에서는 여맹위원장으로 일하던 조옥희 씨를 장시간에 걸쳐 고문하다가 갑자기 두 눈을 뽑고 얼마 뒤에는 코를 베고 마지막에는 그의 가슴을 베어 처참히 살해했다.
또한 신천에서 100여리 정도 떨어진 김지리에 살던 변난동이라는 아이 엄마는 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했다는 죄목으로 미군이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그의 친정어머니가 면회를 다녀온 며칠 후에 딸의 살해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미군장교의 명령에 따라 변 씨는 우익 무장군의 총검에 의해 업고 있던 아기와 함께 꼬치에 끼워지듯 살해됐는데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당사자는 오히려 단 한번의 칼로 두 명을 동시에 찔렀다며 자랑까지 늘어놨다고 했다. 1차 시기에는 대부분의 북한 민간인들이 모두 이런 류의 죽음을 당했다.
▲ 유해와 함께 나온 피해자들의 각종 신발 유품들. [사진제공-최재영]
▲ 유해와 함께 나온 피해여성들의 갈래머리태와 머리카락들. [사진제공-최재영]
2차 시기에 피살된 이북지역 민간인 통계
또한 2차 시기는 2년 동안에 걸쳐 발생했는데 이때 피살된 이북지역 민간인 통계를 보면 1차 시기보다 죽음의 방법이 더욱 끔찍하며 피살자 숫자도 백만 명이 훨씬 넘는다. 황해도에서 274,573명, 함경북도에서 81,270명, 함경남도에서 111,620명, 평안북도에서 107,720명, 평안남도에서 144,669명, 강원도에서 98,600명, 자강도에서 62,490명, 평양지역에서 141,440명이 피살되어 모두 백만명(1,022,382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희생자들은 이북지역에 대한 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참혹하게 피살되었다. 이로서 1, 2차 시기에 학살당한 이북지역 민간인 희생자들의 숫자는 120만명(1,231,540명)이 넘는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2차 시기 피해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치열했던 전쟁은 어느덧 1951년 초여름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전 전투의 소강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공중전과 해상전에서는 여전히 미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공습이나 해군의 해상함포사격 등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군은 전선이 아닌 후방지역에서 민간인들의 생업 현장을 대상으로 일방적인 해상공격과 공중포격을 감행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되고, 주민들의 생존시설들은 모두 파괴됐다. 더구나 미군과 인민군이 서로 정전회담을 진행되는 와중에도 미 공군은 북한지역 민간인과 비군사 민간시설에 대한 폭격과 살상행위를 계속 진행했고 심지어 정전협정이 실효되는 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각의 1분 전인 9시 59분까지도 미공군은 무차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미 해군함정에서는 원산을 향해 무려 41일 동안 밤낮 없이 연속적인 무차별 포격을 했으며, 미국 해군사상 최장기간이라는 기록을 남긴 861일 동안을 포위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미 해군소장 스미스는 “원산에서는 길을 걸어 다닐 수 없고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미공군의 공격은 잔인했는데 미공군 폭격대는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민가에도 야간에 불빛만 비치면 굶주린 개가 고기를 본 듯 공격을 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이 투입되기 이전에 이미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 등 북한의 주요 5개 도시는 쑥대밭이 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죽하면 미 극동군 공군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은 맥아더 청문회에 출석해서 “한반도 지역 전부가 정말로 놀랄 만큼 어지럽다고 말하고 싶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더 이상의 목표물이 없어 중국군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 우리는 무기를 손에서 놓게 되었다”고 증언했겠는가?
특히 평양시에 대한 초창기 기습공격은 서울이 중국군과 인민군에 의해 다시 점령된 1951년 1월 3일에 미공군 폭격부대에 의해 감행됐으며 평양시에 대한 폭격은 1월 3일 밤에 시작되어 그 이튿날 정오까지 매 15분 간격으로 소나기가 퍼붓듯 폭탄을 투하했다. 처음에는 소이탄으로 시작해 네이팜탄, 고성능폭탄, 그 후에는 더 많은 양의 소이탄과 시한폭탄을 연속적으로 투하했으며 이런 체계적인 공습 때문에 그 어떤 인명 구조작업도 불가능했고 수만 명의 주민들이 건물 잔해 속에 깔려 구조 받지 못하고 질식사와 압사를 당해 죽었다. 파괴된 건물 중에는 8,000미터 상공에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적십자 표시를 해놓은 평양시내의 병원들마저도 포함되었으며 이로서 평양시내의 건물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파괴되어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다.
식량이 떨어진 평양시민들은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막집조차 없어 오갈 데가 없게 되자 파괴된 가옥에 들어가 토굴을 파놓고 원시인들처럼 살아갔으며 도시 전체가 빈민소굴과 난민소굴이 되어 생존자들도 대부분 굶주리거나 치료를 받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시내 상황은 살아 움직이는 생존자보다 죽은 시체가 더 많았으며 공포에 휩쓸린 시민들은 대부분 도시를 떠났고 급기야 평양의 인구가 50만 명에서 약 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농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미공군이 투하하는 석유덩어리로 만든 신형무기인 네이팜탄의 가공스런 살상력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동굴이나 지하 방공호에 은신하며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서 폭발한 네이팜은 다시 산탄으로 사방에 흩어져 지상에 있는 모든 물체들을 불 태워버리고 거머리처럼 사람의 살갗에 달라붙어 온몸을 불태워버렸다. 이 같은 공습에 의해 피살되거나 부상당한 이웃들과 가족들을 구조하는 동안 인마살상용 시한폭탄을 투하해 이 구조하는 인원들마저 살상하고 건물을 파괴시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공군의 공습은 장마철 우기에 접어든 평양근처의 저수지와 댐을 폭파시켜 농토와 관개시설물을 모두 파괴했다. 북한지역 전체 미곡의 3/4을 생산하는 평야에 물을 공급하는 평양근교의 5개 댐에 대한 폭격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 모내기가 끝난 장마철에 댐을 폭파시킨 결과로 생긴 인위적인 대홍수로 말미암아 물살은 27마일의 계곡과 평야를 휩쓸어버렸고 대동강 물은 넘쳐서 평양시와 인근 주거지역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혔으며 생존의 기본양식인 쌀 생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혀 1953년의 쌀 생산량은 1949년에 비해 88%로 감소되었다.
미공군은 화학전과 세균전을 감행하는 동시에 대규모 폭격작전인 ‘교살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500대 이상의 전투기를 동원해 북한전력의 90%를 공급했던 수풍댐과 발전소를 파괴하는 등 미공군의 야수 같은 전쟁범죄로 북한의 중부지역을 비롯하여 전 지역이 완전 초토화되었다. 이로 인해 8천 7백동의 공장과 생산설비 등이 파괴되어 1949년에 비해 1953년은 전력공업은 26%로, 연료공업은 11%, 야금공업은 10%로, 화학공업은 23%로 감소되었으며, 철광석, 선철, 강철, 조동, 조연, 전동기, 변압기, 유산, 화학비료, 카바이드, 가성소다, 시멘트 생산시설들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미군사령부는 공군의 공습과 폭격에 의해 부상당한 민간인들을 구조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야비하고 파렴치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이상과 같은 미군의 전쟁 범죄 행위들은 결코 장병들 개인 차원에서 저지른 작전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미국정부와 지도부의 계획 하에 미군사령부의 승인과 지시에 의해 감행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 맺힌 원혼들, 동굴과 터널을 빠져 나오다
앞서 다뤘듯이 6.25전쟁 중에 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곳은 북한지역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노력으로 그나마 50년 동안 철저하게 베일 속에 갇혀 있던 6.25전쟁시 미군이 저지른 범죄와 학살적 만행들이 하나 둘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기득권을 차지한 친일 반공보수 세력들은 6.25전쟁 전부터 전쟁이 시작된 직후에 남쪽의 무고한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서도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좌익’과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여 피해자들을 방치하여 왔는데 이는 망자들을 다시 한번 학살하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충북 단양의 곡계동굴에서 생지옥의 떼죽음을 당한 수백 명의 한 맺힌 원혼들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쌍굴다리에서 학살당한 수백 명의 원혼들이 반세기만에 서서히 동굴과 터널을 빠져 나와 밝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좌우 이념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철저하게 은폐되어 왔던 반인륜적 범죄의 실체들이 그후 하나 둘씩 밝혀질 때마다 당시 온 나라는 경악했다. 헤아릴 수 없이 드러나고 있는 미군들에 의한 피해사례들은 2015년 현재도 진행 중이다.
1999년 9월 29일 미국의 ‘AP통신’을 통해 노근리 학살만행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면서 지난 50여년 동안 전국적으로 숨죽여왔던 전쟁시 미군에 의한 피해자와 유족들 그리고 당시 목격자들로부터 한 맺힌 절규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2000년 6월 13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전쟁 당시 남북의 500만명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남한지역은 피해지역이 전국 각 시도에 골고루 퍼져있는데 영동과 단양을 포함한 충청북도가 많았으며 서울, 부산, 제주, 경기, 강원,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등 80여 곳이 넘으며 북한 지역에는 100여곳이 훨씬 넘는다. 이것은 미군이 자행한 범죄가 몇몇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북을 아우르며 한반도 전역에 걸쳐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며 우리민족 전체를 상대로 저지른 전쟁범죄 행위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신천을 찾은 한국과 해외동포들의 모습을 담은 전시물. [사진제공-최재영]
▲ 전쟁 중에도 신천을 찾은 국제조사단들의 활동 모습을 담은 전시물. [사진제공-최재영]
구순 노모 가슴에 박혀 있는 미군의 포탄 파편들
미군의 만행은 나의 가정에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우리 마을에서 실제 발생한 미군기 폭격사건은 아직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우리 동네의 사례에서 보듯이 아직도 전국적으로 6.25전쟁 중 미군의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은 무수히 많다고 본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와 모친과의 관계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지금도 나는 구순이 넘은 노모를 뵐 때마다 인사를 마치고 나면 모친의 가슴을 애틋한 심정으로 어루만지는 버릇이 있는데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모친의 젖을 먹고 자라는 과정에서 형성된 나만의 특이한 멘탈리티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양평의 ‘석장리’는 예로부터 조상대대로 평화로이 살아오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으나 6.25 전쟁사에서도 매우 유명한 ‘지평리전투’와 ‘용문산전투’ 때문에 우리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양평의 지평리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발생했고 용문산전투는 그로부터 석달이 지난 51년 5월 17일부터 시작됐는데 특히 우리 마을에 피해를 많이 준 지평리전투가 발생한 원인을 보면 열세에 몰리고 있던 유엔군이 반격하면서 위협적이던 중국군의 공세가 저지되고 마침내 미군과 유엔군이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면서 당황한 중국군이 횡성과 홍천군 접경에 있는 ‘삼마치고개’와 양평의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면서 양측의 혈전이 시작됐다.
중국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유엔군을 몰아내고 남한강을 도하해 서울의 남쪽을 뚫고 들어가 수도 서울을 함락하는 전략을 세웠는데 이런 과정에서 당시 서울 근교인 양평읍에서 10리 거리에 떨어져있던 우리 마을은 지형적으로 용문산과 지평리의 중간 지점에 있어 미군이 중국군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애꿎은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강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2월 보름, 황혼 무렵이 되자 어머니는 우리 집 뒷곁 장독대와 부엌을 오가며 저녁식사를 장만하고 있었다. 이때 미군 지휘부에서는 도주하는 중국군들이 우리 마을에 숨어 있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착각을 했는지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미공군 폭격기 편대가 굉음을 내며 동네 상공으로 출격을 한 것이다. 미군 폭격기들은 우리 마을을 서너 바퀴 선회한 후에 우박이 떨어지듯 동네 여기저기에 폭탄을 쏟아 붓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폭탄 투하 중에 하나는 우리 집 장독대 부근에 떨어져 마침 이웃에 살던 주민들과 길을 가던 행인 등이 몰사하고 옆집 아주머니(쌍둥이 엄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오른쪽 팔목이 잘려 나갔다(그후 그녀는 평생을 팔목이 없는 장애로 살아왔다). 천만 다행으로 나의 어머니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가슴에는 무수한 폭탄 파편들이 박히는 큰 부상을 입어 유혈이 낭자한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수술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읍내 병원에서 응급 지혈치료를 받았으나 퇴원을 하여 민간요법을 통해 상처들을 치료했으나 당시 상황에서 파편들은 제거하지 못해 결국 몸속에 지니며 한 평생을 살아오게 되었다.
쇳물이 들어 간 젖을 먹고 자라나다
어머니가 폭탄 파편 세례를 받은 지 10년이 지나 태어난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폭탄 파편들이 박힌 가슴에서 나온 시금털털한 젖을 빨면서 무럭무럭 잘 자라났다.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여느 아이들처럼 어머니 품에 안겨 무심코 가슴을 더듬다가 무언가 이상하고 딱딱한 물체가 손에 잡히면 의아스런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의 턱밑에서 질문을 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아련하다.
내가 군대를 갓 제대한 어느 날,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데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막내야, 나중에 돈 생기면 엄마 가슴을 수술해 줘야 한다. 사람은 원래 죽을 때는 몸에 쇠붙이를 지니고 죽는 게 아니란다”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 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약속대로 파편들을 꺼내기 위해 종합병원에 모시고 갔으나 의사로부터 “오히려 수술을 시도하면 이전보다 더 위험할 수 있으니 원래대로 조심하며 그냥 살아가라”는 통보만 받았다. “너무 오래된 부상이라서 파편들은 저마다 땅콩껍질이 땅콩을 감싸듯 파편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에는 지장이 없다”고도 했다.
진액을 쥐어짜듯 모유를 흡입하며 성장한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우리 동네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왜 미군이 우리 마을에 폭격을 가했는가에 대해 질문공세를 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당시는 이승복 군의 ‘반공전설’ 때문에 내 주장은 힘을 잃었고 당시 미국이나 미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철저히 금기시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문제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답변해주려고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냥 전쟁 중에 당한 일이니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몰래 가슴 아파하며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나는 마땅히 품어야 할 냉혹한 의문들을 품으며 자랐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내 의식의 저변에는 어느덧 내 어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미군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막연한 적개심이 싹트는 동시에 도대체 미군들은 무엇 때문에 그 같이 무모하고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가에 대한 의문점을 안고 지내왔다.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시골마을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던 흰옷 입은 아낙네들의 무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감행한 미군들의 무모한 어리석음과 교만을 청년기에 접어들며 단죄하고 싶었다. 이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반미를 부르짖는 진보적 유형의 애국심이 아니라 그저 소박한 나의 어머니를 향한 평범하고 작은 효심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구순 노모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평안을 확인하는 나의 행위는 내 존재의 확인일 뿐이며 모자간에만 공유하고 있는 치유의 몸부림이다. 어머니는 가슴에 미군 폭탄 파편을 맞고 그것들마저 품은 채 90년을 모질게 살아왔기에 나는 김치 냄새 풍기던 어머니의 품속과 치맛폭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겨왔고 삶의 또 다른 평화지역으로 간주하며 안식처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나는 틈나는 대로 6.25 전쟁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범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눈을 뜨게 된 것이며 지금도 나는 이런 문제를 객관적으로 풀어야만 남북 분단문제와 통일문제의 매듭이 풀릴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 아들의 서재를 찾아 당시 상황을 틈틈이 증언해주는 필자의 모친 강봉단 여
사. [사진제공-최재영]
▲ 지평리전투시 미군의 폭격으로 아직도 가슴에 폭탄파편들을 지니고 있는 필
자의 모친이 여가를 보내는 모습. [사진제공-최재영]
노근리에서 베트남전까지
6.25전쟁시 벌어진 미군학살의 진상들은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전국에서 봇물처럼 터졌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간간히 드러나고 있다. 노근리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과정에서 보듯 미국은 끝까지 책임회피와 외면 그리고 궤변으로 일관해왔다. 사실 노근리사건에 대한 피해자의 문제 제기는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1960년 10월에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 의해 시작됐다. 피해자들은 미국방부가 설치한 소청심사위에 진상 규명과 배상을 요구했으나 심사위원회의 대위출신 법무장교는 회신문서를 통해 증거와 시효문제를 들어 요청을 거절했고 같은 해 12월에도 다시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그 후 1994년 7월과 10월에도 미국 정부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으나 회신을 받지 못했으며 미국을 상대하다 지친 유가족들은 97년 8월에 청주지검을 통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법무부에 낸 신청도 역시 증거와 시효를 이유로 기각됐다. 계속해서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미 국방부에 요청했으나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신만 보내왔다. 그러다가 미국의 AP통신사가 노근리사건 관련자들의 증언과 공식기록을 확인하여 보도하여 국제적 쟁점이 되고 사회문제화 되자 미국의 대응과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이처럼 피해자나 유가족의 힘만으로 미국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각종 시민단체의 주도하에 전 국민적인 관심과 참여 속에 범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남한은 물론 북한에서도 저지른 미군의 학살적 범죄행위들에 대해 통일지향적 차원에서 남과 북이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서 남한 내부에서 6.25전쟁시 자행된 국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진상규명을 매듭져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고 민족화합과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미국의 꼭두각시처럼 미군과 함께 베트남전에 덩달아 참전했던 한국군은 그곳에 민망하게도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던 과오를 범했다. 미군의 전쟁범죄에 한국군이 가담하여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진상규명도 매듭을 지어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의 씨앗이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하며 그 어떤 나라에서도 다시는 미군이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놀랍게도 베트남전 당시에는 북한의 공군도 호치민을 돕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을 했으며 한국군이 월남군과의 전투중에 포로로 잡히면 심문과 취조를 담당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북한 인민군이었다는 사실들은 지금도 역사의 베일 속에 가려져 왔다. 남의 나라 전쟁에 남한과 북한의 군인들이 참전해 싸우는 일은 전쟁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다.
미군의 폭탄 파편을 맞은 나의 어머니로 인해 6.25전쟁에서의 미군의 역할과 범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눈을 뜨게 된 나는 보다 객관적이고 폭넓은 시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만 남북 분단과 통일문제의 매듭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작은 용기와 행동들이 모아지면 60년이 넘도록 짓밟혀왔던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되찾는 일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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