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6

백승종 ‘슈퍼 세종’을 찾아서

백승종 211214

‘슈퍼 세종’을 찾아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률은 23퍼센트이다(2019년). 국내총생산에서 농림어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2퍼센트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곡물의 자급능력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농업을 홀대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세계 주요 국가들은 곡물 자급률이 모두 100퍼센트를 넘는데, 예외라면 일본과 한국 정도가 있을 뿐이다.

세종 때는 사정이 어땠을까. 백성의 주업이 농사였고, 누구나 시화연풍(時和年豊) 즉,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현실은 비참했는데, 특히 즉위 초년에는 해마다 가뭄이 여간 심하지 않았다. 이상기온으로 여름에 갑자기 추위가 찾아오기도 했고, 초여름인데도 눈이 내렸다. 또, 우리가 지레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농사기술 수준도 낮아 실농하는 농민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해마다 흉년이 들었고, 그때마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

해마다 이어진 흉년의 참상이 끔찍도 했다. 특히 세종 4-5년간의 기근은 유난했다. <<실록>>에는 당시의 참상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 5년(1423) 2월 26일의 기사를 보면, 그해 2월 초9일 이후 10여일 동안에 집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간 충청도 유이민이 7백 91명으로 집계되었다. 가난한 백성들은 어린 자식과 연로한 부모를 버려두고 뿔뿔이 헤어졌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다.
유이민의 대다수는 우리나라의 곡창인 전라도로 몰려들었다. 다행히 그곳은 흉년이 심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10일, 전라도 관찰사는 지난 10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유이민이 도내로 밀려들었는지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각지에서 총 5천 8백 48명의 백성이 전라도로 들어왔다고 했다. 서울(190명), 개성(621명), 충청도(2,394명), 강원도(1,043명), 경상도(1,455명), 황해도(22명), 평안도(10명), 함길도(107명) 등이었다. 정확한 통계를 작성하기 어려웠던 그때 사정을 고려하면, 유이민의 실제 숫자가 배는 되었을 것 아닌가.

세종은 긴장했다. 해마다 유이민이 대량으로 발생하면 치안도 문제요, 결국은 각지의 농업기반도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왕은 이용할 수 있는 식량자원과 행정력을 총동원해서 기근의 피해를 줄이려 했다. 그러나 흉년은 강원·경상·경기·평안도를 강타했다. ... 피해 규모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는데, 왕은 관찰사들과 의견을 주고 받으며 현지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했다. ... 춘궁기가 끝나갈 무렵인 세종 6년(1424) 4월 23일, 앞서 말한 4개 지방 관찰사로부터 피해규모를 조사한 보고서가 올라왔다(<<실록>> 참조). 춘궁기에 그들이 구휼한 백성은 총 9,265명이었다. 쌀과 콩 등 곡식이 857섬 정도 사용되었고, 된장용 콩도 115섬쯤 썼다. 그밖에도 빈민들에게 꾸어준 곡식이 48,915섬이었다. 요컨대 그해 춘궁기에 국가는 약 5만 섬의 곡식을 사용하였으니, 빈민 1인당 1섬의 곡식이 사용된 셈이다.

해마다 기근의 규모는 달랐다. 수십만 섬의 곡식이 동원된 적도 있었고, 수만 섬으로 해결될 때도 있었다. 세종은 백성들의 생계를 걱정하느라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세종 10년(1428) 윤4월 11일, 의정부와 육조가 공동으로 왕에게 아뢰었다. “전하께서 가뭄을 근심하시어 술을 전혀 마시지 않으십니다. 바라옵건대 (건강을 위해) 술을 드소서.” 그러자 세종이 대답하였다. “술을 들지 않아도 내 몸은 평안하다. 어찌 꼭 술을 마셔야 하겠는가.” ...

흉년이 거듭되는 가운데 세종은 뜻밖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안타깝게도 우리 농민 중에는 농사의 기본지식이 결여된 사람이 상당수였다. 또, 지방관 중에도 아무 생각 없이 농번기에 백성을 함부로 징발하여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이도 있었다. 세종 12년(1430) 6월 2일, 세종은 호조에 명령하여 모두가 농사원칙에 충실하기를 촉구하였다, 왕의 말은 이러했다.

“지금 밀과 보리가 한창 여물어간다. 백성들이 농사방법을 잘 몰라서 곡식을 제때 거두지 못할까 봐 걱정이다. 호조는 각도의 지방관에게 공문을 보내서 그들이 마음을 쏟아 농사를 장려하게 하라. 곡식이 여물면 바로 베고 거두어서 때를 놓치지 말라.”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농민이 농사철을 제대로 모르다니! 그러나 한 번도 농사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관행적으로 잘못을 되풀이하는 농부가 많았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중국에서 간행된 농업 서적을 바탕으로 삼아, 정평이 있는 농사기술을 널리 보급하는 농촌계몽사업 같은 것을 벌였다. 세종 5년(1423) 6월 1일에도 호조를 통하여 가뭄으로 벼농사가 실패한 지역에 대안을 제시하였다. 즉, 메밀을 뿌리되 《농상집요》와 《사시찬요》에 적힌 경작법을 따르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중국의 농사법은 우리 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세종은 우리 풍토에 맞는 양질의 농업지식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 발단이 된 것은 평안도와 함길도(함경도)에서 잇따라 일어난 흉년이었다. 세종 10년(1428) 윤4월 13일, 세종은 우선 경상도 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먼저 왕은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함길도의 토질은 좋은 편이지만 백성들이 낡은 관습대로 농사를 짓다 보니 생산량이 최저수준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상도 관찰사의 협조가 필요했다. 정평이 있는 농부들에게 씨 뿌리고 밭 갈고 김매고 수확하는 방법을 물어서 종합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주문했다. 또, 각종 곡식의 재배에 알맞은 흙의 성질도 조사해서 알려주기 바란다고 했다. 아울러, 잡곡을 교대로 심을 때는 어떤 품종이 서로 어울리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말하자면 조선 최고 농부들의 지식을 토대로 함길도 백성을 계몽하겠다는 거였다.
석 달 뒤 세종은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도 같은 요청을 하였다(<<실록>>, 세종 10년 7월 13일) 그해가 다 가기 전, 나라 안에서 가장 농사를 잘 짓는 농부들에게서 수집한 농업기술 정보가 세종 앞으로 모였다.

그 사이에 왕의 기대수준이 한층 더 높아졌다. 농업지식을 집대성하여 한 권의 계몽 서적으로 보급할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듬해(세종 11년) 5월 16일, 왕은 정초에게 명하여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게 하였다. 남부지방에서 수집한 농사기술을 알기 쉽게 정리하여 학식이 부족한 백성들도 따라 할 수 있게 책자로 만들었다. 마침내 세종 12년 2월 14일에 <<농사직설>>이 완성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우리의 농사기술을 총정리한 책자가 탄생하였다. 왕은 이 책을 서울의 고관(2품 이상)과 각 지방의 관청에 골고루 나눠주었다.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왕도정치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나는 늘 농사에 정성을 기울인다.” 
세종은 자신의 책무를 그렇게 규정하였는데, 이 책은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영원한 베스트셀러였다. 한문으로 서술되었으나 쉬운 책이었다. 관리와 지주를 통해 그 내용이 농민들에게도 널리 전파되었다. 함길도와 평안도는 물론 전국의 농사수준이 조금 나아졌음은 물론이다.
출처: 백승종, <<세종의 선택>>(사우, 2021

사족: 현재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위기를 한꺼번에 겪고 있어요. 그 중에는 부동산 문제, 청년 실업 등 국가적인 문제도 있고, 지방 소멸, 노령층의 빈곤, 유리 천장, 출산률 저하 등 지역사회의 문제 이거나 또는 특별한 젠더와 연령 집단에게 더욱더 큰 고통을 강요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나아가 기후 위기와 팬데믹처럼 범 지구적인 차원의 문제도 적지 않습니다.

2022년 대선은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슈퍼 세종’을 발굴하는 선거라야 합니다. 개인적인 선호도나 특정 정당에 관한 지금까지의 인연을 떠나서 마땅한 후보를 골라내야 할 것입니다. 뚜렷한 대안이 있는 정치가, 말로만 분홍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실천에 옮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미 실력이 검증된 사람이면 더욱더 환영이겠지요. 민주주의의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국내외의 현안을 깊이 들여다보는, 그러면서도 용감한 실천가를 찾아야겠습니다.
34 comments


Jeongwoo Bae
과거는 현재의 거울입니다. 좋은 글에 감동하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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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공감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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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혜덕
학교 다닐 때 제목만 들은 농사직설이라는 책이 나오기까지 세종의 이토록 선한 집념과 노력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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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원혜덕 예,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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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철
'세종-농사직설 편찬'이라 외웠던, 개념없이 단어로만 알고있던 농사직설의 탄생배경에 그런 크고 깊은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재미있고 생각하게 만드는 역사를 왜 달달 외우도록 만들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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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그러게요. 선생님들도 잘 모르고 가르치시는 경우가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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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원
역사가 어찌 암기과목이겠습니까. 과연
오늘과 대화하는 거울이 마땅 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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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대단히 감사합니다, 서 선생님!
 · Reply · 11 h
Sunyul Lee
정말 귀한 분야에 눈을 돌려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 글을 쓰시기위해 수십시간 수많은 세월을 투자하셨을 그 노고에 감사드리며 다시 몇ㅇ번 이 글을 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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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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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An Kim
슈퍼세종이 필요한 시기인데
여기저기 분탕질이 횡횡하고
선거권자든 피선권자든 건강하지 못한 분위기가 계속 만들어지고ㅠㅠ…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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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김 선생님! 세상은 어디나 대개 다 그렇지요. 미꾸라지가 두어 마리만 있어도 연못이 흐려집니다. 김 선생님처럼 좋은 분들이 도처에 있으니까, 스스로를 믿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 정화해야 할 과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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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성
선생님, 지금의 식량농사는 농민의 입장에서는 기술과 시스템에 돌아가는 가장 수지맞는 것입니다.
일정 비용과 관리를 투여하면 혜택으로 직불금에 영농지원금, 쌀값보전금, 정부지원으로 노령자에게 농협을 통해 논두렁붙여주기 병충해방지 등
넘쳐납니다. 그래서 불과 칠팔 년 전에 너마지기 반 한 단지가 오천만원대였는데요 지금은 일억원대입니다. 그러므로 기본식량인 쌀부족은 없다, 할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고령으로 소농의 사멸과 유통과 소비의 극심한 왜곡이 아닐까 합니다. 관과 정치적 농간도 간과 할 수 없고요.
선생님 글이 구구절절 와닿기에 작은 소견을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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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문경성 감사합니다, 문 선생님! 앞으로는 기후 위기 때문에 지구 차원에서 식량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심해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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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현
농사직설 말로만 알았던 책이 이렇게 만들어졌군요 세종대왕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참 따스하게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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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김양현 참 좋은 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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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택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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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임재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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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달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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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무달구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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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정호
이재명을 도구로 쓰자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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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그래야지요. 이재명이 그나마 최고의 정치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래도 미래를 걱정하고, 대안을 만들어요. 게다가 많은 부분이 이른바 앞서 가는 나라의 정책과 유사성이 있어요. 우리나라는 세계 9위의 경제대국입니다. 위상도 있고, 책임도 있는 나라지요. 그에 비해 다른 후보들은 권력 외에는 안중에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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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정호
백승종 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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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철
백승종 이재명 볼때마다 똑똑한 인재라고 감탄합니다.
준비된 사고와 정신력 ,신념과 철학이 겸비된 인물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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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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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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