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老 기자의 역사적 증언: 처녀몰이
[AP통신 출신 元老 기자의 現代史 증언 (1)]
여자 징용의 경우 부락의 해당 여성들이 낮에는 산 속으로 피해, ‘모집’ 나오는 面 직원이나 경찰관 눈에 띄지 않도록 숨는 광경을 종종 보았습니다.
황경춘(체험수기 가작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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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은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수상자들의 작품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다섯 번째 작품은 황경춘 씨의 手記, ‘해방 직후 美軍 통역으로 근무한 AP통신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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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춘(1924~)
1924년 경남 남해 출생으로, 일본 주오(中央)대학 재학 중 日軍 ‘징병 1기’로 징집되었다. 1945년 8월 일본 패전 후 귀국해 美 군정청 남해 분견대 통역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신문 번역을 담당하는 직원으로 8년간 근무하다가 1957년 AP통신 기자가 되어 서울 주재 특파원 지국장을 지내는 등 30년 간 AP통신에서 일했다. 1992년 1월〈TIME〉誌 서울 주재 기자를 마지막으로 은퇴, 현재는 ‘자유칼럼’이란 인터넷 홈페이지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기사본문 이미지
황경춘 씨 / 사진은 10월26일 열린 ‘광복 70주년 現代史 체험수기 현상모집’ 시상식장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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挺身隊(정신대)와 慰安婦(위안부)
1987년 1월, 저는 30년 근무한 AP통신을 그만두고, 미국 주간지 〈TIME〉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死後(사후) 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진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이 땅에 부활하려는 시기였습니다. 이즈음〈TIME〉은 서울支局(지국)을 개설하고, ‘88 올림픽’ 취재를 무사히 끝낸 뒤, 노태우 대통령의 새로운 정권 하에서 전보다 훨씬 자유로운 취재활동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韓日 외교의 큰 문제로 등장한 게 戰詩(전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습니다.〈TIME〉도 이 관계 취재가 많아졌고, 특히 〈TIME〉이 발행하는 인물 중심의 자매 잡지인 〈People(피플)〉의 특별 요청이 있어, 저는 위안부 할머니의 인터뷰 기사를 취재하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위안부 관계 특종 기사를 쓴 1991년 10월 이후로 추정됩니다. 당시 사용한 취재 수첩이 분명히 어디에 있을 터인데, 정리정돈에 둔한 저는, 얼마 동안 이 수첩을 찾다가 포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제 기억을 중심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실토합니다.
용어의 혼동이 가져온 결과
이때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그들의 피해 회복을 위해 활동하는 사회단체 인사들만이, 용기를 가지고 몇 사람만의 위안부 할머니를 은밀히 만났습니다. 그 당시 국내 언론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外信(외신) 기자로 활동하는, 이 문제 취재를 자주 한 어느 知人(지인)의 소개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방문해 협조를 부탁했습니다. 당시 ‘정대협’은 서대문 로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정대협’ 직원이나 관련 인사들조차, ‘여자정신대’와 ‘戰時(전시) 위안부’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특히 태평양 전쟁 말기를 체험하지 않은 젊은 사람이 쉽게 빠져드는 혼동 중 하나가 이 ‘여자정신대’와 ‘戰時 위안부’ 용어였습니다. 이 두 가지 용어의 混用(혼용)으로,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기자의 위안부 특종 기사가 비난을 받았고, <마이니치(每日)신문>, <요미우리(讀賣)신문>, <산케이(産經)신문>, <홋카이도(北海道)신문> 등 많은 일본 신문이 이 혼동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일본 당국의 반격과, 위안부 문제 호도가 이 혼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戰後世代(전후세대)는 이 혼동의 함정에 빠지기 쉽지만, 이 용어들의 무분별한 사용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일본에게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불신하는 빌미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처녀몰이
1930년대 들어 중국 대륙에서 식민지 침략전쟁에 광분하던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이 법의 발효로,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통제나 徵發(징발)은 물론이고, 군인이 아닌 일반인의 노력 징발이 가능해졌습니다. 징병령이 시행되기 前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 법의 발동으로 壯丁(장정)의 노력 징발이 가능해졌습니다. 농산물 등 물자공출에 빗대어 ‘처녀공출’이란 말이 생긴 것도 이때였습니다.
남자의 징용에는 기혼·미혼의 제한이 없었으나, 여성의 징용에는 ‘14세 이상 25세 이하의 미혼 여자’라는 제한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징발된 여성은 병원 또는 軍需(군수)공장 등으로 끌려갔고, 그중 일부가 軍 위안소로 끌려간 것입니다. ‘처녀공출’이란 이름이 붙은 미혼여성의 강제 징발을 피하기 위해 나이 어린 처녀들의 早婚(조혼)을 했고, 이런 풍조는 조선 시골 농촌에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정신대’란 말은 남녀 차별 없이 이렇게 끌려 간 젊은이들을 美化(미화)해서 언론 등에서 쓰기 시작한 용어였습니다.
그러다가 전세의 악화로 더욱 다급해진 일제가 정식으로 ‘女子挺身隊令(여자정신대령)’을 발동한 것은 1943년 9월이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일본 전국의 14세에서 25세까지의 미혼 여성은 1년 기한으로 여자정신대원으로 ‘근로봉사’를 하게 되었고, 학도동원령에 의하여, 여자 중학생도 2학년부터 1년씩은 노력 동원을 하도록 했습니다.
저의 선친은 경상남도 남해군(섬)에서 중간 정도 수준의 地主(지주)였습니다. 행정 제도로 面(면) 아래 지금처럼 里(리)가 있었는데, 그 里가 자연부락 별로 區(구)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락에 구장이 있어 面 행정을 도왔습니다. 선친은 구장職(직)을 꽤 오래 맡았고, 또 일정 액수 이상의 국세를 납부하는 조선인만이 선거권을 가지는 面協議員(면협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습니다. 面內에서 소위 ‘유지’ 대우를 받는 부류에 속했습니다.
그런 관계로 징용 할당이 시달되면, 특히 여자 징용의 경우 부락의 해당 여성들이 낮에는 산 속으로 피해, ‘모집’ 나오는 面 직원이나 경찰관 눈에 띄지 않도록 숨는 광경을 종종 보았습니다. 일정 기한이 지나면 소위 ‘처녀몰이’(당시 일반인들은 처녀공출보다 처녀몰이란 말을 많이 썼던 것 같다) 수색이 끝나기 때문에 잠깐 몸을 피하게 한 것입니다. 이 ‘처녀몰이’ 기간이 지나면, 面 직원들이 가가호호를 탐문하고 다니는 수색이 일단 끝났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식량부족 등으로 생활이 궁해 이 징용에 자진해 참가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경우, 우리 마을에서 근로 동원으로 끌려가는 예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마을 여성이 항구를 거쳐 육지로 떠나기 위해 트럭 등으로 이동하는 것을 본 적은 있었습니다.
연탄집게로 당한 매질
이렇게 동원된 여성들이 모두 戰時 위안부로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여성도 18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 중부 도야마(富山)의 어느 제약 공장에 정신대원으로 갔다가 1년 근무 후 광복 전에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제 인터뷰에 응한 할머니 한 분은 甘言利說(감언이설)에 속아 중국으로 끌려갔고, 軍 위안부로 강제 수용되어 ‘性노예’ 생활을 했다고 눈물로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김포공항 근처 아파트에 살던 이 할머니는 ‘정대협’ 직원의 소개로 어렵게 취재에 응해준 두 할머니 중 한 사람이었는데, 이 분도 ‘정신대’로 공장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향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인터뷰한 두 할머니의 이야기 내용은 너무나도 비참하였습니다.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참혹한 인터뷰 내용 때문인지, 취재를 부탁한 〈People〉誌는 편집 방침이 바뀌었다면서 제 기사를 싣지 않았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접촉은 중지되었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들의 慘狀(참상)은 필자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한 할머니는 생리가 있다고 일을 거부했다가, 연탄집게로 매질을 당해 아직도 남아 있는 가슴과 어깨의 상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많을 때는 젊은 군인들이 위안소 앞에 줄을 서 순번을 기다렸다고도 했습니다. 광복 후,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 온 두 할머니는, 마음의 상처로 고향에는 못가고 피난민 수용소 등을 전전하다가, 정대협의 도움으로 간신이 아파트 한 칸씩을 얻게 되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신대’의 오해가 풀렸다고 해서, 일본이 조선 처녀들을 軍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다는 비난을 한국 측 억지라고 강변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1943년 이전, 즉 여자정신대령이 정식으로 발동되기 전에도 노력징용의 명목으로 ‘처녀공출’이 성행하고, 이중 일부가 軍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은 前述(전술)한 바와 같으며, 김종필 前 국무총리 등 많은 분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하고, 과거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가 <아사히신문>에 위안부 동원과 관련해 허위증언을 했다고 해서, 해당 신문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위안부 강제 동원 자체를 부정하는 증거는 아닙니다. 일부 일본 정치인과 지식인, 언론사 등이 이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같은 광복 이전 세대가 아직도 살아 있는 동안에, 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韓日 양국 정부의 異見(이견)이 원만한 타결점을 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묻지 마라 甲子生’
농경근무대! 한때 일제 식민지 정책인 滿洲(만주) 대륙 개척기에 사용했을 법한 이 생소한 이름의 부대를, 패전을 앞둔 일본군이 창설해 많은 조선인 징병 1기생이 이곳에서 고생하였습니다. 필자가 바로 그 한 사람으로 당시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합니다.
‘內鮮一體(내선일체)’, ‘一視同仁(일시동인)’ 등 사자성어 구호는 일본 본토인과 식민지인 조선반도의 우리 민족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日帝가 만든 대표적 선전구호입니다. ‘內鮮’이란 일본 본토를 內地(내지)라 부른 그들 법에 의한 것으로, 당연히 조선반도는 外地(외지)로 불렸습니다. 일례로 모든 잡지나 서적의 뒷면에 정가와 함께 송료가 표시되었는데, 內地와 外地의 송료가 달랐습니다.
국민의 가장 중요한 참정권 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인은 많은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國民皆兵(국민개병)’을 부르짖는 일제의 징병제도였습니다. 일본인들은, ‘국민총동원령’으로 조선의 인력이나 물자 공출을 강요했지만, 정작 자신들과 동일하게 총을 다루는 징병제를 조선에 시행하기까지에는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조선인들에게 남아있는 민족정신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일제는 지원병 제도만으로는, 병력이 부족해지자 교육받은 조선인들의 취직난을 빌미로 1942년 5월, 조선인 징병령을 시행했습니다. 그 징병 제1기생이 바로 ‘묻지 마라 甲子生(갑자생)’이란 말을 널리 퍼지게 한 1924년 甲子生들이 主를 이뤘습니다. 정확하게는 1923년 12월에서 1924년 11월 사이에 출생한 조선인 남자를 제1기생으로 발탁해, 1944년부터 징집하는 法이었습니다.
1941년 12월7일, 그때까지 중국만을 상대로 싸우던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 美軍 기지를 기습해 미국 등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한 소위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43년 3월에 경남 진주에 있는 진주공립중학교(現 고등학교)를 졸업한 필자는, 일본 도쿄에 있는 사립 中央(주오) 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였습니다.
戰勢(전세)가 기울어진 일제는 그해 가을에 學徒兵令(학도병령)을 내려 전국 전문·대학의 문과계 일본 학생에 대한 징병 연기특전을 폐지하고, 문과계 학과를 폐쇄하였습니다. 소위 ‘學兵(학병)’이 이렇게 탄생된 것입니다. 서울에서는 학과가 없어진 약 4300명의 조선인 대학생이 ‘부민관(現 서울시의회)’에 모여 조선총독(일본인) 이하 많은 사회 명사가 참석한 성대한 ‘壯行會(장행회)’를 가지고 일본군에 입대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인 전문·대학 학생 수는 약 630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학도병은 명목상 지원제였지, 징병령에 해당하지 않는 갑자생 이전의 조선인 학생이 軍 복무를 해야할 법률적 강제성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을 비롯한 모든 행정기관이 동원되어 학생들이 학도병에 지원하도록 强勸(강권)하였습니다. 물론 도피행각으로 지원을 피한 학생도 있었으며, 이들은 학도병 입대가 끝난 뒤에 당국에 자수하거나, 깊은 산속이나 해외로 도피, 광복 후까지 잠적하기도 했습니다.
‘아카가미’
학과가 폐쇄되어 本家(본가)에 와 있던 저에게도, 경찰서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의 학도병 지원 권유가 집요하게 계속되었지만, 징병 1기생으로 대기 중인 저는 한사코 거절하였습니다. 물론 학도병으로 지원하면 여러 특전이 주어진다는 달콤한 권유에 한때 솔깃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징병령은 다음해부터 실시되고 그에 따른 징병 신체검사 등 절차가 남아있어, 軍 입대에는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 지원을 거절했습니다. 軍 입대가 곧 ‘死地(사지)’에 가는 것이라고 당시 많은 사람이 생각했습니다.
징병 신체검사 결과는 ‘제1乙種(을종)’이었는데, 1944년에는 소집영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1945년에 들어 전세가 점점 기울어져 가는 3월 초, 당시 저승사자라 불리던 ‘아카가미(赤紙·적지)’가 드디어 제게도 나왔습니다. ‘아카가미’라 함은 일본말로 ‘붉은 종이’란 뜻이며, 이는 소집영장이 붉은 용지에 인쇄되어 우송되었기 때문입니다.
1945년 3월10일, 저는 서울 용산 19사단 26부대에 입대하였습니다. 4주 동안의 신병 기초훈련을 마친 뒤 기차와 關釜(관부)연락선 등 2주간에 걸친 지루한 수송 끝에 배치된 곳이, 무기 하나 없고 농기구만 창고에 가득찬, 동네 공회당을 개조한 兵營(병영)이었습니다. 동네 이름은 ‘茨城県 眞壁郡 谷貝村(이바라기현 마카베군 야가이촌)’으로 東京(동경)에서 약 50km 북쪽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부대 이름은 ‘제2농경대’였습니다.
몇년 전, 한국 정부에서 일본군에 복무한 사람을 대상으로 신고를 하라고 해 갔더니, 제가 복무한 부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의 사진이나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정부에서 주는 약간의 ‘건강수당’도 지불할 수 없다고 해, 등록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학병에 나갔던 대학 선배 한 분의 소개로, 일본군에 복무한 한국인 실태를 조사하러 서울에 온 한 일본 여학생이 저를 찾아와 인터뷰했습니다. 제가 농경대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그런 부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당국에서 연락이 와 제가 근무했던 농경대 기록이 발견되었다며, 등록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뒤, 저를 인터뷰한 일본 여성으로부터 일본에서 농경대에 관한 책이 발행되어, 자기가 그 書評(서평)을 썼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또 하나의 강제 연행, 수수께끼의 農耕勤務隊(농경근무대)》라는 제목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진 못했지만, 이 학생이 쓴 서평으로 농경대에 관한 이야기의 대강은 알 수 있었습니다. 아메미야 츠요시(雨宮剛) 라는 저자가 쓴 이 책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패전의 해인 1945년 봄, 일본군은 항공기 연료를 만들기 위한 감자 재배를 위해 일본 본토 內 5개소에 농경근무대를 설치하여, 조선에서 징병된 많은 젊은이가 농작업에 종사하였다. 이 농경대는 시즈오카(靜岡), 이바라기, 도치기(栃木), 아이치(愛知), 나가노(長野) 등 5현에 설치되었다.
著者는 어릴 때 고향에서 농경대원의 층격적인 참상을 목격한 것이 동기가 되어 이것을 파헤치려는 조사를 시작했다. 여러 증언과 사진 등을 증거로 알아낸 농경대의 내용에 의하면, 한 부대에 2500명, 한 중대에 250명 정도가 수용되고, 조선인 대원은 거의 일본어를 못하고 수 명의 通譯(통역)이 각 부대에 있었다.
그들은 삽과 곡괭이 등을 어깨에 메고 작업장으로 행진을 했다. 식량은 형편없이 부족해, 공복 때문에 절도질을 하다가 심하게 매를 맞는 것을 봤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이 동정해서 삶은 콩, 고구마 등을 주었다가 발견되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소나무(松)나 숙사 기둥에 묶여 木刀(목도) 등으로 구타당해 피를 흘리고 ‘아이고, 아이고’하고 비명을 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음 날에는 발을 절며 작업장에 나가기도 하고, 다리를 쇠사슬로 묶인 채 작업을 하기도 했다.>
아키오카 아야(秋岡あや)라는 당시 대학원생이 쓴 書評은 이렇게 맺었습니다.
<本書는, 이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농경근무대의 실태를, 성실한 청취와 조사를 통하여,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찾아 낸 연구 결과이며, 대단히 귀중한 것이다. 本書의 성과가 널리 일본 사회에 공유되고, 피해자 및 가족 여러분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 실현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베일에 싸였던 농경대의 實體
제가 복무한 농경대에서는 다행히 이런 비참한 경험은 없었습니다. 저의 농경대 경험을 쓴 글을 본 어느 지방 대학 교수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교수 부친도 어느 농경대에 입대했다가 한때 사망하거나 도주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광복 후 이 부친이 기적적으로 귀국했다고 합니다. 그 부친은 군대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그 교수의 부친은 돌아가셨고, 교수는 부친이 복무했던 농경대 생활이 궁금해 저를 찾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雨宮 씨 책에 의하면, 일본군이 농경대를 창설한 목적이 비행기 연료를 만들기 위한 감자 재배, 황무지 개간, 松根(송근) 채취 등 작업을 위해 한 부대에 2500명 씩 있었다고 하니, 도합 약 1만2500명의 조선인 징병 1기생이 이 농경대에서 근무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배치된 소대는 일본인 基幹(기간) 군인을 포함하여 50명 정도이며, ‘제2’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제가 있던 이바라기현에 같은 규모의 부대가 다섯 개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이 일본어를 몰랐다는 것을 보면, 농촌 출신으로 거의 無學(무학)인 조선 장정을 이용하기 위해, 이 새로운 부대를 창설한 것 같습니다.
1940년에 조선인의 일본어 해독률이 15.57%였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제 중학 동기 중에도 징병으로 소집된 친구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일반 부대에서 복무한 뒤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광복 후 저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인 장정을 활용하기 위해 창설된 특수부대가 농경대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끌려간 부대에서는 주로 ‘다코쓰보(문어 항아리)’라고 일본인이 말하던, 一人用(일인용) 참호를 파는 일이 主작업이었습니다. 이해 5월 경 오키나와가 美軍에 점령되어, 연합군의 다음 상륙지가 일본 본토 어디가 될 것인지, 軍이나 민간의 관심이 컸습니다. 일본 항복을 위한 비밀협상은 天皇(천황) 처우문제를 걱정한 일본군 강경파 반대로 지지부진 하였습니다.
그런 연합군 상륙작전에 적합한 지역의 하나로 꼽힌 곳이 도쿄 동북방에 있는 치바(千葉)현의 완만한 해안선 구주쿠리가하마(九十九里が濱)였습니다. 태평양에 면한 이 해안지대는 수심이 깊지 않아 상륙작전에 적합한 지역일뿐 아니라, 수도를 지키는 비행기지 중 하나인 가스미가우라(霞が浦)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제가 배치된 농경대가 있는 곳도 그 해안에서 가까운 마을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저희 부대의 主 임무는 일인용 참호 ‘다코쓰보’를 파는 것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삽과 곡괭이를 메고 가 부대 근처 황무지에 할당된 수의 참호를 팠습니다. 때로 근처 야산에서 땔감으로 쓸 잡목 등의 벌채도 하고, 때로는 農家(농가) 농사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작업 도중, 연합군 전투기의 低空(저공) 機銃掃射(기총소사)도 가끔 받았습니다. 다행히,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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