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 사건
제암리 학살 사건(提巖里虐殺事件)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이다. 기독교계에서는 "제암리감리교회 사건"으로 부르며, 줄여서 '제암리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사건 지역을 사적 제299호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으로 지정했다.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제암리 사건을 감리교회를 넘어선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저항운동이었고, 이에 대한 일제의 계획적 만행으로 본다.[1][2]
배경[편집]
1919년 3월 1일에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에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 명은 발안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 봉화를 올림으로써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경과[편집]
1919년 3월 31일 정오 경, 발안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발안 장날 시위에 대해 논란이 있으나, 당시 일제 측 기록과 발안 장날에 대한 실증적 고찰에 따라 3월 31일로 봄.)
발안 장날은 5일과 10일에 여는 5일장으로 음력으로 개시되었으며 현재와 같이 양력장이 된 것은 1937년 이후이다. 이러한 학술적 진척에도 불구하고 당시 역사가 통일되고 정리되지 않고 있다.) 만세 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와 권사 및 교인과 함께 준비하였다. 3월 31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며, 이정근과 그의 동생 등 3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감리교회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 났다.
이때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고, 정미업자 사사카(佐々坂) 등 43명이 3리 밖 삼계리 지역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 4월 1일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 4월 2일 제1차 검거 작전을 시작.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이와오(長谷部巖) 대장으로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내었으며 6일까지 이어졌다.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였다.
- 4월 3일 수촌리 구장 백낙렬 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수촌리 학살 사건).
- 4월 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
-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두렁바위로 주로 안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며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감리교회에서는 문맹퇴치 및 신문화 운동 교육이 이루어졌다. 또한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홍원식이 낙향하여 동리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를 만들었던 민중저변의 의식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던 동네이다.
-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중위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그러나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3]
-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말하여,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제암리 감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 군인들이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했다.
-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시위로 인해 수촌리 감리교회와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코필드 박사(석호필)가 현장을 찾아가던 중 제암리 마을의 참상을 보고 국제사회에 알리게 되었다.
은폐와 왜곡 그리고 진실[편집]
- 교회 문 못질설 : 한국에서는 한때 교회에 가둬둔 뒤 문에 못질하여 막았다는 말이 나돌았으나, 창문조차 총으로 들이대고 있었음에도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못질은 하지 않았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았음도 사실이다.
- 우발사건설 :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치 못한 일부 군인이 일본인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제암리가 아닌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점 등에서 신빙성이 부족하다.
-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 : 1919년 4월 17일 수의사이자 선교사였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 일행과 자동차로 수촌리 학살 사건의 현장을 확인하러 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4월 18일 스코필드는 홀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여러 차례 오가면서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4]
- 아사히(朝日)신문 2007년 2월 28일자 보도 - 제암리 학살 사건 은폐 : 사건 당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 대장의 일기 발견.[5][6]
참고 문헌[편집]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저,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7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년 8월 9일.
아래 두 논문은 위 책에 실린 내용입니다.
- 제암리교회 사건과 서구인들의 반응 : 김승태(숙명여대 강사.교회사학자)
- 제암리교회 사건에 대한 일본측의 반응 : 서정민(연세대 강사.교회사학자)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0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년 6월.
위 책의 아래 글에 사건의 주범인 아리타 중위의 군사재판 판결문과 사건 처리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 방화 사건의 처리에 대한 소고 : 김승태(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이병권, 2006 [수원군 우정, 장안면의 3.1운동]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현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문화유산답사가) 논문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이덕주, 김형석. "3.1운동과 제암리 사건". 《한국기독교와 역사》. (7). 1997, 39-73.
- ↑ 조소영. 문재인 "3.1운동 기념식, 제암리서 하면 좋겠다". 뉴스1. 2015년 8월 11일.
- ↑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 역사적 배경 / 발단 및 역사성”. 2006년 2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5월 7일에 확인함.
- ↑ “독립만세” 3·1 운동의 조력자…푸른 눈의 이방인들, KBS 뉴스, 2018.03.01
- ↑ 한겨레신문 - 일제 ‘제암리 학살’ 은폐공작 드러나 : 그는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로 처리하면 보다 간단하지만 학살, 방화를 자인하게 돼 제국의 입장은 더욱 불이익”하기 때문에 “간부와 협의해서 저항해서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고 밤 12시에 회의를 끝냈다.”라고 적었다.
- ↑ 중앙일보 - 일제 제암리학살 은폐 입증 조선군사령관 일기 발견
외부 링크[편집]
提岩里教会事件
제암리 교회 사건 (테이간리 쿄카이지켄) [1] 은 1919년 4월 15일 일본 통치하의 조선 경기 수원 군 향남면 제암리(현재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에서 삼·일독립운동 중에 발생한 사건. 폭동을 지휘한 29명의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개요 [ 편집 ]
삼·일독립운동 의 여파를 받아 전라도 를 제외한 한반도 전토에서 조선인에 의한 폭동(조선소란)이 발생했다 [2] . 4월 상순에는 경기도 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여 헌병 주재소·경찰서뿐만 아니라 민가에 대해서도 파괴나 방화가 이루어져 일본인이다 피난하는 사태가 되고 있었다. 4월 3일, 2천여명의 봉을 들고 있는 군중이 장안, 비방의 사무소를 습격해 파괴 활동을 했다. 그대로 군중은 하나키리 주재소를 습격하고 방화에 의해 전소시켰다. 주재하고 있던 가와바타 토요타로 순사는 둘러싸여 기봉 등으로 박살된 후, 시체를 손괴(치아를 뽑아, 코귀를 잘라, 관절을 접어 [3] .) 되었다 [4] . 그 후 폭도는 료안리에서 일본인을 살육해 시장을 괴멸시켰다. 이 사태에 일본인·조선인도 함께 전율하고, 조선인의 경찰관이 잇달아 직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무정부 상태가 되어, 일본인은 남성 9명이 자경을 위해 잔류하고, 40명의 노인·부인은 삼계리로 피난당했다.
4월 13일에 조선군 보병 제40 여단으로부터 폭도 진압의 명령을 받은 아리타 슌오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향남면)에 도착했다. 아리타 나카위는 제암리의 주민으로부터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기독교도, 천도교도로서 그 섬멸을 요청받고 [5] 조선군으로부터의 폭동진압의 지령을 장적 토벌로 풀어 목모 사람들의 굴을 멸망시켜 옥근을 끊기로 결심하고 폭동의 수모자인 천도교 , 기독교 신자의 18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성 20여명과 처녀 1명을 모아 사살 또는 자살했다. 그 후, 일본인 참살에 대한 보복심을 가진 병사가 교회를 불태웠다 [6] . 이때, 민가에 연소한 것에 의해, 28호가 소실하고, 민간인 여성 1명이 소사했다 [2] [3] .
2007년에 이와나미 서점에서 간행된 당시 조선군 사령관 이었던 우쓰노미야 타로 의 일기(일본 육군과 아시아 정책 , 이러고는 왼쪽 넉넉히에 독필을 휘두르고 있는 외국인 등에 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으로, 제국의 입장은 엄청 불이익이기 때문에, 일면에는 선내의 폭민 을 증대시키고, 또한 진압에 종사하고 있는 장졸에 의혹의 염려를 초래할 수 있는 불리를 해서 저항하는 것을 하여 살육하는 것으로서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코 밤 12시 산회한다 ' [7] 과 학살은 인정하지 않는 방침을 결정했지만, 다음날 조선총독의 하세가와 호도 가 학살을 인정하고 과실로 행정처분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군 관계자는 협의 끝에 아리타 나카위 에 30일간 중근신처분을 내렸다 [8] 가, 그 후의 군법회의에 의한 판결(1919년 8월 21일자)에서 살인·방화에 관하여 무죄가 확정되었다.
하세가와 조선 총독이 “제암 이리 부근 노 상황 하, 경성 거주 노 외국인 니 선전 세라레, 영국 총 영사 대리, 미국 영사, 미비 외국 선교사, 일부 현상 ヲ 시찰 시타 리 . 장관에게 보고 [9] 우츠노미야가 "독필을 휘두르고 있는 외국인 등에 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듯이, 재경성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 필드 나 AP통신 에 특별 채용된 앨버트 테일러 들에 의해, 사건은 일본군에 의한 학살 사건으로서 전세계에 보도되었다 [10] [11] [12] . 미국 영사나 영국 영사들도 본국에 사건을 보고하면 일본 비판의 여론이 높아지고, 미영으로부터 조선통치의 개선이 일본에 요청되어, 일본의 조선통치가 「무단 정치」로부터 「문화 정치」로 전환한다 원인이 되었다 [13] .
사건 상세 [ 편집 ]
제방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이 보관하는 증언자료를 종합하여 사건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단, 시간과 이름 등 세부사항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
- 아리타 나카위는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 보조희창에 명령해 제방리 주민 중 성인 남성(15세 이상)을 교회에 모았다.
- 미리 명부를 가지고 있던 것 같아, 오지 않는 사람은 찾아 부르고 왔다.
- 아리타 나카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더니, 안(安鍾厚이라고 추정)이라는 신자 대표가 대답했다.
- 아리타 나카위는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라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에서 안을 사격했다.
- 사격이 끝난 후 교회에 짚으로 석유를 뿌려 불을 붙였다.
- 바람이 강하게 불고, 불은 교회 하수의 집으로 타오르고, 능숙한 집은 군인들이 돌고 불을 쏟았다.
- 교회에 불이 붙으면 홍(홍준진과 추정)과 '향남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진과 추정)'과 '노경태'가 탈출하려고 했지만 홍은 도망 중에 사살되어 향남면에 다녔던 사람'은 집안으로 피난했지만 발각해 살해당해 노경태는 산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 탈출한 곳을 사살당한 듯한 시체가 두 세 세 교회 밖에 있었다.
- 마을에서 출화한 것을 보고 달려온 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 홍씨(홍원식)의 아내도 군인의 총을 받고 죽었다.
- 군인들은 고주리촌에 가서 천도교신자 6명을 총살했다.
한국의 인식 [ 편집 ]
2019년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3·1운동 기념식 연설에서 사건에 대해 “경기도·화성 제암리에서도 교회에 주민을 갇혀 불을 내고 어린아이도 포함 29명을 학살하겠다는 만행이 일어났습니다만,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인의 공격으로 사망한 일본의 민간인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4] .
관련 문헌 [ 편집 ]
- 조선총독부 자료 “소밀 770호, 제암리 소련 사건 니세키스루 보고(통패)” 다이쇼 8년(1919년) 4월 24일
- 영자신문「재팬・어드버타이저」1919년 4월 27일호
- 복음 시대, 1919년 5월, 1244-1246
- 『삼・일독립운동과 제방리교회 사건』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편 저 노부나가 정의역 고베학생청년센터 출판부, 1998년 5월
- 『삼・일독립운동과 제암리 사건』 오가사와라 료이치, 강신범, 이누마지로, 이인여름, 이케아키관, 도이히오, 사와 마사히코, 이이지마 노부 [저 및 술], 김명숙, 김성제 [역] 일본 기독교단 출판, 1989년 2월
- 『삼·일운동(현대사 자료 25-26. 조선)』 강덕상편 1-2 미스즈 서방, 1966-1967, 2권
각주 [ 편집 ]
- ↑ 이 제목에 대해서는 '초기한국교회의 민족교회적 성격' 이덕주 [1] 를 바탕으로 선정했다.
- ↑ a b 국립 공문서관 레퍼런스 코드:A04017275800 “단행서·8년 육을 칠일·조선 소요 경과 개요”
- ↑ a b 방위성 방위 연구소 아리타 나카위에 관한 재판 선고의 건 레퍼런스 코드:C03022465000 1143페이지
- ↑ 고베 대학 경제 경영 연구소 신문 기사 문고 정치 (16-125)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19.8.10 (다이쇼 8) [ 2] 맹세에 주재소를 죽이고 독립 만세를 고함치면서 투석하거나 혹은 막대기를 흔들며 광폭을 일으키며 마침내 불을 쏘고 이곳 건물을 완전히 태우고, 같은 소재 재근 순사 카와바타 토요타로가 방지의 수술 다 도망칠 수 있는 것을 추적해 주재소를 가로지르는 동북방 약 80간의 지점에 포위해 동봉 및 돌로 난타 참살한 것 같아」
- ↑ 제096회 국회 외무위원회 제24호 ) 받는 문서 ' 참조 요리 소 니 접시 그리고 그들 ヲ 소멸 세라레타시토 부락민 노 간청 ヲ 수케 전술 노 처치
- ↑ 제096회 국회 외무위원회 제24호 ) 목적지 문서를 참조 [4] "상기 검거반 코우나코우 지방 니대태 화재 ヲ생 세시하 취조노 결과 일부 하 2명 노 참살 니 보복심
- ^ 우츠노미야 타로 일기 3권 이와나미 서점 (4월 18일)
- ^ 우츠노미야 타로 일기 3 권 이와나미 서점 (4 월 19 일) "오히려 오후에 이르고, 총독보다 다시 회히도시에 왕방하게, 지금 주지의 일을 전부 부인하는 것은 각으로 불리하다 미나리야, 그 정도는 과실을 인정하고 행정 처분에도 맡기는 것 전혀 의의가 있는 것을 내담하게 해, 총독은 야바리 행정 처분장은 위치를 가능하게 하는 취지 복명시켜, 와 맞이하는 코지마 중장, 오노, 야마모토 등과 상담중, 정법사, 우치노도 내회해, 학살 방화는 부인해, 진진압의 방법 수단에 적당하지 않을 곳 있어로 30일간의 중근신을 명하는 것에 약결심, 산회하게 하는 것은 오전 한때 가까워.」
- ↑ 제096회 국회 외무위원회 제24호 ) 목적지 문서 참조 [5]
- ^ 나가타 아키라미『일본의 조선통치와 국제관계-조선독립운동과 미국 1910-1922』 평범사, 2005년 2월.
- ↑ 2013년 12월 27일 14시 56분 중앙일보/중앙일보 일본어판
- ↑ 중앙일보 2016년 02월 27일 삼·일독립운동을 전한 AP 특파원의 저택 「딜크샤」 복원에 [6]
- ^ 립명관법학 1999년 3호(265호) 140쪽 영미에서 본 일본의 조선 지배(1)- 전간기 영사 보고를 중심 으로
- ^ “ <삼·일 운동 기념식의 문 대통령 연설 전문> ”. 연합 뉴스 (2019년 3월 1일). 2019년 4월 19일 열람.
외부 링크 [ 편집 ]
- 4월에 있어서의 소란의 개요(조선헌병대 사령부편 「조선 3·일독립 소련 사건」의 구어역) - 웨이백 머신 (2004년 2월 25일 아카이브분)(경기도군부의 란에 해당 사건이 게재, 단 본문과는 내용에 격차가 있다)
- 아리타 나카위에 관한 재판 선고의 건 보고
- 국립 공문서관 https://www.jacar.go.jp/
- 레퍼런스 코드: C03022465000
- 조선소요경과 개요
- 국립 공문서관 https://www.jacar.go.jp/
- 레퍼런스 코드: A04017275800
Jeamni massacre
Jeamri Massacre | |
---|---|
Location | Hwaseong, South Korea |
Coordinates | 37°7′34″N 126°53′37″ECoordinates: 37°7′34″N 126°53′37″E |
Date | April 15, 1919 |
Target | Korean residents of Jeamri |
Attack type | Massacre |
Deaths | 29 |
Perpetrator | Imperial Japanese Army |
Jeamni massacre | |
Hangul | 제암리 학살 사건 |
---|---|
Hanja | 提巖里虐殺事件 |
Revised Romanization | Jeamri Haksal Sageon |
McCune–Reischauer | Cheamri Jaksal Sagŏn |
The Jeamri Massacre was an event where the Imperial Japanese Army attacked Korean civilians inside a church. To cover up the mass-killings, the Japanese soldiers burned the church down.[1] However, Canadian missionary Dr. Frank W. Schofield witnessed the aftermath of the slaughter and published a report on the event.
Background[edit]
In 1919, two million Koreans organized peaceful protests against Japanese occupation in the March 1st Movement.[2] In retaliation, Japanese authorities sent troops to violently suppress the demonstrations.
Massacre[edit]
On April 15, in the village of Jeamri, Japanese soldiers herded 29 residents, including children, into a Methodist church before firing at the building.[3][1][4] Afterwards, the soldiers committed arson by lighting the church on fire and killing any surviving victims; they also set fire to nearby civilian homes.[5] Canadian doctor Frank Schofield heard news of the event and immediately visited the scene. Schofield then wrote a report titled "The Massacre of Chai-Amm-Ni" and published it in The Shanghai Gazette on May 27, 1919.[6][7]
Japanese cover-up[edit]
The Japanese lieutenant responsible was disciplined, but a group of senior officers decided to attribute the incident to resistance by local people.[4]
In his diary, Japanese commander Taro Utsunomiya wrote that the incident would hurt the reputation of the Japanese Empire and acknowledged that the Japanese soldiers committed murder and arson.[3] Utsunomiya's diary revealed that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met and decided to cover up the incident.[8]
Later events[edit]
In 2019, a group of 17 Japanese Christians visited the site of the massacre and apologized for the incident on behalf of Japan.[9]
References[edit]
- ^ ab [1][dead link]
- ^ "March First Movement | Korean history". Encyclopedia Britannica.
- ^ ab "Diary entry reveals Japanese cover-up of massacre : International : News : The Hankyoreh". english.hani.co.kr.
- ^ ab "Japanese Army Massacre Diary Found". www.donga.com. Retrieved 2021-06-12.
- ^ Korean History Dictionary Compilation Society. "제암리 학살사건". terms.naver.com (in Korean). Garam Planning. Retrieved 2021-06-06.
- ^ Service (KOCIS), 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Frank W. Schofield: 'God-sent angel for Korean independence' : Korea.net : The official website of the Republic of Korea". www.korea.net.
- ^ Legault, B.; Prescott, J. F. (2009). ""The arch agitator:" Dr. Frank W. Schofield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e Canadian Veterinary Journal. 50 (8): 865–872. PMC 2711476. PMID 19881928.
- ^ "Japanese Army Massacre Diary Found". www.donga.com.
- ^ 심선아 (2019-02-27). "Visiting Japanese Christians apologize for 1919 church massacre". Yonhap News Agency. Retrieved 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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