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 왜구 프레임이 ‘빨갱이’보다 더 폭력적이다”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민족주의의 거품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선진국 담론을 만들어나갈 수 없다”
이 양반 끝났네. 제정신이 아니다. 선진화 담론 비판하던 국민국가 비판론으로 이름 팔아먹더니.. 쯧쯧.. 어째 선생이라는 것들이 나이 먹을수록 더 현명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나이 처먹은 잡것으로 전락하기만 하는지.. 이 양반 뒷얘기 듣고 나름 연민의 마음도 있었는데.. 갈데까지 갔다. 윤해동은 학자가 아니다. 윤해동을 이렇게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토착 왜구 프레임이 ‘빨갱이’보다 더 폭력적이다” - 조선일보
“토착 왜구 프레임이 ‘빨갱이’보다 더 폭력적이다”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펴낸 윤해동 한양대 교수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2.07.11 03:00
윤해동 교수는 "한국학계가 게토화하고 있다. 몇몇 사람이 구역을 차지하고 족장처럼 군림한다"고 비판했다.
“‘토착 왜구’란 단어는 예전의 ‘빨갱이’보다 더 폭력적이다. 토착 왜구를 입에 담는 순간, ‘파블로프의 개’처럼 친일파들이 득실거리는 시공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영위한 식민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막는다.”
일제 식민지시기를 연구하는 윤해동(63·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문재인 정부 시절 유행한 ‘토착 왜구’에 걱정이 많다. 지금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도 않는 적(敵·친일파)을 만들고 그 적과 싸운다며 권력 유지의 도덕적 정당성을 내세우는 ‘진보 세력’에 환멸을 느꼈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진영을 나누고 합리적 사고와 이해를 방해하는 선동으로 학계와 지식 사회를 마비시켜 지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게 문제라고 했다.
◇“우리 학계 게토화, 몇몇 사람이 족장처럼 군림”
윤 교수는 ‘식민지의 회색지대’(2003) ‘식민지 공공성’(2010) 등을 펴내 친일(親日)과 반일(反日)의 이분법에 갇힌 현대사 연구를 비판해왔다. 이념에 치우친 민중사학에도 날을 세웠다. 그는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민족주의의 거품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선진국 담론을 만들어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 학계가 외부와 담을 쌓고 너무 게토화돼있다. 창비 백 선생처럼 몇몇 사람이 구역을 차지하고 족장(族長)처럼 군림한다”고도 했다.
지난주 낸 ‘식민국가와 대칭국가’(소명)는 조선총독부를 ‘식민 국가’로 파악하면서 그 실체에 접근한 도발적 연구서다. 그는 “학계는 총독부의 억압성만 과도하게 강조할 뿐, 실재한 권력 기구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해왔다”고 했다.
한국광복군이 1945년 8월 미국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면서 통신 훈련을 받고 있다. 19세기 이후 서구와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식민지를 경험했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해 선진적 근대국가를 이룬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이 1945년 8월 미국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면서 OSS교관으로부터 총기훈련을 받고 있다. 19세기 이후 서구와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식민지를 경험했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해 선진적 근대국가를 이룬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독립기념관
◇”식민지 안 됐으면 선진적 근대국가 수립? 근거 없는 얘기”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제의 폭압적 지배 기구 아닌가.
“당시 총독부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권력 기구였다. 입법, 사법, 행정 분야에서 식민지 조선의 근대적 경제와 사회를 주조해낸 주체였다. 이왕직(李王職)과 조선군, 조선은행은 총독의 관할 밖에 있었고, 일본을 위한 통치 기구인 건 분명하지만 총독부가 35년간 조선을 통치하고 이끌어간 권력 기구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최근 몇 년 새 일제 식민 지배의 폭력과 억압을 강조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세계 학계의 합의된 명칭은 그냥 식민지 시기다. 강점(强占)은 학문적 용어가 아니라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에 가깝다. 교과서까지 이런 용어를 쓰는 건 문제가 많다. 구글 데이터베이스 조사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식민지 권력 기구를 ‘식민 국가’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일제 식민 지배는 한국인에게 씻을 수 없는 좌절과 열패감을 안겨줬다.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 힘으로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분단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란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19세기에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가 있다. 태국과 네팔,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등이다. 지금 아프가니스탄과 에티오피아는 전쟁 중이고, 네팔은 정정(政情)이 불안한 빈곤 국가다. 태국은 그나마 나은데, 쿠데타가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한국이 식민지가 안 됐다면 순조롭게 근대국가를 수립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역사적 합리성이 떨어진다. 하물며 선진국이 됐을 것이라는 암묵적 전제는 성립하기 어렵다.”
윤해동 교수는 한국사학계의 이단적 존재다. 식민지 시기 연구자인 그는 친일/반일식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민족주의의 과잉을 비판함으로써 좌, 우 양쪽을 불편하게 했다./김지호기자
◇'우리만 가혹한 시련’ 한국 예외주의, 사실과 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에게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서구와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거의 모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했다. 지금 우리는 지표상으로 완벽하게 선진국이다.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가 한국을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한다고 공식 발표하지 않았나. 한국은 GDP 규모 10위, 제조업 5위, 국방력 6위다. 세계 7개뿐인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 이상)에 들어간 지도 몇 년 지났다. 세계는 이미 한국을 선진국으로 대접하는데, 우리만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것도 넌센스다.”
-한국이 20세기 들어 식민 지배와 분단, 전쟁이라는 유례 없이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는 인식이 강하다.
“우리만 식민지가 된 것도 아니고, 우리보다 더 가혹하게 전쟁과 학살을 겪은 나라들이 많다. 우리만 유례 없는 희생과 고난의 민족사를 가졌다는 ‘한국 예외주의’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런 예외주의는 희생과 고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민족주의에 공통적이다. 하지만 외부 시각으로 보면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선진국 대접을 받는 나라의 집권 세력이 ‘죽창가’나 부르고 있으면, 이게 어떻게 보이겠나.”
◇北 주체사관, 3·1운동, 임정 관심 없어
-문재인 정부는 2019년을 ‘대한민국 100년’으로 내세우면서 남북이 함께 기념 사업을 펼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이승만은 무시했다.
“북은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주체 원년’으로 삼았는데, 이런 신정론(神政論)적 역사 해석은 남쪽의 3·1운동이나 임시정부 건국론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결국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 사업은 없던 일로 되지 않았나. 1919년 건국론은 이승만과 1948년 건국론에 너무 정파적으로 맞섰다. ‘진보’ 학계는 임정 법통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문재인 정부의 1919년 건국론에 편승한 잘못이 있다.”
-해방 직후 좌우 대립과 분단 때문에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잘못된 국가로 생각하고,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교사들이 많다.
“국민국가 수립의 실패를 한국사의 근대 이행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쓴 책들이 많다. 분단을 이유 삼아 대한민국을 뭔가 빠진 ‘결손 국가’로 보기도 한다. 현대사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답이 없다. 1980년대 편향된 역사관에 물든 586세대가 물러나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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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민족주의 비판 내세운 이들에 대해 종종 이런 식으로 민족주의 비판하면 결국 인민 자체가 잘못됐다는 결론밖에 안 나온다고 말했지만 막상 윤해동, 임지현 등이 그러는 걸 보면 참 기분이 안 좋다. 속상할 지경이다.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거기에 글기고 하면서 정치적 편향성만 드러내다가 결국 자신의 이론적 기준도 다 무너뜨리고.. 세상에 국민국가 비판하더니 지금 와서 ‘선진국 담론’ 운운한다는 게 말이 되나.. 박정희의 근대화 시도를 ”탈식민지기의 재식민화”라고 비판하던 윤해동이 선진국 운운하는 시대라니.. 서글프다. 그의 논지에 동의한 적이 별로 없음에도 한번쯤은 꼭 읽었는데.. 어쩌다가 저리 됐을까? 민족주의 담론이 더 이상 ‘진보적’이지 않다고, 반동적이라고 비판하던 이들이 조선일보와 결탁하며 우익에 부역하고 있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손민석
윤해동 선생은 참.. 동의가 안되는데 그래도 한번쯤은 계속 읽어보게 하시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푸른역사였나, 어디서 강연 듣고 이분의 주장에 반론 제시했다가 쿠사리 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내용은 기억 안 나는데 내 얘기를 듣자마자 단칼에 근대주의로 규정하고 화를 내는데.. 어휴.. 피곤하네.. 했던 감정만 남아 있네. 하하.
소명출판 Somyong Publishing
[신간] 식민국가와 대칭국가(윤해동 저) - http://aladin.kr/p/CPen4
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라는 세 개의 국가개념을 사용하여 식민지기의 정치권력 혹은 국가를 분석한다. 이중국가는 대한제국과 통감부가 병존하던 시기 권력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조선총독부 권력은 식민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였고 이와 대치하고 있던 저항국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칭국가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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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강사신문(http://www.lecturernews.com)
LECTURERNEWS.COM
[강사의 서재] “식민지와 한국 근대의 국가” 윤해동의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 한국강사신문
[한국강사신문 김지영 기자] 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라는 세 개의 국가개념을 사용하여 식민지기의 정치권력 혹은 국가를 분석한다. 이중국가는 대한제국과 통감부가 병존하던 시기 권력의 성격을 나타내기...
손민석
국민국가 비판론을 입론한 니시카와 나가오가 알튀세르로부터 상당한 지적 영감을 받았다는 부분을 일본의 잡지 <정황> 2005년 8•9월호에 실린 대담에서 알았다. 니시카와 나가오가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를 번역하고 후기를 달았다는 것도 새롭게 알았고. 역시 내가 왜 국민국가론을 주장하는 니시카와 나가오, 윤해동 등의 주장이 그렇게나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설명이 착착 된다. 알튀세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느낌이 많이 나서 싫어했는데 아예 번역하고 그럴 정도였다니. 이걸 알게 되었을 때의 뭔가 묘하게 쾌감을 느꼈었다. 알튀세르 관련해서 뭐라 했더만 알튀세르에 대해 이런저런 걸 여쭤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싫어, 싫다구 흑흑 왜 싫다는데 자꾸 물어봐요. 님들 때문에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하고 <자본을 읽자>를 다시 읽고 있잖아. 흑흑. 정말 싫다.
손민석
윤해동 교수 결국에는 이승만학당 등을 돌아다니며 우익들의 발언이 옳다고 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되었구나. 어쩌다 저렇게 되는 걸까.
손민석
내가 의아하게 여겼던 지점이 윤해동, 임지현 등의 탈근대주의와 이영훈의 근대주의가 만나는 지점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탈근대주의 연구에 대한 탈맥락화의 좋은 예시로 보인다.
Daham Chong
오늘은 “한글날”이다. 삶과 학문의 발걸음이 이끄는 방향을 마다한 적 없이 걷다보니, 역사학자(歷史學者)로는 보기 드물게, 세종대(世宗代)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제정과 그로 인해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같은 텍스트에 대해 여러 편의 논문들을 쓴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거의 20년 동안 나는 많은 일들을 겪어 왔는데, 그렇게 아주 오랜 동안 혼자서 감내해오던 일들을, 아래 사진의 논문을 통해 얼마간이나마 털어낼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런 연구들을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지만, 일단 이렇게 숨 한 번 돌리고 이미 해야 했었는데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연구와 집필의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또 앞으로는 괴로움 없이 별 일 없는 “한글날” 보낼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담아, 오랜 동안 웬만해서는 하지 않던 “한글날” posting을, 이렇게 한 번 올려 본다. 오랜 동안 감내해왔던 일들에 대한 글이라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널리 양해해주시길.
1. 한글날이 내게는 매번 버겁게 견딜 수밖에 없는 그런 날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나는 존경하는 지도교수님으로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원문으로 똑바로 읽지 않으면 졸업 못 할 줄 알라는 엄명을 받고 대도관을 유배지 삼아 하루 종일 눈 빠지게 실록을 읽은 죄 밖에 없는데, 정말로 그렇게 2000년에서 2001년 사이 석사학위 청구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실록의 기사들을 면밀하게 검토하면서, 세종이 한자가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말과 글을 중시했다는 것을 그토록 강조해 온 기존 국어국문학계와 국사학계의 통설과, 조선왕조실록에 풍부하게 전하고 있는 많은 사료들이 의미하고 있는 바의 사이에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을 직접 발견하고부터는, 그 때의 충격과 깨달음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어 버렸다. 그 이후로 한글날은 내게 매년 감내해야하는 고통스러운 정기행사 같은 것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다행히 연구를 통해서 내가 감내하고 있던 것들을, 순전히 고통만은 아닌, 다른 의미 있는 무언가로 조금씩 바꾸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훈민정음이 제정되었던 15세기 초중반 세종대의 역사적 맥락을 횡단경계적(transnational) 관점으로 살핀 내 논문(「麗末鮮初의 동아시아 질서와 朝鮮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이 2008년 완성되어 모교의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를 거쳐 그 이듬해에 한 학술지에 게재된 직후부터는, 이전부터 감내하던 고통과 비슷하지만 동시에 좀 다른 고통과 다시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논문에 대한 이영훈(李榮薰) 선생님의 관심으로부터 초래된 것이었다. 이 논문이 게재된 직후부터 나와 일면식도 없는 이영훈(李榮薰) 선생님이 내 이 논문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주변의 지인 분들을 통해 듣게 되었는데, 이영훈 선생님의 내 논문에 대한 이야기들은 내겐 매우 고민스럽고 괴로운 경험이었다(이영훈 선생님의 내 연구에 대한 관심을 내게 전해주신 분 중에는, 이미 내가 전부터 이런 연구로 민족주의적 관점을 지닌 연구자들의 반발 때문에 고생하는 상태인 것을 잘 아시는 입장에서, 이영훈 선생님 같은 다른 전공의 저명한 학자들에게도 내가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니 힘내서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내게 연락을 주셨던 선생님들도 계시다. 그런 선생님들의 격려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고, 내 성정 상 앞으로도 그 분들의 뜻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괴로웠던 이유는 이런 소식을 전해주신 다른 선생님들 때문이 아니라, 전해 듣게 된 내 논문에 대한 이영훈 선생님의 이해 때문이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나는 그 분이 상대적으로 젊은 시절 쓰신 논문들은 조선시대 경제사 연구에서 기존의 연구들이 착목하지 못한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분석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 동안 조선시대를 연구한 한국사학의 주류(그 분이 자주 쓰시는 표현을 빌리면)가 경제사 연구를 등한시했다는 비판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새로운 연구성과를 내 놓아도, 조선시대를 다루는 한국사학의 주류가 그를 대체로 배제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던 것도, 오늘날 그가 뉴라이트 입장의 far-right revisionist historiography(歷史修正主義)로 완전히 돌아서게 만드는 데 일정한 영향을 분명히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새로운 논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다른 논문을 통해 그 논문을 자세히 인용하며 조목조목 분석하며 비판만 해도 생산적인 논쟁이 될 일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인용도 하지 않고 무시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던 것이 일을 이렇게 키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선생님이 내 논문들에 대해 평가하고 인용하는 것은, 내게 더욱 더 중요한 차원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름 학계의 거물인 그런 분이 나 같은 사람의 연구자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라 보고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지인 분들을 통해 한 다리 건너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날엔 잠을 설칠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 분 입장에서의 조선시대사 연구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이 내 연구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도 알 수 있었고, 결국 내 연구를 탈맥락화시켜 어떤 부분만을 어떤 입장에서 중시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하시는 것인지를, 대략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 선생님 아니면 경제사학회에서 기획한 어느 학회에서 그 분 자신이 내 연구를 칭찬했다는 바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후배로부터, 선생님이 나를 “한국사” 연구자가 아닌 국어국문학 연구자라 알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데, 그분이 주류 “한국사학” 연구를 혐오하는 수준에서 비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것이 그분으로 하여금 나를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이영훈 선생님이 정규재 tv라는 극우 인터넷 유튜브 매체와 함께 역사와 관련된 “콘텐츠”로 만들어 공개한 동영상 강의에서, 내 소속과 실명과 논문(이 때부터는 내가 2009년 게재한 논문이 아니라 2013년 쓴 논문을 인용하는데, 대체로 그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한다)을 거론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내가 겪는 고통은 더 심해졌다. 내 논문에 대한 그 분의 맥락 없는 이해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그의 책에 중요한 논지 중 하나로 인쇄되어 나온 후로, 내 괴로움은 더욱 더 배가되었다. 그 와중에 어렵게 얻은 하와이 대학에서의 연구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당시에는 대응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20년 연구년에서 돌아와 그 책을 직접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15세기 훈민정음이 제정된 역사적 맥락을 당대의 글로벌한 맥락 속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언어와 문자의 차원에서 “중화중심주의”의 질서가 재구성되는 현상을 원말명초의 상황 속에서 착목하고, 그러한 현상과 조선에서의 언어/문자 생활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불가분의 관계성(중국과 조선이 한쌍으로만 존재해야만 하는)에 대해 분석했던 것을, 그 분은 오로지 당시에 “중국”이 동아시아의 가장 문명국이므로 조선에서는 사대할 수밖에 없어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단순화시켜 서술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제 논문에서 훈민정음 서문에 “중국”이라는 텍스트가 그냥 쓰인 것이 아니라 조선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한 쌍으로 설정되는데 필요한 중요한 ‘비교’의 대상으로 쓰였다는 점과 그렇게 서문이 쓰일 수밖에 없던 사정을 세종대를 중심으로 한 중심으로 15세기 조선사회의 언어/문자생활의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 이유는, 논문에 다 쓰여 있는 것처럼, 단순히 당시에 중국의 언어와 문자가 중요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치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 논문은 근대국민국가가 해당 국가 국민들 모두에게 그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믿도록 설파해 온 그것이, 어떻게 다른 정체성들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그 정체성이라는 것을 지니게 되는지를(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야기하려는 논문입니다”라고 수백 번을 이야기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정말 내게 중요한 소수의 반응들을 제외하고, 돌아오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결국 중국의 언어와 문자가 그렇게 중요했다는 이야기군요”라는 말이 고통스러워서, 나는 지금까지 많은 심적 갈등을 겪어왔고, 알고 지냈던 많은 분들과의 관계가 끊기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2009년과 2013년에 썼던 훈민정음에 대한 논문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내가 15세기 당시 훈민정음 제정의 역사적 맥락과 이를 연구한 20세기 후반 한국사 및 국어국문학 연구의 사학사적 맥락에 대해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와 트랜스내셔널 스터디의 관점에 입각한 연구를 시도했던 이유는, 근대 이후의 “국사학(한국사)”과 “국어국문학”이라는 분과 학문의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의 내용을 객관적 차원에서 실증된 “진리”와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밝히고, 이를 통해 근대국민국가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근대화 서사에 입각한 역사 연구와 서술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 연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동기에서 내 논문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과거라고 믿어져 온 것(훈민정음)이 temporal/spatial의 서로 연동된 두 차원에서 모두 현재와 linear하게 계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내 논문들은 먼저,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성역”처럼 인식되고 있는 훈민정음 제정에 대한 학설은, “객관적”/“과학적”으로 실증된 “진실”이나 “진리”가 아니라, 조선이 유럽과 일본과 미국 등의 타자들과 조우하게 되는 근대국민국가 만들기라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훈민정음 제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서구적 근대성”이 외부로부터 도래하기 이전에 이미 “한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의 전통(정체성) 속에서 이미 근대성의 맹아와 같은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싹트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학문적 기획의 결과물이었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데 치중한다. 다음으로 내 논문들은, 그런 비판적 분석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민국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근대성의 기원으로 설정한 훈민정음이라는 것도 결국, 그것이 제정되던 시점인 15세기 중반 그 시기에도 이미, 조선이라는 사회가 원나라나 명나라와 같은 타자들과 만나며 한자로 쓰인 유교의 “보편적” 가치들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공유하게 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자신이 추구해야 할 정체성(전통)과 그 정체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데 필요한 표음문자의 필요성을 비로소 중요하게 인식하게 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15세기의 사료들을 통해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내가 15세기 언어와 문자 체계를 매개로 중화와 조선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연동되면서 이른바 “중화중심주의”라는 질서를 함께 구성하고 유지했었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훈민정음이 제정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제시하면서, 나는 시종일관 그 질서를 “통치권력”(매우 광역적으로 작동하는)으로 지칭함으로써 비판적 관점을 유지했지, 그 질서를 근대지향적이고 발전적이고 이상적인 어떤 것으로 본질화하려는 서술은 의도적으로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했었다. 한자로 쓰인 “중화중심주의”라는 질서의 가치들을 “보편”이라고 설정하며 조선이라는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로 여긴 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고 썼지, 내 스스로 이른바 “중화중심주의”라는 것을 당시 조선 지배층도 반드시 받아들였어야 마땅한 이상적인 “보편”으로 생각한다고 쓴 적은 없다.
그래서 나는 “동양사 연구자”는 아니지만 내 논문에서 기회가 되는대로, 이러한 “중화중심주의”의 “조공책봉질서”를 동아시아의 이상적인 global한 네트워크로 정의하는 하마시타 타케시(浜下武志) 선생님의 연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언급해왔고, 마찬가지 입장에서 최근 David C. Kang의 연구도 역시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문제점들은 비단 최근에만 노정되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으로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얼마 전 Si X Wang 선생이 내 연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그의 한 facebook posting에서 밝히며 나를 tag해서 나도 그 포스팅을 공유한 바 있지만, 이미 10여 년 전부터 내가 이른바 朝貢冊封體制와 관련하여 “정벌(征伐)이라고 정의(定義)되는 유교적(儒敎的) 전쟁(戰爭)의 model과 그 戰爭을 構成하는 여러 ritual들이 지닌 象徵的/政治的/軍事的 의미(意味)를 分析하는 論文들을 썼던 것은, 바로 그런 기존 연구들의 심각한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결국 훈민정음 제정의 역사적 맥락을 직접적으로 다룬 내 두 개의 논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민국가가 자신의 가장 고유하고 오래된 정체성/전통의 핵심으로 정의해 온 훈민정음과 같은 것조차도, 결국은 조선이 자신과는 다르다고 인식했던 타자들과 조우하고, 이를 통해 한자로 쓰인 유교사회의 가치들을 광범위하게 공유하며, 결국은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연동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그 필요성이 중요하게 인식되며 만들어지게 되는 역사적 맥락을 보여줌으로써, 연구자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거세지는 지구화의 물결 속에 더욱 심화되고 있는 근대국민국가 중심의 역사 연구/서술의 모순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국경을 넘는 시민사회의 연대와 공존을 추구하려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쓴 것이다. 내가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쏟아지는 비난을 감내하며 써 놓은 논문들을, 이영훈 선생님은 극우 youtube 매체의 동영상강의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에서, 당시 보잘 것 없는 조선이 “중국”에 지성사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그런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인용해 왔던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은, 그런 주장마저도 결국은 과거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소위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입장과 현재의 중국을 혐오하는 입장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런 주장을 그간 민족주의적이고 일국사적 관점에 입각해 온 “주류” “한국사학”의 역사 왜곡으로부터 역사를 구하기 위한 “진실”과 “진리” 추구로 정의하기 위해 ‘탈정치화의 정치’라는 수법이 또 다시 쓰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아래의 사진으로 제시한 이 논문을 꼭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에는, 이러한 이유들이 있었다.
2. 게다가 2000년대 초반 이성시 선생님과 임지현 선생님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가 기획되어 진행되던 단계 때부터, 그 기획에 서구중심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관점에 입각한 매우 전형적인 근대화서사를 드러내는 것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영훈 선생님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부터가, 한국 역사학계에서 문제시되던 사정도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런 새로운 학문 기획에 이영훈이라는 학자가 참여했다는 사정이, 크게는 postcolonial studies와 transnational한 관점을 표방하며 그간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던 특정 그룹의 연구자들을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라 호도하고 폄하하는 근거로, 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작게는 내 연구들도 그런 맥락 속에서,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다분히 postcolonial studies나 transnational studies에 반감을 지닌 학자들에 의해, 오해받고 비난받아 왔었다.
사실 2006년 이후로 박사학위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그 논문의 일부를 이루는 세종대 훈민정음 제정의 문제를 연구해 오면서, 나는 대학원 안팎에서 온갖 비아냥과 원색적인 비난과 모욕적인 일들을 겪어왔다(몇 년 전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의 한명으로 그 국제학술회의를 주관한 국사편찬위원회와 중국 측 기관의 초청을 받아 발표를 하다가 중국 학자들도 아니고 함께 동행했던 한국인 역사학자들 때문에 겪었던 황당한 일들은 이미 예전에 포스팅으로 공유한 바 있고, 그런 일들은 아직도 겪는다). 그런 흐름 속에서 내가 내 연구를 통해 분명하게 이바지한 학문적 공헌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한 평가도 받지 못하는 가운데(내가 원했던 것은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만큼은 이 연구들이 학계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독창적인 연구성과라는 최소한의 평가와 그에 따르는 비판과 토론 그리고 후속 연구로 이어지는 생산적인 학술논쟁 뿐이다), 세종과 훈민정음과 관련 연구(용비어천가 관련 연구도 포함해서)를 해 오고 있는 것은 바로 나인데, 자신의 전공분야도 아닌 세종 시기와 훈민정음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에 대해(그 책의 내용을 보아도 제대로 연대기 자료들을 원본으로 면밀하게 통독해 본 적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뉴라이트적 입장의 인사로 이미 공고해진 자신의 명망을 기반으로 해서, 그 위에 내 논문을 인용해서 얹어 놓는 아주 편한 방법만으로, 그 분이 자신이 원했던 시끌시끌한 이슈 만들기 효과와 인지도를 챙기고 있다는 점도, 내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이 논문을 반드시 써야만 했던 데에는, 2000년대 초반 이후로 거의 20년에 걸쳐 한국 사회 전반과 한국 역사학계를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복잡한 이유들이 있었다.
3. 2000년대 초반, 세종이 했다고 하는 일들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에 대한 비판을 처음 시작한 역사학자는 내가 아니다. 내가 그 선생님의 실명을 여기서 밝히기는 어렵지만, 그 어려운 일을 2000년대 초반의 시점에 이미 하셨던 다른 선생님이 계시다. 2008년 봄 박사학위 청구논문 심사가 진행되던 시점에 나는, 조선 전기 조선과 그 이웃들의 관계를 서술하는 데(특히 세종대를 정점으로) 오랜 동안 정설로 사용해 온 “교린”이라는 용어가, 15세기 당시 사료 속에서 자주 쓰이던 용어도 아닐 뿐더러, 실은 근대 이후 민족주의적 관점(자국중심주의적)에서 조선시대 대외관계사를 다시 쓰기 위해 재정의된 학술 용어이자 언설이라 주장한 논문을 한국사학계에 발표한 상태였다. 특히 이 논문에서 나는, 해방 이후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행된 한국사 연구는 이 학설을 통해 세습적 희생자의식(임지현 선생님이 지적한 바 있는)에 기반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조선왕조를 선량한 피해자로 설정함으로써 조선시대와 직결되는 근대화 실패의 원인을 이른바 “외세” 식민주의의 책임으로만 규정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14세기 말부터 15세기 내내 조선왕실이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 지역사회들과 대마도 등에 매우 공격적으로 수직적 상하관계를 강요하고 그 관계의 영속화를 시도했던 사정이 지금까지 은폐되고 자세히 연구되지 못했던 것이니, 앞으로 이 부분을 성찰적으로 연구해야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미 한국사학계에서 미운 털이 박힌 상태로 “찍혀” 있던 상황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타 학교의 박사과정생이, 세종이 재위기간에 행했던 주요 업적들에 대해 여러 이유들을 들며 통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내용까지 구구절절 써서 보내드린 메일만 보고도 흔쾌히 내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직을 수락해주셨던 그분이, 바로 2000년대 초반 세종이 했다고 하는 일들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의 물고를 튼 학자이다.
내가 지금까지 학계에서 버티고 있는 동안, 그리 많지 않았던 소중한 연대감을 경험하게 해 주신 분이라, 고마움은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있다. 내가 굳이 그 선생님의 존함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 분이 그렇게 다른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나를 도와주신 댓가를 오랜 동안 치르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내 역사 연구의 관점은 2007년-8년 무렵과 비교해서도 꽤나 달라져서 그 분의 시각과는 많은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그분의 논문을 처음 읽고 받은 영감이 이후 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므로, 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분의 논문을 인용했는데, 그 선생님 주위의 다른 분들은 아마도 그런 내 논문을 보고 그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왜 정다함이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그런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통과시켜 주어서, 계속 저런 논문들만 쓸 수 있도록 만들었냐는 식의 핀잔을 주곤 했던 것 같다. 오래 전 학술회의에 불러주셔서 가서 토론도 하고 발표도 했었는데, 이제 당신 논문은 좀 그만 인용하라고 하셔서, 나는 선생님께서 나를 도와주신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불만 섞인 목소리까지 들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이후로는 죄송하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앞서 언급한 문제들로 낙담하고 괴로워하느라 아직 단독 저서가 없지만, 내 책이 나오면 내 지도교수님과 함께 꼭 가장 먼저 전해드리려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 선생님께 오랜 동안 연락드리지 못했던 점에 울컥하는 방향으로 조금 이야기가 샜지만, 여하튼 원래 이 선생님의 연구를 언급해서 정말 하려고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이 선생님께서 시도한 연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영훈 선생님이 세종이라는 특정한 관련 주제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에 비판을 제기하기 15년도 전에, 이미 한국과학사 내지 한국사연구 내부에서, 세종대와 관련된 매우 구체적인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이 선생님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나는 2008년 이후로 세종이 했던 여러 프로젝트와 관련된 통설을 비판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연구들을 발표해 왔던 것이다. 사실 이렇게 이영훈 선생님이 자기 전공도 아닌 세종대에 대해 내 연구를 인용하며 마치 자신이 세종대를 민족주의적 관점 위주로 해석해왔던 한국사학의 연구성과를 제대로 비판하는 역사학자인양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미 한국과학사 연구와 한국사 연구 내부에서, 한참 전에 세종대와 관련된 매우 구체적인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연구들은, 전공자들이 아니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어렵게 시도된 새로운 연구들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여기엔 많은 복잡한 이유들이 있고 그 이유들을 모두 여기에서 자세히 언급할 수도 없지만, 내가 볼 때 이러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사연구라는 분과학문 자체가 소수의 학회와 학술지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그런 연구들을 시의적절하게 제대로 review하고 그 분과학문의 미래에 반드시 필요한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끄는 능력을 잃은 지 오래 되었다는 점인 듯하다. 내 입장에서, 이러한 사정과 곧바로 연결되는 지점이라 더 심각한 문제라 느꼈던 것은, 이렇게 일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시대를 전공하는 어떤 역사학자도 뉴라이트적 역사인식에 기반한 이영훈의 이러한 조선시대 해석(세종대를 포함)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문을 통한 비판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 한국사학계 내부에서 어렵사리 세종대에 대한 통설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며 제시된 새로운 연구들이 아직 학계 밖까지 공유되지 못하는 이러한 복잡한 사정 속에서, 이영훈 선생님은 자신이 인용해 온 내 연구가 자신의 관점을 오히려 비판하는 역사인식론에 기반한 연구라는 것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내 연구의 특정한 부분만을 탈맥락화시켜 마치 자신의 주장과 합치하는 것처럼 인용하는 방법으로, 자신이야말로 기존 한국사연구의 민족주의적 해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대표적 역사학자인양 그 입지를 강화해가고 있는 점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internet에 기반한 youtube라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면 낡고 심각한 문제가 있는 지식도 마치 새 것처럼 “재미디어화”되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기회에 편승한 덕이 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학계 내부의 사정을 잘 알 리 없는 인터넷 상의 한국사 분야 독자들 사이에서, 이영훈 선생님은 마치 기존 한국사 연구의 민족주의적 해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며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하는 역사학자의 “양심”을 대표하는 존재인 것처럼 성공적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한글날 특집 역사스페셜 이후로 미디어로부터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고사하고 있는 내가, 근래 몇 년간 학계 외부의 일반인 독자들로부터 이메일을 통해 이런 저런 연락을 자주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내 논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유튜브 강의동영상과 책을 통해, 내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면서 내게 연락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분의 세종 비판이 youtube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학계의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꽤나 징후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할 일이다.
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연구에 관심이 있고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는 일반인 독자분들이 보내오는 그 메일들에서 결국 보이는 이런 저런 내용까지 모두 감내하는 것은, 내게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런 메일을 읽어야 하는 날이면, 그 기나긴 밤 내내 감내해야할 고통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내가 아래 사진으로 제시한 논문을 꼭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데에는, 이러한 이유들이 있었다.
4. 내가 전혀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논문에서 일본군 종군 조선인 “위안부”(이러한 호칭에 대해서는 근래에 여러 비판들이 제시되고 있어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해 온 사람은 아닌 내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조심스럽기 때문에, 일단 이 호칭의 사용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제기만큼은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인용부호로만 처리한다) 문제와 관련된 비평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세종대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세종대의 일들을 연구한 근대국민국가 역사학의 연구성과에 대해서 비판하는 논문을 쓰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저자가 조선시대의 소위 “기생”을 다룬 내용과 그 관점을 확인하고 나서는, 도저히 그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고 논문을 마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위안부” 관련 주제의 전공자는 아니지만,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의 관점에서, 또한 그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된 페미니스트 스터디로부터 여러 영감을 받아 온 입장에서, 나는 이영훈 선생님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서 “기생”을 다루는 내용과 관점이 지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비판을 이 논문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글을 쓰고 난 이후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와 같은 이영훈 선생님의 조선시대 “기생” 해석에 대한 여러 반응들을 인터넷 상에서 검색해보다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한국인 연구자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좌파”라며 자랑스럽게 도배를 해 놓은 sns에다가, 그와 같은 이영훈 선생님의 “기생(또는 관비나 관기)”에 대한 해석이 마치 남성 통치권력이 여성에 가한 착취를 사회경제적인 시각으로 통찰력 있게 분석하는 의미 있는 시도라는 식으로 정신 나간 평가를 해 놓은 따위의 포스팅들을 보게 된 이후로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비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전 Harvard대학의 Mark Ramseyer 교수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으켰던 물의에 대해 비평하는 논문들도 역사비평의 같은 호에 기획으로 실렸는데, 마침 시의적절하게 전부터 알고 있었던 Jimin Kim 선생님의 논문과 함께 실려서 주제 상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도,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5. 아마 내가 훈민정음의 제정과 그 이후 훈민정음으로 쓰인 용비어천가 등에 대해 연구한 내용들을 미리 책으로 묶어서 낼 수 있었더라면, 굳이 지금까지 마음고생을 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할 만큼 여러 이유로 혹사당하는 상태에서 이런 일들을 겪으며 모두 개인적 차원으로만 환원시켜 감내해야만 하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었다. 세종대와 관련해서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제시된 여러 연구들이 있는데, 하필 앞으로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러한 세종시대에 대한 재해석 논의가, 오래된 식민주의 역사학의 조선사 해석이 끼쳐왔던 해악을 다시 소환하려는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세종대를 다룬 통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바람직한 관점에서 세종대를 재해석해보려는 내 기획이 역사비평의 도움으로 장기연재로 구체화된 것이고, 내 글은 이 기획연재를 시작하는 논문으로 실리게 된 것이었다.
그 동안 내가 하고 있는 연구들로 인해서, 그리고 나의 연구들을 탈맥락화시켜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입장을 탈정치화시키며 역사적 “진실”의 수호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영훈 선생님으로 인해서, 내가 짊어져야 했던 많은 걱정과 고민들을, 이제 이 논문과 함께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움도 많이 남는 논문이지만, 공이 되든 과가 되든 다 앞으로의 여정에서 내가 지니고 가야할 것이 될 것이고, 그렇게 남은 숙제들은 내가 앞으로 해 나갈 연구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동안 가슴 한 구석 늘 답답했던 마음과 불면의 밤들도 이제 안녕. 포스트 콜로니얼 스터디와 트랜스내셔널한 시각에 입각해서 진행해 온 내 문제의식을 식민주의적 관점과 유사하다고 매도했던 주장들과 “혐의”도 이젠 안녕. 앞으로 조선시대사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정말 중요하기만 한 세종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을 꼭 그렇게 뉴라이트적 관점에서 해야겠다는 주장들도 모두 안녕. 뭐 혹시라도 또 만나게 된다면, 그 땐 좀 덜 무서운 표정으로 웃으며 맞이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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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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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동의 “숨은 신을 비판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김용섭을 비판하고 있는 논문을 읽는데 내가 여태까지 읽었던 논문들 중에 가장 난폭하고 비약이 심한 글이다. 세상에나 이런 글이 학술지의 심사를 통과해 실릴 수 있었다는 말인가. 놀랍다.
읽고 있는데 계속 툭툭 걸린다. 세상에, 김용섭에 그리 친화적인 입장이 아닌데도 너무나도 난폭하게 김용섭의 연구를 재단하고 있어서 내가 김용섭이었으면 정말 충격받았을 것 같다. 누가 내 논지를 이런 식으로 분석하고 재단했으면 정말 많이 화났을 것 같다. 한 학자가 다른 학자의 연구에 대해 이렇게까지 난폭하고 폭력적인 대우를 하는 걸 처음 봤다. 많이 놀랐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윤해동의 요약에 따르면 김용섭은 지주적 코스와 농민적 코스라는 ‘두 갈래의 길’이 한국 현대사에서 각각 대한민국과 북조선이라는 두 유형의 근대국가 건설로 귀결되었다고 본다. 중세 이후에 전개된 지주전호제의 발전과 그것의 해체에 대응하는 지주적•농민적 코스의 존재는 각각 그것에 조응하는 상부구조=근대국가의 건설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길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좌절되고, 내재적 이행의 계기 또한 봉쇄당했다. 그렇지만 이 두 갈래의 코스는 계속해서 전진하였고 그 결과로 북조선과 남한이라는 두 개의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상부구조=하부구조의 조응에 기초하여 있다.
윤해동은 이에 대해 “넷째, 국민국가 건설론이 내전론으로 귀결되면서 그의 발전론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역으로 그가 분단의 제국주의적 외인론을 옹호하고, 냉전의 논리에 순응적이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일단 문장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농민적 코스에 대한 지지가 비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옹호가 되는가? 이 말 자체가 지금 윤해동이 레닌의 정세론과 김용섭의 사회론을 혼동하는 것이다. 본인이 그렇게 적어놓았으면서도 말이다. 심지어 사실 윤해동은 레닌에 대해서도 오독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는데, 두 갈래의 길 테제의 핵심은 사회주의=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이 아니다. 그것의 기본적인 성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이다. 다만 그 개혁의 주체로 노동자•농민이 되어 생산자에게 보다 친화적인 개혁을 한다는 것이지, 성격 자체는 자본주의적이다.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김용섭의 발전론이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옹호하는데, 그게 왜 냉전의 논리에 순응적인 게 되는건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사회주의적 길이니 사회주의를 긍정하는 것이라 그렇다는 건가?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이라 생각하는 것도 기묘하다. 농민적 코스는 얼마든지 남한의 농지개혁과도 연결될 수 있다. 한국의 농지개혁이 자작농을 대규모로 양산하지 않았나. 그게 농민적 길이 아니면 대체 뭔가.
또한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이 냉전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 되는가? 냉전의 논리를 부정하려면 자유민주주의든 국가사회주의든 근대사회에 존재한 모든 정치체를 부정해야 하는 건가? 리영희처럼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냉전논리에 도전하고 그것을 타파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나.
마지막으로 지주적 코스와 농민적 코스 간의 충돌=내전으로 한국전쟁을 독해하는 게 냉전의 논리에 순응적이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브루스 커밍스도 김용섭과 유사한 논리 속에(그는 김용섭과 달리 토지국유론의 입장에 보다 가깝다) 내전론을 주장하고 있으니 냉전 논리에 순응적이었다고 해야 하나? 내전론을 주장한 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 모두 냉전에 순응하는 이들인가? 지나치게 폭력적인 언사이다. 문장 하나하나 다 납득되지 않는다.
다른 예로 윤해동은 “김용섭으로 대표되는 일국적 발전론은 ‘근대화론’의 ‘성장론’과도 공통점이 많다. 크게 보면 박정희 정권의 성장 이데올로기와 논리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논리적 틀에는 냉전적 사고가 잠재되어 있다. 민족주의 - 민족국가론이라는 집단적 주체성과 냉전적 발전을, 그것도 체제적 관변 민족주의의 성장론과는 ‘거꾸로’ 된 형태로 강하게 결합하여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 논리의 연장에서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은 “박정희 시기의 민족주의 및 발전론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비판은 동일한 패러다임 안에서 제한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김용섭의 연구는 “국민만들기=국민화과정에서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 또한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단순화된 언설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가 인용하는 월러스틴의 말처럼 “냉전기 사회주의권의 경제발전이 자유주의적인 발전노선과 친화성을 가진 것이었다는 전제”에 동의할 수 있다면 사회주의는 모두 체제 협력적인 것이 되나? 당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체제로부터 탄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유지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하는 이들이었나? 황당한 논리다.
그리고 당대의 현실에서 경제개발은 당연한 일이다. 경제개발을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건가? 경제론이 없는 역사입론은 존재할 수가 없다. 어느 사회이든 물질적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심지어 윤해동이 주창하는 식민지근대성론도 세계화라는 경제적 토대가 “영토”를 해체하는 상황 속에서 논의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경제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부분을 도외시할 수 있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이런 식이면 경제성장을 논하는 현재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다 체제 협력자 아닌가.
마지막 예로 윤해동은 내재적 발전론이 오리엔탈리즘적 함의를 품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서구나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적 성취를 조선후기 사회가 이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지배가 그를 저지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일본이나 여타 자본주의 국가들의 근대화의 방식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이는 다만 일본의 성취를 깍아내리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성취였다는 주장을 보강해줄 뿐이다. 이는 조선에도 기회가 주어졌던들 동일한 근대자본주의를 성취하여 사악한 영웅 역할을 하려 했을 것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게 월러스틴의 유럽중심주의 비판 논리 중 하나인데 이것도 사실 굉장히 폭력적인 서사다. 조선왕조가 서구적 경로와 같은 길을 간다고 해서 “반드시” 제국주의로 이어진다는 함의를 품게 되는가? 자본주의 맹아를 갖춘 모든 국가들이 동시에 자본주의 국가가 됐다고 쳐보자. 서로 대등한 힘을 갖고 있기에 제국주의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함의가 들어있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월러스틴이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확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타지역을 ‘종속’시키거나 “정복”하지 않고는, 그러한 제국주의적 착취 없이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제 하에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굳이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가 성장하여 자본주의로의 전화가 이뤄진다고 해서 일본과 동일한 길을 갈 것이라는 함의가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윤해동은 월러스틴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론에 동의하나?
이외에도 지적하고 싶은 게 무수히 많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들을 마치 필연적이고 당연하다는 듯이 윤해동은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단견을 전제로 하여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지 놀랍다. 더군다나 생존하고 있는 역사학자의 연구 아닌가.. 너무 심하다. 경합하는 두 사조 간의 유사성을 밝혀내고 그것이 서로 모순되면서도 은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는 것과 두 사조가 사실 하나이며 둘 모두 체제협력적이라 규정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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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제 한국에 가면 꼭 구해서 읽고 싶은데요....저는 '토착왜구'보다 그래도 '빨갱이'는 더 폭력적이고 위험하다고 봅니다. '토착왜구'로 명명 당한 그 어느 사람도 그렇게 해서 폭력적 죽음을 당한 일은 없는데, '빨갱이'라고 해서 끔찍하게 죽은 사람들은 너무나 많으니까요....지나친 '한국 예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데 한국에서 '탈식민'의 과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만큼 식민주의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피한 현상인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인터뷰를 실은 <조선...>의 방씨 족벌도 식민지 토착 엘리트의 후손들인데, 사회 곳곳에서 그 어떤 제도적, 인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조선인들을 "천황 폐하를 위해" 전장에 나가 죽도록 독려한 사람들이 패권 권력이 바뀌자마자 바로 "자유민주주의자"가 돼 계속해서 사회에서 군림하는 것은...아무래도 다수에게 납득하기가 힘든 상황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민족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지배 족벌들의 권력이 그 어떤 권위로도 뒷받침되지 않는, 카터 에케르트쌤 말씀대로 "power without ideological hegemony"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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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국가와 대칭국가 - 식민지와 한국 근대의 국가
윤해동 (지은이)소명출판2022-05-31
미리보기
정가
35,000원
Sales Point : 1,430
8.0 100자평(0)리뷰(1)
456쪽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 식민지와 한국 근대의 국가
윤해동 (지은이)소명출판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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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라는 세 개의 국가개념을 사용하여 식민지기의 정치권력 혹은 국가를 분석한다. 이중국가는 대한제국과 통감부가 병존하던 시기 권력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조선총독부 권력은 식민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였고 이와 대치하고 있던 저항국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칭국가로 규정하였다.
이중국가는 식민국가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식민국가가 이 책의 중심적인 분석 대상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식민국가는 그 자체만으로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제국,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민의 저항(권력)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그 권력의 기반이 잠식되어 가는 존재가 바로 식민국가였다.
식민국가의 다른 한편에 서있는 저항권력 즉 대칭국가의 존재를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식민국가는 강한 능력을 가진 국가였지만, 반면 자율성은 약한 그런 근대국가였다. 한편 대칭국가는 반(半)주권을 가진 반(半)국가였음에도, 강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였다.
목차
머리말_만약 한국이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3
제1장 ‘식민지적 사유중지’와 ‘식민국가’ 13
제2장 통감부와 ‘이중국가’ 33
1. 이중국가론 44
2. 군사점령과 보호국화 50
1) 보호국이란 무엇인가? 50
2) 군사점령과 보호국으로의 길 55
3. ‘폭력기구’ 해체의 세 차원 61
1) 한국정부의 기반 잠식 63
2) 폭력기구의 해체와 장악 66
3) 저항폭력의 진압 71
4. 사법권 침탈과 ‘법권’ 철폐 74
1) 사법권 침탈 76
2) 영사재판권 철폐 78
5. 이중국가 해체와 병합 82
제3장 총독과 조선총독부 행정 87
1. 총독과 식민지 97
1) 총독의 종합행정권 99
2) 조선행정에 대한 지휘감독권 103
3) 역대 조선총독 108
2. 조선총독부의 행정과 재정 113
1) 총독부의 행정 113
2) 총독부의 관공리 115
3) 관공리의 민족별 구성 119
4) 총독부의 재정 125
3. 자본주의국가 129
1) 자본주의국가 129
2) ‘수탈’과 ‘위대한 탈출’ 131
제4장 조선총독부의 입법기능과 식민지의 법 137
1. 세 종류 성문법과 관습 143
2. ‘법에 의한 지배’의 구축 146
3. 총독의 입법권과 제령 151
4. 제국 일본의 법령 158
5. 대한제국과 통감부의 법령 164
6. 관습의 힘-중추원과 부작위적 ‘동의’ 167
7. 현법顯法과 은법隱法 179
제5장 조선총독부 재판소와 경찰 183
1. 사법기관 191
1) 조선총독부 재판소 191
2) 조선의 검찰제도 199
2. 식민지경찰 202
1) 헌병경찰(1910~1919) 202
2) 보통경찰(1920~1945) 212
제6장 지방행정과 도 223
1. 근대적 관료행정과 도제道制 229
2. 도회와 ‘식민지공공성’ 241
제7장 제국과 식민지의 사이 253
1. 이왕직 268
1) 이왕직 269
2) 왕공족 276
3) ‘조선귀족’과 ‘조선보병대’ 280
2. ‘조선군’ 284
1) ‘조선군’의 세 시간 284
2) 일본의 대외침략과 조선군의 ‘파병’(1919~1945) 292
3) 조선인의 군대 참여 306
4) ‘본토결전’과 제17방면군(1945) 318
3. 조선은행 327
제8장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총독부-대칭국가와 식민국가 339
1. 국가론의 지평 345
2. 한국 근대의 두 국가 349
3. ‘대칭국가’ 355
1) 주권의 두 얼굴 355
2)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반주권’ 360
3) ‘대칭국가’라는 상징 364
4) 분출하는 국가들, 경쟁하는 주권성 368
4. 식민국가 372
1) 주권 없는 ‘근대국가’ 372
2) 조선총독부와 ‘국가의 효과’ 376
3) 식민국가라는 모델 379
5. 국가와 민족의 대위법 380
제9장 식민국가와 동아시아 385
미주 407
참고문헌 429
용어 찾아보기 442
인명 찾아보기 456
접기
책속에서
˝‘선진국‘ 한국의 바탕에는 민족주의의 두터운 거품으로 싸여있는 식민지가 깊숙이 그리고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를 직시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만이 치러야 했던 예외주의적 고난의 사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6쪽.)
˝궐위의 시대 곧 정치와 권력이 서로 어긋나 있는 시대, 국민국가가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시대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전지구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자유로운 세계의 만민은 지구적 정의라는 이상과 더불어 주권적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383쪽.)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전지구적 식민지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던 이런 국가의 풍경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국가 너머를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406쪽.) 접기 - zazaie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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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한국일보 2022년 7월 8일자 '새책'
저자 및 역자소개
윤해동 (지은이)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재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를 대상으로 한 저작으로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 2003), 『지배와 자치』(역사비평사, 2006), 『근대역사학의 황혼』(책과함께, 2010), 『植民地がつくった近代』(三元社, 2017), 『동아시아사로 가는 길』(책과함께, 2018) 등이 있음. 주요 관심 분야는 평화와 생태를 중심으로 한 융합인문학 연구임.
geobookz@gmail.com
최근작 : <식민국가와 대칭국가>,<경성제국대학과 동양학 연구>,<제국 일본의 역사학과 '조선'> … 총 2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식민지적 사유중지’와 기묘한 국가 논의-‘국가론 부재의 국가’(조선총독부) 대 ‘국가 없는 건국론’(대한민국 임시정부)
‘토착왜구’로 상징되는 인식론적 폭력은 ‘식민지적 사유중지’라고 하는 인식론적 공백사태를 초래한다. 식민지적 사유중지라는 인식론적 공백은 모든 근대적인 사회적 구성에 대한 사유중지를 초래하며, 이는 다시 인문, 사회과학적 연구 기반의 약화를 불러온다.
식민지적 사유중지라는 사태는 국가론과 관련하여 상반되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국가론 부재의 국가’(조선총독부)를 기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 없는 건국론”(대한민국임시정부)을 주장하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지배한 식민지시기의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부면에서 국가상태를 상정하고 있지만, 총독부라는 권력기구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거의 하지 않는다. 국가론 부재의 국가에 관한 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의가 사회의 한쪽에서 무성하지만, 그게 어떤 국가인지 혹은 국가인지 아닌지조차 말하지 않는다. 국가를 말하지 않는 건국론, 어찌 기묘하지 않은가? 이제 이처럼 기묘한 국가 논의 상황을 넘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
식민지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방법-‘식민국가’ 논의
식민지의 총독부 권력을 국가론적 논의에서 배제해 버리고 단지 권력의 특수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조선총독부를 인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게으르고 무책임한 방식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조선총독부는 국가론적 논의에서 배제해야 할 예외주의적 사례가 아니다. 식민지는 인간의 역사와 기억 속에서 폐기해야 할 대상이거나 부끄럽기만 한 경험이 아니다. 식민지는 인류사의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식민지 경험을 통하여 인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종속을 그냥 견뎌야 하는 관습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새로이 개발하고 발견해나가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식민지민의 지속적인 저항을 통하여 식민지 억압의 경험은 빛나는 인간적 가치를 발견하는 극적인 계기로 전환되었다. 실제 한국에서도 그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 개의 국가 개념-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
이 책에서는 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라는 세 개의 국가개념을 사용하여 식민지기의 정치권력 혹은 국가를 분석한다. 이중국가는 대한제국과 통감부가 병존하던 시기 권력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조선총독부 권력은 식민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였고 이와 대치하고 있던 저항국가 즉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칭국가로 규정하였다.
이중국가는 식민국가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식민국가가 이 책의 중심적인 분석 대상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식민국가는 그 자체만으로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제국,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지민의 저항(권력)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그 권력의 기반이 잠식되어 가는 존재가 바로 식민국가였다. 식민국가의 다른 한편에 서있는 저항권력 즉 대칭국가의 존재를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식민국가는 강한 능력을 가진 국가였지만, 반면 자율성은 약한 그런 근대국가였다. 한편 대칭국가는 반(半)주권을 가진 반(半)국가였음에도, 강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였다.
새로 쓰는 한국 근대 ‘국가의 풍경’
20세기 초반 한반도를 비롯한 전지구의 ‘국가의 풍경’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던 식민국가의 한편에서는 대칭국가가 싹터서 자라고 있었다. 전지구적 식민지배의 시대에는 마치 바로크시대 다성음악에서 통주저음과 고음으로 구성된 대위법처럼, 식민국가와 대칭국가가 서로의 존재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국가가 존재하는 곳에서 대칭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싹트고 있거나 자리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것이 전지구적 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던 ‘국가의 풍경’이었다. 이 책에는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그런 국가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접기
식민지를 주제로 한 다성음악
반복적으로 언급하지만 '공교육에서의 한국사'가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역사는 아주 광범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식민지의 역사는 늘 일제의 지배와 조선(한국)의 저항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근대 국민 국가 수립 운동', '민족 운동'이라는 대주제명으로 전개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동시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윤해동,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소명출판, 2022는 그러한 통념을 깨버리는 전문서적입니다. 우선 이 책은 근대사를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전제는 '식민지근대'입니다. 그는 예전부터 "근대란 원래 세계 체제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한국적 근대라는 문제의식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윤해동,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휴머니스트, 2007, 19쪽.) 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모든 근대는 식민지근대'가 되는 것입니다(21쪽.).
이러한 시각으로 조선총독부의 국가론적 성격을 분석합니다. 우리는 총독부라고 하면 단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식민지를 억압한 권력체라고만 인식합니다. 하지만 자세하게 알거나, 그 정체성을 규명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6쪽.).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합니다.
이중국가는 대한제국과 통감부가 병존하던 시기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대표적인데, 헝가리 왕국은 헌법과 의회가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와 군사, 외교와 재정을 공유하고 국왕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임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경우는 고종과 순종이 존재하였고 군대와 경찰도 있었다. 하지만 러일전쟁 개전과 함께 잠식적으로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8월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한일보호조약, 이른바 "을사조약" 이후 1906년 2월에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대 통감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1907년 7월 제3차 한일협약(이른바 "정미조약")을 차례로 체결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병운동을 제압하고, 군대, 경찰, 사법기구를 접수하며, 고종을 퇴위시키고 통감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이후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야말로 식민국가가 됩니다. 총독은 천황에 직속되나, 본국의 내각의 직접적 통제를 받지 않고 식민지의 행정, 입법, 사법 등 종합행정권이 부여된 '소천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한국 정부의 조직을 토대로 조선주차군과 헌병경찰(1910년대 무단통치의 주류였던 경찰과 헌병경찰의 약 58%가 조선인이었다. 다만 최말단인 순사보와 헌병보조원으로 머물렀다(210~212쪽.).)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1929년 척무성, 1942년 대동아성이 설치되면서 본국의 중앙정부와 제국의회의 직간접적 통제를 받았고, 이왕직(천황가의 2단계로 왕공족으로 우대하나, 조선왕조의 상징공간을 박물관이나 동식물원을 설치하여 신성성을 떨어뜨리고, 고종과 순종은 궁에 유폐되어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었다.), '조선군(1904년 한국에 주차하는 일본군을 '한국주차군'이라고 명명하고, 1918년부터 '조선군'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은 조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자, 3.1 운동 진압, 중국침략을 위한 군대로 변모되었고, 1938년 지원병제도가 도입된 이후 1944~1945년 사이에 학병과 징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도 동원되었다. 그 중에는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회적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생각하거나, 차별에서 탈출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306~318쪽.). 또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은 오사카 루스(留守) 제4사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쓰카자키 마사유키(塚崎昌之), 신주백 역, 「오사카성 부근에 남겨진 근대 한일 관계의 상흔」, 『역사비평』 83, 2008.) 참고.)', 조선은행(엔블록을 견인하는 국제투자기관으로 역할을 다하며 중국 침략에 대한 군사비 충당을 위해 화폐 증액발행을 하였다.) 등에 대해서는 감독권이 없었습니다. 한편 지방행정제도에는 도제를 도입하여 총독 중심 중앙행정체계를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여기서 도평의회 혹은 도회의원의 약 70~75%는 조선인이었고, 이들은 조선인 교육문제, 생활개선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요구하였습니다(249~252쪽.). 이렇게 식민지 경영 방법을 모색하는 데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많이 참고하였다는 것에 또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민국가 조선총독부는 인민의 동의에 기반하지 않은 식민지 통치라는 측면에서 주권 없는 근대국가였습니다(372~380쪽.).
이러한 조선총독부와 대치하는, 즉 대칭국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입니다(이하 임정). 임정은 3.1 운동 이전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이 국민주권설과 공화정에 기반한 임정 수립 논의가 있었기에 쉽게 수립될 수 있었고, 명목상으로 국내의 한성정부를 계승하되, 실제로 초기 상해임정과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가 통합하여 성립되었습니다.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식민지배가 종결될 때까지 5번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인민주권의 원칙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유하고 있는 영토가 없고, 국제적 승인을 받진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임정은 식민국가를 통해 국민국가를 상상하고 학습하였기에 '이념상의 정부'로서 저항성을 담보한 '상상 속의 국가'인 셈입니다. 즉 반주권(半主權)을 보유한 반국가(半國家)라는 것입니다(355~372쪽.).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될 때 일본은 홋카이도(1869), 오키나와(1879)를 병합하고, 청나라 중심의 중화질서는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이후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청, 이중국가로서의 대한제국, 제국 일본으로 정리되고, 1930년대에는 국민국가를 지향하고 있던 분열된 중국, 이중국가로서의 만주국과 식민국가로서의 조선, 그리고 그들의 '모국'인 제국 일본이라는 혼성적 결합으로서의 동아시아형 국가간체제가 탄생하였습니다. 여기서 제국 일본은 내지와 외지로 구성되는 국내적 '공영권(共榮圈)'을 핵으로 대동아공영권 결성을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상의 전지구적 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는 풍경이자 다성음악이(405~406쪽.) '공교육으로서의 한국사'에서 전개되어 학생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넓은 역사 인식으로부터 세상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역사학의 과제이고, 시민들에게 공유되어야 할 역사상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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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좋았지만... 아쉽게도 잘못된 점이나 오타가 있었습니다. 이는 평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됩니다. 제가 지적한 것은 소명출판사에 신고를 하였고,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38쪽: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사진과 설명 불일치. -> 반대로 되어 있어야 함.
399쪽: “달리진다” -> “달라진다” 수정 필요.
405쪽: 특별한 의미가 있으면 “「」”를 확실히 하거나, 아니면 “」” 삭제 요망.
"‘선진국‘ 한국의 바탕에는 민족주의의 두터운 거품으로 싸여있는 식민지가 깊숙이 그리고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를 직시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만이 치러야 했던 예외주의적 고난의 사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6쪽.)
"궐위의 시대 곧 정치와 권력이 서로 어긋나 있는 시대, 국민국가가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시대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전지구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자유로운 세계의 만민은 지구적 정의라는 이상과 더불어 주권적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383쪽.)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전지구적 식민지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던 이런 국가의 풍경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국가 너머를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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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zaie96 2022-07-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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