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25년 신문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두루 섭렵하고 47권의 책을 냈다. 평일에는 생업에, 주말엔 공부에 매달렸고, ‘학문에 대한 사랑과 갈증’이 그의 에너지였다. 마침내 공부의 세계로 돌아온 이한우 교수(단국대학교 인재아카데미 주임교수)를 만났다. 이 글은 주간경향 <1172호>에 실린 이한우 교수 인터뷰 ‘사람과 갈증이 꿈을 이루는 비결’ 2편이다.
오랜 시간 공자를 연구하셨고, 신문기자로서 25년을 살면서 많은 지도자들을 겪어보셨을 텐데요, 깨달은 바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야 합니까.
“사서 중의 하나인 대학에 친민(親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존 번역서들은 그것을 ‘백성과 친하게 지내라’고 번역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친’은 제 몸과 같이 여길 ‘친’입니다. 그것은 지도자 자신이 개인적으로 즐거운 일이 있더라도 백성들이 고통스러울 때는 진정으로 고통스러워 해야 하고, 반대로 자신이 힘든 일이 있더라도 백성들이 즐거울 때는 마음속에서부터 즐거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 대통령도 그렇고, 다른 건 몰라도 ‘친민’의 정신은 부족한 듯합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어도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자질이라 여깁니다. 옛날에도 ‘친민’하지 않는 임금은 시골 백성들이 다 알아차렸는데, 지금처럼 매스컴이 발달한 사회에서야 그것을 금방 느끼는 것이지요. 다음에 어떤 대통령이 나올지 모르지만 제발 ‘친민’하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공자가 지금 정치판을 보고 있다면, 야당과 여당에 어떤 말을 하고 싶으실까요.
“역시 정명(正名)이겠죠. 본분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여당은 여당답고 야당은 야당다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여당은 책임감을 갖고 국정을 이끌어나가고, 야당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정부와 여당을 감시하고 채찍질하며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집권의 기대를 높여가야 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야 모두 크게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야 모두 공(公)에 대한 의식을 높일 것을 주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지나치게 패권주의로 흐르면서 공공성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실력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뜻만 좋다고 해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떤 스승의 영향을 받았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모든 저서의 서문에 감사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스승 두 분이 계시더군요.
“대학 때 김충렬 선생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셨지만 강의의 스케일과 내용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고, 늘 새롭게 연구된 결과만을 정리해 강의를 하셨는데 학생 때는 깊은 교감을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기자로 있으면서 자주 선생님을 찾아뵙고 자연스럽게 사제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기자가 된 것도 실은 김충렬 선생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중앙일보> 뉴스위크에서 번역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 김용옥씨가 김충렬 선생님을 야비하게 비판했어요. 실은 저도 김용옥 교수에게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김충렬 선생님을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고 저건 아니다 싶어 <월간중앙> 1991년 6월호에 김용옥 교수를 반박하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게 계기가 돼 <문화일보>로 자리를 옮겼고요. 김충렬 선생님은 지금도 저에게 맑은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계십니다. 또 한 분은 한국외국어대학에 계셨던 이기상 선생님입니다. 오직 그분께 제대로 된 하이데거 철학을 배우고 싶어서 학교를 옮겼습니다. 고려대에서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 우연히 그분의 학위논문을 읽게 됐는데,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아, 우리나라에 이렇게 수준 높은 학자가 계시구나. 사실 철학의 텍스트를 읽는 법은 이기상 선생님께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는 서울대 철학과 석·박사 과정 학생들 중에 현상학·해석학·하이데거 등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다 외국어대로 와서 이기상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후 서울대 교수의 견제로 인해 다 돌아갔지만요. 그러다 보니 저와 몇몇만 선생님 곁에 남게 됐지요. 기자생활을 하는 저를 배려하기 위해 저녁 강의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기에 박사과정이라도 마칠 수 있었어요. 지금 제가 동양의 고전들을 파헤치고 있지만, 그 공부 방법은 오롯이 이기상 선생님께 배운 것입니다.”
이한우의 공부법이 궁금합니다.
“제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니 공부법에 대해 말한다는 게….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공부를 해온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면 학부 때 영문과를 다녔지만 관심은 사회운동과 사상 공부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철학 공부를 해야겠는데 철학과 교수님들이 써놓은 철학개론은 읽어봤자 직접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철학 공부를 하고 싶어하던 친구들과 영어권의 대표적인 철학사인 코플스톤의 <철학사>를 원문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9권짜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반쯤 읽었지요. 영어공부도 됐고 서양적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보다 깊게 이해했던 계기가 됐지요. 그 후에는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 나라의 언어로 된 대표적인 저작들부터 읽자는 생각이 뿌리를 내린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자본론>은 독일어로 읽어야 하니까 독일어를 공부했고요.”
관심 분야의 대표적 저작을 읽기 위해 언어를 배우고, 그 책들을 번역하게 되었군요. 공부하는 자세는 그러해야 하는데,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분야를 공부하게 되면 그 뿌리까지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나 전모를 파악하는 것도 필수적이고요.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대학원 시절 공부했던 독일철학의 방법론에서 배운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저의 이 같은 철저함과 전체 파악이라는 두 가지 기본원칙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저함’과 ‘전체 파악’이 교수님의 공부법이군요. 독일철학에서 배운 방법론이 동양철학과 역사를 파고드는 바탕이 된 거군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모두 아우르게 된 이유를 알겠습니다. <논어로 논어를 풀다>, <논어로 대학을 풀다>, <논어로 중용을 풀다>, <논어로 맹자를 읽다>를 저술한 이후에 조선 왕들의 필독서, ‘제왕학의 교본’이었다는 <대학연의>를 국내 최초로 번역하셨는데요. 군주가 받은 교육을 통해 한 시대가 결정되므로 군주의 리더십을 평가하려면 그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번역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대학연의>와 저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95년에 제가 이승만에 관한 연재를 하고서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문에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1년 동안의 연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의 동양적 사고의 측면이다. 아마도 그 부분이 오히려 70%는 되지 않을까?’ 저는 이승만을 미화하는 입장도 비판하는 입장도 아닙니다. 그저 대한민국을 세운 큰 정치인의 인간적 측면과 정신적 면모를 파악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동양 정신세계를 전혀 모르니 그 사람의 깊이도 알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제가 택한 것이 <조선왕조실록> 전체 읽기였습니다. 2001년부터 2007년 동안 실록 읽기는 그에 관한 충분한 답을 주었습니다. 워낙 많은 뛰어난 조상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 중에서 특히 세종을 깊이 알게 된 것은 저에게 큰 수확이었지요. 그러고는 곧장 세종의 위대함의 정신적 원천을 추적하게 됐는데요. 그런 점에서는 천생 저는 역사학도라기보다는 철학도이지요. 그때 만난 것이 바로 <대학연의>입니다. 송나라 정치가이자 학자인 진덕수가 썼다는 이 책이 바로 성군 세종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서 한편으로는 기뻤고 한편으로 암담했지요. 제왕학의 교본을 통해 한 인간이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된 책이 없어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암담했고 안타까웠습니다. 실록을 읽고 단행본을 내는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줄곧 <대학연의>는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2007년 실록 읽기가 끝나자마자, 내가 직접 번역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한문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냥 한문공부만 했다면 저도 포기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사서삼경을 철저하게 뿌리까지 파고들면서 동시에 한문공부를 병행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재미도 있고 실력도 늘고. 그래서 6년이 지났을 무렵 사서삼경 중에서 사서 공부가 거의 끝났고요. 그때쯤 예전에 사두었던 <대학연의>를 꺼내서 읽는데 줄줄 읽히는 겁니다. 그게 2013년 5월이었는데요, 곧장 미친 듯이 몰두해 6개월 만에 원고지 7500장을 번역했습니다.”
그 방대한 작업을 6개월 만에 끝냈다는 건,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책은 구절구절 머리와 가슴을 때리면서 파고드는 구절들로 가득했습니다. 번역을 끝내놓으면 아직 남아있는 구절이 궁금해 못 견디게 하는 그런 책이었지요.”
제왕들도 <대학연의>를 읽으며 같은 생각을 했겠군요.
“그 책은 간단히 말하면 사서삼경에 들어 있는 대학이란 책의 체계를 빌려 사서삼경 전체를 재구성한 다음에, 그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내 리더십 갖추는 법을 제시한 다음, 그에 맞는 역사서 속의 사례들을 뽑아 재배치하고서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것을 세종은 경사(經史)통합 공부법이라고 불렀는데요. 오늘날로 말하자면 철학과 사회과학, 혹은 사회과학과 역사사의 통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후 세종은 이 경사통합 공부법을 기반으로 해서 독서를 계속 심화해 나가 결국은 위대한 임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지금 읽더라도 얼마든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다움을 갈고 닦는 데 큰 도움을 주리라 여깁니다.”
진덕수가 지은 <심경부주>를 연이어 번역하셨습니다. <중종실록>에는 “어제 경연에서 부제학이 <대학연의>는 이미 진강하였으며, 진덕수가 지은 <심경>도 공부하는 데 매우 관계가 있다고 하였으니, 들여오도록 하라”는 구절이 있고, <현종실록>에는 “집의 이상단이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경전은 소홀히 하고 계시는데, <심경>, <대학연의>에 전심하여 급선무로 삼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이처럼 모든 실록에 진덕수의 책들이 언급되어 있다고요. 그의 <문장정종>은 최근에 번역을 끝내셨고, 계속 진덕수 연구에 몰두하고 계신데요, 그는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책 내용도 궁금합니다.
“진덕수라는 인물과 그의 저작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연의>를 끝내고서 그의 또 다른 저작인 <문장정종>을 2014년 11월에 시작해 지난 3월 말에 1차 번역을 마쳤습니다. 분량은 원고지로 1만4000장 가까이 되니 <대학연의>의 두 배가 넘습니다. 사실 이 책을 번역할 때만 해도 일종의 문장론이라 <대학연의>보다 재미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 그 책 이상의 의미와 흥미로 가득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책으로 나오겠지요. 고대 중국부터 당나라까지 최고의 문장들을 모은 다음에 칙령·외교문서·상소·서사·시부 등으로 나눠 재구성하고 약간의 풀이를 덧붙인 것인데, 저는 서양에서도 이러한 방대하고 체계적이며 치밀한 문장론은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허약한 문장문화를 개선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리라 생각합니다.”
47권의 책을 낸 작가에게 진덕수의 문장론이 준 감동은 어떤 것일까요.
“저도 이번에 <문장정종>을 번역하면서 문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사실 20년 넘게 문장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에 있었는데도 좋은 문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한 그림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기억에 남는 문장론이라 해봤자 이태준의 <문장강화> 정도였죠. 그러나 진덕수의 <문장정종>은 흔히 생각하는 문학적인 문장론이 아니라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문장, 즉 머리와 마음속에 들어 있는 생각과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결과물로서의 문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책의 앞부분이 황제의 칙령 및 외교문서로 시작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쓰는 글이 실은 칙령이나 외교문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옛날에는 더욱 그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옛 문장 중에서 관심을 갖는 실용문장은 상소문이나 대책문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좁은 시야에 대해 크게 반성을 하는 계기도 됐습니다. <문장정종>이란 말 그대로 문장의 바른 원류라는 뜻인데, 그 제목의 담대함만큼이나 그 내용은 신선하면서도 둔중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진덕수라는 인물의 편집능력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대학연의>도 그렇지만 <문장정종>을 보면 그가 왜 어떤 글을 빼고 어떤 글을 포함시켰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작은 설명 부분에서 진덕수의 정말로 탁월한 안목을 보게 됩니다.”
오래전, 페이스북에서 아버지 얘기를 읽은 적 있습니다. 학문을 사랑하고 정진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거름을 받은 덕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엄마’ 하고 울지 않고 ‘아부지’ 하면서 울었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불만이지요(웃음). 제 이름에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雨)자는 돌림이고 한(翰)자는 한림원 할 때의 한으로 글을 뜻합니다. 비 오듯이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쓰라는 뜻이라고 어릴 때부터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름 자체보다는 아버지의 그런 말씀이 저의 무의식에까지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래서 문필가라는 말을 자주 쓰셨습니다. 학자보다는 문필가가 되라고 하셨지요. 저는 별로 그렇지 못한데 아버지는 참으로 강직하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아니다’ 하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하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살이는 많이 힘드셨지요.”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여덟 살 이한우는 매달 아버지 회사로 배달돼 오는 <소년중앙>을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읽고 싶어서 30분을 걸어서 회사를 찾아갔다. ‘아직 책 안 왔다, 한우야. 집에 가서 기다려라.’ 수위 아저씨가 달랬지만, 우체부 아저씨가 올 때까지 소년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아버지는 뿌듯한 눈빛으로 어린 아들을 바라보셨다. 다음 달 책이 배달돼 올 때까지, 책 속 내용을 다 외우다시피 했다.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2003년, 아버지는 반복되는 갑상선암 수술 끝에 결국 성대결절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 전날 아버지와 마지막 육성 대화를 했다. ‘그동안 잘 키워주신 아버님 목소리 너무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늘 자랑스러운 아들이어서 나도 고맙다.’ 지상에서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학문의 길로 돌아오셨습니다. 늘 자랑스러운 아들을 먼 곳에서도 말없이 응원하고 계시겠지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중국 역사를 원전 중심으로 좀 더 깊이 본 후 다시 진덕수의 <서산독서기> 번역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아마 원고지 분량으로 2만장쯤 될 텐데, 유학의 핵심개념이라 할 수 있는 덕(德), 인(仁), 음양(陰陽), 이기(理氣) 등 50여개 개념을 남김없이 풀어내는 책입니다. 기존의 우리 학계와는 다른 새로운 내용들이 얼마나 담겨 있을지 벌써부터 설레고 궁금합니다. 이처럼 진덕수를 통해 유학의 기초개념들을 충분히 익히고 나면 필생의 목표인 삼경, 즉 <시경> <서경> <역경>을 쉬운 우리말로 옮기려 합니다. 그때쯤이면 대학 2·3학년만 돼도 사서삼경 전체를 얼마든지 독파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저의 마지막 꿈이자 목표입니다. 아마도 그때는 제 나이도 60 중반쯤은 돼 있겠군요. 그때부터는 좀 놀아야겠지요.”
오랜 시간 공자를 연구하셨고, 신문기자로서 25년을 살면서 많은 지도자들을 겪어보셨을 텐데요, 깨달은 바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야 합니까.
“사서 중의 하나인 대학에 친민(親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존 번역서들은 그것을 ‘백성과 친하게 지내라’고 번역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친’은 제 몸과 같이 여길 ‘친’입니다. 그것은 지도자 자신이 개인적으로 즐거운 일이 있더라도 백성들이 고통스러울 때는 진정으로 고통스러워 해야 하고, 반대로 자신이 힘든 일이 있더라도 백성들이 즐거울 때는 마음속에서부터 즐거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 대통령도 그렇고, 다른 건 몰라도 ‘친민’의 정신은 부족한 듯합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어도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자질이라 여깁니다. 옛날에도 ‘친민’하지 않는 임금은 시골 백성들이 다 알아차렸는데, 지금처럼 매스컴이 발달한 사회에서야 그것을 금방 느끼는 것이지요. 다음에 어떤 대통령이 나올지 모르지만 제발 ‘친민’하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공자가 지금 정치판을 보고 있다면, 야당과 여당에 어떤 말을 하고 싶으실까요.
“역시 정명(正名)이겠죠. 본분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여당은 여당답고 야당은 야당다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여당은 책임감을 갖고 국정을 이끌어나가고, 야당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정부와 여당을 감시하고 채찍질하며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집권의 기대를 높여가야 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야 모두 크게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야 모두 공(公)에 대한 의식을 높일 것을 주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정치는 지나치게 패권주의로 흐르면서 공공성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실력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뜻만 좋다고 해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떤 스승의 영향을 받았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모든 저서의 서문에 감사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스승 두 분이 계시더군요.
“대학 때 김충렬 선생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셨지만 강의의 스케일과 내용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고, 늘 새롭게 연구된 결과만을 정리해 강의를 하셨는데 학생 때는 깊은 교감을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기자로 있으면서 자주 선생님을 찾아뵙고 자연스럽게 사제관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기자가 된 것도 실은 김충렬 선생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중앙일보> 뉴스위크에서 번역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 김용옥씨가 김충렬 선생님을 야비하게 비판했어요. 실은 저도 김용옥 교수에게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김충렬 선생님을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고 저건 아니다 싶어 <월간중앙> 1991년 6월호에 김용옥 교수를 반박하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게 계기가 돼 <문화일보>로 자리를 옮겼고요. 김충렬 선생님은 지금도 저에게 맑은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계십니다. 또 한 분은 한국외국어대학에 계셨던 이기상 선생님입니다. 오직 그분께 제대로 된 하이데거 철학을 배우고 싶어서 학교를 옮겼습니다. 고려대에서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 우연히 그분의 학위논문을 읽게 됐는데,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아, 우리나라에 이렇게 수준 높은 학자가 계시구나. 사실 철학의 텍스트를 읽는 법은 이기상 선생님께 다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는 서울대 철학과 석·박사 과정 학생들 중에 현상학·해석학·하이데거 등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다 외국어대로 와서 이기상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후 서울대 교수의 견제로 인해 다 돌아갔지만요. 그러다 보니 저와 몇몇만 선생님 곁에 남게 됐지요. 기자생활을 하는 저를 배려하기 위해 저녁 강의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기에 박사과정이라도 마칠 수 있었어요. 지금 제가 동양의 고전들을 파헤치고 있지만, 그 공부 방법은 오롯이 이기상 선생님께 배운 것입니다.”
이한우의 공부법이 궁금합니다.
“제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니 공부법에 대해 말한다는 게….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공부를 해온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면 학부 때 영문과를 다녔지만 관심은 사회운동과 사상 공부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철학 공부를 해야겠는데 철학과 교수님들이 써놓은 철학개론은 읽어봤자 직접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철학 공부를 하고 싶어하던 친구들과 영어권의 대표적인 철학사인 코플스톤의 <철학사>를 원문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9권짜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반쯤 읽었지요. 영어공부도 됐고 서양적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보다 깊게 이해했던 계기가 됐지요. 그 후에는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 나라의 언어로 된 대표적인 저작들부터 읽자는 생각이 뿌리를 내린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자본론>은 독일어로 읽어야 하니까 독일어를 공부했고요.”
관심 분야의 대표적 저작을 읽기 위해 언어를 배우고, 그 책들을 번역하게 되었군요. 공부하는 자세는 그러해야 하는데,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분야를 공부하게 되면 그 뿌리까지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나 전모를 파악하는 것도 필수적이고요.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대학원 시절 공부했던 독일철학의 방법론에서 배운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저의 이 같은 철저함과 전체 파악이라는 두 가지 기본원칙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저함’과 ‘전체 파악’이 교수님의 공부법이군요. 독일철학에서 배운 방법론이 동양철학과 역사를 파고드는 바탕이 된 거군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모두 아우르게 된 이유를 알겠습니다. <논어로 논어를 풀다>, <논어로 대학을 풀다>, <논어로 중용을 풀다>, <논어로 맹자를 읽다>를 저술한 이후에 조선 왕들의 필독서, ‘제왕학의 교본’이었다는 <대학연의>를 국내 최초로 번역하셨는데요. 군주가 받은 교육을 통해 한 시대가 결정되므로 군주의 리더십을 평가하려면 그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번역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대학연의>와 저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95년에 제가 이승만에 관한 연재를 하고서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문에 제가 이렇게 썼습니다. ‘1년 동안의 연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의 동양적 사고의 측면이다. 아마도 그 부분이 오히려 70%는 되지 않을까?’ 저는 이승만을 미화하는 입장도 비판하는 입장도 아닙니다. 그저 대한민국을 세운 큰 정치인의 인간적 측면과 정신적 면모를 파악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동양 정신세계를 전혀 모르니 그 사람의 깊이도 알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제가 택한 것이 <조선왕조실록> 전체 읽기였습니다. 2001년부터 2007년 동안 실록 읽기는 그에 관한 충분한 답을 주었습니다. 워낙 많은 뛰어난 조상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 중에서 특히 세종을 깊이 알게 된 것은 저에게 큰 수확이었지요. 그러고는 곧장 세종의 위대함의 정신적 원천을 추적하게 됐는데요. 그런 점에서는 천생 저는 역사학도라기보다는 철학도이지요. 그때 만난 것이 바로 <대학연의>입니다. 송나라 정치가이자 학자인 진덕수가 썼다는 이 책이 바로 성군 세종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서 한편으로는 기뻤고 한편으로 암담했지요. 제왕학의 교본을 통해 한 인간이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된 책이 없어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암담했고 안타까웠습니다. 실록을 읽고 단행본을 내는 작업을 해나가는 동안 줄곧 <대학연의>는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2007년 실록 읽기가 끝나자마자, 내가 직접 번역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한문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냥 한문공부만 했다면 저도 포기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사서삼경을 철저하게 뿌리까지 파고들면서 동시에 한문공부를 병행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재미도 있고 실력도 늘고. 그래서 6년이 지났을 무렵 사서삼경 중에서 사서 공부가 거의 끝났고요. 그때쯤 예전에 사두었던 <대학연의>를 꺼내서 읽는데 줄줄 읽히는 겁니다. 그게 2013년 5월이었는데요, 곧장 미친 듯이 몰두해 6개월 만에 원고지 7500장을 번역했습니다.”
그 방대한 작업을 6개월 만에 끝냈다는 건,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책은 구절구절 머리와 가슴을 때리면서 파고드는 구절들로 가득했습니다. 번역을 끝내놓으면 아직 남아있는 구절이 궁금해 못 견디게 하는 그런 책이었지요.”
제왕들도 <대학연의>를 읽으며 같은 생각을 했겠군요.
“그 책은 간단히 말하면 사서삼경에 들어 있는 대학이란 책의 체계를 빌려 사서삼경 전체를 재구성한 다음에, 그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내 리더십 갖추는 법을 제시한 다음, 그에 맞는 역사서 속의 사례들을 뽑아 재배치하고서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것을 세종은 경사(經史)통합 공부법이라고 불렀는데요. 오늘날로 말하자면 철학과 사회과학, 혹은 사회과학과 역사사의 통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후 세종은 이 경사통합 공부법을 기반으로 해서 독서를 계속 심화해 나가 결국은 위대한 임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지금 읽더라도 얼마든지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다움을 갈고 닦는 데 큰 도움을 주리라 여깁니다.”
진덕수가 지은 <심경부주>를 연이어 번역하셨습니다. <중종실록>에는 “어제 경연에서 부제학이 <대학연의>는 이미 진강하였으며, 진덕수가 지은 <심경>도 공부하는 데 매우 관계가 있다고 하였으니, 들여오도록 하라”는 구절이 있고, <현종실록>에는 “집의 이상단이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경전은 소홀히 하고 계시는데, <심경>, <대학연의>에 전심하여 급선무로 삼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이처럼 모든 실록에 진덕수의 책들이 언급되어 있다고요. 그의 <문장정종>은 최근에 번역을 끝내셨고, 계속 진덕수 연구에 몰두하고 계신데요, 그는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책 내용도 궁금합니다.
“진덕수라는 인물과 그의 저작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연의>를 끝내고서 그의 또 다른 저작인 <문장정종>을 2014년 11월에 시작해 지난 3월 말에 1차 번역을 마쳤습니다. 분량은 원고지로 1만4000장 가까이 되니 <대학연의>의 두 배가 넘습니다. 사실 이 책을 번역할 때만 해도 일종의 문장론이라 <대학연의>보다 재미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 그 책 이상의 의미와 흥미로 가득했습니다. 올가을에는 책으로 나오겠지요. 고대 중국부터 당나라까지 최고의 문장들을 모은 다음에 칙령·외교문서·상소·서사·시부 등으로 나눠 재구성하고 약간의 풀이를 덧붙인 것인데, 저는 서양에서도 이러한 방대하고 체계적이며 치밀한 문장론은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허약한 문장문화를 개선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리라 생각합니다.”
47권의 책을 낸 작가에게 진덕수의 문장론이 준 감동은 어떤 것일까요.
“저도 이번에 <문장정종>을 번역하면서 문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사실 20년 넘게 문장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에 있었는데도 좋은 문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확한 그림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기억에 남는 문장론이라 해봤자 이태준의 <문장강화> 정도였죠. 그러나 진덕수의 <문장정종>은 흔히 생각하는 문학적인 문장론이 아니라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문장, 즉 머리와 마음속에 들어 있는 생각과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결과물로서의 문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책의 앞부분이 황제의 칙령 및 외교문서로 시작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쓰는 글이 실은 칙령이나 외교문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옛날에는 더욱 그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옛 문장 중에서 관심을 갖는 실용문장은 상소문이나 대책문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좁은 시야에 대해 크게 반성을 하는 계기도 됐습니다. <문장정종>이란 말 그대로 문장의 바른 원류라는 뜻인데, 그 제목의 담대함만큼이나 그 내용은 신선하면서도 둔중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진덕수라는 인물의 편집능력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대학연의>도 그렇지만 <문장정종>을 보면 그가 왜 어떤 글을 빼고 어떤 글을 포함시켰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작은 설명 부분에서 진덕수의 정말로 탁월한 안목을 보게 됩니다.”
오래전, 페이스북에서 아버지 얘기를 읽은 적 있습니다. 학문을 사랑하고 정진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거름을 받은 덕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엄마’ 하고 울지 않고 ‘아부지’ 하면서 울었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불만이지요(웃음). 제 이름에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雨)자는 돌림이고 한(翰)자는 한림원 할 때의 한으로 글을 뜻합니다. 비 오듯이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쓰라는 뜻이라고 어릴 때부터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름 자체보다는 아버지의 그런 말씀이 저의 무의식에까지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래서 문필가라는 말을 자주 쓰셨습니다. 학자보다는 문필가가 되라고 하셨지요. 저는 별로 그렇지 못한데 아버지는 참으로 강직하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아니다’ 하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하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살이는 많이 힘드셨지요.”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여덟 살 이한우는 매달 아버지 회사로 배달돼 오는 <소년중앙>을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읽고 싶어서 30분을 걸어서 회사를 찾아갔다. ‘아직 책 안 왔다, 한우야. 집에 가서 기다려라.’ 수위 아저씨가 달랬지만, 우체부 아저씨가 올 때까지 소년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아버지는 뿌듯한 눈빛으로 어린 아들을 바라보셨다. 다음 달 책이 배달돼 올 때까지, 책 속 내용을 다 외우다시피 했다.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2003년, 아버지는 반복되는 갑상선암 수술 끝에 결국 성대결절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 전날 아버지와 마지막 육성 대화를 했다. ‘그동안 잘 키워주신 아버님 목소리 너무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늘 자랑스러운 아들이어서 나도 고맙다.’ 지상에서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학문의 길로 돌아오셨습니다. 늘 자랑스러운 아들을 먼 곳에서도 말없이 응원하고 계시겠지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중국 역사를 원전 중심으로 좀 더 깊이 본 후 다시 진덕수의 <서산독서기> 번역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아마 원고지 분량으로 2만장쯤 될 텐데, 유학의 핵심개념이라 할 수 있는 덕(德), 인(仁), 음양(陰陽), 이기(理氣) 등 50여개 개념을 남김없이 풀어내는 책입니다. 기존의 우리 학계와는 다른 새로운 내용들이 얼마나 담겨 있을지 벌써부터 설레고 궁금합니다. 이처럼 진덕수를 통해 유학의 기초개념들을 충분히 익히고 나면 필생의 목표인 삼경, 즉 <시경> <서경> <역경>을 쉬운 우리말로 옮기려 합니다. 그때쯤이면 대학 2·3학년만 돼도 사서삼경 전체를 얼마든지 독파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저의 마지막 꿈이자 목표입니다. 아마도 그때는 제 나이도 60 중반쯤은 돼 있겠군요. 그때부터는 좀 놀아야겠지요.”
이한우. 그와 두 번에 걸쳐 긴 인터뷰를 끝낸 뒤, 그가 하는 논어 강의를 찾아다니며 듣게 되었다. 대학교수, 법학자, 역사학자, 동양철학자, 대학생, 주부, 회사원, 출판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한우의 논어 강의를 듣고 있었다.
“‘중(中)’하고 ‘용(庸)’하라. 본질에 적중하고, 죽기 살기로 유지하라”. “논어는 ‘문(文)’으로 시작해서 ‘문’으로 끝난다. 문은 애씀이다. 애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강의를 듣고 나서, 노트의 첫 장에 꾹꾹 눌러 썼다. 본질에 적중하고 애쓰는 삶- 그의 모습이었다.
“‘중(中)’하고 ‘용(庸)’하라. 본질에 적중하고, 죽기 살기로 유지하라”. “논어는 ‘문(文)’으로 시작해서 ‘문’으로 끝난다. 문은 애씀이다. 애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강의를 듣고 나서, 노트의 첫 장에 꾹꾹 눌러 썼다. 본질에 적중하고 애쓰는 삶- 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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