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급진적 ‘민족차별 철폐’ 이뤄
[미래를 향한 추억]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쏘련의 민족정책
2014년 02월 11일 09:53 오전
쏘비에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대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직장 안전성, 즉 국가가 보장하는 취직의 기회이고 또 하나는 дружба народов, ‘제(諸)민족 친선’이라는 국가 정책입니다.
한국 독자들은 아마 앞부분은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특히 요즘 같이 정규직 취직은 아예 (거의 도달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평생의 꿈이 된 시대에는, 무직자는 물론이고 비정규직도 원칙상 없어야 했던 사회는 아마도 긍정적으로 재평가될 여지가 약간이나마 있을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아직도 광의의 ‘외국인/외국 출신’ 등이 2.7% 안팎 정도만 되는 한국의 경우에는 당장에 쉽게 그 중요성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諸)민족 친선’이 쏘련의 상징처럼 된 연혁을 약간 밝히고,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해서 그 허와 실을 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반도는 일제의 지배를 36년 동안 받았는데, 지금도 그 사실에 대한 집단 기억들은 상당 부분 한국인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예컨대 한국 지배자들은 아무리 같은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인 일본과의 군사협력을 공식화하고 싶어도, 인기가 뻔히 없을 그 정책을 ‘감히’ 펴지 못하는 실정에 있습니다. 일제 시대를 합리화한 교학사 교과서가 거의 채택되어지지 않은 것도, 식민지 시절에 대한 집단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은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러시아의 오래된 소수자 폄하와 배제
그런데 러시아 제국은 일부 소수자에 대한 꽤나 폭력적인 지배를, 36년도 아니고 400년 이상 해온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볼가 강 중역의 터키 계통 타타르 민족은, 1552년에 매우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복당한 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수십 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러시아 지배에 저항해왔으며, 또 과중한 세금 강요나, 이슬람 신도인 타타르 인들에게 기독교(희랍 정교회) 개종을 압박하는 등 각종의 차별과 불이익에 시달려왔습니다.
물론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전체 귀족층의 약 5%가 이슬람 신도였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타타르 등 이슬람계 소수자들의 지배층이야 제국 질서에 어느 정도 편입되긴 했지만, 평민들은 늘 경제적 억압과 민족 차별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보그롬”(유대인 학살)이라는 말이 세계 상당수의 언어에 외래어로 들어갈 만큼 유대인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차별과 폭력은 악명 높았으며, 예컨대 1860년대 이래 러시아에 건너가기 시작한 고려 민족(재러 교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의병 출신의 하급 자식인(서당 훈장) 이인섭(1888-1982)은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여정을 묘사하면서 제정 러시아에서 겪은 자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원동에 있을 때에는 대로씨아 민족주의자들이 조선 사람을 만나면 조선 사람들이 조이살 (좁쌀)을 먹고 산다고 ‘추미재’라고 천대하고서 심지어 ‘긔차’ 로씨아 민족들이 안즌 차 칸에은 조선 사람을 함께 안치지 안았고, 시비리에 와서은 ‘효쟈’, ‘솔네나다’라고 비소하면서 심지어 어너 식당이나 영화관에서도 함게 안지 못하게 배척하던 로씨아 사람인 볼세비키들이 동무 – 다왈씨 – 라고 대지고 회의에 참석시긔고 나중에 그들이 진행해온 비밀공작에 열성 참가하게 되였다” (이인섭, 『망명자의 수기』, 반병률 엮음, 한울, 2013, 237쪽)
이인섭은 그 회고록을 60~70년대, 중앙아시아에서 집필했는데, 그때까지 1910년대 원동(연해주)에서 쓰였던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모욕적 비칭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효쟈’는 화가(貨家), 즉 작은 규모의 장사꾼이라는 말의 중국어 발음의 와전인데, 이 말은 (일본인을 제외한) 조선인, 중국인 구별 없이 모든 동아시아 ‘황색 인종’에 대한 비칭으로 쓰였습니다. ‘솔네나다’는 “소금 필요 없다.”는 러시아어(соль не надо)의 와전인데, 중국인들이 빈소를 차릴 때에 사체를 보존하기 위해 소금을 이용한다는 것이 러시아인의 장례 풍속과 크게 다르다고 해서 놀림의 테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인섭이 그런 말들을 반세기 동안 기억하면서 살았다면 러시아인들의 차별에 도대체 어느 정도의 상처를 받았을까요?
그렇다면, 과연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인, 즉 다수자가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구도였는가 하면, 또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러시아라는 ‘주변부적 제국’(러시아 좌파 이론가 보리스 카갈리츠키의 용어)이 서구 자본에 종속돼 있었던 만큼 러시아 지배층 안에서도 ‘개명한 서구’에 보다 가깝다고 여겨졌던 러시아 서부 쪽 여러 민족적 소수자들의 엘리트들은 아주 강하게 대표됐습니다.
러시아 귀족층(1897년 현재 1,221,939명, 즉 제국의 전체 인구의 1% 이하) 가운데 폴란드인들이 28% 정도였고, 독일인들은 2%였지만, 귀족층 상층, 고관현직에서는 독일인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참고로, 구한말 한성에서 러시아 제국의 정책을 밀고 나갔던 러시아 공사 칼 폰 베버(1841~1910)나 알렉시스 폰 스페어 (1854~1916), 아니면 고려인들에게 특히 잔혹했던 골수 인종주의자인 원동 총독 파울 폰 운테르베르게르(1841~1921) 등은 다 독일계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고려인이나 중국인들은 물론이고 러시아 농민들마저도 ‘미개한 원시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제정러시아는 대단히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억압과 차별의 ‘피라미드’였습니다.
수많은 소수 민족들의 반란들이나, 1881~1900년 동안만 60만 명에 달한 유대인들의 미국 대량 이민이 잘 보여주듯이, 이 피라미드는 이미 1917년 이전에도 파열음을 내고 있었습니다. 각종의 피차별 소수자들이 총수로 따지면 러시아인보다 더 많았던 나라에서는 억압적이고 극도로 위계적인 ‘민족 질서’로는 건실한 근대국가를 아예 만들 수 없었습니다.
혁명 이후의 러시아, 1930년대 한국어로 교육과 재판 받았던 유일한 곳
1917년 혁명으로 민족 정책은 거의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일단 제국형 단일 국가는 가버렸으며, 매우 급진적인 형태의 연방제가 채택됐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있었을 때 쏘련 총인구 중에서는 러시아인이 아닌 사람들이 약 49%를 차지했는데, 그 만큼은 쏘련의 영토는 11개의 연방공화국과 20개의 민족자치주(АССР), 8개의 민족자치지역(АО), 그리고 7개의 민족 자치면(面, НО, национальный округ)과 33개의 민족 자치 소면(小面, национальный район), 또 거기에다가 약 8천 개의 민족 자치촌(村, национальный сельсовет) 등이 있었습니다. 과거 제국의 영토 절반 정도는 이렇게 민족자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게 된 셈입니다.
물론 쏘련의 공식적 주장과 달리 연방공화국은 ‘독립국가’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지 않았으며, ‘언제나 민족자결권을 행사하여 쏘비에트 연방을 이탈할 권리’를 가졌다고 보기가 힘듭니다. ‘나머지 세계’, 즉 자본주의 진영과의 대치 상황에서 사실상 적진에 가담할 권리를 쏘비에트 정권은 그 어느 연방공화국에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족 자치촌까지 모든 자치 기구에서는 일체 문서를 민족 언어로 작성할 권리와 재판 등 사법 절차도 민족 언어로 진행할 권리, 일체 교육을 민족 언어로 받을 권리 정도는 확보했으며, 가능한 한 주요 요직에서 ‘민족 간부’, 즉 해당 소수 집단의 출신들을 기용하는 것은 원칙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의 경우 1937년 강제 이주로 다 무산되고 말았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2개의 민족자치 소면(小面)과 70개 정도의 민족 자치촌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는 러시아어 아닌 고려 말, 즉 조선어로 사법과 교육이 이루어지며, 계속 늘어나는 식자들이 『선봉』 등 고려인 정기간행물을 구독했으며, 민족 교육 받은 젊은이들은 고려민족사범대학 등 민족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참, 1930년대에 일제 치하의 한반도를 포함해서 한국인이 한국어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나 고등교육(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쏘련 이외에 있었을까요? 그런 현실을 직면한 수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의 약속들의 현실성을 절감하여, 국내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다지 야심이 없는 지역민의 일상의 차원에서는, 언어나 문화 등의 측면에서 쏘련에서 살기는 매우 편했습니다. 일단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쏘비에트공화국(РСФСР)이 아닌, 다른 연방공화국에서 사는 이상 굳이 그 어려운 러시아어를 모국어만큼 배울 필요조차도 없었습니다.
1938년 이전까지 연방공화국에서 같으면 러시아어는 필수 과목조차도 아니었으며, 1938년에 필수화됐지만, 원칙상 여전히 주된 교육언어는 해당 공화국의 민족 언어였습니다.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쏘비에트공화국 안에서의 소수 집단이라 해도, 러시아어를 필수 과목으로 이수했다 해도, 교육 체계는 민족 언어 위주로 돼 있었던 만큼 굳이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예를 들어 1989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투바(Тува) 자치 공화국에서는 투바인들의 40% 정도가 러시아어를 충분히 구사하지 않았다고 나왔습니다. 즉, 우리가 일제 시대 때에 직면했던 ‘강제 동화’ 같은 것을, 쏘련은 원칙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노골적 강제는 아니었더라도 ‘중앙’으로 가면 갈수록 러시아어를 매우 잘 구사해야 한다는 것은 묵시적 요구로 제시됐던 것입니다.
쏘비에트 중앙의 무대는 상당한 민족적 다양성을 허용하긴 했는데, 1920년대 이후로는 다수자 문화에의 어느 정도의 ‘용해’는 불가피한 조건이긴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계량화해서 통계로 처리하면, 1910년대에 태어난 쏘비에트의 인민 예술가(즉, 국가적으로 공인 받은 최고의 예술인 : 연주자, 배우 등) 중에서는 러시아인들은 55%, 독일인과 폴란드인은 약 3%, 유대인은 약 8%, 이슬람계 소수자들은 무려 20%를 각각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민족적 구성이 다양해도, 인민 예술가쯤 되는 사람이면 보통 러시아어 구사 수준은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는, 국가에 더 핵심적인 엘리트 집단에서는 1930년대 초반 스딸린의 보수화 이후로는 뚜렷하게 ‘러시아화’, 즉 종족적 러시아인들의 우세 경향은 관찰됐습니다.
군의 경우 1944년에 장군급 장교들 중에서 러시아인들은 이미 무려 77%를 차지했으며, 유대인은 불과 3% 정도, 타타르족은 0.5%에 불과했습니다. 쏘련 후기로 가면 갈수록 군과 보안기관 등에서는 종족적 러시아인의 비중은 높아져가고 있었고, 그만큼 소수자 출신의 유식층의 불만도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소수만이 진출할 수 있는 ‘중앙 무대’의 문제였습니다. 예를 들어 군 장군이나 보안기관의 핵심 인물이 되려는 야심이라고는 그다지 없었던 나의 아버지 같은 ‘일반 유대인’ 입장에서는 이게 과연 그렇게까지 중요했을까요?
일단 군 기밀과 무관한 일반 직장에 취직하는 데에는 민족 차별은 거의 없었고, 1940년대 이후에는 유대민족 자치구역 이외에는 학교에서의 이디쉬어 교육은 잘되지 못해도 이디쉬 문학과 러시아어로 번역된 민족 문학은 꾸준히 출판되고, 또 이디쉬 문화 잡지인 『소비에티쉬 게임란드』(쏘비에트 조국)도 꾸준히 나와서, 유대인으로서의 문화생활에 그렇게까지 불이익 받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아픈 일상의 문제는 아마도 이인섭이 일찍 경험한 일상 속의 다수자에 의한 언어 폭력 같은 것이었는데, 공식적 통제가 가능한 곳, 예컨대 대학이나 직장 같으면 당 조직이나 청년당(Комсомол) 조직이 있을 때에 그 문제에 부딪치는 즉시 그 조직에 통보하여 공식적 해결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너, 유대놈.”(ты, жид) 같은 말은 ‘제(諸)민족 친선’이라는 공식 이념에 정면 위반됐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공식 조직에 호소하는 게 ‘고자질’로 인식돼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졌던 초중고 학급 사회나 군부대 사병들의 소(小)사회 같은 곳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학교나 군대라는 벽을 넘기만 하면, 유대인 등의 소수자는 비교적 편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단, 권력의 핵심에 가려는 야심이 없는 이상 말입니다.
쏘비에트의 – 공식 통계에 의하면 180개나 되는 – ‘제(諸)민족’들은 정말 ‘친구’가 됐을까요? 스딸린의 시절에 쏘련 사회가 보수화되고 10월 혁명의 국제주의 정신이 점차 사라짐에 따라서, 즉 국민국가의 질서가 확립됨에 따라서 민족 정책에서 온갖 왜곡들이 다 나타났습니다. 일단 고려 민족처럼 스딸린 시절에 ‘일본 정탐’ 무고를 받아 – 사실상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연해주에서 “국경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만들어진 혐의 – 죄 없이 집단적 처벌인 강제추방을 당한 일부 민족들은 아예 ‘민족 자치’ 시스템에서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유대인 같으면 절대 대다수는 그 자치 지역 밖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디쉬어 교육의 혜택 등을 거의 받을 수 없었습니다. 또 거기에다가 또 발틱 공화국들 등은 스딸린 시절에 사실상 강제적으로 쏘련에 편입됐으며, 그만큼 그 편입을 ‘식민화’로 인식해 독립을 지향했으며, 그런 움직임은 어떤 물질적 시혜로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발틱 지역은 쏘련에서 생활수준은 가장 높았지만 역설적으로 분리 독립 의지도 제일 강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권력 핵심층의 민족 편향은 논의했지만, 크고 작은 편향들은 곳곳에서 관료국가의 이런저런 정책 판단 오류나 소수자에 대한 편견, 불신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체첸-인구쉬 자치공화국에서는 숙련공의 대다수는 러시아인 등 ‘유럽계’ 민족들이었으며 체첸인들은 대개 농민으로 남았습니다.
그 결과로 스딸린 시기의 강제 추방 등으로 안 그래도 컸던 불만이 더 커져, 결국 1991년 격동 이후에 체첸에서 분리 독립이 시도되고, 이에 대한 매우 잔혹한 탄압은 러시아 역사의 커다란 오욕이 됐습니다. 위와 같은 스딸린 시대 이후의 사회 보수화, 소수자에 대한 괄시, 러시아인들의 주류화와 비(非)러시아인들의 열등의식과 원한 등은 결국 쏘비에트의 망국에도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스딸린의 반동, 그럼에도 가장 진보적 다문화주의 사회 쏘련
그러나 스딸린 이후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10월 혁명이 가져다 준 ‘민족차별 철폐’나 ‘소수자 우대’ 정책은 엄청난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소수자 언어에 대한 우대 정책, 민족 언어를 통한 민족 교육 진흥책 등은, 동화 없는 문맹퇴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은 문학 등 소수자 문화 육성 정책의 수혜자가 됐습니다. 키르기즈족 작가 아이트마토브(Чингиз Айтматов, 1928~2008)나 죽지족 작가 유리 르트해우(Юрий, 1930~2008) 같은 소수자 문인들이 국제적 문학 스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 그들의 민족 언어 작품들을 꾸준히 번역해 주고 출판해 주고 보급해 준 공산당 당국의 정책이 있었던 것입니다.
연방공화국이나 각국 민족 자치 단위에서는 무조건 민족 언어로 정기간행물을 내야하고, 서적을 출판해야 했던 만큼 각 민족의 언어에서 근대적 용어들이 만들어지고, 또 예컨대 10혁명 이전에 학술 전통이 없었던 많은 소수자 언어들을 학술 언어 등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인섭이 혁명 이전에 한 때에 겪었던 것과 같은 일상에서의 차별은 비록 남아 있었지만, 그 차별을 당의 기관에 고발하기만 하면 비교적 쉽게 시정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자들에게 큰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주의가 존재한다면, 쏘련의 민족 정책이야말로 다문화주의의 전형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것도 서구보다 훨씬 일찍, 훨씬 더 급진적으로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10월 혁명의 ‘여열(餘烈)’ 덕이었습니다.
2014년의 벽두, 탈(脫)공업화를 당하고, 남미 이상의 사회적 격차에 시달리고 수백만 명의 ‘불법 체류자”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해 자본이 축적을 하고 있는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약 48%의 주민들은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구호를 지지하고 ’이민 억제‘나 ’러시아인 우대‘를 원한다고 합니다.
쏘련 시절에 들을 수도 없었던, 그런 반인륜적 구호를 거의 절반 이상의 주민들이 지지한다 하니, 쏘련이 사회주의였나, 아니었나를 떠나 그 망국이 엄청난 사회적 퇴보를 의미했다는 것만큼 사실인 듯합니다. 지금의 러시아는 경제성장을 하는지 몰라다, 사회적으로는 많은 차원에서 퇴행하고 있으며, 각종의 모순만 누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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