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전시관 기독교관련 전시물들의 허(虛)와 실(實)
<연재> 최재영 목사의 방북기(11)-신천박물관 참관기⑤

기자명 최재영
입력 2015.01.26 02:59
수정 2015.01.26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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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평양을 방문하기 위해 북경에서 합류했던 미 법무장관 출신의 진보인사 램지 클락(Ramsey Clark)은 “미군에 의한 학살범죄는 6.25전쟁에서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남북간의 긴장을 심화시켜 분단을 지속시키고 같은 민족끼리 서로 악마화하여 적으로 간주하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최첨단무기를 보유한 주한미군은 전쟁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남한 국민들의 기본권을 위반하고 정신까지 점령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그것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같은 미국의 전략은 인류평화에 위반되는 범죄행위다”라고 나와 일행에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남한과 북한을 오가며 6.25전쟁 중에 미군에게 직접 피해를 당한 유족과 생존자들을 만나 구체적인 사실들을 들어왔으며 특히 이번 신천박물관 방문을 통해서는 온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양시민뿐 아니라 각 지방에 거주하는 인민들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골고루 나누는 과정에서 북의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정신과 가치관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오늘로서 신천박물관 내부 전시실을 관람한 방문기는 마무리 하고 외부에 있는 학살현장 참관기는 다음 기회에 연재하도록 할 것이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전시실을 돌아보며 느낀 전체적인 평가와 더불어 각종 전시물에 대한 허(虛)와 실(實)을 다룰 것이며 박물관의 운영방향에 대한 발전적인 제안을 하려고 한다. 또한 그동안 신천박물관 참관기를 통해 다룬 6.25전쟁 기간과 전쟁이후 지금까지 발생한 미군의 만행과 범죄를 다루었는데 오늘 서두에는 그것에 이어 6.25전쟁 직전에 발생했던 또 다른 형태의 남북간의 전쟁(전쟁직전의 전쟁)에 대해 잠시 살펴보며 미군관련 범죄 여부를 다루고자 한다.


▲ 평양을 방문하기 위해 북경에서 만난 미국 법무장관을 지낸 램지 클락과 함께. [사진제공-최재영]



순수한 인민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은 놀랍게도 1989년까지는 식량과 곡물을 해외에 수출한 국가였다. 그 당시 북의 인민들은 직업적으로는 완전 고용의 혜택, 의료분야는 무상의료 혜택을 받아왔으며 주거지는 실질적인 무상주택, 학교는 평생 무상교육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왔으나 1991년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의 붕괴와 더불어 이에 따른 무역상대국의 몰락으로 북한의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계속되는 가뭄과 대홍수, 냉해를 겪어야 했으며 이런 악조건을 지닌 북한을 상대로 냉혹한 미국은 국제적으로 대북 구제정책을 펴기보다는 강력한 대북 경제봉쇄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인민들이 사망(고난의 행군시기)했으며 당시 유아 사망률은 무섭게 치솟았고 평균 수명도 1993년 73.2세에서 1999년에는 66.8세로 추락했고 5세 이하의 어린이 사망률은 1천명당 27명에서 48명으로 상승했다.

이 같은 원인의 배경에는 미국이 취해온 대북 제재조치가 가장 큰 작용을 했다. 미국이 근래까지 이라크와 북한 등에 취해온 경제봉쇄 정책들은 무기에 의한 전쟁보다 실제로 더욱 잔인하고 참혹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무서움을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6.25정전협정이 끝난 직후부터 60년간 북한에 가해진 대북 경제봉쇄는 마치 대량학살무기와 동일한 파괴력을 지니며 아직도 북한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 내가 3년 전에 평양시에 있는 대동강 타일공장을 방문해 공장내부를 세밀하게 돌아본 후 부소장의 브리핑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 공장은 대리석보다 더 단단하고 성능이 뛰어난 30여 가지 종류의 타일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이 국제사회의 무역 시스템을 총 가동해 북한에 대한 수입, 수출, 통관, 은행 거래 등을 철저히 막아버려 수출할 길이 없어졌다며 부소장은 울상을 지어 보였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인권에 해당하는 식량과 의약품 문제를 볼모로 자행된 미국의 압박정책은 경제봉쇄로 확대되어 인간의 의식주와 삶 자체를 파괴하는 심각한 인류 범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학살만행은 아직도 한반도에서 현재 진행형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 북한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두 몰락한데다가 미국의 경제봉쇄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도 김일성 주석 사후 지금까지 자체의 힘으로 단합하며 잘 견뎌왔다. 물론 일부 탈북자들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국가 정체성과 체제의 본질이 훼손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방북기간 내내 북에서 본 인민들의 모습은 매우 놀랄 정도로 차분하고 의연했다.

유사한 경제봉쇄가 가해진 이라크와 비교할 때 북한이 지금까지 갖추어 놓은 업적들과 현재의 발전적 상황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라크에서 입증됐듯 혹자는 미국이 북한을 제재하듯 프랑스와 영국의 목을 조여 왔다면 아마 영국과 프랑스조차도 힘든 상황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경제봉쇄 정책속의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북의 인민들은 매우 긍지가 높았으며 민족 정체성과 자주에 대한 정신이 살아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북한의 모든 제도와 시설들은 인민들을 위해 계획되고 유지되어 있었다.

6.25전쟁 직전의 또 다른 남북 전쟁

우리 민족은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주둔한 이후 지금까지 70년 동안 미 점령군에 의한 만행과 범죄로 고통을 받아왔다. 한반도에서 자행된 미군 범죄를 분류할 때 첫 시기는 1945년 9월 8일 해방직후 미군의 남한의 진주 시점부터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직전까지 구분된다. 두 번째는 3년간의 6.25전쟁 기간인 1950년부터 1953년 사이, 그리고 세 번째가 정전협정 이후 60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이다.

미국은 해방직후 일본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남한에 진주하여 결국 군대를 양성하고 미군을 주둔시키는 등 남한 내에서 치밀한 전쟁준비를 시작했고 궁극적으로 남한에 친미 군사정권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 기간 미군 지배하에 있던 남한의 국군과 경찰 등에 의해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으며 그들은 민족적인 양심을 지켰다는 이유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몰리는 등 정치적 견해 차이로 투옥되거나 무참히 처형되었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제주 4·3 사건과 1948년 10월 19일의 여수순천 사건, 1949년 12월 24일의 문경 양민학살 사건 등이 미국정부와 미군의 지도와 간섭 아래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국 내에서 자행된 끔찍한 사건들이다. 따라서 당시 남한에서 자행된 각종 대규모 처형사건들도 미군에 의한 전쟁범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6.25전쟁 직전에 발생한 또 다른 남북 대결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우리나라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수백차례 이상의 갖가지 전투를 벌여왔다.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그 한 예로 1949년 3월에 발생한 무력충돌은 개성 서북쪽의 송악산에서 벌어졌는데 이때의 혈전은 거의 전쟁 수준에 해당할 만큼 남북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1949년 6월 7일에는 남한군이 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 북쪽으로 부터 2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지를 점령했고, 같은 해 6월 17일에는 38선 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황해도 태탄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어서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했는데, 이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포까지 동원되었다.

이러한 전투는 모두 미군의 작전계획에 의해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해서 발생한 전투였으며 북한 측은 이런 남측의 공격에 의해 커다란 경각심을 갖게 되어 추후 남한보다 더 적극적으로 군사적 공격 태세로 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북측의 주장에 따르면, 남한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되었고 쌍방의 충돌지역은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의 양양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로써 남북간에는 6.25전쟁 직전에도 단순한 국지전이나 소규모 충돌이 아니라 실제로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 가운데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으며 그런 연유로 해서 이 지역들은 6.25전쟁 중에 북한 인민군이 주공격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1년 5개월간 벌어진 전투가 874회라는 것이며 경미한 충돌 사건과 월경사건들까지 포함하면 2,000여회 이상을 남북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렀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전투의 배경에는 이승만 정부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니라 미국 정부와 미군정 그리고 주한미주둔군과 미방첩대(C.I.C)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각종 문서들과 6.25전쟁 초기 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미군 사무실 등에서 입수한 공문서들에 의하면 1945∼48년 사이에 미군이 남쪽 군대를 어떻게 통제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북한지역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려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이 남긴 가장 큰 상처와 결과물은 바로 남북 분단이며 미국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에 대해 분단 유지를 강요하고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도 마땅히 미국의 범죄로 단정해 책임을 묻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성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분단 70년을 맞는 남과 북과 해외동포들은 국제법상 ‘전쟁범죄’ ‘평화범죄’ ‘인류범죄’에 해당되는 미국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단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학살규명의 본질에서 벗어난 반기독교적 게시물은 철거해야

나는 신천사건의 발생 원인과 신천지역 기독교인들과의 연루 여부를 앞서 다뤘다. 그러나 제 1전시관 초입에 진열된 불필요한 반기독교적인 전시물들을 보면서 이런 것들은 오히려 학살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호도할 수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몹시도 마음이 불편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조선에 기어든 미국 선교사 일당’이라는 설명 문구를 넣은 장면에는 양복을 입은 조선 최초의 선교사들인 언더우드, 아펜젤라 등 4명의 선교사들 사진이 편집되어 있었고 ‘조선옷 차림으로 위장한 미국선교사 언더우드와 그 심복자들’이라는 문구가 쓰인 또 다른 사진 속 장면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교회를 설립한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인 원한경 박사와 함께 삿갓과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장면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시실 유리관 안에는 각종 성경책과 찬송가, 소책자, 십자가 목걸이와 천주교 묵주 등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우리 인민들 속에 숭미, 공미사상을 퍼뜨리기 위하여 미국 선교사놈들이 리용하던 성경책, 찬송가, 십자가’라는 설명문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1 전시관안의 이러한 기독교 관련 진열품과 게시물들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사용했다는 법적 증거물이 될 만한 물건들은 전혀 아니었다. 특히 유리관속의 성경책들과 십자가 장식물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선교사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반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진열품들이었다.

지금 내가 당장 시급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종교적인 자료이든 아니든 간에 학살사건과 직접 연관됐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들과 납득할 만한 증거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관 벽면이나 진열장에는 학살 사건과는 무관한 반기독교적인 전시물들이 연달아 보였기에 결국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이다. 그 동안 간혹 이곳을 방문했던 해외동포나 남측 인사들 중에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이곳에 전시된 반기독교적인 전시물들을 보며 거부감과 오해를 품고 돌아가기도 했다.


▲ 제1전시관 벽면에 게시된 조선 최초의 선교사들(우측 상)과 서경조 형제들의 사진(우측 하). [사진제공-최재영]




▲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조선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사진. [사진제공-최재영]




▲ 조선 최초의 자생적 교회를 설립한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인 원한경 박사 등과 함께 찍은 장면. [사진제공-최재영]




▲ 어린이를 대상으로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는 흉칙한 모습으로 묘사된 신천주둔 미군 군목 그림. [사진제공-최재영]



전시물들은 철저한 고증과 검증을 통과한 것으로

한국에서 활발하게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을 하던 서경석 목사는 신천박물관을 방문하고 나서 반감을 품은 채 귀국해서 오히려 철저한 반북 활동가가 된 케이스에 해당된다. 서 목사는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왜 극우보수로 돌아서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며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신천박물관 측의 잘못된 전시물들을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적 개신교 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松川理)’에 세워진 ‘소래교회’였는데 이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83년 5월 16일에 서경석 목사의 증조부가 되는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거주하던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시작되었다. 소래교회는 외부세력의 도움 없이 순수한 우리 선조들의 자력에 의해 세워진 조선교회의 뿌리가 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런 증조부를 두고 있던 서 목사가 신천박물관 제1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자신의 증조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사진 속에는 삿갓을 쓴 서 목사의 증조부 형제와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의 아들이 함께 찍은 장면이 있었는데 이 사진이 전시실 벽에 걸린 이유는 신천 학살사건과 결부 시키려는 북측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해설사는 한 술 더 떠 “미제 양키는 황해도 지역의 주민들을 몰살시킨 우리 인민의 원쑤이고 기독교와 선교사들은 그 놈들의 앞잡이”라며 우렁찬 해설까지 곁들여 주니 서 목사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황당함과 분노를 느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직계 증조부들의 교회사적 업적이 이곳에서는 엉뚱한 용도로 사용되는 실상을 목격하자 충격을 받고 즉각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서 목사가 한국 언론에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박물관 측에서는 해당 사진자료를 떼어 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도 그 사진 게시물을 떼어내지 않고 있다”며 인터뷰 중에 불만을 표출했다. 실제로 서 목사가 지적한 그 게시물은 내가 이번에 방문할 때도 여전히 벽면에 붙어 있었다.

기독교 복음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역사적 사실과 최초의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와서 행했던 역할들은 박물관 측에서 주장하는 내용과는 실제로 많은 차이가 있다. 설령 신천학살 사건에 당시 미군에서 활동한 군종장교들이 직접 연관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120년전 이 땅에 들어 온 서양 선교사들의 역할과는 무관하다. 또한 박물관 측이 학살자로 지목하는 미군 군목(채플린) 연루설은 그에 따른 논리적 증거물들과 과학적인 설명을 박물관 측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자료적으로 뒷받침해 줘야한다.

그럼에도 아직도 제1 전시실 초입에는 반미를 뒷받침하기 위한 명목으로서 반기독교적인 게시물들을 전시한다면 학살사건의 주체와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 방해가 되거나 장애요인이 된다고 본다. 신천 박물관 측에서는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학살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난 전시물들과 게시물들은 엄격히 선별해서 신속히 철거해야 하며 기존의 전시물들도 하나하나 철저한 검증을 통해 진열해야 하며 전반적으로 전시실의 자료 보완작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박물관 본관 입구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지시찰을 다녀간 것을 기록한 기념동판. [사진제공-최재영]




▲ 김정은 제1위원장이 2014년 11월 25일에 신천박물관을 방문하여 현지 지도하는 모습. 고령의 김기남 비서가 메모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사진제공-최재영]



난징기념관과 유대인기념관처럼 자료수집과 추모사업에 중점을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천박물관을 직접 참관한 인원이 무려 1,600만명, 박물관 강사들로부터 이동식 강의를 들은 인원이 425만명이라고 한다. 연인원이 무려 2천만명이나 되는 각계각층의 엄청난 인민들이 그동안 박물관을 통해 반미, 반기독교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기독교적인 강조가 북의 주민들에게는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해외동포나 남측 동포들에게는 오히려 반감과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통일시대를 앞두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반기독교 정서를 주입하는 교육이 박물관의 존재 이유처럼 느껴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의 난징대학살희생동포기념관(이하 난징기념관)에 가면 입구에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可以寬恕, 但不可以忘却),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자(前事不忘, 后事之師)” 라는 글귀가 있으며 매년 12월 13일이 되면 중국 인민은 학살당한 30만명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특히 지난 12월에는 추모일을 앞두고 미국, 일본, 영국 등 14개 국가의 협조를 받아 일본군이 사용하던 각종 학살관련 군용장비, 보도영상 등 새로운 증거 자료들 7,602점을 수집하여 공개했다. 중국 정부도 국가기록보관소를 통해 17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사이트에 올려서 일제의 학살 만행을 고발하는 영상을 공개했는데 이 영상에는 일본군이 중국인 임산부를 37번이나 난도질한 사실과 휘발유를 이용해 중국인들을 화형에 처한 내용들이 포함됐다.

중국판 홀로코스트라고 할 수 있는 난징기념관처럼 이제 신천박물관도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해 좀 더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자료수집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사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난징기념관 외에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학살기념관인 야드바셈(Yad Vashem, 이름을 기억하라)의 운영방식도 신천박물관측이 적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라는 표어아래 야드바셈의 입구에는 “망각은 포로상태를 이어지게 한다.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기념관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로부터 학살당한 유대인 600만명을 추도하기 위해 1953년에 건립됐고 2005년도에는 무려 5,600만 달러를 다시 투자해 10만평의 부지에 역사관을 세우고 재개관을 했다.

기념관 캠퍼스에는 추모탑과 전시관, 역사관은 물론 어린이 희생자들만을 별도로 추모하는 어린이 추모관등의 시설물이 자리 잡고 있으며 어두운 실내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으며 천정부터 바닥까지 어린이의 희생을 상징하는 숫자의 촛불들을 밝혀주고 있다. 이처럼 신천박물관도 일일이 모든 희생자들에 대한 세밀한 정보와 자료를 입수해 구체적인 추모 사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본다.


▲ 시진핑 주석이 난징학살기념관을 방문하여 전시관을 둘러보는 모습(2014.12.13). [사진제공-최재영]




▲ 목사 출신의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이 유대인 학살기념관을 방문하여 헌화하고 추도하는 모습(2012. 5. 29). [사진제공-최재영]




▲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유대인 학살기념관을 방문하여 전시관을 둘러보는 모습(2013.3.22). [사진제공-최재영]




▲ 아베 일본 수상이 유대인 학살기념관을 방문하여 헌화하고 추도하는 모습(2015.1.19). [사진제공-최재영]



가해자의 공식사죄와 추모방문을 꿈꾸며

독일 국민들은 2차 대전이 끝난 50년 만인 2002년에 사상 최초로 국가원수인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이스라엘 의회 연설을 통해 이스라엘 국민들과 전 세계 유대인 디아스포라 앞에서 진심으로 사죄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이날 독일 대통령은 “나치에 의해 학살당해 용서를 빌 수 있는 무덤조차 없는 고인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합니다. 과거 독일인들이 저지른 행위와 저와 저의 세대의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분명하게 사죄했다.

그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독일간의 수교 20주년을 기념해서 당시 독일의 퀼러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바로 야드바셈 기념관이었다. 그도 역시 기념관에서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감히 기념관 안에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으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다”라고 고백했다. 이듬해인 2006년 1월에는 현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학살기념관을 찾아가서 “과거를 아는 사람만이 미래를 가질 수 있다”는 문구를 방명록에 남기며 깊이 사죄했으며 그 후 2012년 5월에는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을 보내 추모하게 했다. 이처럼 독일은 국가의 역대 지도자들이 의무적으로 방문하도록 하는 관례를 두면서까지 유대인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기리고 있었다.

이처럼 독일은 자신들의 부끄럽고 추악한 과거의 흔적들을 감추기보다는 아직도 사건 당시의 홀로코스트 수용소를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 기념관을 세웠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금전적 배상을 아직까지도 자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중에 있다. 이들 독일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미국과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대통령들을 떠올리며 하루 빨리 미국의 양심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무엇보다 독일이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고 무릎 꿇게 된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국력과 국민적 단합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사진에서 보듯 미국은 유대인학살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자발적으로 기념관을 찾아가 추모와 헌화를 하면서도 아직도 미국에 의한 6.25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과 반응이 없다. 아베 일본 총리 역시 위안부나 징용군에 대한 사과나 난징학살에 대한 언급은 피하면서도 유대인기념관에 자발적으로 추모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해 독일도 구구하게 변명할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2차 대전이라는 전쟁중에 피치 못하게 발생한 사건으로 몰고 간다면 얼마든지 발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이스라엘 국민의 단합된 모습과 국력 앞에서 그리고 역사의 정의와 양심 앞에서 철저히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의 희생자 모두를 위한 기념관으로 확산되기를

앞으로는 신천박물관도 ‘피의 교훈’은 잊지 말되 미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와 적개심보다는 미국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관여했다는 과학적인 자료수집에 몰두해야 하며 동시에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사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학살사건에 미군이 개입한 부분을 ‘반미 구호’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미 국립문서보관소 문서들과 각종 관련 자료들을 입수하는 프로젝트를 세워 철저한 자료 확보와 체계적인 증명 작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미국은 제시된 자료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죄과를 시인하고 사죄와 보상을 논의하는 단계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 학살박물관인 야드바셈에서는 지금부터 10년 전에 무려 2,200만 달러(약 230억원)를 투자하여 피살당한 유대인 320만명의 명단과 신상정보를 구체적으로 입수해 1차적으로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이 신상정보 자료에는 희생자들의 이름, 생일, 주소 사망일과 생전의 사진, 일기, 편지, 가족과 친척, 수용소로 끌려갈 때 탑승했던 열차번호와 수용소에서 받은 수인번호까지 모두 보관되어 있으며 누구나 사이트에 접속하여 사망자의 이름만 검색하면, 고인들의 생전의 자취와 신상명세는 물론 희생자의 평소의 버릇과 연인은 누구이며, 첫 데이트 장소와 마지막 남긴 말까지 모두 담겨 있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자료를 구축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유가족과 친구들과 이웃들은 물론 관계된 인물들을 모두 탐문하여 철저하고 객관적인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수집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천박물관도 희생자와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많은 재정과 시간을 투자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자료 확보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부터 15년 전에 미군이 저지른 신천사건과 6.25전쟁 범죄를 다루기 위해 남과 북, 해외동포가 함께 힘을 합해 ‘전민특위’를 구성하여 2001년 6월 23일이 되어서야 ‘코리아 국제전범재판’을 뉴욕에서 열었다. 비록 이 재판이 국제여론을 크게 이끌지는 못했고 U.N과 I.C.C(국제형사재판소) 등 공신력 있는 국제기구에 의한 법적인 제재와 구속력은 얻지 못했어도 미국 측에 충분한 경종을 울렸다고 본다. 앞으로도 미 법무장관을 지낸 램지 클락을 비롯해 국제행동센터(I.A.C)의 브라이언 베커,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르녹스 하인즈 U.N상임대표, 평화를 위한 미재향군인회장인 브라이언 윌슨, 미국 헌법권리센터(C.C.R)의 대표 마이클 래트너 등 양심 있는 미국의 법조계 인사들과 반전 및 평화단체, 인권단체 등과 연대 협력해야 한다.

미국 내에서 신천학살 문제를 인정하는 지성인들과 시민들이 주축이 돼 신천사건과 6.25전쟁 중에 일으킨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민적 이슈와 열풍이 자국 내에서 거세게 일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미국정부의 사죄와 보상은 물론 책임자 처벌에 대한 길이 열릴 것이며 유대인학살 기념관에 독일 지도자들이 정식으로 사죄하듯 미국 지도자들도 직접 우리나라를 찾아와 사죄와 추도를 하는 날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또한 신천박물관과는 별도로 남북간의 합의하에 6.25전쟁 중에 희생당한 모든 민간인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서울과 평양의 한복판에 각각 설립하여 민족화합과 유대협력의 차원에서 동족의 상처와 아픔을 서로 함께 나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현재 평양에는 ‘전승기념관’이 있고 서울에는 ‘전쟁기념관’이 있으나 통일지향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기념관들은 상대방을 군사적으로 제패했다는 의미의 ‘군사적 전쟁 승리사’의 차원에서 설립한 것이기에 민족화합 차원에는 도움이 안 되는 실정이다.

만일 남북의 모든 민간인 희생자 기념관이 건립된다면 우리민족은 자체적으로 6.25전쟁의 참된 의미를 사로 공유할 수 있을 것이며 짓밟힌 우리 민족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회복하여 평화통일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남북은 더 이상 서로 대적하며 국력을 소진하지 말고 6.25전쟁 기간 중에 남과 북 전체 영토에서 자행된 미군의 만행과 범죄에 대한 공동 규명작업을 마무리하여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남북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 책임자 규명과 사죄문제에 대해 깊이 논의하면서 동시에 남북이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용서와 치유의 한 마음을 품는 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