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분단사’ 정면 돌파한 임미정 선생을 추모하며
등록 :2021-02-28
[가신이의 발자취] ‘남과 북의 경계인’ 임미정 선생을 추모하며
지난 2월 10일 별세한 자수연구가 임미정 선생의 영정. <통일뉴스> 제공.
- ‘박정희의 멘토’ ‘최초의 북한 밀사’
- 간첩 몰려 사형당한 황태성 조카
- 부친 임종업 황태성·박상희 ‘동지’
- 모친 황경임 대구인민항쟁 체포
- 15살 때부터 부모 옥바라지
- 1948년 모친 찾아 월북
- 김일성대 재학중 한국전쟁 참전
- 낙동강 전투때 낙오·체포 옥살이
- 90평생 ‘일기’ 현대사 사료로
지난 2월10일, 임미정 선생이 89살을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고인은 ‘최초의 북한 밀사’였으나, 박정희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사형 당한 ‘비운의 혁명가’ 황태성의 외조카이자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했다.
임 선생의 별세 소식을 바로 접하지 못해 늦게나마 추모의 글이라도 올리려 하니, 고인의 삶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천형과 같았던 가족사 안에서 해방공간, 한국전쟁, 5·16쿠데타 등 격동기에 고인이 겪었던 파란만장한 삶을 풀어가는 것으로 추모의 글을 대신하려 한다.
1960년 5월16일, 박정희 등 일단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탈취했다. 냉전체제 하에서 남한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의 정변을 예의주시하던 중, 쿠데타 세력 중에 박정희 등 과거 남로당 전력자들이 포진되어 있음을 간파한다. 이후 남한의 정세를 관망하던 김일성은, 쿠데타 세력에게 남북관계 정상화와 민족통일을 논의할 회담을 타진하기 위한 밀사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1946년 10월 대구인민항쟁 때 검거를 피해 북한으로 온 황태성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그때 황태성은 북한의 무역성 부상(장차관급)을 마치고 폐병으로 요양 중이었다.
1963년 9월28일치 <경향신문>에 보도된 ‘간첩 황태성 사건 진상공개’ 기사에 실린 황태성과 그를 도운 혐의로 연루된 권상능·김민하·임미정씨의 사진.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황태성은 일제강점기 내내 서울과 경북지역에서 사회주의운동·광주학생운동·신간회운동 등을 주도하다 여러차례 옥살이를 했다. 그와, 1946년 대구인민항쟁 때 경찰에 의해 사살당한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는 사회주의운동의 굳건한 동지였다. 박정희는 자신이 가장 존경한 셋째형과 막역했던 황태성을 젊은 시절 한때 멘토로 삼기도 했다.
황태성은 박상희에게 조귀분을 소개해 혼인으로 이어졌고, 이들 부부의 딸 박영옥은 훗날 박정희의 소개로 김종필과 결혼하게 된다. 황태성은 쿠데타 세력과 가까웠던 쌍용양회 사장 김성곤(그는 황태성과 함께 대구인민항쟁에 앞장섰다)과 조귀분을 통해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날 계획이었다. 황태성은 1961년 8월30일 서울로 들어와, 바로 김민하(당시 중앙대 강사·훗날 총장)를 만나기 위해 중앙대로 갔다. 두 사람은 경북 상주군 청리면 동향으로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황태성은 1959년, 외조카 임미정이 김민하의 친구이자 처남인 권상능과 혼인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북에서 우연히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며칠 뒤 임미정 부부는 김민하의 주선으로 황태성을 만났다. 세 사람은 황태성으로부터 민족의 공존과 평화를 열어갈 원대한 구상을 듣고는 그에 동감하여 황태성의 서울 생활에 필요한 여러 채비를 해줬다. 또 한편, 임미정 부부는 조귀분을 찾아가 황태성이 쿠데타 수뇌부와 만날 수 있게 주선해주도록 설득하는 등 적극 역할을 했다.
‘간첩 황태성 사형 확정’을 보도한 1963년 10월22일치 <동아일보>의 기사. 황태성은 그로부터 50여일 뒤인 12월14일 인천에서 전격 총살됐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적 정통성이 취약한 데다 좌익(남로당) 전력으로 인해 미국과 국내 우익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는 박정희로서는 쉽게 황태성을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좌익 콤플렉스와 항간의 숱한 억측에 시달린 박정희는 황태성을 남파간첩으로 몰아 형식적인 재판 끝에 1963년 12월 전격 처형했고, 황태성을 도운 김민하와 권상능도 구속되어 실형을 살게 했다.
임미정은 1932년 임종업과 황경임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부친 임종업은 황태성·박상희와 함께 경북지역의 ‘사회주의자 3인방’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쳐 수차례 구속되는 등 치열한 삶을 살았다. 임종업은 배재고보 시절, 황태성의 자취방을 드나들다가 그때 진명고녀 학생이었던 황태성의 여동생 황경임을 만나 1928년 결혼했다.
임미정은 김천의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김천여중을 다니다, 대구로 와 외삼촌 황태성의 집에 머물며 경북여중을 다녔다. 그 시기에 일어난 대구인민항쟁은 10대 중반의 어린 소녀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벅찬 삶으로 이끌었다.
1946년 인민항쟁에 연루된 황태성은 수배령을 피해 북으로 가고, 이어 47년에는 임종업·황경임이 체포되어 각기 5년·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5살 임미정이 홀로 부모의 옥바라지를 맡아 해야 했다. 이듬해 7월, 황경임은 재심으로 석방되었지만, 곧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참석차 북으로 올라갔다. 1948년 9월, 임미정도 단독정부 반대운동으로 경북여중에서 퇴학당한 뒤, 남로당 경북도당의 주선으로 북으로 갔다. 그때 산업성 지방산업관리국장인 외삼촌 황태성과 북로당 간부학교를 다니고 있던 어머니 황경임과 재회했다. 임미정은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편입하여 학기를 마치고, 1950년 4월 생물학부에 지원했다.
그러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임미정은 학업을 중단하고 6월27일 ‘김일성대학 해방지구정치공작대’로 선발되어 서울로 내려왔다. 임미정은 서울시청 입구의 계단에서 권총을 차고 대원들을 지휘하는 어머니 황경임을 만나기도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황경임은 1994년 89살로 북한에서 별세했다.
임미정은 1950년 9월 낙동강 전투에서 낙오되어 김천의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이때 한 친구로부터 1950년 7월 아버지 임종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사실을 전해들었다. 임미정은 1951년 9월 상주에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재심을 통해 54년 석방되었다.
황태성의 탄생 100돌인 해이자 사형 집행된 날인 2006년 12월 14일 경북 상주의 선산에 있는 묘에서 43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참배 행사가 추모연대 주최로 열렸다. 왼쪽부터 여섯째·일곱째가 권상능·임미정 조카 부부. <통일뉴스> 제공
그뒤 임미정은 권상능과 1956년 11월2일 독립운동가 장건상 선생의 주례로 결혼했다. 임미정은 1961년 10월 권상능이 황태성 사건으로 구속되자, 17살 처녀 시절 대구형무소에서 배운 자수 솜씨로 외삼촌과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1963년 12월10일 끝내 황태성이 총살당하자 부부는 그의 주검을 수습해 고향 상주의 선산에 모셨다. 임미정은 외삼촌이 지어준 호를 따 ‘자하자수연구소’를 차리고, 권상능과 함께 조선화랑을 운영했다.
임미정 선생은 파란의 한국현대사 속에 던져져 신산한 삶을 살면서도 틈틈이 메모한 일기를 남겼다. 이 기록은 한국현대사에서 잊혀진 장면들, 70여 년 전 한 맑은 영혼의 청춘이 조국과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몸부림친 족적을 소환한다. 어느 눈 밝은 연구자가 관심을 갖는다면, 고인에 대한 최상의 추모가 되리라.
김학민/전 경기문화재단 이사장·<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공동 저자
▶관련기사: 나를 꼭 죽여야 했소? ‘비운의 밀사’ 황태성 미스터리 53일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44526.html)
▶관련기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151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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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꼭 죽여야 했소? ‘비운의 밀사’ 황태성 미스터리 53일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984850.html?fbclid=IwAR1cikrZCAEP5oXQH0WnRjIpLQJJn18Q79R-BLPPByO6_SPobD0FTXEHO0k#csidxcec33acf709a7c4bbfc024ff535927b
Vladimir Tikho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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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 선생은...식민지 시대 사회주의 지향의 독립 운동자이셨죠. 임종업 선생도 그러셨고요. 황태성 선생은 1927년부터 경북의 조선 공산당 지회 활동을 하신 분에요. 신간회 관련도 하셨고요. 사실 국내 '정통' 사회주의 세력으로서 북조선에서 비교적 주류적 무대에서 활약한 경우죠. '간첩'은 전혀 아니었고 북남/남북의 어떤 자주적인 통일, 적어도 통일 지향적인 '교류'의 가능성을 타진하러 고향이었던 남한에 파견된 거죠. 만의 하나에 박정희는 이 기회를 살려 이북과의 '물밑 교류'를 시도했다면 어쩌면 1968년의 삼척 침투 사건 등등 그 후의 군사 갈등의 첨예화를 피했을 수도 있었겠지만....박정희에게는 한반도 평화보다는 미국의 인정, 그리고 돈과 기술이 필요했죠. 그렇기 위해서는 대미 충성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충성 과시의 방법은 바로 사회주의자 황태성의 목을 잘라 그걸 대서특필해 세상을 알리는 일었습니다. 이렇게 형의 막역한 친구의 '피'를 흘려 천조국에 대한 '적성'을 맹세한 셈이죠. 그런데 한반도로서는 이 길은 평화가 아닌 대립 심화의 길이었습니다....좌우간 황태성 선생의 독립 운동 공적이라도 정부가 언젠가 인정해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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