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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대 이락선 논쟁 1963년7월16일자 조선일보 1면에 종교인 함석헌의 기고문이 '3천만의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는 제목으로 실렸다. 함석헌은 박정희의 쿠데타 직 후월간지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란 제하의 글을 실어 군사혁명 을 신랄하게 비판했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군사혁명의 불가피성을 인정 하고 있던 당시 확실하게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글로서는최초였다.7일 간 연재된 조선일보 기고문에서도 함석헌은 '씨알 중에 지극히 작은 씨 알의 하나인 이 사람은···'으로 시작해 박정희 정부를 전면적으로 부 인하는 주장을 폈다. <박정희님, 당신은 군사 쿠데타를 한 것이 잘못입니다. 나라를 바로 잡자는 목적은 좋았으나 수단이 틀렸습니다. 수단이 잘못될 때 목적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데모크라시입니 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은 서울대 종교학과 신사훈(뒤에 대한 예수교 장로 회총회장) 교수가 기고한 것이다. 학구적으로 쓰여진 신교수의 반론은 독자들에게는 인기가 낮았던 것 같다. 8월3일자 조선일보가 한 면을 털어서 소개한 독자들의 반응은 함석헌 지지 8건, 신사훈 지지 1건이었다. 함석헌은 7월22일 오전 서울시민회관에서 '귀국 보고 강연회'를 가졌 다. 3천5백명을 수용하는 시민회관의 1, 2층이 꽉 찼다. 주로 청년, 학 생들. 입장하지 못한 청중들은 바깥에서 '스피커를 바깥으로 내어 달라' 고 아우성을 쳐 기마경찰이 질서유지를 위해 출동할 지경이었다. 당시 62 세이던 함석헌은 '내 진단에 의하면 국민들은 군정을 원치 않으며 군정 의 업적이 있다면 물가고에 국민을 허덕이게 한 것뿐이다'라고 비판했다. 이후 함석헌의 대중 강연은 대전 등 지방으로 이어졌다. 그는 '군인 은 군복을 벗고 3년이 지나야 사람이 된다' '반드시 군에서 혁명이 일어 날 것이다' '군인들! 상사의 명령에 기계처럼 움직이는 졸병들'이란 표 현을 쓴 것으로 최고회의에 보고되어 군인들을 격앙시켰다. 함석헌은 예정된 강연이 취소되는 일이 일어나자 이것이 군사정부의 압력 때문이라고 격분하여 8월16일자 동아일보에 '정부당국에 들이대는 말'이란 글을 실 었다. <묻노니, 정부당국 여러분. 낡은 정치의 부패와 무능을 한번 쓸어버 리고 경제부흥을 첫째로 하겠다고 했고, 약속의 2년이 다 지난 오늘엔 그 기다렸다던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가'는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이 '나'라고 해서, 땟눌러 앉아 정권을 쥐려고 하는 여러분. 당신들은 이 나라를 어떤 나라로 알며 이 민중을 무엇으로 아나.>. <말 못하는 민중이라 업신여기지 마. 어리석어 그러는 것이 아니다. 착해서 그러는 것이지. 무지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도리가 우리 속에 있어 그러는 거지. 겁나서 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크기 때문에 그러는 거지. 민중이 내 말을 듣고싶어 하는데 왜 내가 말하는 것을 방해하나. 대답하라. 천하에 내놓고 대답하라. 대답이 나오는 때까지 나는 물을 것 이다.>. 함씨의 글이 나간 다음날 임성희공보부 장관은 '새디즘적 정신이상 현상자'라고 비난하고 ' 종교인의 탈을 쓰고 일부 정파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정희의 대리인으로서 함석헌에 대한 반격에 나선 것은 '5·16혁명기록의 사관' 이낙선중령이었다. 최고회의 공보비 서이던 그는 8월22일부터 3일간 동아일보에 '들이대는 말에 갖다 바치는 말씀'이란 제하의 글을 실었다. 그때 이낙선의 나이는 36세. 60대 민간 지식인과 30대 젊은 장교의 대 결이었다. 이 논전은 군과 민, 구세대와 신세대, 서구적 민주주의와 민족적 민주주의의 대결로 의미가 부여되는 제5대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박의장이고 공무원이고 군인이고 지성인이고 닥치는 대로 입에 담지못할 욕설을 퍼부어놓고도 언론자유도 그외의 온갖 자유도 없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작년과 금년의 재해로 정부나 국민들이 온통 야단인데 선생님은 어디서 온 이방인이기에 초연히 앉아 불난 집에 부채질만 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걷고 있을 겨를이 없어 세찬 달음박질을 하는 통에 얼마쯤의 무리가 뒤따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혁명정부는 어리석게도 국민을 편안히 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논길을 넓혀라, 부엌을 개량하라, 호미자루를 길게 하라, 리어카를 이용하라, 돼지를 길러라, 가을갈이를 하라, 퇴비를 많이 만들어라, 자동차는 고 스톱을 지 켜라, 양담배를 피지말라, 깡패를 잡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다음에 표찍을 때 보자'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5·16은 결코 인기를 얻기 위 한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낙선은 군대가 민주주의와 동떨어진 존재라는 주장에 대해서 이렇 게 반론하면서 군사문화의 논리를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다. <군 사회가 민주사회와 동떨어진 것으로 착각하신 선생님은 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한 일, 정군운동, 소위 하극상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알 까닭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해박한 지식을 과시할 때 우리는 주견 있는 총명으로 답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조직의 발달을 뽐내신다면 우리는 건전한 심신으로 맞세우겠습니다. 선생님이 개인적 재간으로 덤비신다면 우리는 단체적 협동력으로써 막을 겁니다. 만일에 오랜 경험을 앞세운다 면 우리는 오히려 짧은 기간내에 고도로 훈련되고 조직화되고 숙련되고 기계적인 행정역량으로 반발할 것이고, 선생님이 그럴 듯한 종교적인 계시, 임기응변의 잔꾀로 견주신다면, 우리는 언제나 생각하고 평가하고 다시 숙고하여 결론짓는, 반복이 주는 주도한 계획성으로 대할 것 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즐겨 돌리시는 혓바닥 운동이나 자랑으로 하시는 광필에 대해서는 차라리 묵묵한 실천으로 답하렵니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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