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즐거움
예전의 선비는 공부가 깊어짐에 따라서 스승을 바꾸기도 하였다. 책상을 등에 걸머지고 새 스승을 찾아 수백 리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지금까지 그를 가르친 스승께서 도리어 어깨를 두드려주며 제자의 장도를 축하하였다.
1980년대,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40년 전 나도 먼 길을 떠났다. 낯설고 물도 설은 유럽으로 갔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는지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내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신선한 자극을 준 역사가들이 많았다. 영국의 역사가 맥팔렌(Alan Macfarlane)도 인상적이었고, 프랑스와 독일에도 사회사적 관심을 깊게 만든 역사가들이 여럿이었다. 유학 시절 나는 도서관에서 수십 종의 역사 관련 신간 학술지는 거의 다 훑어보았다. 서가를 산책하며 책의 숲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서 열심히 읽기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베르너 뢰제너(Werner Roesener)가 쓴 <<중세의 농민>>(1985)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뻤다. 조선의 농촌사회는 유럽 중세의 농촌과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서 나는 뢰제너 박사에게 편지를 썼다. 얼마 후 그와 만나기로 약속이 성사되어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로 직접 찾아갔다. 그 인연으로 위르겐 슐룸봄 등 여러 학자들을 사귀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이 장차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칠 인적 자원을 한꺼번에 선사한 것이었다.
그 시절 나는 아루투어 임호프와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임호프 교수는 우리 식으로 말해 “읍”(邑) 정도 크기의 지역을 연구하는 탁월한 사회사가였다. 그런데 마침 눈에 암이 걸렸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그는 완치되어 강단에 복귀하였다. 건강을 되찾은 그를 만나 여러 가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매우 기뻤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인구사연구회’와도 연락이 잘 되었다. 피터 라슬렛을 비롯해 그쪽 학자들의 논저를 많이 읽었으므로, 케임브리지에서 체류할 기회를 얻고 싶었다. 마침 독일 정부에서도 연구비를 배정해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뜻밖의 가정 사정이 있어서 그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학자들, 그리고 미국의 여러 학자와도 안부나 묻는 단순한 친선관계를 넘어 상당한 신뢰를 쌓았다. 특히 미국의 제임스 팔레 교수와는 서로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사회의 특성을 둘러싸고 서면으로 토론한 기억이 새롭다. 영국의 마티나 도이힐러 교수와도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여러 가지 책을 읽었고, 다양한 흐름에 속한 학자들과 토론하는 가운데 사회사에 관한 나의 관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사회’라고 하는 좁은 의미의 특정한 분야를 다루는 역사로서 사회사를 생각하였다. 이것이 한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를 총괄하는 ‘전체사’로서 사회사로 확장되었다. 나중에는 문화사인지 사회사인지 구태여 구별도 하지 못할 만큼 확장되었다. 기쁜 일이었다.
나의 좁고 편협했던 인식이 차츰 확장됨에 따라 나의 저술에도 그에 상응하는 변모가 있었다. 물론 근본이 시골 사람인 내가 달라져야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하지만 사물을 응시하는 태도와 서술 방식에 변화가 계속되었다. 그래도 생각만큼 실력이 늘지는 못해 나의 글은 끝내 꾀죄죄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젊은 시절의 유학 경험으로 한때는 시야가 넓어진 듯한 느낌에 기뻐하기도 하였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었다. 먼 옛날 책상을 등에 걸머지고 떠난 젊은 선비의 경험이란 아마도 이런 것일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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