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31

최재영 목사의 방북기(9)-신천박물관 참관기③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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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책임자 해리슨은 위관급인가? 장성급인가?
<연재> 최재영 목사의 방북기(9)-신천박물관 참관기③

기자명 최재영
입력 2015.01.12 09:45

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부터 10월 6일까지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복수.하.리라’ 어머니의 한 맺힌 증언

신천박물관을 방문한 첫날에 만나고자 했던 ‘복수.하.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삼남매의 어머니는 바로 이옥후(리옥후)라는 이름의 70대 아주머니였다. 신천학살 피해자인 그녀는 사건 당시 7살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70대 중반으로 접어든 할머니가 되었다. 학살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양팔을 잃은 상태로 지금껏 살아왔다는 그녀는 한숨과 함께 떨리는 음성과 증오심에 가득 찬 증언을 내뿜었다. 그의 증언에 대한 진위여부를 떠나 차마 분노의 눈물 없이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군이 우리 마을에 들어왔을 때 우리 식구들은 무서워서 죽은 듯이 숨어 있었어요. 워낙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피바람이 불었기에 숨소리도 못 내고 사흘 동안 꼼짝없이 숨어 지냈습니다. 사흘이 되자 우리 식구들이 배가 고파 너무 허기지니까 어머니가 나더러 ‘어른들은 위험할 수 있으니(애들은 좀 안전할 수 있으니) 네가 몰래 나가서 먹을 양식 좀 구해 오너라’ 하고 말씀하셔서 저는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위험한 상황인데 어떻게 아이를 내 보낼 수 있나요?”

“저는 조심스럽게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간신히 먹을 것을 구해 다시 오두막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눈앞에 미군들이 나타난 겁니다. 저는 미군을 발견하고는 엉겁결에 놀라서 도망을 쳤지 뭡니까. 정신없이 달리는데 벌써 미군들은 등 뒤에 바짝 쫓아왔고 저는 너무 놀라서 계속 도망치려 했습니다. 미군들은 영어로 멈추라고 지껄이는 듯 고함을 쳤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혹시 그 당시에도 헬로우, 스탑처럼 기본적인 영어는 알고 있던 시절이 아니었나요? 혹시 멈췄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너무 당황하고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고 전 그때 영어를 처음 들어봤습니다. 저는 이를 악물고 식구들이 숨어 있던 오두막까지 단숨에 달려와서는 문을 열려고 오른 팔을 올렸지요. 그 순간 미군이 총을 쏴서 내 한쪽 팔을 박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저는 나도 모르게 다시 왼쪽 팔로 문을 움켜잡았는데, 그 미군 놈이 다시 내 왼팔을 쐈습니다.”

“아, 기가 막히군요. 그런데 양팔에 총을 맞았다고 해서 지금처럼 두 팔이 모두 없어지지는 않을 텐데...... 치료를 못해서 이렇게 되셨나요?”
“아닙니다. 살기등등한 미군놈들은 내 양팔을 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놈들은 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엎혀 놓고 군홧발로 짓밟으며 내 두 팔을 몽땅 잘라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잘라진 내 팔을 또 다시 세 동강이씩 절단을 냈습니다.

“도대체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내가 죽어서라도 살인마 미제놈들의 원수를 꼭 갚고야 말 것입니다.”


▲ 읍내는 물론 시골 마을마다 찾아 다니며 좌익세력과 부역자 가족들을 색출하는 미군의 모습(미국립문서보관소 소장). [사진제공-최재영]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의 민망함과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생경스러움이 교차하며 내 몸을 휘감는다. 그의 온 몸에서는 복수의 피가 펄떡이는 듯 했다. 시대의 아픔을 통째로 안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몸짓은 한 자락의 희망이라도 붙들 힘이 없어 보였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같은 잔인한 만행을 겪었다는 그날의 일곱 살 소녀는 그 후 양 팔이 없는 불편한 몸으로 한 맺힌 65년의 삶을 그렇게 모질게 살아왔다고 했다. 누구라도 그렇듯이 나는 리옥후 할머니의 생생한 이야기가 추호도 가식이 없는 진실된 증언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오죽하면 결혼해서 힘들게 낳은 삼 남매의 이름들을 각각 “복수” “하” “리라”로 지었겠는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국가는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장애의 몸으로 대학을 모두 마치고 일선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도록 후원해 주었으며 지금은 정년퇴직을 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관통상의 아픔과 복수의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한 가냘픈 여인의 증언을 들으며 오늘은 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자료들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이하, NARA) 문서들을 직접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신천학살 사건에 미군이 실제로 개입한 증거와 정황이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학살을 총 진두지휘했던 지휘관과 실무자들이 누구였는가를 알아보고자 했다. 지금까지 가능성을 두고 조사한 바로는 신천에서 직접 작전을 수행하거나 주둔했던 미군부대가 두 종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일반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야전부대였고 또 하나는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특수 방첩부대였다.

신천학살사태는 1950년 10월 3일 오후 4시에 황해도 재령에서 시작되어 저녁 6시부터는 신천으로 이어졌다. 겉으로 볼 때는 좌익과 우익 양측의 충돌에 의해 발생한 듯하나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기획하고 현장에 투입되어 직접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던 검은 실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정부와 미군사령부의 지시아래 실행에 옮긴 미군 전투부대와 방첩부대들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이승만 정부로부터 전시작전권을 물려받은 미국 정부와 미군 최고사령부의 완전한 승인절차와 이승만정부의 비호와 공조 없이는 감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천사건은 학살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사냥’이라고 불릴 정도의 유혈 참극이었기에 반세기를 넘어 1세기를 향하는 이 시점에도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사건의 진실은 은폐되어 왔고 마음 놓고 우리 역사의 수면 위에 드러낼 수 없었다.

학살책임자로 지목된 해리슨의 계급은 무엇인가?

오늘 전시관을 둘러보거나 생존자의 증언을 듣기 전까지 나는 평소에 커다란 의문점을 하나 품어왔다. 그것은 바로 북측이 지목하고 있는 학살 책임자 미군장교 해리슨의 계급이 정확하게 무엇이냐에 대한 문제였다. 평소에 신천사건에 대해 연구하면서도 이 문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점점 미궁에 빠져 있었다. 피해자인 북측을 제외한 한국이나 각국의 연구 단체들과 언론 매체들은 모두 해리슨에 대한 계급을 ‘중위’로 언급하거나 중대장이니, 소대장이니 하면서 중구난방으로 제 각각 언급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동안의 연구에 대한 확신 때문에 해리슨이 미군 중위였다는 주장들은 아무런 근거나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천사건을 다룬 소설 ‘손님’을 집필한 작가 황석영은 해리슨의 계급을 ‘중위’로 간주하여 작품을 집필했으며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신천사건을 방영해 진보와 보수진영 모두에게 큰 관심을 끌었던 mbc다큐멘터리 제작진도 해리슨의 계급을 아예 처음부터 ‘중위’로 단정을 하고 방송 스토리를 전개했다. 이와 같이 신천학살 주모자로 지목된 해리슨을 추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아무런 근거나 기초자료 없이 해리슨의 계급과 직책을 아무렇게나 취급해왔다. 그런 이유로 인해 신천학살에 대한 미군 개입설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확보되기보다는 사건의 실체에서 벗어난 추론과 억측들만 난무했던 것이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된 부분은 자체 내부의 혼선에서 빚어진 실수인지는 몰라도 북측도 생존자들의 증언 동영상을 보면 해리슨을 중위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 나를 더욱 혼란하게 했다. 아무튼 학살의 총지휘관인 해리슨이라는 장교는 분명 한 사람일 텐데 그의 계급과 직책은 지금까지 팔색조처럼 다양하게 불려왔다. 그의 계급과 직책이 정확히 무엇이냐에 따라 신천학살사태의 미군 개입설에 대한 진실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남측이나 서방세계 시민들은 막연하게 “신천학살은 미군이 저질렀으니 그대로 믿어라”라는 식의 주장은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좀더 누구나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자료도 확보하여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


▲ 제1전시관 벽면에 부착된 학살지휘관 해리슨에 관한 각종 게시물. [사진제공-최재영]




▲ 유엔기 옆에서 어딘가를 응시하는 해리슨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 [사진제공-최재영]




▲ 포악한 모습으로 그려진 해리슨 장군이 명령하는 모습을 재현한 그림. [사진제공-최재영]




▲ 해리슨의 장군 신분증 원문(상)과 번역문(하) 사진. [사진제공-최재영]




▲ 미 8군 사령관 워커의 학살 명령문. [사진제공-최재영]



해리슨은 장성급 계급인 미육군 소장(少將)이었다

나는 그동안 북측에서 해리슨의 직책을 ‘신천지구 위수사령관’ 혹은 ‘신천점령 미군사령관’이라고 언급해 온 것을 근거로 해서 적어도 점령군사령관 정도의 직책이라면 미군 고위직 장교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해리슨(Harrison)’이라는 영어이름 하나 달랑 들고 해방 이후부터 6.25 정전협정까지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 영관급과 장성급을 대상으로 해당 인물을 물색해왔다. 지금까지 학살주범으로 지목된 ‘해리슨’의 정확한 영어 풀 네임(Full Name)조차 서방세계에 공개된 바가 없었고 ‘해리슨’이라는 이름 자체도 라스트 네임(Last Name)인지 퍼스트 네임(First Name)인지의 여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두 명의 관련 인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 명은 제주 4.3사태와 관련이 있는 영관급 장교로서 사태 이후 정보 수집 차 계속 제주에 잔류했던 미 24군단 정보참모부 소속 해리슨(Harrison) 대령이었고 또 한 명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6.25전쟁 정전협정 조인식에서 유엔군 측 수석대표로 나온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장군(중장)이었다. 그러나 신천사건과 관련된 ‘해리슨’이 이 둘 중에 한 명이 해당되는지에 대한 여부는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오리무중이었다.

북측은 박물관을 설립한 날부터 지금까지 입에 거품을 물듯 초지일관 학살의 우두머리로 미군장교 해리슨을 거론해 온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 그에 대한 신상자료가 전시실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혀 근거 없는 허구의 인물을 학살의 책임자로 거론하기에는 너무 많은 무리수가 따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신천사건의 미군개입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월남한 반공 우익 인사들과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보수세력들이었다. 그들은 해리슨이라는 일개 미군 중위가 어떻게 자신의 소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수만 명을 죽일 수 있겠느냐는 논리를 펴며 하루에 700명은 죽여야 52일간 35,000명 이상을 학살할 수 있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신천사건은 좌익과 우익들끼리 죽인 우리 민족 내부의 사건이며 사건 현장에서 미군을 전혀 목격한 일이 전혀 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내가 오늘 방문한 전시실에서 해리슨이라는 장교는 일반 전투부대 의 위관급 장교가 아닌 미군 첩보부대의 장군으로 밝혀졌다. 그가 미육군의 장성으로서 소장(少將)의 계급이었음을 밝혀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의외로 박물관 전시실 벽면에 다른 사진들과 함께 조용히 붙어 있었다. 그 증거물은 해리슨이 전쟁 중에 특수임무를 수행할 때 사용했던 장교 신분증이었다. 이번 박물관 참관 중에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해리슨의 신분증 사진을 통해 그의 신상정보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는 것이며 그에 따른 후속 연구 조사가 박차를 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신분증의 앞면은 영어 원문으로 작성되었고 그 아래는 원문을 한글(조선글)로 번역해 놓았다.

‘해리슨의 신분을 확증하는 근거 자료’라는 설명서와 함께 번역한 내용을 보면 ‘이 증명서의 소지자는 민주자유 한국의 통일을 위한 군사 첩보활동에 종사하고 있음 -미륙군소장 해리슨 디 매든 -’이라고 적혀 있었다. 신분증 앞면은 카드 고유번호 ‘70120’이 스탬프로 찍혀 있었고 카드의 네 모서리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각각 그려져 있었으며 카드 내용은 영어 대문자로 “THE BEARER OF THIS CARD IS ENGAGED IN SUPPORT OF ARMD FORCES INTELLIGENCE ACTIVITIES FOR THE UNIFICATION OF A DEMOCRATIC FREE KOREA. - HARRISON D. MADDON- MAJ. GENERAL”이라고 기록 되었고 해리슨의 풀 네임 위에는 그의 친필로 된 서명이 있었다.

예상대로 해리슨은 위관급이 아니라 미 육군소속의 장성급 지휘관이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원래 이런 류의 카드는 국내외에서 정보기관에 종사하는 요원들이나 군 방첩대 요원들이 임무를 수행하거나 각 기관의 협조가 필요할 때 필수적으로 제시하는 암행어사 마패와 같은 것이다. 학살 지휘자로 지목된 해리슨 소장은 6.25전쟁 중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방첩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이하 CIC)의 지휘관으로 신천사건에 개입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1차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해리슨 장군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해야

또 해리슨의 신분증 사진 위에는 ‘미제 침략군 장교 해리슨 디 매든’이라는 설명서와 함께 유엔기 옆에서 해리슨 장군이 모자를 들고 뒷짐을 진 상태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장면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사진 우측에는 해리슨 장군이 1950년 10월 17일자로 장병들에게 내렸다는 학살명령문이 영문과 번역문으로 아래와 같이 걸려 있었다.

‘1950년 10월 17일 해리슨 놈의 <명령>’
“나의 명령은 곧 법이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한다.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북한을 구원하기 위하여 공산도배를 진멸시켜야 한다. 로동당원, 국가기관 복무자는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체포 처단하며 일체 그 동정자들도 공산주의자들과 동일하게 처단하라.”

‘Harrison order(10/17/1950)’
“My order is the law. outlaws will be shot to death. destory all red bandits to free the north korea from the communist threat. hunt and kill all the communist party remembers civill servants and there families. kill there sympathizers too.”

또한 명령문 옆에는 ‘졸개들에게 학살 명령을 내리는 해리슨’이라는 당시 상황을 재현한 그림 한 폭이 걸려 있고 그 밑에는 ‘1950년 12월 3일에 내려진 해리슨의 두 번째 학살명령문’이 걸려 있었다.

Harrison D. Maddon! 그는 미 육군에서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첩보부대 지휘관으로 밝혀졌으니 이제부터라도 국내외 연구가들은 그에 대한 자료들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NARA에는 6.25전쟁 관련 문서들이 수백 만 건이나 소장되어 있지만 해리슨 장군과 관련된 자료를 입수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미국의 이익에 해가 되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은 해제가 만료됨에도 아직도 일급비밀(Top Secret)로 분류되거나 이미 공개된 문서들도 논란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다시 슬그머니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천사건 당시 미 24사단 19연대 1대대장, 모리스 너츠 대령도 당시의 신천지역 전투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NARA를 찾았으나 문서군에는 구체적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신천지역에서 미군방첩대는 어떤 역할을 했나?

해리슨이 미군 방첩대 장군 출신 지휘관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한 후에 추후 방북기를 통해 밝혀 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2001년 4월에 한국의 ‘한겨레 21’측에서 NARA를 직접 방문하여 '사리원과 신막 사건 조사 보고서'라는 제목의 63쪽 분량의 문서를 발굴 조사했는데 이 문서에는 조사 보고서, 외신 기사, 관련자 증언록, 민간인 관련 문서 등으로 구성돼 있었음이 밝혀졌다. 나는 이 문서를 통해 미군 방첩대가 신천학살 전후로 황해도 일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건이 담겨 있었다. ‘1950년 12월 8일 사리원에서 멀지 않은 신막 부근에서 치안대원들이 21명의 민간인들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려는 순간을 영국군 장교가 목격을 했고 그 장교는 황급히 처형을 지연시킨 뒤 상부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고 급파된 두 명의 영국군 통신장교는 처형을 신속히 중지시키고 살해당할 뻔한 민간인들을 신막 교도소로 무사히 이송시켰다고 한다.

그 후 처형을 중지시켰던 당사자인 레너드라는 영국군 중위는 당시 처형을 집행하려던 치안대원에게 직접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치안대의 대표가 하는 말이 민간인을 처형하는 것은 미국 방첩대(CIC)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었던 캄펠 중위도 비슷한 발언을 했는데 “당시 사살하려고 했던 죄수들은 공산주의자 혐의가 있어 서울로 이송할 계획이었고, 처형은 미국 방첩대의 명령에 의한 것이지만 방첩대 내부의 작전을 우리가 입증하긴 어렵다고 했다”는 증언을 했다.

이처럼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 방첩대원들은 이북의 점령지역에 들어가서 좌익과 부역자들 그리고 그들의 일가족들을 모두 색출하여 제거하는 작전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집행하는 비밀정보조직이며 고도의 테러 실행조직이었다. 또한 미군부대의 지휘관은 점령지인 해당 지역에서 자치대를 관리하고 통제할 책임이 있고, 행정명령에 따라 관이 주도하는 민간치안대에서는 미군사령관의 허가한 만큼의 무기들을 소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의해 무장된 우익 치안대가 함부로 총기류와 각종 흉기를 휘두르는데도, 미군은 적절한 통제를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하물며 신천과 재령에서 발생한 극단적인 학살사태는 단순히 좌익과 우익의 즉흥적인 충돌에서 빚어진 사태라기보다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인 미군 정보부서와 방첩대의 전략에서 실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염두해 두어야 할 부분은 미군 방첩부대의 작전은 비공개이기 때문에 일반 미군병사들과 일반 국군들 그리고 반공우익에 속한 일반 치안대원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다만 지휘관이나 지도자나 단장, 대표자들만 방첩부대의 흐름과 전략을 어느 정도 인지할 뿐이다.

미군 개입설을 부인하는 다양한 주장들

그 동안 한국 정부가 발행한 ‘6·25전쟁 전사(戰史)’ 기록에는 “1950년 10월 18일, 미육군 보병 제24사단 19연대 3대대가 가장 먼저 신천에 진입했고 이틀 후인 20일에 3대대는 신천을 떠나서 진남포로 진격하라는 상부의 작전 명령을 받고 3대대가 다시 북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신천학살 사건에 직접 연루되거나 현장을 목격한 월남 반공우익 인사들로서 “미군들은 단 2시간 정도만 신천에 머물다 지나갔으며 미군들은 탱크나 군용 차량들을 몰고 신천을 유유히 통과하며 구월산을 향해 포만 몇 번 쏘고 지나갔다”고 증언했다. 6.25전사 기록과 우익 인사들의 주장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 두 증언을 비교할 때 확실히 드러난 것은 신천에도 미군이 들어 온 것은 맞는 사실이나 이틀이나 2시간은 학살을 저지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에 이런 주장들은 미군 개입설을 확증하려면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또한 소설가 황석영의 한겨레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소대병력이 신천에 잠깐 들어가서 두 시간 정도 머물고 그대로 진격해서 올라갔어요. 그게 미군 제1기갑사단 소속인데. 전사에 잘 나와 있어요. 이거 작전계획을 알아야 하는데 황주 방면으로 올라가는 중대가 예하부대를 파견해서 신천에 들어가서 두 시간 동안 미군환영대회를 하고 돌아왔단 말이야. 그렇다면 수색소대인데 수색소대가 45일 동안 주둔할 필요가 없는 거라. 본대는 이미 올라갔고. 작전개념상으로 맞지가 않는다니까?”라며 황 씨도 당시의 미군 부대 정보와 동향을 다른 방향으로 파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신천에 도착한 미군은 반공우익의 증언처럼 2시간을 체류한 것인가? 아니면 전사의 기록처럼 이틀을 주둔한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북측의 주장대로 52일간 주둔하며 학살을 주도한 것인가?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가? 북측은 미군이 1950년 10월 17일 신천을 통과하여 점령한 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12월 17일까지 무려 52일간 인민공화국 정권과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혐의가 있다고 판단된 좌익과 그 일가족들에 대하여 남녀노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했다고 주장해왔다. 누구의 말이 근거가 있는지 밝히고자 그 동안 입수된 자료들을 가지고 당시 미군의 이동경로와 신천 주둔여부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미군 전투부대는 왜 신천에 주둔했는가?

신천학살 사건의 최초 발단은 1950년 10월 13일, 금요일 저녁 6경부터 서서히 시작됐다. NARA문서에는 당시 신천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미군의 일상적인 전투일지들과 보고 문서들이 다행스럽게도 상당수가 남아 있었다. 1950년 10월 17일자에 작성된 보고 문서에는 “4일 전인 13일에 황해도에서 ‘Mansai affair(만세사건)’이 있었으며 좌우로 대립한 주민들끼리 처참한 살육전을 벌였다”고 사건 당일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언급했다. 또한 미군 항공기가 신천지역 항공을 관측 보고한 후에 작성된 10월 18일자 통신문서에는 “미군 비행기를 본 신천 주민들이 백기를 흔들면서 구조를 요청했다. 조사가 요망된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또한 문서에는 미군의 점령지로서 신천을 담당하게 될 미군부대는 서부전선을 맡고 있던 ‘미육군 24사단 19연대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19연대의 이동경로를 적은 10월 18일자 작전지도에는 ‘신천’이라고 적힌 지명과 함께 작전을 수행한 이동 경로가 분명히 표시되어 있었다. 실제로 18일에 신천으로 직접 들어 간 미군부대는 19연대 3대대 소속의 C중대와 L중대였다. 1대대와 2대대가 안악과 진남포를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동안 3대대 소속의 2개 중대는 신천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평양시 함락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3대대 소속의 2개 중대는 왜 북진하지 않고 후방지역인 신천과 재령에 계속 남아있게 됐는지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내려진 상부의 작전 명령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 신천에 남았던 2개 중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양으로 진격하는 주력 부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경계 근무를 서기 위한 것으로 일반적인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2개 중대가 신천에 도착한 목적은 바로 반공우익 세력을 돕기 위해 긴급 투입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2개 중대가 신천에 도착하기 닷새 전(10월 13일)에 재령과 신천에서 발생했던 학살 사건에서 좌익과 우익들의 불꽃 튀기는 살육전이 진행되자 미군 3대대가 좌익과 부역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특수임무를 받고 배치된 것이다. 물론 3대대가 신천에 도착하기 이전에 미군 방첩대가 먼저 당도해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19연대는 원래 1대대와 2대대뿐이었으나 8월 중순 무렵에 뒤늦게 어디에선가 3대대가 19연대에 합류했던 것이다. 이 3대대원들 중에는 6.25전쟁에 투입된 지 단 3개월 만에 작전수행중 인민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중대원들이 전사하고 그 결과 대대가 해체가 되고 나머지 생존자들로 꾸려진 대원들이었다. 당시 해체된 중대의 통신병이었던 ‘챨스 슈’라는 이름의 병사가 소속된 중대는 원래 140명이었는데 인민군의 총격으로 겨우 4명만 살아남았다고 증언했으며 이처럼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병사들로 구성된 3대대의 C중대와 L중대는 마침내 무법천지가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인 신천에 도착해 좌익 소탕작전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챨스 슈’는 훗날 미국 신문에 “한국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불가피했다(신문기사 제목: U.S. Army vet says killing korean civillians anavoidah)”라는 기고문을 발표해서 미국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반공우익 인사들과 보수 측 인사들 측에서 가장 신뢰하는 신천사건 기록서는 당시 신천사건 현장에 직접 참여했던 조동환 씨가 1957년 5월에 펴낸 ‘항공의 불꽃, 황해도 10.13 반공의거 투쟁사’라는 백서인데 사상자와 관계자 실명까지 등장할 정도로 세부적으로 집필했다. 이 책은 신천사건을 총 1막에서 5막까지 분류해서 종합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는데 그 중에 1막이 바로 10월 13일 저녁에 시작된다. 13일에 시작된 서로간의 학살은 18일까지 지속됐다. 결국 반공 우익세력과 좌익세력은 5일간의 혈전 끝에 닷새 만에 우익이 승리하며 신천군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그 결과 유엔군과 미군 제1기갑사단의 북진 통로를 열어주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닷새가 되는 날(18일)이 바로 미 19연대 3대대의 2개 중대가 신천에 입성한 날이다. 그렇다면 신천에 도착한 미군들은 팔짱을 끼고 좌익과 우익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 미군은 이날 좌익을 대상으로 가장 큰 피의 대학살극을 벌여 입성 당일에 우익반공 치안대에 승리를 안겨준 것이다.

또한 신천사건 당시 활약했던 반공우익 인사들이 월남해서 조직한 ‘신천 10.13동지회’라는 단체에서 작성한 공식적인 문서를 보면 10월 13일 오후 4시를 기해 신천군 옆에 있는 재령군에서 인민군과 좌익이 퇴각하기 전에 반공우익 세력들이 먼저 봉기하여 노동당과 각 기관을 습격했고 남산 꼭대기와 거리에 태극기를 게양했으며 동시에 좌익과 부역자들을 대거 숙청했다고 기록했다. 그 후 퇴각하던 인민군 측의 병력증원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우익 봉기군은 사리원에 주둔한 유엔군 측에 긴급 연락을 취하는 한편 S.O.S라는 대공표식으로 유엔군 측 공군에 신속히 알려 드디어 10월 18일 유엔군이 재령과 신천으로 입성하여 결국 두 지역은 재탈환되고 치안이 평정됐으며 수많은 무기와 차량 및 군수품을 유엔군에게 인계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조동환 씨의 책이나 ‘10.13동지회’의 전사기록을 보더라도 분명히 미군은 좌익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재령과 신천에 긴급 투입된 사실이 분명하며 투입된 후에는 치안을 평정하기 위해 수많은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이다.


▲ 휘발유 불길과 수류탄에 의해 학살당한 장소인 방공호를 둘러보는 필자. [사진제공-최재영]




▲ 방공호에서 숯덩이처럼 참혹하게 타버린 피해자들의 유해모습. [사진제공-최재영]




▲ 방공호 주변에서 239구의 유해가 발굴된 소식을 전한 당시의 신문 기사. [사진제공-최재영]




▲ 사건 당시 신천군 내무서 방공호 인근에서 추가로 발견된 유해들. [사진제공-최재영]



미군에게 있어 민간인들은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미 24사단 지휘부는 많은 예하부대 중에서 왜 하필 19연대 3대대를 신천에 배치했을까? 앞서 밝혔듯이 신천으로 간 3대대원들은 이미 자신들이 소속했던 연대가 해체되어 새롭게 편입돼 온 상처 입은 병사들이면서도 동시에 강한 병사들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난민들 틈에 낀 인민군들이 민간인과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자신의 중대 행렬에 총격을 가한 결과 140명중 겨우 4명만 남을 정도의 피해를 입어 큰 충격을 받았기에 이들은 다른 부대의 병사들과는 다르게 민간인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강했고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보호 본능이 어느 부대원들 보다 심하게 작용했다. 낯선 이방인이었던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신천에 당도하기 전에도 누가 적군이고 민간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서로 맞붙어 싸우는 남과 북의 주민들 생김새와 옷차림이 모두 똑같은 상황을 보며 언제 어디서 자신들을 향해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함께 동료들을 잃은 적개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에 파견돼 온 미군장병들은 부산항에 내릴 때만 해도 2차 세계대전의 승리감에 들떠 있었다. 입국할 때만 해도 전선의 상황을 실감하지 못해 의기양양했던 미군들은 듣던 말과는 달리 직접 전장에 출전해보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된다. 가는 곳마다 자신들을 환영하는 인파들이 거리를 메웠지만 그들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을 정도로 피아 분별력이 힘들었다.

24사단은 참전하자마자 1개월 만에 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이 대전전투 중에 포로로 잡혀가자 미군사령부 총지휘부는 급기야 “흰 옷을 입은 민간인을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예하부대에 내렸다. 1만 6천명의 병력과 5천대의 차량을 보유한 미 24사단은 17일간의 전투기간 중 모두 7천명의 병력과 주요 장비의 60%를 상실했기에 전투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군에게 있어서 이제부터는 남측 주민이든 북측 주민이든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적으로 의심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NARA의 전투 보고서에는 “육군에서는 우리 거점에 접근하는 모든 민간인 피난민들에게 폭격을 가할 것을 요청했다. 야간에 흰옷을 입은 민간인들에게 정체를 묻는 대신에 총격을 가할 것”, “북측 발사지역 난민들은 모두 Fair game이다”라고 기록되었다. Fair game은 수렵금지가 해제된 사냥감이라는 뜻이다. 또 ‘밤에 흰옷을 입은 사람이 보이면 누군지 묻지 말고 그냥 총격을 가하라. 총격을 가하지 않으면 중대장을 보직 해임한다’는 문서도 있었다. 미군들은 이제 신원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접근하면 발포해도 문제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두려움이 커질수록 병사들도 난폭해져 갔고 지휘부의 명령처럼 전쟁터는 그야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살육하는 사냥터로 전락이 된 것이다. 아래와 같이 당시 다른 미군부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 피난민이 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 누구든지 넘으려고 하면 발포하라. 여자와 아이들
의 경우에는 분별력 있게 대처하라. (1950년 7월 24일, 미1기갑사단 명령문, 24일 오전
10시, 휘하 미 8기갑 연대 통신문)

*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피난민들이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1950년 7월 26일, 미8군 본부 통신명령문)

*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며 발포하라. (1950년 7월 26일, 미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명의의 명령문)

*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
것이다. (1950년 7월 27일, 미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명의의 반복 명령)

AP통신이 보유한 위와 같은 19개나 되는 작전문서 외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차별 발포를 승인한 문건은 더 많았다. 특히 미군 지휘사령부가 7월 25일에 피란민 대책회의를 가진 이후로 1950년 7~9월까지 3개월간 작성된 문건들을 보면 피난민을 향해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문들은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공군의 경우에는 육군의 지상전투상황의 답보상태나 소강상태와는 상관없이 이북 전 지역을 대상으로 융단폭격을 가했으며 “피란민이 8명 이상 눈에 띄면 적군으로 간주해서 공격하라”는 내용의 문서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군 지휘부는 북측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전투지침을 내리는 한편 북진을 하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가 공산주의자니 조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실제로 미군들은 38선을 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사살하려 시도했다. 날이 갈수록 미군들의 눈에는 군인과 민간인 구분이 안됐기에 남과 북, 우익과 좌익, 민간인과 군인을 쉽게 구별하지 못했고 모호해져갔다. 결국 미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민간인들 앞에서는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고 그러한 위험 요소는 제거돼야 마땅했기에 그런 전투지침을 받은 상태에서 3대대원들은 신천 땅에 투입된 것이다.

대량학살은 3대대가 신천에 입성한 날에 본격적으로 시작

NARA의 문서상에는 1950년 10월 18일 신천에 머문 미군 병력은 24사단 19연대 3대대의 2개 중대였고 나머지 주력군들은 다시 예정대로 북진했다. 뒤에 남은 3대대 병력은 북진한 주력군의 안전을 위해 경계업무를 담당하면서 신천 지역의 정황을 상부에 비교적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천에서 발생한 사태는 미군 3대대가 주둔한 18일부터 본격적으로 대량학살로 이어지게 된다. 전세가 어느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았던 좌익과 우익간의 닷새간의 치열한 혈전은 19연대 3대대원들이 신천에 도착하며 마무리됐다.

우익세력이 이날을 자신들의 승리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다. 좌우의 치열한 싸움이 왜 미군이 주둔하면서 갑자기 우익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미군이 우익들을 도와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상상을 초월한 전대미문의 살육전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신천에 주둔한 미군은 반공 봉기사건의 방관자나 감독자 역할이 아닌 학살의 직접적인 주체로서 개입했던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월남한 우익 인사들 중에는 신천에 주둔한 미군 병력이 1950년 12월 초까지 머물렀으며 심지어 12월 6일에도 우익세력과 미군에 의한 집단 학살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결국 미군이 신천군에 주둔한 자체가 우익반공 세력들의 활동에 큰 힘과 배경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 단일무덤으로는 가장 많은 5,605명이나 되는 피살자를 안장한‘애국자묘’에서
헌화하는 필자. [사진제공-최재영]




▲ 필자 일행과 밤늦게까지 조사와 참관작업을 협력하고 있는 생존자와 안내원들. [사진제공-최재영]



좌익과 부역자들을 색출하며 학살을 확대한 미군들

10월 13일 저녁, 신천에서 발생한 좌익과 우익세력들의 무차별적인 공세에서 시작된 피의 학살은 미군이 신천에 입성하여 개입하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양상이 되었다. 좌우의 참혹한 싸움판에 개입한 미군은 불붙어 있던 학살 사태를 묵인하거나 방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태를 공평하게 진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익세력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좌익들의 가족들과 부역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집요하게 색출하여 학살을 감행했던 것이다. 미군의 그 같은 행동들은 우익세력들의 살인 감정을 더욱 고무시켰으며 피는 피를 부르는 원리에 따라 그날 하루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했다. 결국 신천에 미군이 도착한 18일, 그날 미군은 반공우익 세력과 치안대에게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현재 NARA에 있는 미 24사단 민정담당 보고 문서에는 미군이 신천을 지나갔다는 10월 18일 이후에도 신천에 관한 문서가 작성되어 연속으로 상부에 전달됐고 작성자는 민정 담당관으로 표기 되었다. 10월 24일자 문서에는 당시 신천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던 반공 봉기군 지휘관이었던 신상규(sin sang kiu)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신천군의 인구와 식량 상태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으며 비단 신천뿐만이 아니라 황해도 전 지역에 걸친 광범위한 조사 결과가 망라되어 있었다. 이처럼 신천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자료를 수집하려면 누군가는 계속 신천에 주둔해서 활동하며 조사해야 했다.

이를 입증하듯 월남한 반공우익 인사들 중에는 2가지 중요한 단서를 증언해 주었다. 첫째는 18일 이후에도 미군들이 통역관을 동반하고 신천에 계속 남아서 치안을 통제하고 있는 장면을 분명히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신천에 있던 미군들은 주민들의 복장으로는 피아를 구분할 수 없었기에 같은 편인 우익 민간인들을 포함해 눈에 띄는 민간인들은 검문을 통해 무조건 두 손을 들게 하여 소지품들을 빼앗는 등 철저한 조사를 통해 혐의가 없는 사람들만 풀어주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미군이 들어온 지 한 달이 훨씬 지난 11월 30일에도 신천에서 미군을 목격했으며 당시 희생당한 반공 봉기군들의 합동장례식이 열리던 날에도 재령과 신천에서 미군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이 두 가지 증언을 통해 미군 방첩대원들이 신천 일대 지역에 주둔하며 계속해서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군 방첩대원들은 계속 민간의 동태를 살피며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그들의 지휘관들은 신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는 결론이 난다. 이처럼 미군 방첩대는 신천에 계속 주둔하며 악몽의 학살을 지속적으로 기획하며 집행하는 주체세력이 되어갔던 것이다.

미군과 연합군의 참전이 결정된 직후 이승만은 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했고 그 시각부터 전쟁의 법적 당사자는 미군과 인민군의 대결로 바뀌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처럼 특수 점령지역인 신천의 상황을 예민하게 파악하며 직접 개입했던 것이다. 국제법상 전시에는 정상적인 전투행위로 적군을 사살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전쟁 중 발생한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학살은 제네바, 헤이그 협약에도 위배되는 매우 중대한 반인도적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국과 유엔은 신천학살에 대해 함구하며 범죄사실을 묵살해왔다. 분단 70주면을 맞은 이런 시점에서 객관적이고 올바른 진상규명을 위해 남과 북과 해외동포가 모두 함께 힘을 모은다면 평화적인 남북통일의 기운을 싹트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학살(Holocaust)이라는 것은 근대성과 배치되는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 문명의 보편적 현상으로 뿌리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미국의 역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한 첫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고한 민간인 학살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미국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영토를 빼앗고, 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노동력을 빼앗고,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자원을 빼앗아 그것들을 근간으로 지금까지 경영되고 유지되어 왔다. 근래의 한 예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영토 내에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날조된 거짓말로 침략을 정당화했으나 결국 이라크에는 대량 살상무기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애꿎은 민간인 수만 명이 미군의 학살적 만행에 참혹하게 죽어갔다.

미국은 이 같은 방식으로 6.25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한반도에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북한에 대한 왜곡된 정보와 부정적인 자료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국제사회에 퍼트리며 국제여론을 조성하여 이를 구실로 한미 합동군사훈련, 한일 합동군사훈련, 한미일 합동군사훈련 등 갖가지 종류의 최첨단 공격훈련을 실시하며 또 다시 전쟁의 기회를 찾고 있다. 동시에 미국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북 관계를 팽팽한 군사적 대결 구도가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정책을 이끌어 왔으며 핵무기와 인권을 구실로 대북 제재조치와 고립정책을 주도해오고 있다. 또한 남북 양측이 서로 화합하고 화해하려는 조짐만 보이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가차 없이 훼방하며 우리 민족 당사자끼리의 평화적인 통일 논의시도 자체를 가로막아 아시아권에서의 자국의 이익과 패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시관을 참관하며 자료를 확인하는 내내 내가 몸서리쳤던 이유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증오심과 적개심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태어난 조국 대한민국이 전후 지금까지 아직도 자주권을 찾지 못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친미를 부르짖으며 미군과 미국정부의 바지가랑이를 붙들며 전시작전권을 계속 맡아 달라며 애걸하고 있는 비극적 현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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