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지어 사태] 역사부정주의자는 왜 ‘계약’에 집착하는가?
입력 2021.03.13 (08:00)취재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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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버드대 램지어 교수 논문이 부른 파문이 한 달 째 이어지고 있다. 램지어 논문은 이미 국제 학문공동체에서 사망선고를 받았다.
학계에서는 호주국립대 교수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Suzuki) 발표 자료와 에이미 스탠리(Amy Stanley) 등 5개 나라 학자가 공동 집필한 <학문적 부정을 이유로 철회되어야 할 사례> 등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또 램지어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들인 '게임이론'도 경제학자들이 주도해 3,300여 명의 연구자들이 서명한 공개편지를 통해 터무니없음이 증명됐다. 램지어가 그나마 학자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논문 철회'다.
■ '위안부' 국제사회의 공동인식과 지지
램지어 사태로 우리 사회는 또 홍역을 치렀다. 하지만 반대로 국제사회의 공동인식과 지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하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 이후 오로지 진실 규명을 위해 달려왔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활동가. 그리고 수많은 사료를 발굴하며 역사부정주의자들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해온 학계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의기억연대와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나눔의 집 주최로 한국과 미국, 일본 역사학자들은 12일 긴급 토론회를 열었다. '램지어 교수 사태를 통해 본 아카데미 역사부정론'이라는 주제다.
학자들이 분석하는 램지어 사태 본질을 보자.
호사카 유지 /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
호사카 유지 /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
■ 램지어가 끌어들인 '계약'
램지어는 위안부 모집 업자와 여성들이 신뢰할 수 있는 성매매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위안부는 성 노예가 아니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한 일본군 헌병의 고백을 들며, 램지어가 이런 역사적 증언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1940년 여름 (중국) 난닝 점령 후 나는 '육군 위안소 북강향(北江鄕)'이라는 간판을 내건 위안소를 매일 순찰했다. 군이 위안소를 개설했으니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라는 여단 사령부의 지시 때문이었다. 15명 정도의 15살부터 23살인 젊은 조선인 작부를 거느린 경영자 황 씨는 지주의 둘째 아들이며, 소작인 딸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도항해 왔다고 얘기했다. 계약은 육군 직할의 다방, 식당이라는 얘기였지만 오빠라고 그를 따르는 젊은 여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해야 하는 책임을 깊이 느끼는 듯했다."
(일본군 헌병대 조장 스크지 타쿠시로『헌병 하사관(憲兵下士官)』 1974)
김창록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창록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램지어 '계약' 〓 日 '강제연행 없었다'
그럼 램지어는 왜 이 같은 역사적 증언과 사료, 연구 자료가 존재하는데도 옛 일본 공창제의 '계약'을 끌어들여, 위안부와 업자가 자율적인 '계약 관계'였다는 논리를 폈을까?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램지어가 "일본의 '강제동원 없었다' '성 노예가 아니다'는 주장에 '자유 계약'이라는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를 제공해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램지어의 글에도 일본의 국가기관인 "일본군이" "필요로 했고" "부추겼고" "협력했고" "요구했고" "약속했고" "위안소를 세웠고" "허가했고" "금지했고" "명령했다"고 서술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것만으로도 일본은 당시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고, 국가 책임이 발생하는 것인데, 램지어는 사적인 '계약 관계'였다는 주장으로 이 책임에 면죄부를 제공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위 사진은 1월 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일본군 위안부 승소 판결'이 나자 2월 1일 보강되어 게시된 일본 외무성의 『위안부 문제』라는 공고문이다.
'1965년 종결' '2015년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기존의 태도와 함께, 역사부정주의자들이 앵무새처럼 내뱉는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 연행을 직접 가리키는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 "'성 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반하는 것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다.
일본이 말하는 강제연행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2007년 아베가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관헌이 집에 쳐들어가 사람을 유괴하듯이 끌어간다고 하는 그런 강제성"이라며 강제성 의미를 자의적으로 한정했다고 지적했다. 또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이라고 범위까지 정해, 실제 강제성을 증명하는 국제사회의 수많은 사료와 증언, 그리고 규명이 끝난 인도네시아 스마랑 사건과 같은 실체마저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명령한 문서가 없다고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일본의 이런 논리는 일본에서만 통하는 어설픈 은어라고 김창록 교수는 지적했다.
램지어가 1991년 일본 공창제를 분석하며 내놓은 '계약' 논리를 2021년 터무니없이 위안부에다 끌어다 쓴 것은 일본의 이 궁색한 논리에 비켜갈 길을 터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김득중 박사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
김득중 박사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
■ 역사 논쟁의 주전장(主戰場) '미국'
학계는 미국 하버드대 교수 '램지어'라는 인물이 갑자기 등장한 것에도 주목했다. '하버드 대학교수' '국제학술지'라는 권위를 빌려 역사부정주의 주장이 미국에서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 김득중 박사는 "역사부정주의자들이 미국에서 계속 소녀상이 세워지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 불리한 상황에 대한 대응 수준에서 미국을 주전장(主戰場)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전략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여론을 일본에 우호적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이 저변에 있다"는 것이다.
김창록 교수도 램지어의 주장은 '강제연행 입증 자료 없다' '성 노예가 아니다'는 일본 역사부정주의자들의 주장, 그리고 그것을 빼닮은 한국 역사부정론자 주장이 망라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조직과 인물, 활동, 이념, 재정적으로 연계를 점점 강화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미국의 역사 부정주의 진영이 언제든 제2, 제3의 램지어를 또 내세울 수 있다는 거다. 그런다고 진리가 바뀌는 일은 없겠지만, 이 문제를 담대하게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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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봉
안양봉 기자 beeb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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