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adimir Tikhonov
3 h ·
[전쟁의 시대, 민족/국민의 시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너무나 많은 분석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푸틴을 "평화 지향적 인물"로 오해하거나, 그 정권의 성격을 몰라서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 정권의 성격을 뻔히 잘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 정권이 사실상 대리전 형태의 세계 대전의 "관문"을 열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명목 국내총생산으로 치면 세계 총생산의 3%도 안되는, 독일 같은 유럽 주요 국가보다 더 작은 경제 규모로 러시아는 도저히 "범서방 진영"과의 전면 대결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그 분석가들에게는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결은 그들에게 "상식에 대한 도전"으로 보였습니다.
한데 푸틴과 그 정권은 그런 "상식에 반하는 도전"을 감행하고서도 계속 "범서방 진영"과의 대결을 더 전면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요? 사실 이 부분을 이해하자면 "역으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푸틴의 정권은 바로 세계적으로 주요 열강 중에서는 경제적인 비교적 "약자"로서, 전쟁이라는 무리수를 먼저 꺼낸 것이 아닌가 라고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접근법이 현실에 더 가까우리라고 생각합니다.
푸틴 정권의 경제 운영 방식이나 부정부패의 정도, 혹은 관제 민족주의 등등은 한국의 4공이나 5공과 상당히 비슷하지만, 푸틴이나 그 주위 인물들의 성장 배경이나 세계 인식은 불가불 박정희 내지 전두환과 상당히 다릅니다. 푸틴도 그 주요 "중신"들도 적어도 소련의 어용 "맑스-레닌주의" 정도를 철저히 학습한 만큼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정기적으로 "과잉 생산의 위기"를 맞고, 그런 위기 국면에 "세계 재분할"을 위한 열강들 사이의 각축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까진 압니다. 레닌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정도를 필독으로 읽은 사람들이잖아요. 한국에서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푸틴 주위의 외교 정책 조언자 역할을 하는 지식인들, 예컨대 세르게이 가라가노프나 표도르 루캬노프 등은, 세계 체제론, 그리고 세계 체제론적 패권론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사상가들입니다. 실은 사미르 아민 등 세계 체제론의 거두들이 한 때에 푸틴의 자문 기국 격인 "발다이 클럽" 학술대회에 초청돼 모스크바로 종종 왕래하곤 했습니다. 무지막지한 보위부 계열의 독재자 푸틴이 네오마르크시스트들을 "모셔서"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미래 예측"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예측을 바탕으로 해서 경제적 약자이자 군사적 (상대적) 강자인 러시아의 "대전략"을 짜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네오마르크시스트들은, 발다이 클럽 등의 모임에서는 1945년 이후에 시작된 경제 주기 (콘드라티예브 주기)가 2008년 세계 공황으로 그 최후의 말기적 단계를 맞이하여 전세계가 불가피하게 미국 패권의 위기가 곁들인 전반적인 복합적 위기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고 종종 발표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와 때를 같이 하여 열강 사이의 세계 재분할 사투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못을 박곤 했습니다. 세계 체제의 종합적 위기론, 그리고 패권 투쟁 격화론 등은, 류캬노프가 편집장으로 있는 <세계 정치에 있어서의 러시아> 같은 러시아 외교가의 전문 저널에서는 계속해서 다루어졌습니다. 일단 푸틴 정권의 주요 정책 결정권자들이 이와 같은 세계 정세에 대한 이해를 그 전략 채택의 배경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저는 러시아 외교와 유관한 복수의 관계자들에게 들은 바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의 판단은 단순했습니다. 일단 세계적인 위기 국면은, 그들에게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수복" (재점령)하는 좋은 기회로 인식됐습니다. 한데 러시아가 경제적 약자인 만큼, 세계 재분할 전쟁 과정에서 경쟁 열강으로부터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낫다는 판단도 아울러 있었던 듯합니다. 선수를 쳐서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경제와 전사회를 먼저 군사 총동원 모델로 재편하면 어차피 벌어지게 돼 있는 세계적 "사투" 국면에서 비교적 유리한 위치가 될 수 있다고 인식하여 우크라이나전을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러시아는 이제 확실히 군사 총동원 사회 모델로 신속히 재편돼 가고, 다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전쟁하는 국가"와 극도로 군사화돼 있는 국민/민족주의는 이제 "상식"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그런데 예컨대 차후 러시아의 공격을 두려워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도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이 가동돼 있고, 국민/민족주의 열풍이 날로 강해집니다. 중국과 미국은 사실 거의 노골적으로 - 대리전의 형태든 직접적 충돌의 형태든 - 차후 중-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양쪽에서 "군사력"에 대한 집착과 배타적인 국가주의는 - 비록 각각 다른 모양으로 - 계속 힘을 얻어 갑니다. 우리가 정말 1930년대 중후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계속 들고 "평화를 위한 투쟁"을 벌일 방법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계속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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