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나는 제사가 싫다> 이하천씨의 재반론
이하천(작가) () 승인 2000.03.09
"조상의 개념 다시 설정하라"
여성 작가 이하천씨가 <나는 제사가 싫다>를 펴낸 이후 우리 사회에 ‘제사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2월3일 전상인 교수(한림대·사회학)가 <문화일보>에 이씨 글에 대한 반론문을 기고하자, 이씨가 <시사저널>에 재반론을 보내왔다.
나는 제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성 중심적인 지금의 제사 형태에 너무나 문제가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것뿐이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제사 양식은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뿌리를 자르는 틀이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 위대하다는 말을 한다. 그것은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선택할 권리는 없고 단지 선고만 받는다. 그런 틀은 여성의 주체성을 빼앗는다.
나는 작가다. 작가는 정서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다. 자연히 한국인의 심리 속으로 무수히 잠수해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내게 부각된 것은, 지금은 좀 먹고 살 만한데도 왜 이렇게 너도나도 내면에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를 추적해 들어가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건져올려진 것이 바로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틀이었다. 가부장제의 핵은 제사와 호적 제도이다.
“조상은 협박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는 언제부터인지 어두운 그림 하나가 떠오르고 있다. 한국 여성의 내면에 어린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장면이다. 남성은 어떤가? 남성도 역시 그 속에 어린아이가 하나 웅크리고 앉아 피를 흘리고 있다. 이 울고 있는 어린아이와 피를 흘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거대한 바윗돌이 빙 둘러싸고 있다. <나는 제사가 싫다>라는 책은 바로 이 거대한 바윗돌을 쳐내기 위해 쓴 책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조상의 개념을 다르게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상이란 무엇인가? 조상이란 부드러우며, 따뜻하고 인정스럽고 품위있고 자존심 있는 존재로 풀어내야 한다. 조상이라는 개념을 격상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조상은 깡패가 아니다. 더더욱 협박하는 자가 아니다. 나한테 경배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자손에게 벌을 씌우겠다는 식으로 조상의 개념을 축소하지 말자는 말이다. 그것은 가부장제가 특권적 권력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유아독존적 발상이다. 뿌리는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도 엄연한 뿌리가 존재한다.
나는 이 책을 내놓고 재미있는 현상을 보았다. 두 50대 여성의 입을 통해 나온 언어다. ‘그런 말 하면 칼 맞는다’‘화형 당할라’라는 언어이다. 이것은 조상을 핑계 삼아 이 가부장제가 얼마나 여성을 심리적으로 협박해 왔는지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래도 남성들이 할말이 있는가? 인간은 말 한마디에 걸려 몇십 년을 고생할 수 있는 극도의 심리적 동물이다.
사실 이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해야 하는가? 이 일은 이 땅의 사회학자·심리학자를 포함한 학자들이 우선했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내가 하는 것뿐이다. 반박문을 쓴 이는 사회학자이다. 자신들이 했어야 할 일을 누가 해주었으면 사실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런데 경박하다니! 그럴 때 쓰라고 ‘힘든 일을 해줘서 감사합니다’라는 언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보낸 경박이라는 언어에 ‘낯 붉힐 줄 모르는 감각으로 반만 년이나 멍청하게 연장되어 온 낡은 권리를 움켜 쥐고’라는 언어를 되돌려 준다. 얼마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인구의 절반이 그토록 오랫동안 울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할 수 있는가? 그래도 할말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잘났나?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는 알 바 없고 적당히 서양에서 배워온 학문을 가르치고 효도나 하고 나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가부장제가 이 땅에 저지른 폐해는, 첫째 우리에게 강자의 논리를 심어주었고, 둘째 무엇이 이익이냐라는 잣대를 우리의 심리 속에 심어주었고, 셋째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면서 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면 금방 드러나는 결론이다. 이 땅에서 장애자나, 정신병자나, 그 외의 약자 처지에 한번 서 보라. 그들은 천형의 벌이라도 갖고 태어난 생명처럼 살다 가야 한다. 강자가 강자인 것은 강자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약자들을 위해 에너지를 쏟으라고 강자가 있다는 말이다.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고 제 조상묘나 화려하게 하고 제 어머니에게 효도나 하고 고향에 가서 돈이나 뿌리라고 강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잣대를 끊임없이 심어주어 합리성을 쟁취할 심리적 갈피에 무엇이 이익이냐를 심어주었다. 이익 때문에 딸보다 아들을 좋아했고, 이익 때문에 작은아들보다 큰아들을 좋아했다. 이것은 가정에서 닭 한 마리 삶아 분배하는 과정만 보아도 금방 드러난다. 가정에서조차 이렇게 원칙의 잣대가 무너졌으니 무슨 할 말이 더 있는가?
또 여성들은 시댁에 가서 써야 할 언어·표정·옷차림과 친정에 갈 때의 언어·표정·옷차림이 틀리다. 남성은 어떤가? 그들은 사회에 나가 정의를 부르짖으며 난리를 치다가도 가정에 들어오면 권력자로 돌변해 무너져 내린다. 사회의 정의와 가정의 정의는 같은 선상에 있는 개념이다. 이런 남성들을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자는 자신이 사회적 권력을 가지면 반드시 도둑놈이 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정치인들만 씹고 있는가? 또 친정 부모는 딸이 결혼하기 전에는 ‘너 자신을 위해서 살라’고 하고 결혼을 하고 나면 ‘너를 희생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린 여성에게 너무도 황당한 장면이 될 것이다. 그러니 여성들이 사십만 넘으면 책을 읽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원칙을 살리려고 책을 읽는 것 아닌가? 왜 여성에게 이토록 패배감이 들도록 만드는가? 그 보복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느냐는 말이다.
“가부장제는 우리 영혼의 문제”
극심한 억압은 반드시 다른 희생의 피를 빨아 먹고서야 휴식을 취한다. 말하자면 억압은 반드시 다른 형태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억압의 구조를 풀어내야 한다. 이 땅의 여성은 이런 억압의 언어를 곳곳에서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
이 억압은 어머니라는 절대 권력자가 되었을 때 반드시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심리학을 조금만 공부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반박하는 이는 서양의 바버라 부시가 한 선택과 한국 여성의 선택을 같은 선상에 놓고 싶어하는 모양인데, 이것은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다. 바버라 부시에게 한국 여성의 억압 구조를 설명하면 아마 ‘오 마이 갓!’할 것이다. 서양은 이미 거지 노릇조차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든 사회다.
한국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남의 집으로 들어가야 하고 또 그 집 조상을 모셔야 하는 선고를 엄중히 받는다. 그래서 나는 가부장제를 물고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뿐이다. 이래도 못 알아듣겠으면 남성들의 위치를 여성과 바꾸어 보면 그 해답은 금방 드러날 것이다. 아마 남성들은 벌써 3·1 운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사회에 어떻게 근대성을 확립할 것인가 하는 화두로 이 책을 던지는 것이다. 이 울고 있고, 피 흘리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자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나오도록 언어 싸움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실행되었을 때 우리는 참다운 근대성을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반박문을 내는 그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완벽한 논리의 세계로 내기를 바란다. 그렇게 시시하게 적당히 쓰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반드시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에 잣대가 가 있는 글을 생산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대참패를 당하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도 내 사회적 뿌리와 개인적 뿌리가 이렇게 썩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꿈속에서조차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거짓말은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거짓말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른이다. 어른이 어른인 것은 어른답기 때문이다. 겨우 공경이나 바라고 효도나 바라고 남의 집 자식을 데려다가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벌떼처럼 달려들고, 아들 아들 부르짖으며 며느리에게 관련도 없는 조상을 숭배해야 복을 받는다고 협박하는 것이 어른이 아니다. 그래서야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존경받는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조상의 개념을 다시 설정하라고 감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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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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