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7

1906 김원봉 독립운동의 실체 : 월간조선

[이슈와 역사] 김원봉 독립운동의 실체 : 월간조선

06 2019 MAGAZINE

이슈와 역사
김원봉 독립운동의 실체
1930년대부터 공산주의 운동, 臨政 파괴 획책


글 : 주익종 이승만학당 교사

⊙ 의열단, 임시정부 반대해 臨政 요인들에 대한 테러 시도說, 이승만에게 현상금 내걸기도
⊙ 김원봉이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용대는 중국 정부가 주도해 만든 중국군 산하 정치선전대
⊙ 중국공산당의 기만으로 조선의용대 빼앗긴 후 궁여지책으로 臨政 참여… 日帝 패망 무렵 다시 臨政 해체 요구


朱益鐘
1960년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同 대학원 경제학 박사 /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실장 역임. 現 이승만학당 교사 / 저서 《대군의 척후》 《고도성장시대를 열다》

1940년 10월 조선의용대 창립 2주년 기념 선전영상 속의 김원봉. 얼마 후 그는 중국공산당에 부대를 빼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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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文在寅) 정권의 ‘역사정치(歷史政治)’ 중 임시정부 기념 드라이브는 지난 4월 11일 임정수립기념식과 더불어 황급히 마감됐다. 하지만 김원봉(金元鳳)에 대한 건국훈장 서훈(敍勳) 건은 여전히 살아 있다. 보훈처는 지난 2월 김원봉에 대한 건국훈장 서훈 건을 제기했다가, 거센 반발이 일자 일단 거둬들였다. 그러나 서훈 드라이브는 독립기념관 소속 연구소 세미나(4월 1일)와 집권 당·정·청(黨·政·靑) 토론회(5월 2일)로 이어졌다. 그리고 MBC TV는 5월 4일부터 김원봉의 일대기를 다룬 40부작 대하드라마 〈이몽(異夢)〉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을 사산(死産)케 하려 한, 또 신생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한 인물에게 ‘건국’ 훈장을 준다는 것은 난센스다. 어쩌면 그 부당성을 자세히 논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그가 월북(越北)해서 북한 정권에 가담한 것만 문제 삼고, 그의 해방 전 독립운동을 그저 상찬(賞讚)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한 청와대 청원(2019.1.20~2.19)은, 그가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해 일제(日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라는 정규군을 창설하여 무장투쟁에 앞장섰으며, 1940년대에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이룩했다고 상찬했다.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한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리라. 이런 인식은 과연 옳은 것일까. 

김원봉이 한 ‘독립운동’의 실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의열단 주역은 김원봉의 고모부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의 중농(中農)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장 과정에서 받은 교육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 할진대, 그가 받은 교육은 표에서 보는 것처럼 늘 중도반단(中途半斷)에 그쳤다. 이런 교육으론 근대 민주주의 정치나 시장경제, 국제관계 등에 관해 체계적인 지식을 습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그는 혈기 넘치고 대담하며 용감무쌍했다. 1919년 초 동포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접하자 곧바로 학업을 그만두고 독립운동기지로 떠날 만큼 의협심 충만한 열혈 청년이었다.

처음에는 적(敵) 요인을 살해하고 적 시설을 파괴함으로써 조선인의 애국심 환기해 민중 폭동을 일으킨다는 테러 활동을 택했다. 1919년 11월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를 중심으로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에 참가한 것이다. 의열단은 해외에서 몇천, 몇만 명의 군대를 조직해 일제와 맞서는 일이 불가능하니, 극소수 비밀결사의 암살과 파괴로 효과를 거두고자 했다.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가 주도자고, 김원봉은 동조자였다.


의열단은 1920년 초부터 단원을 국내에 보내 암살과 파괴를 꾀했다. 1920년 봄 단원 6명을 보내 대규모 암살 폭파를 기도했으나, 사전(事前)에 대원들이 검거되어 실패했다. 의열단은 그 보복 차원에서 다시 단원을 보내 그해 9월 부산경찰서장 폭살(爆殺)을 시도하고, 11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후에도 1921년 9월 총독부 폭탄 투척, 1922년 3월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1923년 3월 대규모 암살·파괴단 파견, 1924년 1월 도쿄 황궁 앞 이중교(二重橋) 폭탄 투척 등이 이어졌다.

엄혹한 일제하에서 이런 투쟁들은 우리 민족의 항일(抗日) 의지가 죽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암살·파괴 공작들은 일의 성패(成敗)만 놓고 보면, 대개 실패했다. 사전에 발각되어 공작단이 검거되거나 아니면 투척한 폭탄이 불발되고 엉뚱한 사람이 저격되기도 했다. 크게 흥행한 영화 〈암살〉이나 〈밀정〉 등은 사건을 날조하거나 터무니없이 과장했다. 영화 〈암살〉에선 1933년에 김구(金九)와 김원봉이 손잡고 공작조를 보내 조선군 사령관과 친일(親日) 거두를 사살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런 ‘화려한 성공’은 없었다. 실상 의열단은 그보다 훨씬 전 테러 방식에 의한 항일활동을 그만두었다.


임시정부 타도 행동대 역할



1930년경 신혼 초의 김원봉과 그의 아내 박차성. 박차성도 사회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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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투쟁론자 김원봉은 독립운동 방법론으로서의 외교론(外交論)과 준비론(準備論)을 부정했다. 이 점은 그의 부탁으로 신채호(申采浩)가 1923년 1월 쓴 〈조선혁명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의열단 선언문’이라 할 이 글에서 신채호는 외교론이 “2000만 민중의 용기 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義氣)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라 했다. 또 준비론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100분의 1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고 논하였다. 오직 암살·파괴·폭동의 폭력으로써만 일본을 축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흔히 이에 동조해, 외교론이나 준비론이 허황되다고 말한다. 폭력투쟁론은 더 허황되다. 폭력으로 조선은 결코 일본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이회영(李會榮)·박용만(朴容萬)·신채호 등 베이징파(北京派)와 마찬가지로 이승만(李承晩)과 임시정부를 극력 비판했다. 김원봉과 의열단은 베이징파의 행동대원 역할도 했다. 1921년 5월 9일 작성된 일제 고등경찰 자료는, 5월 초 베이징파가 상하이에서 연설회를 열고 임시정부 재직자(在職者)의 총사직을 요구했으며, 그 비상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폭탄·권총까지 휴대했다는 설(說)이 있다고 했다. 의열단 등 베이징 방면의 무장투쟁론자들은 이승만 등 임시정부 요인의 암살을 공언하면서 현상금을 내걸었다고도 한다(염인호, 《김원봉연구》 48~49쪽.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3권, 384쪽).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실행은 못 했더라도 김원봉 등이 그렇게 공언하고 다녔을 것이다. 독립운동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민족의 적에 겨눠야 할 무기로 같은 동포, 그것도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을 겨눈 것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황푸군관학교 졸업 후 中共黨 세력에 가담

의열단의 항일투쟁은 곧 한계에 봉착한다. 폭탄과 무기 구입, 단원 파견 등에 상당한 경비가 드는데, 자금 조달이 안 되는 것이다. 의열단은 창립 이래 주로, 이동휘(李東輝)가 만든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이 돈은 레닌이 이동휘에게 준 독립운동 자금 40만 루블의 일부였다(《월간조선》 2019년 5월호, ‘레닌이 임시정부에 준 자금의 행방’ 참조). 이 지원은 곧 끊겼다.

김원봉은 1924년 봄부터 가을까지 광둥(廣東)의 쑨원(孫文) 정부에 손을 벌렸으나, 일본 정부의 반발을 우려한 쑨원은 거절했다. 그 후 의열단 활동이 중단되고 단원들은 칩거 상태에 들어갔다. 7, 8명의 단원이 좁은 방 하나에 함께 거주하며 중국만두나 국수로 끼니를 때우는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염인호, 앞의 책, 88쪽).

김원봉은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북벌 국민혁명에 참여해서 새 기회를 잡고자 했다. 1926년 1월 의열단은 종래의 파괴·암살 노선을 포기하고 항일군대를 편성하기 위한 군사교육을 받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김원봉 등은 1926년 1월 황푸(黃埔)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학했다. 군사훈련뿐 아니라 삼민주의(三民主義)·사회주의 등 정치교육도 받았다. 이를 통해 중국 군관학교의 인맥을 얻었다. 당시 황푸군관학교에는 후일 중국공산정권의 총리가 되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으로 있었다. 김원봉은 이때부터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관학교의 조선인 생도를 중심으로 의열단 조직도 확대했다.

그해 10월 졸업 후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한 김원봉은 장제스 국민혁명군의 북벌(北伐)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듬해 4월부터 장제스가 국공합작(國共合作)을 깨고 공산당 탄압에 나서자 공산당은 폭동으로 맞섰다. 김원봉 등 의열단은 공산당 쪽에 가담했다가 많은 단원을 잃었으며, 단세(團勢)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겨우 빠져나온 김원봉은 1928년 초 상하이로 귀환했다. 여전히 새 길을 찾아야 했다.


30대엔 공산혁명가



장제스와 텅제(뒤). 황푸군관학교 시절 김원봉과 만난 텅제는 남의사 서기로 김원봉을 후원했다.
상하이에서 김원봉은 중국으로 망명한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출신 안광천을 만났다. 안광천은 불미스런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에서 배척된 인물이었다. 김원봉은 그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코민테른과 아무런 연계 없이, 김원봉과 안광천은 1929년 말 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했다. 김원봉은 그 부설 교양기관으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해서 공산혁명 요원 양성에 나섰다. ‘노동자·농민 속에서 당 조직을 건설하라’는 코민테른 노선에 동조한 활동이었다.

이 학교에선 1930년 4~9월과 1930년 10월~1931년 2월에 모두 21명이 교육을 받았다. 김원봉은 이들을 조선 내에 침투시켜 공장이나 농촌에서 ‘세포’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 성과는 전반적으로 부진했다. 레닌주의정치학교가 정통 공산당 조직이 아니었기에, 그 출신자들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단’시 되고 배척당했기 때문이다. 1933년 9월 서울 가네가후치(鐘淵)방적의 제사공장에서 동맹파업이 일어났을 때 이 정치학교 출신자가 발각되었다. 그는 다른 졸업생 10여 명의 조선 내 활동을 자백해, 그들이 일제히 검거되었다.

김원봉은 1931년 9월부터 제3기생을 양성할 계획이었으나, 만주사변 발발로 중국 내 반일주의(反日主義)가 고양되는 등 정세가 일변하자 계획을 바꾸었다. 같은 공산혁명 요원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일찍이 김원봉은 1926년 황푸군관학교에서 훗날 국민당 정부의 간부가 될 이들을 여럿 만났다. 비밀첩보기관인 삼민주의역행사[일명 남의사(藍衣社)] 서기인 텅제가 그중 하나였다.

김원봉은 1932년 5월 텅제를 통해 중국 정부에 한중(韓中)합작 항일투쟁을 제안했다. 중국 정부가 그를 수용해서 경상경비로 월(月) 3000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원봉은 난징(南京) 교외에 중국군 간부훈련반으로 위장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조선 내외 각지에서 학생을 모집했는데, 김원봉은 처남인 경남 동래의 박문희로 하여금 신간회(新幹會) 회원이나 동래 노동조합원 등 5명을 포섭하게 했다. 의열단원인 윤세주는 펑톈(奉天)에서 시인 이육사(李陸史)를 포섭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강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간부학교)에서는 1932년 10월~1933년 4월, 1933년 9월~1934년 4월, 그리고 1935년 3~9월에 각기 6개월씩 생도를 교육했다. 교육과정 중 정치교육에서는 삼민주의 외에 유물사관(唯物史觀)도 가르쳤다. 1기 26명, 2기 55명, 3기 44명 등 총 125명 청년투사를 양성했다.

간부학교는 2~3명을 한 조(組)로 공작지에 파견해서, 조선과 만주에 전진대를 조직하려 했다. 중국 정부가 1기 졸업생 공작금으로 3만원을 보조하는 등 4년간 40만원이란 거금을 지원했다.

제1기생 노석성은 1933년 11월 귀국한 후 고향인 평남 강서군과 대동군 등 일대에서 농촌 청년들을 규합해서 비밀 농민조합을 만들었다. 그는 도시 공작을 위해 평양과 신의주를 내왕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육사는 서울에 돌아온 후 1934년 3월 《조선일보》 대구특파원으로 채용되었으나, 정보가 새서 곧 경찰에 체포되었다.

1, 2기 국내 파견자 대다수가 체포됐다. 제1기 파견자 19명 중 12명이 체포되고 2명이 이탈했다. 제2기 파견자 31명 중에서는 20명이 체포되고 1명이 이탈했다. 3기는 1명만 체포되었는데, 조선 및 만주 파견을 대폭 줄인 때문이었다.

국내 노농대중 조직화 운동은 그전의 레닌주의정치학교의 교육생 파견 같이 전형적인 공산주의 조직 결성 시도였다. 김원봉은 ‘조선 정세와 의열단의 임무’라는 강의에서 전형적인 공산혁명론을 드러냈다(염인호, 앞의 책, 170~175쪽).

“지금부터 우리의 운동은 직접 공장 내로, 농촌에 민중 가운데로 잠입하여 노동자·농민이 되어 민중 속에서 강대한 조직과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혁명 세력을 조선 민중 속에 두고…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으로의 진전 공작을 해야 한다.”

김원봉 자신이 공산당원이 아니며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간부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면서도, 공산혁명론을 대놓고 설파하는 이상한 행태였다.




中 군사委 정치부가 조선의용대 관할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 사진(1938년 10월 10일). 앞줄 깃발 뒤 한가운데가 김원봉이다.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1937년 중일(中日)전쟁 발발을 계기로 절정을 맞는다. 바로 정규군 조선의용대 대장으로서 활동한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먼저 결성되었다. 대원 수는 200명가량이었다(314명이라는 설은 과장). 그에 관한 상식은 “좌익계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했으며, “중국 국민정부가 일제에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용대 일부가 화북으로 이동해서 적극 투쟁했다”는 것이다(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하지만 사실은 이와 전혀 달랐다.

우선 조선의용대 창설을 주도한 것은 김원봉이 아니라 중국국민당 정부였다. 중일전쟁 발발 3일 뒤인 7월 10일 중국 정부가 김구·김원봉·유자명(柳子明)을 장시(江西)성 주장(九江)시 근처의 루산(廬山)으로 불러서 한중합작 항일연합전선을 펼칠 것을 요청했다. 구체적 방안으로서, 중국 정부는 9월 하순 한인(韓人) 좌우 양대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한인 청년을 선발해서 특별군사훈련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김원봉이 여기에 적극 호응하여, 민족혁명당 등의 청년 당원 83명을 모아, 12월 1일 중국 중앙군관학교 싱쯔(星子) 분교의 제6기 특별훈련반에 입교케 했다. 이들은 6개월간 군사훈련과 더불어 공산주의 서적 독서 등의 교육을 받았다.

이듬해 1938년 5월 6기 훈련생들이 졸업했다. 하지만 이들이 6월 일본군과 중국군의 격전지인 우한(武漢)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동북의 만주로 가겠다면서 35명이 이탈했다. 김원봉의 지도력과 위신에 큰 금이 갔다.

장제스의 정보기관인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인 왕펑성이 김원봉에게 망명한 일본인 공산주의자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를 소개해서, 조선의용군 건립방안을 협의케 했다. 아오야마는 7월 3일 ‘국제의용군 건립안(案)’을 장제스에게 제출했다.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정치부[부장 천청(陳誠), 부부장 저우언라이]에 의용군을 건립도록 지시했다.

이 의용군은 소규모이며 중국군 배속 정치선전대이므로 명칭을 ‘대(隊)’로 하고,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가 관할하기로 했다. 마침내 10월 10일 100여 명의 병사로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창립했다.


중국공산당의 조선의용대 이탈 공작

조선의용대 대원 중에는 자질이 우수한 지식인급 청년이 많았다. 대원 중에는 황푸군관학교, 의열단 간부학교, 중국 중앙군관학교 등을 졸업한 자들이 많았다. 한·중·일 3개 국어에 능통하며 혁명 투쟁 속에서 단련된 열혈 청년들이었다. 지휘 체계는 중국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 지도위원회 – 조선의용대 본부의 순이었다. 그중 지도위원회는 중국 측 5인(주임 포함), 한국 측 4인으로 구성됐다.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 소속 중국군 중장이 주임을, 김원봉이 대장을 맡았다.

이처럼 조선의용대를 발의한 것이나 조직 체계와 활동 분야를 설계한 것은 중국 정부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내 조선인 부대였다. 활동 전반을 통제한 지도위원회는 중국 측이 장악하고 있었다. 김원봉이 대장을 맡은 건 사실이지만, 중국 정부가 그를 임명했다.

조선의용대는 창립 후 곧바로 우한전투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일본군 병사에게 염전(厭戰)·반전(反戰) 정서를 조장하는 확성기 방송을 하거나 전단을 살포하는 등의 선전활동을 했다. 그 밖에 정보 수집이나 포로 심문 등도 맡았다. 1938년 10월 하순 우한 3진[우창(武昌), 한커우, 한양(漢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의용대 본부는 광시(廣西)성 구이린(桂林)으로 갔다가 1940년 3월에 충칭(重慶)으로 옮겼다. 제1구대와 제2구대는 다른 전선에 투입되었다.

창립 2년 후인 1940년 가을부터 조선의용대는 큰 변화를 겪는다. 바로 화베이(華北) 이탈이었다. 비(非)전투 선전활동에 대한 의용대원들의 불만도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국공 균열 속에서 조선 청년을 장악하려 한 중국공산당의 유인 공작이었다. 저우언라이는 김원봉의 중국인 비서[중공당원 쓰마루(司馬路·본명 루젠궈)]에게 지령을 내려, “조선 동포 다수 거주 지역, 즉 화베이와 만저우(滿洲)로 가야 의용대 조직을 확대 발전시킬 수 있다”고 김원봉을 설득하게 했다.

아울러 같은 목적에서 옌안(延安)의 중공당 소속 조선인 무정(武亭)·최창식 등이 조선의용대에 연락원을 파견해서 의용대 내 좌익분자와 접선, 중공당 세포조직을 결성하고 화베이 이동을 선동했다. 1~3구대와 멀리 떨어진 의용대 본대(本隊)에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이 선동에 따라 의용대 다수 병력이 이미 1940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황허(黃河) 바로 남쪽의 뤄양(洛陽)에 집결했다.


中共黨, “소시민적 개인주의자”

김원봉도 화베이 이동에 동조했다. 1940년 9월 김원봉은 의용대 회보에 “반드시 조선 군중 속에 깊이 들어가서 먼저 중국 내의 100여만의 조선 이민을 쟁취하여 그들을 단결시키고 무장시켜 전투역량으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기고했다. 또 그해 10월 창립 2주년 기념 선전영상에서도 화베이 이동을 제창했다. “앞으로 우리는 더 나아가서 십여만의 우리 이민 동포가 있는 화북으로 가서, 거기서 조선의용대의 전투 깃발을 꽂고, 거기서 우리의 피 끓는 젊은 동무들을 모집해서 적의 무기를 뺏거나 무장해서, 만주로 들어가 우리는 조선혁명군과 연합해서 우리의 조국으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곧이어 1940년 11월 충칭(重慶)에서 의용대 본부는 북상(北上) 집결 및 화베이 진출을 공식 결의했다. 의용대는 겨울을 지낸 후 1941년 봄~여름에 황허를 건너 타이항(太行)산맥 일대의 팔로군(八路軍)에 합류했다. 이동한 대원 수는 전 병력의 80%에 달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 군사위원회에는 내부의 중공당원이 작성한 병력이동 허위보고가 올라갔다. 의용대는 ‘초모(招募) 활동’을 명분으로 황허 도하(渡河)를 승인받았다. 바로 그를 창립하고 운영해온 국민당 정부를 기만·배신한 행위였다. 이를 알게 된 장제스는 분노해서 조선의용대에 대한 수색령까지 내렸으나, 이미 의용대가 중국공산당 관할 지역으로 넘어간 뒤였다.

김원봉도 화베이로 넘어가려 했으나, 저우언라이가 ‘충칭에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그를 막았다. 그러나 이는 중국공산당의 기만 술책이었다. “정치적으로 절대 믿을 수 없는 소시민적(小市民的) 기회주의자, 개인적 영웅주의자”라는 것이 김원봉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솔직한 평가였다. 대다수 의용대 병력과 단절됨으로써 김원봉은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의 공작으로 조선의용대를 빼앗겼다. 김원봉 독립운동사 중 최대 위기였다. 노선 전환은 필연 수순이었으니, 바로 오불관언(吾不關焉) 하던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臨政의 左右합작은 중국 정부의 작품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1942년 김원봉의 임정 참여를 항일연합전선의 일대 성취, 중국 관내[關內·산하이관(山海關) 이남의 중국 본토] 독립운동 세력의 좌우통일이라고 기술(記述)한다. 그러나 이는 과도한 미화(美化)다. 그것은 실상 조선의용대를 상실한 김원봉의 위기 타개책이자, 중국국민당 정부가 종용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민혁당은 1941년 5월 중앙회의를 열어 임시정부에 참여키로 결정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승인받을 가능성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김원봉은 의용대의 화베이 이탈 후 곧바로 1941년 11월 임정 참여를 시도했으나, 한국독립당이 그를 거부했다.

중국 외교부장은 임정 승인을 거론하며 김구와 김원봉의 합작을 종용했다. 특히 조선의용대 이탈 사태를 겪은 중국 정부는 임정에 대한 적극 통제에 나섰다. 1941년 10월 말 한국광복군을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게 하고 중국군 참모총장이 직접 장악·운영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11월 중순에는 이러한 내용을 명문화한 ‘한국광복군행동 9개 준승(準繩)’을 관철했다. 이듬해 5월 중국 군사위원회는 잔여 조선의용대(약 20명)의 광복군 편입도 명령했다.

중국은 한편으로 한독당에는 다시금 민혁당의 임정 참여를 허용하라고 독촉했다. 결국 한독당이 입장을 바꾸었다. 1942년 10월 임정 의정원(議政院)이 민혁당의 임정 참가를 승인했다. 기존 의원 23명에 새 의원 23명을 더하도록 했는데, 민혁당계가 새로 13명을 등원(登院)했다. 요컨대 세력이 약해진 김원봉이 임정 참여를 꾀했고, 중국국민당 정부가 김원봉과 김구를 연합게 한 것이다. 중국 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은 중국 정부의 작품이었다.


臨政 참여 후에도 臨政 흔들기 계속



1942년 임시정부 요인들. 김구(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김원봉(앞줄 맨 오른쪽) 등의 모습이 보인다.
김원봉은 임정에서 한독당 일당(一黨) 체제를 깨는 투쟁을 벌였다. 그는 충칭에 있는 독립운동가만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될 수 있게 한 임시약헌(臨時約憲), 의정원 의결 없이 발표한 1941년 11월의 〈건국강령〉, 그리고 폐쇄적인 국무위원 선임 등을 비판했다.

한독당과 민혁당 간 협의는 지지부진했으나,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에서 신탁통치 방침이 알려져 위기감이 고조되자 일약 합의를 보았다. 1944년 4월 국무위원직이 한독당 외에도 개방되어 김원봉이 군무부장(軍務部長)을 맡는 등 민혁당이 국무위원 14명 중 4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은 실제 임정 정무에서 소외되었다. 중국 정부는 1943년 3월, 정당은 한독당, 군대는 이청천(李靑天)의 광복군을 원조한다고 결정했다. 김원봉은 광복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김원봉은 옛 조선의용대를 끌어들일 생각으로 저우언라이를 통해 옌안 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과 접촉하기도 했으나 거부당했다.

대신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어깃장을 놓았다. 일찍이 임정 합류 전에 김원봉은 중국 정부의 광복군 승인을 극력 방해했다. 그 때문에 중국 정부의 승인은 광복군 창설 후 10개월 만에 나왔다.

김원봉은 미국에 대해 임정 승인 외교를 펼치는 김구-이승만 팀에 대항해, 미국에서 이승만의 반대파로 적극 활동하던 한길수(韓吉洙)와 제휴했다. 한길수는 미국 국무부와 정계를 대상으로 미국이 임정 승인을 하지 않도록 열렬히 선전활동을 했다. 미국 국무부가 임정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 인식의 상당 부분은 한길수의 악선전 때문이었다(《방선주 저작집》 1, 649~653쪽).

김원봉은 일제 패망이 확실해진 무렵부터는 임정 해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시한 후인 1945년 8월 13일 김원봉은 20여 명의 비한독당 의원들과 연서(連書)로, “대한민국의 주권을 27년 이래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주하는 독립운동자만 행사해온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하기로 하고 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제안서를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제출했다. 3년 넘게 몸담고 있던 자신의 피란처를 해체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일본의 항복 이후 김원봉 등의 임정 해체 공세는 더 격해졌다. 8월 23일 김원봉 등 의원 19명은 내각 총사직 및 ‘간수(看守)내각’ 조직을 제안했다. 간수내각이란 임정의 잔무를 처리하는 기구를 뜻했다. 이 공세에 지친 김구는 마침내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하는 글〉에서 국내 각계급, 혁명당파, 종교집단, 지방대표 등이 참여하는 임시정권을 조직할 것이며, 이 과도 정권이 수립되는 대로 임정은 일체의 직권(職權), 문서, 물품을 인계하겠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까지 했다.


좌충우돌식 독립운동

김원봉의 활동을 보통의 독립운동 노선 구분법에 따라 살피면, 의열투쟁 – 군사요원 양성 – 공산혁명론 – 민족협동운동 – 무장투쟁 – 민족협동운동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학습에 따라 진화해간 게 아니라, 한마디로 갈 지(之) 자 모양의 좌충우돌이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결과로 사상이 열정을 못 따라간 것이라고나 할까.

흔히 조선의용대를 군사조직이란 표피만 보고 무장투쟁노선으로 분류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외교독립운동이었다.
중국 항일전에 기여함으로써, 중국이 승리한 후 조선의 독립을 얻으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의용대 창립 전인 1938년 4월 25일 김원봉은 “조선과 중국은 입술과 잇몸 관계에 있다”고 했다. 또 의용대 지도위원회의 주임인 중국군 중장 허중한(賀衷寒)도 1938년 10월 12일 “중국 혁명이 성공한 뒤 한국 민족의 독립해방이 이뤄질 수 있다”고 의용대원들에게 훈시했다. 국제관계의 기회를 이용해서 타국(他國)의 힘을 빌려서 조선 독립을 달성하려 한 게 외교론 아니면 무엇인가. 김원봉에게서 돋보인 것은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 수완이었다.

역시 중국 정부에 기댄 김구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김두봉도, 소련군 장교가 된 김일성(金日成)도 다 외교독립운동을 한 셈이다. 흔히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외교론이라 하여 비하하지만,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운동이야말로 가장 현실성 있는 독립운동이었다.

더욱이 전쟁 중 김원봉의 행태는 그 독립운동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그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중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말라고 하여 훼방을 놓았으며, 자신이 임시정부에 가담하려 하면서도 중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이중 플레이를 했다. 그는 자신을 지원한 중국국민당 정부를 기만하다가 중국공산당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어쩔 수 없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후에는 미국에 있는 한길수를 통해 미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공작했다. 그는 일본의 항복이 분명해진 때부터는 임시정부 해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은 격이라고나 할까.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강변하던 현 집권세력이, 이처럼 임정의 뒤통수를 친 김원봉에게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주겠다고 한다. 이런 난센스가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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