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2

EBS '위대한 수업' 석학 이렇게 섭외했다 - PD저널

EBS '위대한 수업' 석학 이렇게 섭외했다 - PD저널

EBS '위대한 수업' 석학 이렇게 섭외했다
[제작기] 세계 석학들의 지적 향연 선사하는 EBS '위대한 수업-그레이트 마인드'

최현선 EBS PD
승인 2021.10.20 

조지프 르두 교수는 5시간에 걸쳐 EBS '위대한 수업' 강연을 진행한 뒤 소속된 밴드 ‘아미그달라로이드(편도체)’의 곡인 ‘공포(Fearing)’ 공연까지 선물해줬다. ⓒ최현선 PD 제공

[PD저널=최현선 EBS PD] 보스턴에서 에스테르 뒤플로 교수(MIT, 역대 최연소, 두 번째 여성 노벨 경제학상 수상) 촬영이 끝나고 그를 배웅하던 길,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는 그의 손에 시선이 갔다. ‘KF 94, 황사 마스크, 대형’라고 적힌 한글을 보고 물음표가 가득한 내 시선을 의식한 뒤플로 교수가 마스크를 들더니 말했다. "저는 한국 마스크만 써요. 안전하니까."

방탄소년단과 삼성의 콜라보 영상이 뉴욕 타임스퀘어 메인 전광판을 빛내고 핼러원을 맞아 <오징어 게임> 코스튬이 세계 각지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오늘, 김연아·박지성 등의 스포츠 스타로 시작한 ‘두유노클럽’의 명단은 하루가 다르게 각양각색으로 늘어나고 있다. 문화 콘텐츠로 국가 자체가 거대한 브랜드가 되어가는 이 시기에 EBS도 세상을 향해 당찬 도전장을 내밀었다. 가장 잘하고 자신 있는 고급 지식 콘텐츠, 바로 ‘강연’으로 말이다.

지난 8월 말,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의 석학 라인업이 공개되고 연일 각종 언론과 커뮤니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 석학들을 어떻게 다 섭외했냐’며 EBS 수신료의 가치를 찬양하는 글 가운데 누군가가 ‘강연 안 오시려고요? 저희 폴 크루그먼은 이미 섭외했는데...’라는 섭외 기법을 사용한 게 아니냐고 한 댓글에 실소가 터졌다. 어떤 면에선 사실이기 때문이다. “EBS <위대한 수업>에 조지프 나이, 에스테르 뒤플로, 폴 크루그먼, 유발 하라리, 마이클 센델, 주디스 버틀러 등이 강연을 했는데요, 세계적인 석학인 당신도 꼭 모시고 싶어요.” 답장이 없는 이에게 내가 보낸 메일의 첫 문장이었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는 만 2년이 되어가는 코로나19로 심화된 계층 간 지식 격차와 SNS를 통해 쏟아지는 가짜 정보의 홍수 속에 세계 최고 수준의 지식을 대중적으로 보급해 ‘지식의 민주주의’, ‘교육 혁명’을 구현한다는 목표로 기획됐다.

목표는 거대했지만 엑셀에 섭외하고 싶은 석학들의 이름을 나열하다 보니 너무 현실감이 없어 허무맹랑한 생각마저 들었다. 가능할까? 라는 의심은 차곡차곡 현실이 되었다. 석학당 적게는 50개, 많게는 300개가 넘는 메일을 주고받았다. 때로는 당사자에게, 그들에게 닿지 않으면 비서나 담당자에게, 그마저도 안 되면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영미 출판사, 그들의 아는 사람을 통해 연락하고 또 연락했다.

답장이 없으면 현지 시각으로 월요일 오전 9시가 되자마자 메일을 다시 보내기도 하고, 연락이 닿지 않으면 서류를 택배로 보내기도 하고, 연사 트위터를 새글 알람 설정을 해두고 글이 올라오면 잽싸게 멘션을 달기도 했다. 물론 늘 통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진심은 통했다. 모든 게 디지털화되었지만 사람의 진심과 정성만큼은 언제나 아날로그다.
지난 8월 30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마인즈'. ⓒEBS

뇌과학계의 거장이자 뉴욕대 신경과학센터 교수 조지프 르두는 당초 바쁜 스케줄 때문에 1시간의 ‘인터뷰’ 촬영만 승낙한 상태였다. 하지만 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본인의 모든 저서와 논문을 깊게 연구한 제작진 열정에 반해 ‘강연’을 진행하겠다고 먼저 제안해왔다. 특히 당시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았던 <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 원서를 정독하고 소통하는 제작진 노력에 깊은 감명을 표하기도 했다. 조지프 르두 교수는 5시간에 걸쳐 강연을 진행하고 소속된 밴드 ‘아미그달라로이드(편도체)’의 곡인 ‘공포(Fearing)’를 기타로 연주하고 노래하며 멋진 공연을 선보이기까지 했다.

논문 및 저서를 공부하고 직접 끈질기게 섭외하는 과정에서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 석학들에게 촬영 전 직접 그린 초상화를 선물했는데,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 댄 애리얼리는 프로듀서에게 직접 그림 선물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하기도 했고, 자택에 초대한 리처드 니스벳 교수는 본인의 딸이 화가라며 그 자리에서 직접 소개를 해주기도 했다.

사실 <위대한 수업>팀에 지원해 발령을 받았을 때는 교과서와 전공 서적에서나 보던 석학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렜다. 하지만 출국을 했던 5월은 더욱 짙어진 팬데믹 상황임을 물론, 아시아 혐오 범죄 기사가 연일 터지던 상황이라 해외 출장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코로나 상황이라 기존의 해외 촬영처럼 카메라 감독이나 연출팀 등 한국에서 스태프를 데려갈 여력도 되지 않아 PD 한 명씩 홀로 해외로 떠나야 했다. 오죽하면 제작진끼리는 ‘배우자와 자식이 없는 미혼 PD만 이 프로그램을 담당할 수 있다’며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방송 제작 현장은 더욱 막막했다. 촬영 전후로 교수와의 소통은 물론, 새로운 석학을 현장에서 섭외하고 또 현지에서 촬영팀을 꾸리고 장소까지 물색하려니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랐다. 그럼에도 힘을 낼 수밖에 없던 이유는 유일하게 현장에 있는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상황이 바뀌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 교수 등 강연에 응해준 석학들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전달해주기도 했다. ⓒ최현선 PD 제공

폴 크루그먼 교수의 촬영을 위해 17곳의 장소를 물색했다. 뉴욕 맨하탄과 브루클린 지역에 내 발 길이 닿지 않은 스튜디오가 없을 정도였다. 원하는 장소를 제작비로 감당할 수 없어서 촬영 전후 청소를 자청해 비용을 30% 이상 깎기도 했다. 예산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면 더 발로 뛰어야 했다. 통역도 없이 혼자 철저한 자본주의인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랬다.

현지 카메라, 조명, 오디오 스태프 등의 포트폴리오를 일일이 확인하여 오디션을 보고 업무를 도울 현지 프로덕션을 직접 섭외했다. 좋지 않은 제작사를 만나 촬영 중간에 스태프를 교체하기도 했다. 젊은 미국인 조연출을 구해 밤낮없이 업무 연락을 하는 등 한국식 업무 강도를 알려주다 손절 당할 뻔하기도 했다. 물론 그와는 지금 눈빛만 봐도 원하는 걸 아는 둘도 없는 짝꿍이 되었다.

누군가는 석학이 미국, 영국 등 백인 남성에 치중돼 있다는 지적하곤 한다. 주디스 버틀러, 에스테르 뒤플로, 리사 랜들과 같은 각 분야의 손꼽히는 여성 석학도 촬영을 마쳤고, 입국 제한 등으로 대면 촬영을 진행할 수 없었던 반다나 시바(인도), 오드리 탕(대만), 안도 다다오(일본) 등의 다양한 국적의 석학 역시 촬영을 앞두고 있음에도 말이다.

물론 현시점으로 석학의 궤도에 오른 인물 대부분이 백인 남성이라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어느 나라가 아직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어느 나라는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을 했다. 그사이에 제곱으로 벌어진 지식의 격차를 줄이려는 게 제작진이 추구하는 목표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가 장수 콘텐츠가 되어 10년이든, 20년이든 지속된다면 그때는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더 다양한 석학의 강연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시기가 너무 멀지 않길 바란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는 국내용 단발성 TV 프로그램에 그치지 않는다. 올해 12월 글로벌 OTT 플랫폼(www.thegreatminds.com)을 오픈해 6개 언어(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전 세계에 제공할 예정이다. 당신의 강연을 통해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길 바란다는 댄 애리얼리 교수의 말처럼 석학의 수십 년의 업적이 고스란히 녹은 질 높은 강연을 통해 시청자들이 보다 나은 삶을 영유할 수 있길. 한국을 넘어 세계로, 내년에는 <위대한 수업, Great Minds>이 ‘두유노클럽’에 입성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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