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7

[포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의 삶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포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의 삶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포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의 삶

등록 :2019-03-03


2017년 8월 8일 전남 담양군 자택에서 만난 곽예남 님. 담양/이정아 기자 leej@hani.co.kr1925년 전남 담양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 집의 2남 3녀 중 셋째 딸.

아이가 자랐고 일본의 폭압도 점차 거세졌다. 일본군의 ‘처녀 공출’을 피하기 위해 그 부모는 혼인을 시켰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결혼 뒤 100일도 되지 않아 처녀 공출을 가게 된 시누이를 대신해 시집이 며느리를 보내려 한 것이다. 친정으로 피해왔지만 은신은 길지 못했다.

1944년 봄, 동네 여성 다섯 명과 뒷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던 아침에 변은 벌어졌다. 힘으로 몰아치는 일본 순사에게 연행된 그는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 기차에는 같은 동네 여성들 외에 6~7명이 더 타고 있었다.



2013년 4월 5일 대전의 한 한방병원에서 병상에 앉아 있는 곽예남 님에게 양노자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처장(왼쪽)이 안부를 묻고 있다. 할머니는 2015년 12월 폐암 4기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나, 다행히 병세의 진전은 더뎠다. 대전/이정아 기자그렇게 끌려간 곳, ‘위안소’에서 조선 여성은 ‘위안부'가 되었다. 24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2층 건물. 조선인도, 중국인도, 일본인도 있었지만 모두에게 기모노가 입혀졌다. 단독 외출은 허용되지 않았고, 관리인의 동의를 얻어 두세 명이 동행해야 위안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루 세 차례, 방에 있는지 검사를 받았다. 해방 덕에 지옥 같은 그 시간이 1년 반에서 끝난 것을 차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해방 뒤 그는 고국에 돌아가길 바랐으나, 귀향은 쉽지 않았다. 그를 데려갈 때에 일사불란하게 작동했던 일본군의 시스템은 멈추어버렸다. 중국말을 잘 몰랐던 할머니는 해방 뒤 고향을 묻는 중국 관리에게 ‘광주, 대명(담양)’을 말했으나, 관리가 이를 중국 광동성의 광주로 잘못 이해한 탓에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을 떠돌았다. 구걸로 삶을 이어가던 그는 안후이성 숙주에 이르러서야 겨우 정착했다.



고국보다 중국에서 지낸 삶이 더 길었던 곽예남 님은 한국어를 대부분 잊었다.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을 위해 몸짓·표정 등 언어 외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각종 농사도구 이름이며 해방 전까지 쓰던 낱말 일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담양/이정아 기자

곽예남 님은 광주·전남의 유일한 생존 위안부 피해자였다. 2017년 8월 조카와 함께 살던 전남 담양 자택, 할머니의 방. 담양/이정아 기자중국에서 60년 가까이 생을 이어가면서도 조선의 국적을 놓지 않았던 그가 2004년 문화방송 프로그램 ‘느낌표' 팀을 만난 건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이후 방송사와 한국정신대연구소의 도움으로 2004년 국적을 회복한 그는 고국에 돌아와 남은 가족과 극적으로 만났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고향에 부모님은 없었다. 딸을 빼앗긴 아비는 그 이듬해 화병으로 숨졌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부모는 임종 때에도 잃어버린 딸을 잊지 못했다고 가족은 전해주었다.



2004년 4월 방영된 문화방송(MBC) ‘느낌표’ 의 한 장면. 방송인 윤정수 씨가 당시 중국에 거주하던 곽예남 할머니를 찾아가 함께 대화하고 있다. 문화방송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월 4일 오찬을 함께 하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첫 정부 기념식이 열린 2018년 8월 14일 오후 충남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 안 모란묘역에서 참석자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이용수 할머니, 문재인 대통령, 김정숙 여사, 곽예남·김경애 할머니.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선풍기들이 모두 할머니들을 향하고 있다. 천안/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조국은 반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그를 다시 품었고, 우리는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만 기억하지만, 그에게도 애끓는 심정으로 딸을 기다린 부모가 있었고, 봄날 나물 캐던 아름다운 청춘의 시기가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그의 신산한 삶이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향년 94. 지난 1월 28일 김복동 님의 별세에 이어 올해 세 번째 들려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궂긴 소식이다. 이제 남은 피해 생존자의 수는 22명으로 줄었다.



곽예남 님이 2013년 4월 5일 대전의 한 한방병원에서 병상에 앉아 있다. 대전/이정아 기자3월 2일 토요일 오전 숨진 그의 빈소는 전주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4일 치러진다.

곽예남 님, 고단한 삶 접고 이제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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