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로부터 해방된지 무려 74년. 적지않은 세월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광복이 내겐 남의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 어린시절부터 앉기만하면 옛날 시집 올 때, 또 시집 와서 울던 이야기를 하곤했는데,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날이면 날마다 그런 이야기를 해서, 그런 이야기만 나오면 "또 그 얘기냐"고 지겨워하며 안들으려한 못된 아들이었다. 그런 핀잔을 들으면서도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 때의 한이 풀리지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16살에 시집을 오셨다. 생일이 음력 12월14일이니, 만으로는 14살에 시집을 왔다. "뭐 한다고 시집은 그렇게 일찍 왔느냐"니 "누가 그렇게 어려서 시집을 가고싶어 갔겠느냐"고 말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1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바로 아래 남동생, 그 아래로 여동생이 둘이었다. 외할머니가 막내이모를 낳은 뒤 시름시름 앓아서 엄마는 어려서부터 부엌살림을 도맡아서 밥을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서당을 했는데도 장녀인 어머니는 글공부도 못하고, 식구들 밥을 하고, 병 든 어머니를 돌봐야했단다. 외할아버지는 글만 읽을줄 알았지, 집안 살림이라고는 아무 것도 할줄을 몰라서 10대 초반의 큰딸이 없으면 전부 밥숟가락을 놓아야할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외할아버지가 소녀가장이나 다름없는 큰딸을 시집 보내기로 한 것은 '공출'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위안부 징발을 지금도 '공출'이라고 한다. 그 때 공출 당하면 인생이 끝장이 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너도 나도 아직 크지도않은 아이들을 시집을 보냈고, 외할아버지도 급히 수소문해서 장녀를 시집 보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시집을 오는데, 어머니는 병이 들어 누워있지, 동생들은 "누나,언니! 가지마"라고 치마를 붙들고 놓아주지않지, 외갓집에서 황룡강을 건너 십여리길을 눈물로 왔다고 한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신방에 들어가긴해야하는데,
너무 어린 나이라 부끄러워서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밖을 서성이면서 외갓집 쪽을 바라보며 혹시 외갓집에서 밥하는 연기라도 오르는 것을 볼수 있지않을까하고, 망원경도 없던 시대에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글 만 읽는 선비여서 부엌에 한번 들어가본적도 없어서 온 식구들이 오늘도 굶고있지나않을지, 동생들이 누나, 언니를 찾으며 배고파 울지는 않을지 생각하면서 밤마다 눈물을 쏟았다는 것이다.
얼마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외할머니 기일과 외할아버지 생신 등 일년에 두세번 외갓집을 갔고,
그 때면 모처럼 며칠 따뜻한 밥과 반찬을 외할아버지와 동생들에게 해주었는데, 돌아올 때는 또 동생들이 울며 가지말라고 젖먹이 막내이모가 안놔주는 바람에 어머니도 외갓집에서 우리집에 오는 내내 엉엉 울면서 왔다며. "저 황룡강 물이 다 내 눈물이다"고 했다.
'공출'의 산증인이 지금도 그날들을 증언하는데, 아직도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부라는 이들이 있다니, 그 때 이야기를 하면 다시 눈물을 흘릴 어머니에게 차마 그런 말씀은 드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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