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년 2 월 18 일 원광대학교 <동경대전연구회> 콜로키움
근대 일본의 동학인식
- 동학농민전쟁 보도를 중심으로 -
나카가와 미라이(中川未來・에히메대학 교수)
여러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에히메대학에서 일본 근현대사를 가르치고 있는 나카가와 미라이입니다. 오늘은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님의 소개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조성환 선생님의 제의로, <동경대전연구회>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박맹수 선생님, 조성환 선생님, 감사 드립니다. 원래는 한국어로 발표를 해야 마땅합니다만 일본어로 발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근대사를 연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와 중국어 실력이 많이 부족한 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조성환 선생님이 통역을 해 주시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1979 년에 큐슈(九州)의 미야자키현(宮崎県)에서 태어나, 교토대학에서 일본 근현대사를 공부했습니다. 2015 년부터 시코쿠(四国)의 에히메대학(愛媛大学)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전공은 일본 근현대사로, 내셔널리즘이나 대외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사상사와 사학의 근접성이나 지역사나 미디어사의 자료 조사 등을 통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의 주요 논문은 PPT 에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이 연구 과정에서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저널리스트이자 내셔널리스트였던 구가 가쓰난(陸羯南)과 에히메현 출신으로 인천에서 활동한 언론인 아오야마 고헤(靑山好惠)가 보도한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그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지금까지 일본에서 이루어진 일본사 연구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어떻게 평가되어 왔는지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2000 년대 이전의 일본사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이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 한 요인, 즉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하게 된 계기로만 간단히 언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편,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 선생님의 논문처럼 선구적인 연구에서는, 이미 출병 ・ 점령 지역에서의 민중 억압에 대해서도 주목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이 나타난 것은 2000 년대 이후로, 청일전쟁 연구에 사회사적인 시각이 도입되면서부터입니다. 오오타니 타다시(大谷正)선생님과 하라다 케이이치(原田敬一) 선생님은 군사물자 수송을 위해 대량으로 동원된 민간인 군부의 존재와 언론의 역할, 그리고 지역사회와 군대의 관계를 밝히는 일련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만, 그 연구에서, 일본군에 의해 조선왕궁이 점령된 1894 년 7 월 23 일부터 대본영이 해산된 1896 년 4 월 1 일까지를 “넓은 의미의 청일전쟁”으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군에 의한 동학 농민군 섬멸 작전에 관한 실태 뿐만 아니라, 조선이나
대만에서의 민중 억압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도 인식이 높아져 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선생님이나 박종근(朴宗根) 선생님의 연구를 토대로 하고 있는 이노우에 카츠오(井上勝生) 선생님이나 박맹수(朴猛洙)선생님과 같은 한일 연구자들의 의욕적인 조사로, 보다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연구 방법과 자료도 다양화되어 갔습니다. 일본에서는 섬멸 작전에 참가했던 병사의 일지와 편지, 장병의 묘비, 나아가서는 지역 신문이나 잡지 등의 역사적 자료도 발견되어,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동학농민전쟁의 탄압과 대만 정복전쟁으로 인해 일어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청일전쟁이, 근대 일본국가와 사회가 동아시아 민중과 직접 대치하여 억압을 추진해 나간 것으로 평가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발표의 주제인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1890 년대 당시의 보도는 어떻게 평가되어 왔을까요? 【사료(史料) 1】은 구가 가쓰난(陸羯南)의 <동학당>론입니다.
여기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일종의 혁명당”, “이웃나라의 지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동학당’의 이미지에 대해, 카노 마사나오(鹿野政直)선생님이나 토오야마 시게키(遠山茂樹) 선생님,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선생님은, 청일전쟁 당시의 저널리즘에는 자유민권운동에서 생겨난 아시아 민중운동에 대한 공감이나 연대 의식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카가와현에서 발행되던『카가와신보(香川新報)』에 실린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보도를 조사한 이노우에 카츠오(井上勝生) 선생님도,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학당’의 이미지가 단기간에 급변한 것도 사실입니다. 청일전쟁 개시 이전에 ‘혁명당’으로 표현되었던 동학농민군이 개시 이후에는 ‘조선 내지(內地)의 흉도’, ‘백성의 봉기’ 등으로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평가가 변했을까요?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보도 내용을 검토하기 이전에 누가 어떻게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보도했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에히메현의 남부, 세토내해에 접한 우와지마시(宇和島市)에 있는 아오야마 고헤의 무덤을 소개하겠습니다. 사진과《도표 1》을 봐 주십시오. 묘 앞의 석등에는 “아오야마 고헤군 영전”, “조선국 인천 거류지 유지자중(有志者中)”, “메이지 30 년 8월 건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니시와키 쵸타로(西脇長太郎) 등 “조선 인천 재류” 유지자, 약 50 명이 1898 년에 건립한 것입니다.
또한 묘비에는 아오야마의 이력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료(史料) 2】가 그 묘비의 글입니다. 1872 년에 태어나 1896 년에 죽은 아오야마 고헤라는 인물은 조선의 인천 거류지에서 일본어 신문 『조선신보(朝鮮新報)』를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지 내셔널리즘의 중요한 담당자였던 ‘지방 청년’이 ‘조선으로 건너가 활동한 장사’(壮士; 폭력행사를 하며 정치활동을 했던 청년들)나 ‘조선 낭인’으로 지역에서 활약하며 해외 침략의 첨병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우와지마 출신인 아오야마야말로 그런 사람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지방 청년’들의 조선 진출에 발판이 된 것은 바로 일본 국내 언론사의 조선통신원이나 거류지에서 간행되던 언론사의 기자라는 직업이었습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대외 인식이 형성되는 데는 신문이나 잡지 같은 미디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미디어의 정보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발신 과정과 수신 과정 양쪽 모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보를 전달하는 구체적인 매체의 경우에도, 도쿄나 오사카에서 발행되는 유력한 미디어 뿐만 아니라, 아동용 잡지나 지방지를 포함한 다양한 미디어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정보의 유통 과정 그 자체를 사상이 형성되는 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조선에 관한 정보가 미디어를 통해 근대 일본 사회에 유통되고, 그것이 그 구성원의 대외 인식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 구체적인 과정과 미디어간의 상호 영향 관계에 주목을 해 왔습니다.
오늘 발표에서 소개하는 아오야마 고헤는, 『조선신보』를 발행하는 한편, 『오사카 아사히 신문(大阪朝日新聞)』의 계약통신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현지에 재류하는 일본인이 계약통신원인 경우, 본국에서 임시로 그리고 기한부로 파견되는 특파원과 달리,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정보를 발신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도표 2》를 봐 주십시오. 이것은 아오야마 고헤가 발행한 『조선신보』지면의 일부입니다. 거류지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은,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을 때 꼭 참조해야 되는 미디어”로 인지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1890 년대 초반에는 부산에 있는 핫토리 도오루(服部徹)가『동아무역 신문(東亜貿易新聞)』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발행된『조선신보』,『동아무역신문』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마 안 되는 당시의 지면을 참조함과 동시에『오사카 아사히신문』등 일본 국내 미디어에 그대로 옮겨 실은 거류지 미디어의 기사를 찾아 내어, 자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오야마 고헤가 조선으로 건너간 배경에는 근대 일본에서 ‘민중 주체의 조선 진출’이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민중 주체의 조선 진출’ 문제에 관련해서는 세토내해 연안 지역의 상인과 선박업자의 움직임, 그리고 조선 근해의 어업 등이 검토되어 왔습니다. 이들을 조선으로 밀어낸 요인으로는 예를 들어 근대화로 인한 경제적인 지역간 격차 형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저도 일찍이 지역간 격차 해소를 주창한 내셔널리스트의 언설이 지역사회에서 환영을 받으며 수용되었던 사례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의 일본인 거류지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의 영향력, 그리고 재조 일본인이 미디어를 필요로 한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민중을 조선으로 밀어낸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단 운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야마모토 타키노스케(山本瀧之助)는, 1896 년의 저서『시골 청년(田舎青年)』에서, 지방에 거주하면서 입신출세의 조건인 학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젊은이를 내셔널리즘의 담당자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골 청년’들에게 하나의 활로로서 ‘아시아’가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은, 누가 어떻게 조선에 관한 정보를 발신했는지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조선에 관한 정보를 필요로 했던 지역사회로 시점을 옮겨, 방금 소개한 아오야마 고헤와 카지야마 신스케, 두 사람의 ‘시골 청년’과 조선의 관계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동학당’= ‘혁명당’이라는 이미지에 주목해, 당시 그러한 이미지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있었는지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다음은 <조선과 일본을 잇다 : 원산(元山) 거류지의 카지야마 신스케(梶山新介)>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카지야마의 약력을 소개하겠습니다. 《도표 3》을 함께 봐 주십시오. 카지야마는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년도는 알 수 없지만, 그는 1877 년에 오사카 협동 상회의 사원으로 부산에 건너갔다가, 1879 년에 원산으로 옮겨 갑니다. 카지야마는 1887 년에 원산에서 독립해 개업을 하는데, 그 이후 원산 거류지의 행정이나 상업활동을 담당하는 초기 일본인 단체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게 됩니다. 오사카 협동 상회는, 카지야마와 마찬가지로 야마구치현 무사집안 출신인 타카스 켄조(高須謙三)가 설립한 무역상사입니다.《도표 4》는 그의 후손이 제공한 사진입니다. 타카스는, 당시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와도 공통되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을 ‘문명화’함으로써 비즈니스 기회를 잡을 수 있고, 그것이 일본의 ‘국익’을 도모하게 된다는 의식입니다. 카지야마 신스케와 조선의 관계는 이러한 특징을 가진 오사카 자본의 조선 진출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카지야마 신스케가 원산에서 독립・개업하여 거류지의 유력자가 된 배경에는, 당시 일본에서 조선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소금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세토내해의 연안 지역은 일본 식염 제조의 약 8 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과잉 생산으로 가격이 하락해서 급하게 새로운 판로 개척이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관심을 끈 것이 조선시장입니다. 조선에 소금을 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84 년부터입니다. 그 직후 조선 염전이 태풍으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으로부터 식염 수출이 급증하였습니다. 《도표 5-1》과 《5-2》는 조선의 각 항으로 보내진 소금 수출량과 원산항의 수출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조선으로 보내는 식염 수출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대부분이 세토내해 연안 지역에서 운반되었기 때문에 생산지에서 과다경쟁이 일어나 정부가 관여를 하게 됩니다. 거류지 일본 상인과의 협조가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세토우치 소금업계의 지도자인 아키라 사다오미(秋良貞臣)는, 장래성을 검토하기 위해 1887 년에 조선과 블라디보스톡을 시찰합니다. 야마구치현 출신인 아키라는 카지야마를 만난 뒤 그를 높게 평가합니다. 그리고, 아키라는 조선의 염전을 경지로 바꾸려는, 즉 조선 염업을 전멸시키려는 속셈으로 소금 수출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경제적 침략성이라는 자각은 없었습니다. 카지야마의 독립・개업이 확실히 이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조선으로의 소금 수입이 거류지에서 그의 사업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카지야마 신스케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1889 년부터 조일 간에 방곡령을 둘러싼 외교 문제가 발생합니다. 방곡령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요구한 거류지의 상인 대표가 카지야마 신스케였습니다. 카지야마 신스케를 비롯한 거류지 일본인은 일본 정부 이상으로 강경한 대조선 정책 실행을 주장했는데, 그 운동이 정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격과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외무성은 카지야마를 요주의 인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정부의 거류민 압박과 일본 정부의 무위무책”이라는 카지야마 신스케의 주장은, 아오야마 고헤의『조선신보』에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신문에 보도된 카지야마의 논의가 일본에서 가장 발행 부수가 많은『오사카 아사히 신문』에도 그대로 게재되어 있었고, 에히메현에서 발행되던 지방지 『카이난신문(海南新聞)』에도 소개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거류지 미디어의 발신 정보는, 재조 일본인 사회의 내부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 열도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대외강경파’로 불리며, 이토 내각에서 정치세력의 지도자였던 구가 가츠난은 카지야마 등이 발신한 조선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인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을 우습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선린(善隣)이라는 미명의 양보는 일본의 권위를 훼손하게 된다”고 언급했습니다. 이와 같이 카지야마 등이 발신한 정보는, 텐진조약에 근거해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의 주장을 지지한 대외 인식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발신하다: 인천 거류지의 아오야마 고헤이>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1872 년에 몰락한 무사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아오야마는 1890 년에 인천으로 건너 갑니다. 【사료(史料)3】은 『인천경성 격주 상보(商報)』라는 일본어 신문 창간호에 실린 취지문입니다. 상업 상황에 관한 보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이 신문은 아오야마가 관여하면서 크게 발전해, 1892 년에는 『조선신보』로 이름이 개정되었습니다. 동시에 아오야마는『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통신원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인천 거류지에는 많은 에히메현 출신이 있었습니다. 에히메현에서는 1880 년대부터 조선 근해로 출어하는 어부가 많이 있었고, 어선에 편승해 돈을 벌러 조선으로 건너온 민중도 많았습니다. 《도표 6》은 부산에서 어업허가장을 받은 일본 어선의 통계입니다. 거류지 사회의 유력자 중에는, 제일 권업 은행의 지점장・니시와키 조타로(西脇長太郎) 와 같은 에히메현 출신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의지하여 몰락한 무사집안의 아들이었던 아오야마가 인천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
아오야마 고헤는 일본 언론이 보도하는 조선 정보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조선의 시사를 올바르게 보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신보』는 아주 작은 신문입니다. 그럼, 이 작은 거류지 언론이 어떤 방법으로 조선 정보를 일본 국내에 발신했던 것일까요?
그것을 추측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도표 7》은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의 경영 장부입니다. 이것을 확인해 보면 이 회사는『동아 무역 신문』을 직접 구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오야마는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통신원이었습니다. 거류지 미디어는 일본 국내의 대표적인 신문 미디어에 직접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오사카 아사히 신문』 이외에도 수많은 신문이 『조선신보』의 기사를 참조하고 있었습니다.
아오야마는 “최근 많은 신문들이 조선신보의 기사를 무단으로 전재(転載)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오야마는 그대로 옮겨 게재하는 전재(転載) 자체에 대해서는 환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에 관한 정보를 확산시키는 수단으로 매우 유용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오야마가 에히메현의 청년 단체인 우와지마 청년회에도『조선신보』를 매호 기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이난신문』『우와지마신문(宇和島新聞)』과 같은 지방지에서도 아오야마가 발신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조선신보』라는 거류지 미디어는 일본 국내 미디어에 조선 정보를 매개・접속하는 허브 미디어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오늘 발표의 주제인 <동학당 이미지의 발신자와 그 의도>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1893 년부터 동학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그것이 일본에서는 어떻게 보도되고 있었을까요? 아오야마 고헤는 이미 1892 년에 평안도의 민중운동에 주목하여 조선사회에 혁명의 요소가 축적되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1893 년에 보도된『조선신보』의 대표적인 기사를 【사료(史料) 4】에 제시해 두었습니다. 이 기사에는 ‘동학당’이 “조선의 양이 혁명당”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처의 정보도 담겨 있습니다.
【사료(史料) 5】는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기사입니다. 인천통신원, 즉 아오야마가 보내온 정보를 바탕으로 쓴 것으로, 동학 운동이 에도막부 말기의 일본 존황양이 운동에 비유되어 있습니다. 즉, 1893 년 시점부터 일본의 미디어는 거류지 미디어를 뉴스의 출처로 삼아 ‘동학당’을 보도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동학당’이 ‘양이’를 주장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평가에는 어떤 정치적 의도가 담겨져 있었을까요? 【사료(史料)
6】은 『동아 무역 신문』의 주필자였던 핫토리 도오루가 1893 년에 발표한 『소설 동학당』의 한 구절입니다. 여기에는 농민군 봉기를 이용한 개화파의 정권 수립과 일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한 조선의 근대화 추진이라는 핫토리의 욕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동학당’을 조선 사회의 병을 치료하는 ‘혁명당’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조선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은, 아오야마 고헤의 『조선신보』와 핫토리 도오루의 『동아 무역 신문』은 ‘조선 낭인’이라고 불리던 정치 청년의 거점이 되고 있었습니다. 인천의 일본 영사관은, 신문사의 통신원을 자칭하는 장사(壮士)가 다수 조선에 입국했는데, 그 중심 인물인 아오야마가 거류민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동학운동을 틈타 조선에서 공작을 펼친 장사(壮士)집단인 천우협의 멤버 중에는『조선신보』와 『동아 무역 신문』기자들이 있었습니다. ‘혁명당’이라는 ‘동학당’ 의 평가에는 그들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평가를 동반한 정보가 일본 국내에 유통됨으로써 청일전쟁 직전의 ‘동학당’ 이미지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1894년 2월 15일에는 전라도 고부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5월 31일에는 조직된 농민군이 전주에 입성을 합니다. 조선 정부는 6 월 1 일에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일본 정부는 2 일에 출병을 결정했습니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급물살을 타는 조선 정세의 변화를 보도한 것도 거류지 언론과 통신원들이었습니다. 《도표 8-1》, 《82》에 나타나 있듯이 일본 국내 언론의 특파원이 조선에 도착하여 보도를 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6 월 이후입니다. 동학농민군의 전투는 1893 년 때와 마찬가지로 ‘혁명당’ 에 관한 평가와 함께 보도되었습니다. 거류지 미디어가 보도한 정보는, 일본 국내 미디어에도 그대로 게재되어 유통이 되었습니다. 《도표 9》가 그 한 예입니다. 그리고 기사 내용 뿐 만 아니라 ‘동학당’의 시각적 이미지인 『조선신보』의 삽화도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6 월 7 일부터 23 일까지는 전신 불통과 선박 부족으로 인해 조선에서 들어오는 신규 정보가 극단적으로 줄어듭니다. 일본 언론은 기존의 ‘동학당’ 인식에 근거해 몇 개 안되는 정보를 해석하여 보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8 일에 청나라군이 충남 아산에 상륙을 합니다. 청나라군이 아산에 상륙했다는 소식 자체는 간신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청나라군의 이후 동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 언론은 청나라군이 일본군에 앞서 농민군을 토벌할 것이라고 상정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선 정세는 청나라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6 월
10 일『중앙신문(中央新聞)』에 실린 《도표 10》은 그런 불안과 초조함을 잘 보여 줍니다.
이 그림에는 일본어의 음놀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똑똑한 수상(利口相)”, 즉 이홍장(李鴻章)이라는 이름을 가진 크고 강해 보이는 중국인이 “놀라서 도망가는 무리들(逃愕党)”, 즉 “동학당(東学党)”을, 손가락으로 사람을 튕기는 놀이인 ‘싯페’를 하면서 쫓아 가고 있습니다. 그 배후를 수상 이토 히로부미가 뒤쫓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출병’ 즉 ‘싯페’의 ‘동반자’ 입니다. 청나라에 뒤쳐져 있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그려진 풍자화입니다.
실제로 청나라군이 아산에 계속 주둔하였고, 농민군과 조선정부군은 6 월 11 일에 휴전을 하게 되는데, 각각 6 월 17 일과 23 일이 되어서야 이러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6 월 초순에 발표된 신문의 논조는 두 가지로 분열이 됩니다. 하나는 ‘동학당’의 ‘기개’를 평가하면서도 조선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일본군의 농민군 토벌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혁명당’인 ‘동학당’을 지원하여 청나라군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일본군이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조선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자의 대표적인 논의를 【사료(史料) 5】에 제시해 두었습니다. 여기서는 경제 언론인으로 유명한 다구치 우키치(田口卯吉)가 ‘조선 인민’에게 ‘동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청나라군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상황에서 쓴 것이므로, ‘동정’이 청나라를 비판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청나라군 주둔과 전주 화약(全州和約)에 대한 정보가 들어온 6 월 하순에 효력을 잃게 됩니다. 게다가, 일본정부가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굳이 ‘동학당’을 ‘혁명당’으로 평가할 필요성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조선에서 취재활동을 시작한 일본 국내 언론의 특파원들은 “동학당이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등의 보도를 하고, 구가 가츠난도 “동학당이 흉포한 무리” 라고 평가하기에 이릅니다. 단번에 ‘동학당’의 평가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럼, 아오야마 고헤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일본 주도의 조선 개혁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존재로 ‘동학당’을 그려 왔던 아오야마는, 청일전쟁 개시와 갑오개혁의 개시를 “지금까지 중국 상인이 장악해 온 조선 시장의 비즈니스를 일본상인이 만회할 절호의 기회”라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농민군의 항일 재봉기에 대해서 애초에는 농민군이 무언가를 오해하여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라고 보도했었는데, 바로 갑오개혁의 추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도를 하게 됩니다.
1894 년 11 월에 시작된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섬멸작전에는 시코쿠 4 개 현의 소집병으로 구성된 후비대 보병 제 19 부대가 참가했습니다. 아오야마 고헤의 고향인 우와지마 출신자들도 “동학당 정벌”에 참가했는데, 아오야마는 그들의 출발을 한성 용산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동학당’을 ‘의인’ ‘혁명당’이라고 평가했던 아오야마였습니다만, 이 단계가 되면 “그저 수가 많은 불량 집단으로, 토벌하면 흩어졌다가, 다시 집결한다. 정말이지 골치아픈 불량배들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오야마는 1895 년 4 월 23 일에 열린<동학당 두목>의 재판을 방청한 뒤, 동학 지도자인 손화중(孫華仲)이 재판관과 일본인에게 “백성을 위해 의군을 일으켰는데 사형이라니. 천하에 이런 비리가 어디 있느냐!”고 외친 내용을 보도하였습니다. 아오야마는 “조선 사회의 현 상황이, 용사의 나아갈 길을 그르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했다”고 개탄했지만, 그것은 농민군 섬멸 작전이 끝난 후에 보이는 여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확인이 가능한 농민전쟁에 관한 아오야마의 마지막 보도는 황해도 평산에서의 재봉기에 대한 글입니다. “치워도 치워도 떨어지는 마른 잎처럼 귀찮은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지역사회에서의 동학농민전쟁 보도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카가와현에서 발행되었던『카가와신보』는 동학농민군에게 동정적인 논조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표 11》은 그 지면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기사 내용과 논리 구성을 검토해 보면, 그 보도 내용이 도쿄에서 발행되고 있던 미디어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실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갑오개혁기의『카가와신보』는, ‘동학당’을 ‘개화당’ 이나 ‘일본당’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선 국민 중의 선각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농민군에 대한 경의 표명은 아니었습니다. 이토 내각과 대립하고 있었던『카가와신보』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일본을 위해 ‘동학당’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 즉 이토 내각의 조선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일견 호의적인 ‘동학당’ 평가가 일본 주도하의 조선 ‘근대화’를 주장하기 위한 도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카지야마 신스케와 아오야마 고헤의 이후 생애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카지야마의 이후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자료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된 것은 1911 년 식민지 조선의 함경남도 함경군 동명면 서호진에 거주하는 지주의 모습입니다. 또한 아오야마는 결핵을 앓아 『조선신보』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1896 년 9 월 20 일에 인천을 떠납니다. 그리고 11 월 13 일에 고향인 우와지마에서 사망을 합니다. 머리말에 소개한 아오야마 무덤과 석등 등은 인천 거류지 일본인들이 아오야마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조선신보』의 경영은, 아오야마의 동생 무라마츠 타다오(村松忠雄)로부터 나카무라 추키치(中村忠吉)에게로 옮겨집니다. 나카무라는 청일전쟁 중 군마현의 지방 신문에서 파견된 종군기자로서 “동양의 상업은 일본의 손으로 파악하고 싶다”는 야망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간 인물입니다. 나카무라가 경영하는『조선신보』는 일본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1908 년에 『조선신문』으로 개편되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1942 년까지 존속하게 됩니다.
1890 년대 일본의 동학농민전쟁 보도는 근대 일본이 대륙국가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정치 경제적 관심을 어디에 두고 있었는지 그 소재를 매우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학당’은, 근대 일본이 어떠한 형태로든 조선에 개입해, ‘독립’이나 ‘문명화’ ‘개량’ 등을 추진하고자 할 때,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존재로 소비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저의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통역해 주신 조성환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번역: 장영순(張栄順, 愛媛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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