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둘러싼 차별어 - 어떻게 탄생해 쓰여왔는가 > 동포소식 |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조선'을 둘러싼 차별어 - 어떻게 탄생해 쓰여왔는가
몽당연필
21-02-21 00:46 | 43 | 0
우쓰미 아이코(게이센여자학원대학 명예교수)
● 1941년 도쿄 출생. 와세다대학 문학부, 동 대학원 사회학 전공 박사과정을 단위 취득 퇴학. 일본조선연구소 연구원, 인도네시아 파자자란대학 강사로 근무. 귀국 후 릿쿄대학, 도쿄도립대학 등 비상근 강사. 일본 식민지 지배 책임에 관한 서적을 다수 집필. 현재, 게이센여자학원대학 명예교수.
정리: 황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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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전후 미청산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에는 오랜 세월 동안 ‘꺼려지는 것, 증오하는 것, 부끄러운 것’이라는 이미지가 쌓여왔다. 일본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을 뽑아내고, ‘조선’이라는 말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대항의 언어를 계속 발신해야 한다.
‘조선朝鮮’, ‘선인鮮人, ‘북선北鮮’—‘일본에 의한 통치’를 의미
‘선인’이 단순히 국가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입니다.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병합’ 당시에 했던 발언이 있습니다.
‘오늘 공포한 병합 조약에 따라 한국은 제국에 병합되어 지금부터 조선으로 개칭하고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되어…’
이 문장에 나와 있듯이 원래 존재했던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을 ‘조선’으로 고치고, 일본 영토의 일부라고 규정했던 것입니다. 지배자들은 ‘조선’이라는 말을 ‘대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라는 의미를 담은 말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0월 무렵에는 이미 신문에서 ‘선인’이라는 말이 보이기 시작해 단기간에 일반화되었습니다. 그 흐름에서 ‘북선’, ‘남선’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이나 ‘북선’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일본에 의한 통치’라는 의미가 전체적으로 포함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조선 반도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조선’이라는 말과 표현은 같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는 이처럼 달랐습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모습. 우측 아래가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관동대지진 당시를 기록한 <군대일기>.
많은 조선인이 학살된 와중에 군대 내부자가 당시의 일을 자세히 적었다.
‘죽창으로 조선인을 죽여야 한다며 혈안이 되어 떠들썩하다’라는 기술이 있다
‘제3국인’—뒤틀린 식민지 의식의 발로
1945년 8월 일본 패전 이후 또 다시 새로운 차별어가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제3국인’이라는 말입니다. 원래 ‘제3국인’이라는 말 자체는 차별어가 아닙니다. 일본은 전쟁에 졌기 때문에 연합군(GHQ)이 점령해 통치했지만, 그들에게 일본인은 적국의 국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조선인이나 대만인도 살고 있었습니다.
GHQ는 조선인이나 대만인에게는 별도의 지령을 내려야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The Third National’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당시 점령 정책에서의 분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 일본인의 뒤틀린 감정과 반감이 담기게 됩니다. 1945년 8월 15일은 자신들에게 패전의 날이어도, 조선인들에게는 일본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날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인이 많았던 것입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고방식은 한국을 ‘병합’해서 영토를 넓히고 천황 아래로 사람들을 통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과 언어를 동화시켜 조선에서 황민화 정책을 강행했습니다. 일반적인 일본인에게는 ‘일본이라는 집안에 조선이라는 아우가 생겼다’라고 하는 발상이 선전되었습니다.
패전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기력을 잃은 일본인 중에는 ‘우리는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조선인은 저렇게 기뻐하다니 괘씸하다’느니, ‘기껏 돌봐줬더니 뒤통수를 쳤다’라는 식으로 강한 반감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뒤틀린 식민지 의식이 있어 ‘제3국인’이라는 말에는 ‘난폭한 조선인’, ‘무법을 저지르는 조선인’과 같은 의미가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패전 후 전쟁 재판—도쿄 재판은 물론 BC급(연합군이 선포한 국제 군사재판소 조례 및 극동 국제 군사재판 조례의 전쟁 범죄 유형. B항은 ‘보통의 전쟁 범죄’, C항은 ‘반인륜 범죄’-옮긴이)전쟁 재판에서도 식민지 지배 책임을 전혀 묻지 않은 채, 전후 시대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주의를 내부에 품은 평화와 민주주의였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춍チョン’, ‘북조선’—납치 문제가 결정적 계기
1948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공화국)이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다시금 한국, 조선을 대하면서도 식민지 지배 청산을 하지 않았습니다.
공화국으로 귀국 운동이 벌어진 1950년대 이후에도 미디어에서는 ‘북선 귀환’이라는 용어가 쓰였습니다. ‘북선’이 식민지 시대 용어라는 점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왜 ‘귀국’이 아니라 ‘귀환’이라고 했을까요? 공화국을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일 조선인은 전쟁 이전부터 이어진 모멸적인 ‘선인’의 이미지와 ‘빛나는 민주주의 국가 조선’이라는 이중 구조 안에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를 전후로 고등학생이나 젊은이들 사이에서 ‘쵸-센’, ‘춍’과 같이 새로운 차별어도 쓰였습니다.
1965년 ‘한일조약’이후 일본에는 한국의 정보가 들어오고 사람간 왕래도 활발해졌습니다만, 반대로 공화국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졌습니다. 귀국 운동으로 들끓었던 공화국에서의 생활이 녹록하지 않았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격렬했던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사회에서 생활이 어려운 건 패전 후 일본을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 있던 나라에 귀국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2002년 ‘납치 문제’는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 정부나 시민단체가 반조선·반총련 캠페인을 전개했고 ‘조선’에서 ‘북조선’으로 달라진 이미지가 따라다니게 됩니다.
과거에 우쓰미 아이코 씨가 집필에 참여한 책.
<조선인 차별과 언어>에는 기사보다 더 상세한 내용과 언어에 대응한 차별 경험이 담겨 있다
앞으로의 ‘조선’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일본은 조선반도에 어떤 일을 했는지, 그것을 바탕으로 조선과 국교 정상화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에 담긴 의미의 변천을 보고 있노라면 ‘조선’의 정의, 그것에 담긴 이미지는 시대와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일본인도 공화국으로 여행을 갑니다. 현재의 조선을 한 명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보는지, 보고 들은 것들을 강연회나 글을 통해 긍정적으로 발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교 정상화가 실현되고 공화국과의 왕래도 자유로워지면 다양한 정보가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조선’이라는 말의 의미는 다시 달라지지 않을까요?
해당 글은 <月刊イオ>(월간이어) 2021년 1월 호의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 : 몽당연필 번역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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